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 展
Animal Sensory Meridian Response
2022.11.11~12.11 ARTBASE 26SQM
‘유혹의 소리'를 사냥이라는 소재로 풀어간 작품들로 전시합니다.
전시장의 시각적 그리고 촉각적인 언어와 함께 관람자가 직접 연주 가능한 작품(악기)이 전하는 청각적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원초적 본능
장진택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자는 들어야 할 것이고, 무언가를 듣고자 하는 자는 말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본능은 그저 저급하거나 천박한 동물의 흔적일 뿐이나, 누군가에게 이는 진실한 사랑의 표현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복잡하고 다단하며 섬세하고도 미묘한 교감의 차원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젖혀진다.
인간의 감각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감각을 표출하거나 또는 수용하는 모든 측면에서, 우리 인간이라는 종의 감각이란 다른 한편 잠재의 단층에 머무르게 됐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필수적 요건을 어떠한 입장에서 해제하는가를 좇아 감각은 개인 혹은 집단의 자아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소재이기도 하면서. 또한 언제나 제 목적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채 가리워져 있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말 그대로 인간이 우리로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따로 또 같이 일정한 시공을 누군가와 공유해야만 하는 처지이기 때문일 거다. 결국 인간의 감각은 그것이 스스로를 드러내어야 함과 동시에 가리워져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이와 같은 양가성은 인간이 사회라는 조직 혹은 구조 안에 자신을 귀속하고 있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이자 굴레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누구도 그러한 굴레와 속박을 강요한 바 없다는 사실이다. 철저히 자처에 의해 행해진 감각의 봉인은 감각의 감각 자체를 계속해서 무디어지게끔 다듬어왔다. 인간은 자기 감각을 이토록 제어한 대가를 무관심을 기조로 한 어떤 형태의 평온으로 보상받았다. 이 평온의 상태를 일컫는 말은 다양하다. 긍정이나 부정과 같은 주관적 잣대를 기준으로 그것은 적절한 것일지도 적당한 것일지도 혹은 지나치지도 않은 균형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며, 무능하거나 그렇기에 무효하거나 때로는 불필요하다고까지 규정되어버린 압제 상태로 바라보아질 수도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관점에 따라 기술되는 각각의 서사는 어느새 질서를 위한 객관이라는 덧없는 기준의 근거가 되어있었다. 이런 경우, 보통은 이 무한의 은하계 가운데 우월의 상징 중 하나가 될 제도와 사상이라는 틀을 굳건히 세우는 데 이상의 정의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감각의 통제를 대하는 포만하고도 공허한 양가의 극단 그 어느 쪽이더라도 이를 관통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에 취약할 밖엔 방법이 없음에, 이에 따라 감각은 그리고 이것을 억제해야 하는 인간은 원시의 본성을 깊은 심연으로 몰아넣었다. 돌이켜야 할 건 이 감각이라는 것이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특정한 형편을 유지하려는 성질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미 둔화하기 시작한 감각은 제 관성을 통해 계속해서 둔화하며, 그러한 감각을 다시금 깨우는 순간 그것은 급작스레 반복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할 테다. 게다가 이 유별한 경험은 이전의 감각을 전혀 다른 단위의 것으로 변형케 하여 그 이전의 형상으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며, 따라서 이는 변화된 상황으로부터 제 감각을 재구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소리는 듣고 말하게 한다. 원초적 감각의 하나인 청각은 그 자체로 듣는 감각의 작동을 지칭함과 함께 듣고 말하는 관계를 본능적으로 형성해낸다. 소리가 음악이 되는 때는 특별하다. 음악은 사회화된 형태의 감각과 유비한다. 소리를 내는 장치는 악기가 되어 연주를 한다. 그것이 어떠한 형상으로 각자의 문법을 차용하든 간에, 이를 꿰뚫는 자취와 맥락은 동일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유용하는 편집의 방식에 의해 감각은 전달된다. 구속되지도 않았으며, 하지만 완벽하게 해방되지도 못한 감각의 혼재 속에서 들리는 소리와 음악은, 그리고 말하는 도구와 장치는 억압된 감각을 미러링(mirroring)하고 그 역지(易地)를 사지(思之)하게 한다. 굳이 숨겨두지 않았지만 찾아야 하는 우리의 감각은 그렇게 펼쳐져 있다.
이현종 展
Animal Sensory Meridian Response
2022.11.11~12.11 ARTBASE 26SQM
‘유혹의 소리'를 사냥이라는 소재로 풀어간 작품들로 전시합니다.
전시장의 시각적 그리고 촉각적인 언어와 함께 관람자가 직접 연주 가능한 작품(악기)이 전하는 청각적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원초적 본능
장진택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자는 들어야 할 것이고, 무언가를 듣고자 하는 자는 말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본능은 그저 저급하거나 천박한 동물의 흔적일 뿐이나, 누군가에게 이는 진실한 사랑의 표현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복잡하고 다단하며 섬세하고도 미묘한 교감의 차원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젖혀진다.
인간의 감각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감각을 표출하거나 또는 수용하는 모든 측면에서, 우리 인간이라는 종의 감각이란 다른 한편 잠재의 단층에 머무르게 됐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필수적 요건을 어떠한 입장에서 해제하는가를 좇아 감각은 개인 혹은 집단의 자아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소재이기도 하면서. 또한 언제나 제 목적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채 가리워져 있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말 그대로 인간이 우리로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따로 또 같이 일정한 시공을 누군가와 공유해야만 하는 처지이기 때문일 거다. 결국 인간의 감각은 그것이 스스로를 드러내어야 함과 동시에 가리워져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이와 같은 양가성은 인간이 사회라는 조직 혹은 구조 안에 자신을 귀속하고 있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이자 굴레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누구도 그러한 굴레와 속박을 강요한 바 없다는 사실이다. 철저히 자처에 의해 행해진 감각의 봉인은 감각의 감각 자체를 계속해서 무디어지게끔 다듬어왔다. 인간은 자기 감각을 이토록 제어한 대가를 무관심을 기조로 한 어떤 형태의 평온으로 보상받았다. 이 평온의 상태를 일컫는 말은 다양하다. 긍정이나 부정과 같은 주관적 잣대를 기준으로 그것은 적절한 것일지도 적당한 것일지도 혹은 지나치지도 않은 균형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며, 무능하거나 그렇기에 무효하거나 때로는 불필요하다고까지 규정되어버린 압제 상태로 바라보아질 수도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관점에 따라 기술되는 각각의 서사는 어느새 질서를 위한 객관이라는 덧없는 기준의 근거가 되어있었다. 이런 경우, 보통은 이 무한의 은하계 가운데 우월의 상징 중 하나가 될 제도와 사상이라는 틀을 굳건히 세우는 데 이상의 정의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감각의 통제를 대하는 포만하고도 공허한 양가의 극단 그 어느 쪽이더라도 이를 관통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에 취약할 밖엔 방법이 없음에, 이에 따라 감각은 그리고 이것을 억제해야 하는 인간은 원시의 본성을 깊은 심연으로 몰아넣었다. 돌이켜야 할 건 이 감각이라는 것이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특정한 형편을 유지하려는 성질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미 둔화하기 시작한 감각은 제 관성을 통해 계속해서 둔화하며, 그러한 감각을 다시금 깨우는 순간 그것은 급작스레 반복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할 테다. 게다가 이 유별한 경험은 이전의 감각을 전혀 다른 단위의 것으로 변형케 하여 그 이전의 형상으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며, 따라서 이는 변화된 상황으로부터 제 감각을 재구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소리는 듣고 말하게 한다. 원초적 감각의 하나인 청각은 그 자체로 듣는 감각의 작동을 지칭함과 함께 듣고 말하는 관계를 본능적으로 형성해낸다. 소리가 음악이 되는 때는 특별하다. 음악은 사회화된 형태의 감각과 유비한다. 소리를 내는 장치는 악기가 되어 연주를 한다. 그것이 어떠한 형상으로 각자의 문법을 차용하든 간에, 이를 꿰뚫는 자취와 맥락은 동일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유용하는 편집의 방식에 의해 감각은 전달된다. 구속되지도 않았으며, 하지만 완벽하게 해방되지도 못한 감각의 혼재 속에서 들리는 소리와 음악은, 그리고 말하는 도구와 장치는 억압된 감각을 미러링(mirroring)하고 그 역지(易地)를 사지(思之)하게 한다. 굳이 숨겨두지 않았지만 찾아야 하는 우리의 감각은 그렇게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