ARTBASE김수지 / 보이지 않는 흔적

전시명 : 보이지 않는 흔적 | Invisible Trace

전시 기간 : 2026년 3월 4일 ~ 2026년 5월 29일

전시 장소 : 26SQM 박서보재단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 24길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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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것들을 살펴본다. 예컨대 커튼 뒤의 어둠, 오래된 대리석 조각의 내부, 침대 밑의 적막, 회색 빌딩의 네모난 창 안쪽. 드러나지 않는 공간은 역설적으로 그 너머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흔적이 된다. 

김수지는 이 보이지 않는 공간의 흔적을 캔버스 위로 끌어 올린다. 보이는 것과 감추어진 것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에 주목하며, 그는 “구상과 추상, 과거와 현재, 현실과 허구”와 같이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대립항의 경계면을 탐구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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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지, The Neighbors, 2024, oil on canvas, 130x97cm. © Suji Kim. Courtesy of the artist and CARIN


화면 속 서로 다른 성질들이 뒤섞이는 혼종적 구조는 기억이 쌓이고 편집되는 과정과 닮아 있다. 명확한 실체를 드러내는 대신, 사건과 인지의 틈바구니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파동에 집중한다. 꿈의 잔상, 신화나 역사 속 서사, 바랜 사진 속 이미지들은 캔버스 위에서 본래의 맥락을 잃고 “유령 같은 흔적"으로 남는다.2) 조각난 형상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서로 뒤엉켜 종래의 원형을 지운다.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뇌의 시냅스 구조에서 잊히거나 왜곡되는 기억의 속성을 반영한 시각적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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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지, Come Back to Me like an Old Dog, 2025, oil on newspaper and hanji wrapped linen canvas in a wooden frame, 81x140.5x7cm. © Suji Kim. Courtesy of the artist and CARIN


작가는 이러한 기억의 덧없음을 그려내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로 유화를 선택했다. 얇은 레이어를 겹겹이 쌓아 올리고 다시 지워내거나 변형하는 행위는 기억의 퇴적과 소멸을 물리적으로 재현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캔버스는 고정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장소라기보다는 "의미가 발생하고 소멸하며 전이”될 수 있는 동적인 현장이 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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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지, The Perversion of Freedom, 2025, oil on newspaper and hanji wrapped linen canvas in a wooden frame, 81x140.5x7cm. © Suji Kim. Courtesy of the artist and CARIN


이 맥락에서 이번 전시에 사용된 박서보의 캔버스는 다층적 시간과 미술사적 맥락이 중첩된 상징적 장이다.4) 김수지는 이를 “시간의 유령들이 배회하고 있는 터전”5)이라 부르며, 구체적인 형상을 의도적으로 추상의 영역으로 밀어 넣거나, 반대로 희미한 흔적 속에서 형태를 다시 호출하는 방식으로 해체와 재배치를 반복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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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지, Confessions of an Artist, 2025, oil on newspaper and hanji wrapped linen canvas in a wooden frame, 58x86cm. © Suji Kim. Courtesy of the artist and CARIN


이때 대상을 단순화하거나 과장하는 만화적 필선은 이 ‘유령들’에 시각적 암시를 더한다. 불완전한 개인의 기억을 거대한 집단의 역사와 병합하기 위해 작가는 유희적인 표현을 통한 우회로를 택했다. 이 우회는 서로 다른 층위가 맞물릴 때 발생하는 생경함을 완충하며, 화면 속에서 익숙함과 낯섦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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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지, Something to Hold on To, 2025, oil on newspaper and hanji wrapped linen canvas in a wooden frame, 81x140.5x7cm. © Suji Kim. Courtesy of the artist and CARIN


전시는 겹쳐진 시간과 가려진 기억 사이를 천천히 통과한다. 전통적으로 작품을 보호하는 경계였던 액자는 이번 전시에서 작품을 외부 공간으로 확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물리적 틀은 작품을 드러내거나 가리며, 두 상태 사이의 관계를 조율한다. 캔버스 위를 떠도는 파편들은 꿈의 조각이나 과거의 잔상에 머물지 않고, 보이지 않는 너머의 공간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1) 김수지 작가와의 서면 인터뷰 (김지수, 2026.1.20).
(2) 상동. 
(3) 상동. 
(4) 캔버스는 박서보 작가 생전에 신문지묘법을 위해 국내외 여러 흑백신문을 배접해 둔 상태로, 김수지 작가에게 전달되었다. 작가는 "거장의 정신적 유산이 담긴 캔버스를 한국 현대미술의 거대한 시간의 층위와 대면하는 현장"으로 받아들였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다. 
(5) 상동. 
(6) 상동.


글 김지수 
이미지 편집 임한빛

© PARKSEOBO FOUNDATION.
이용 시에는 출처를 표기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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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흔적》 전시 전경, 박서보재단 26SQM ⓒPARKSEOBO FOUNDATION


* 이 전시에는 박서보가 자신의 작업을 위해 직접 제작하고 작가 사후 박서보재단이 신진 작가 육성을 위해 후원한 박서보 캔버스를 사용한 작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6SQM 의 전시는 예약 없이 자유롭게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월요일~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전시작 정보

1. 김수지, The Neighbors, 2024, oil on canvas, 130x97cm.

2. 김수지, Confessions of an Artist, 2025, oil on newspaper and hanji wrapped linen canvas in a wooden frame, 62x91x5cm.

3. 김수지, For the Sinners, 2025, oil on newspaper and hanji wrapped linen canvas in a wooden frame, 58.5x90x7cm.

4. 김수지, Something to Hold on To, 2025, oil on newspaper and hanji wrapped linen canvas in a wooden frame, 81x140.5x7cm.

5. 김수지, Come Back to Me like an Old Dog, 2025, oil on newspaper and hanji wrapped linen canvas in a wooden frame, 81x140.5x7cm.

6. 김수지, The Perversion of Freedom, 2025, oil on newspaper and hanji wrapped linen canvas in a wooden frame, 81x140.5x7cm.



[김수지 작가 인터뷰 전문]

* 인터뷰 진행 박서보재단 김지수(2026년 1월 20일, 이메일)


1.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회화를 매체로 활동하고 있는 김수지 작가입니다. 저는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현재 예일 대학교에서 회화 및 판화 석사 과정을 밟으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주로 유화를 통해 기억과 역사의 층위를 엮어내며, 이를 통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끊임없는 다이얼로그를 캔버스 위에 구현하고 있습니다.


2.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서로 다른 문화와 환경을 오가며 살아온 경험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이러한 배경이 작가님의 시선이나 작업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함께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의 배경은 세상을 이분법적인 대립이 아닌, 연속적인 스펙트럼 위의 유동적인 지점들로 바라보게 하는 렌즈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구상과 추상, 현실과 허구, 과거와 현재라는 이질적인 개념들 사이의 경계를 흐리며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뉘앙스에 주목하게 했습니다. 저는 이를 정체성이라는 고정된 틀로 설명하기보다, 물려받은 유산과 상상된 서사가 충돌하고 융합하며 만들어내는 혼종성의 관점에서 시각화합니다. 이러한 시선은 결국 화면 속에서 형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형식적 실험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3. 갤러리에서의 실무 경험과 작가 활동을 병행해 오신 이력이 인상적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작업을 구성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갤러리에서의 경험은 작품을 보여지는 대상이자 물질적 실체로서 객관화해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이는 제 작업에서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혹은 알려진 것과 상상된 것 사이의 대화를 구성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전통적인 내러티브를 따르기보다, 이미지들을 배치하고 가리는 과정을 통해 의미가 발생하고 소멸하며 전이되는 지점에 집중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화면을 구성할 때 관람객의 시선이 머무는 곳과 가려진 곳 사이의 긴장을 정교하게 조율하며 회화의 물리적 존재감을 강조합니다.


4. 작가님의 작업에서는 유화의 레이어링과 지우기의 과정이 두드러집니다. 여러 매체 중에서도 유화를 선택하게 된 계기와, 작가님께 유화라는 매체가 갖는 의미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유화는 특유의 유연성과 시간성 덕분에 기억의 퇴적과 소멸을 동시에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얇은 레이어를 쌓아 올리고 다시 지워내거나 변형하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이 행위는 자동기술법적인 직관과 체계적인 방법론 사이를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저에게 유화는 단순히 색을 칠하는 도구를 넘어 캔버스의 면을 피부처럼 다루는 수단입니다. 그 위에서 촉각적인 질감과 추상적인 형상을 혼합하며 구체적인 형태를 추상의 영역으로 밀어 넣거나, 반대로 흔적 속에서 형상을 끌어올립니다. 겹겹이 쌓인 층들은 이전의 자국들과 융합되어, 마치 잠에서 깬 뒤 흐릿해지는 꿈의 파편처럼 기억의 단편적인 속성을 드러냅니다.


5. 꿈이나 기억, 역사와 신화 등에서 수집된 이미지들이 작업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작가님의 작업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합니다.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몇 가지로 정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 작업에서 반복되는 꿈의 잔상, 역사적 알레고리, 신화적 대상들은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를 연결하는 압축된 통로이자 기억의 덧없음을 증명하는 시각적 장치들입니다. 가족 앨범 속 바랜 사진이나 17세기의 바니타스 정물, 그리고 고전 신화의 파편들은 캔버스 위에서 본래의 맥락을 잃고 유령 같은 흔적만을 남긴 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융합됩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잠에서 깨어난 직후 사라져가는 꿈의 조각들처럼 파편화되어 나타나며, 저는 이들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적인 기억을 집단적인 역사의 궤적 속에 심어 넣습니다. 결국 제 작업의 핵심은 사라져가는 것들의 유령론적 배회와 그 흔적이 캔버스라는 피부 위에 어떻게 물리적인 층위로 남겨지는가에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화, 재구성, 신화화, 그리고 혼종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실재와 허구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시각적 신화를 구축하는 과정입니다.


6. 작품 속 인물이나 대상에 대한 만화적이고 유희적인 표현과 내포하고 있는 미묘한 정서 사이의 관계를 “충돌”이라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이 표현이 작품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작품 속 유머와 만화적 표현은 무거운 역사나 모호한 기억에 접근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입니다. 저는 개인적인 기억을 집단적인 역사 속에 심어 넣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색함이나 유쾌함을 즐깁니다. 이러한 '충돌'은 관객으로 하여금 익숙한 만화적 표현을 통해 작품에 다가오게 하지만, 동시에 그 이면의 복잡한 감정과 마주하게 합니다. 이러한 형식과 내용의 충돌은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습니다. 구상적인 형태가 추상적인 배경 속에서 붕괴되거나 융합되는 과정은, 우리가 세상을 지각할 때 느끼는 모순과 기이함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7. 작업 속에서 커튼과 같은 ‘가림’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이미지가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더불어 이번 출품작에서는 액자의 사용을 통해 ‘겹겹의 구성’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요, 이러한 형식적 선택이 가림의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구체적인 출품작을 예시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작품 속 커튼이나 천의 이미지는 내부의 공간을 암시하면서도 동시에 차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기억이 완벽히 재현될 수 없음을 뜻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너머를 상상하게 만드는 심리적 도구가 됩니다. 이번 출품작에서 액자는 단순히 작품을 보호하는 틀이 아니라, 화면 속 이미지를 가두거나 분절하는 또 하나의 레이어 역할을 합니다. 이는 캔버스 내부에서 일어나는 레이어링 작업을 외부 공간으로 확장하여, 관객이 물리적인 겹을 통해 작품 내부의 가려진 진실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가림과 드러냄의 다이얼로그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합니다.


8. 작가님의 작업에서는 미술사적 알레고리가 자주 등장합니다. 평소 즐겨 참고하거나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이미지나 주제가 있다면 무엇인지,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 속에 숨겨둔 알레고리가 있다면 함께 이야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오래된 아이콘이나 미술사적 유산을 현재의 풍경 속으로 소환하여 물려받은 유산과 제가 꿈꾸어 온 서사 사이의 대화를 이끌어냅니다. 이번 전시작들에도 고전적인 구도나 상징들이 숨겨져 있지만, 그것들은 지워지고 덧칠해지는 과정을 거치며 본래의 맥락에서 이탈해 있습니다. 저는 명확한 설명보다는 아이코노그래픽한 배치를 통해, 관객이 각자의 기억을 투사할 수 있는 명상적인 공간을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9. ‘박서보의 캔버스’라는 미술사적 맥락을 지닌 매체로 작업하시면서 특별히 떠올랐던 생각이나 감정이 있었다면 나누어 주실 수 있을까요?

박서보 작가님의 유산이 담긴 캔버스 위에서 작업하는 것은 단순히 귀한 재료를 사용하는 차원을 넘어, 한국 현대 미술의 거대한 시간의 층위와 대면하는 경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결국 이 작업은 매끄러운 빈 바탕이 아니라, 이미 수많은 이야기와 시간의 유령들이 배회하고 있는 터전 위에 저의 개인적인 기억과 구상적 도상들을 겹쳐내는 과정이었습니다. 거장의 정신적 유산과 신문지라는 기록된 과거, 그리고 저의 회화적 제스처가 만나는 이 지점은 구상과 추상의 긴장을 넘어, 서로 다른 시대의 숨결이 하나의 화면에 압축되는 현장이었습니다.


10. 앞으로의 작가님의 작업이 어떤 방향으로 확장되기를 바라시는지, 현재 관심을 두고 있는 새로운 시도나 질문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저는 앞으로 형태가 어떻게 추상화되고, 그 과정에서 의미가 어떻게 전이되는지를 더 깊이 파고들고 싶습니다. 단순히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 제스처와 기법을 통해 의미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현재는 캔버스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관객의 지각 방식 자체를 흔드는 새로운 형식적 틀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유령들이 현재의 화면에서 어떻게 더 선명하게, 혹은 더 희미하게 숨을 쉴 수 있을지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