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전과 나
- 앵포르멜 작품 국전서 시선 끌어
4·19와 5·16은 미술계에도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괄목할만한 변화는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국전과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반국전’ 움직임은 여전했다. 1960년 10월 국전이 열리는 덕수궁 바깥 돌담에서 열린 두 건의 전시회는 이런 움직임에서였다. 김정현(金正炫, 1915~1976, 동양화), 김형대(金炯大, 1936~ , 서양화·판화) 등 서울미대 재학생 10여명으로 구성된 ‘벽 동인회’가 덕수궁 정동길 돌담을 전시장 삼아 1일부터 15일까지 《벽전》을 열었다.
또 윤명로와 김봉태, 김종학, 이주영(李柱榮, 1934~ ,서양화) 등 서울대와 홍익대 졸업생으로 구성된 ‘60년 미술협회’ 회원 12명이 곧이어 5-15일 영국 대사관 입구의 덕수궁 벽에서 앵포르멜 화풍의 작품으로 제1회 《60년 전》을 열었다. 이들은 대부분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나에게 미술을 배우고 같은 이념을 추구한 ‘안국동파’ 동지들로 뒷날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작가다.
둘로 갈라진 ‘대한미협’과 ‘한국미협’이 예술단체 통합 원칙에 따라 61년 12월 18일 당시 수도여사대(현 세종대)에서 총회를 열고 단일 단체인 ‘한국미술협회(미협)’를 탄생시켰다. 초대 이사장에 박득순, 부이사장에 김세중 김환기였다.
국전의 실질적인 쇄신은 5·16 군사정변 이후 이루어졌다. 1961년 국전에 군림해온 몇몇 원로와 중진 등을 고문으로 추대해 중임 심사위원에서 배제하고, 정당한 참여가 봉쇄돼온 재야 중견작가들을 영입했다. 심사위원은 추천작가 전체 회의에서 천거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국전 운영 규정〉 개정이 이뤄졌다. 미술발전에 기여했다면서 추대한 고문은 고희동 허백련(許百鍊, 1891~1977, 동양화) 김은호(金殷鎬, 1892~1979, 동양화) 이상범 노수현 이종우 장발 도상봉 손재형(孫在馨, 1902~1981, 서예) 김용진(金容鎭, 1878~1968, 서화)이었다. 그러나 국전이 임박해 발표한 심사위원에는 도상봉과 손재형이 들어 있었다. 그나마 고문 제도는 12회 국전 때까지만 이어졌다.
고무적인 것은 1959년 제8회 국전에 앵포르멜 풍의 작품이 출품되더니, 1961년 10회전에서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이 서울미대에 재학 중이던 김형대의 앵포르멜 계열의 작품 〈환원(還元) B〉에 돌아간 것이다. 국전에서 추상미술로 수상한 최초의 작가가 되었다. 완전한 보수적 권위를 고집하던 국전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 제도개선 촉구한 ‘국전의 검은 백서’
국전은 해마다 말썽과 시비가 잇따랐지만, 점진적인 변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다만 만족할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1968년 정부 기구 개편에 따라 국전 운영은 새로 생긴 문화공보부가 문교부로부터 인계받았다. 문공부는 국전 개선에 엄청난 의욕을 보였다. 제18회 국전을 한 달여 앞둔 9월 초 〈운영개선방안〉을 내놓았다. 그 골자는 심사 위원은 연속 중임을 피하고 동일 유파, 사제관계, 친분 등을 피해 균형 있게 안배하며 그 자격은 연임한 일이 없는 현역 작가로만 한다는 것이었다. 국전을 격년제로 하되, 열리지 않는 해에는 국제전을 열기로 했지만, 국전 주도 작가들의 반대에 부딪혀 취소하는 소동을 벌였다.
정부의 의욕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몇 가지 문제를 낳았다. 그해 대통령상은 이은상(李殷相, 1903~1982, 시인)의 〈애국시〉를 한글 전서로 쓴 서희환(徐喜煥, 1934~1995)이 차지했다. 서예 부문의 첫 대통령상이다. 하지만 담합 심사와 수상작의 자질 시비를 불렀다.
그해 대통령상은 서예 부문에서 나온다는 소문이 심사 전부터 파다했던 터였다. 파리에서 갓 돌아온 남관(南寬, 1911~1990)이 서양화 분과위원장으로 심사에 참석했다가 심사 도중 퇴장하고는 기자 회견을 하고 담합 심사라며 폭탄 발언을 했다.
남관은 “7개 분과위원장이 참석한 종합심사에서 서양화와 공예가 1표씩 나오는 데 반해 나머지 5표가 일치하여 대통령상·국회의장상·국무총리상으로 똑같이 몰렸다”고 했다. 그는 심사가 사전 담합에 의한 ‘돌려먹기’라는 것임을 알아채고 바로 심사 도중 심사장을 뛰쳐나와 지상에 폭로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건축과 서양화 등 2개 부문 문공부장관상 선정을 거부했다. 그런데도 남관의 퇴장 이후 심사위원들이 그와 가까워 보이는 홍대 출신 이승조(李承祚, 1941~1990, 서양화)의 추상작품 〈핵(核) F90〉을 문공부장관상에 선정했다. 말하자면 ‘입막음’용 선심이었다.
또 전 해 대통령상 수상작가인 김진명(金鎭明, 1916~2011, 서양화)이 낸 작품이 낙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뒤늦게 안 심사위원이 재심을 요구했으나 투표 결과 낙선했다. 또다시 어느 심사위원이 재고를 요청해 심사위원장에게 일임했으나 끝내 낙선하고 말았다. 보통 치욕이 아니다. 애초 대통령상에 오를 수준이 아니었단 말 아닌가.
게다가 서예부의 추천 작가인 김응현(金應顯, 1927~2007)이 서희환의 대통령상 수상작을 “그것은 글씨도 아니다”라는 혹평을 어느 주간지에 발표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해 심사 부위원장이자 서희환의 스승인 손재형의 국문 전서를 모방한 것으로 대통령상을 줄 만한 작품이 못 된다고 본 것이다.
또 “추상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오지호(吳之湖, 1905~1982, 서양화)가 서양화분과에서 추상미술을 심사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추상과 구상을 분리 심사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그 이전에 그는 “추상을 심사할 수 없다”며 심사위원직을 고사했어야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불합리하고 황당한 사례들을 〈국전의 검은 백서(白書)〉라는 글을 통해 고발하고 국전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월간 중앙》 1968년 11월호에서다.
나의 제안은 국전을 봄, 가을 2회 개최하여 봄에는 새로운 예술이념을 촉진하는 선정에 집중하고, 가을에는 ‘수구적인 사실’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구상을 대상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즉 ‘전위’와 ‘수구’로 나누자는 것이었다.
또 동·서양화부로 나누지 말고, 회화부로 묶고, 판화부와 조각부 3부만으로 구성하자고 했다. 무엇보다 작품 심사를 공개하자고 했다. 심사위원 선출제도를 개선해 예술원 회원들의 전횡을 막을 ‘특별 자문위원회’ 같은 기구를 구성하자는 의견을 냈다.
나의 글은 화단과 정부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 야인으로 ‘국전 개혁’에 참여
문공부는 1969년 제18회 국전을 맞아 새 규정과 방법을 마련했다. 국전 심사위원 천거를 새로 발족할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회에 위임키로 했다. 예술원이 심사에서 손을 떼도록 할 심산이었다. 또 ‘추천작가제’를 초대작가와 추천작가로 다시 구분해서 시행하고, 서양화부만 구상과 추상을 분리 심사하기로 했다. 예술원은 곧바로 반발했다. 심사위원 추천권을 예술원에 둔 기존 심사위원회 규정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주장을 폈다. 이와 함께 국전 제도 개선을 총괄하고 있던 이춘성(李春成) 문공부 차관의 고체를 요구하며 대정부 건의를 했다.
하지만 정부는 문공부 안을 확정하고 10월 1일 15명의 운영자문위원회 명단을 발표했다.
동양화 : 이상범 김은호 장우성
서양화(1부) : 도상봉 김인승 박고석(朴古石, 1917~2002)
서양화(2부) : 이준(李俊, 1919~ ) 박서보 김영주
조각 : 김경승(金景承, 1915~1992) 김세중
공예 : 이순석(李順石, 1905~1986)
건축 : 배기형(裵基瀅, 1918~1979)
사진 : 이경모(李坰謨, 1926~2011)
명단에 국전과 관계없는 야인은 나 하나였다. 또 예술원 회원이 아닌 사람은 또 김세중 김영주 나 정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예술원 결의에도 참여하고 운영자문위원회에도 낀 인사들이 꽤 있었다는 점이다. 10월 6일 문공부 주재 회의에 나갔더니 도상봉 김경승 김인승 손재형 장우성 등 국전을 주도해온 위원들이 나를 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점심 식사 후 손재형이 나에게 오더니 “박 선생을 초대작가로 추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저 “감사하다.”며 웃었다.
하지만 오후에 속개된 회의에서 나는 “세 번 이상 출품한 추천작가가 초대작가가 되고, 심사권은 초대작가에 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간 원칙 없이 초대작가를 추대하다 보니 제도가 무질서해졌다.”며 국전 주도 세력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회의는 격론을 거듭하다 겨우 몇 개 합의하고 해산했다. 문공부에서는 나에게 장관이 다음날 발표할 개혁안 작성을 요청했다. 나는 기자들의 눈을 피해 정릉의 산속 호텔에서 밤새 글을 썼다. 회의에서 한 말들을 글에 다 넣었다.
운영자문위원회는 심사위원 40명을 추천했다. 운영자문위원회는 그것으로 끝났다. 정부는 1970년 새로운 국전 운영 혁신방안 마련에 들어갔다.
그해 대통령상은 박길웅(朴吉雄, 1941~1997, 서양화)의 〈흔적-백(白)/F75〉가 차지했다. 추상회화가 대통령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주의 편향의 보수적인 국전에 변혁의 상징처럼 되었다.
여기에도 엄청난 비화가 숨겨져 있다. 심사위원들은 심사 발표 전날 대통령상으로 이승조의 작품을 정해놓고 헤어졌다. 다음날 형식적인 논의를 한 번 더 거쳐 발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한 조간신문에 〈대통령상에 이승조〉 기사가 단독으로 난 것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전날 결정을 무효화하고 박길웅을 3위에서 1위로 끌어올려 대통령상으로 발표했다. 이승조는 서양화 비구상 부문 특선으로 내려앉았다.
이는 미술계에 알려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동아일보는 〈국전과 잡음〉이라는 69년 10월 17일 자 사설에서 “대상을 바꿔치기했다느니 자파(自派) 작품을 당선시키기 위해 최우수작을 낙선시켰다느니 잡음이 한둘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1980년에는 국전 민영화 방안이 논의되었다. 문공부는 이미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국전 개최업무를 이관한다는 공문을 보내놓은 상태였다. 나는 또 다시 정부 의뢰로 국전 개혁의 한 축을 맡게 되었다. 문예진흥원은 1월 ‘대한민국미술제 준비위원회’ 7인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시안을 만들도록 했다. 김원(金源, 1912~1994, 서양화) 서세옥, 김경승, 김태(金泰1931~, 서양화) 이준, 이경성, 그리고 내가 위원이었다. 위원장은 김원이었으며, 시안은 내가 기초했다. 이 안은 30일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열린 4차 준비위원회 모임과 31일 100여 명이 참석한 전체 초대작가 회의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원안대로 사단법인 발족작업에 들어갔다.
이때도 내가 보고를 했다. 나는 특히 내가 정부 용역을 받아 실기한 ‘국전 추천·초대작가 지정과 심사위원 선정’ 조사 결과의 통계치를 들어 그간 국전 운영의 난맥상을 고발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설명했다. 국전을 주도해온 사람들의 반발이 보통 아니었다. 그럼에도 국전은 내가 제시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으며, 이는 대세였다.
다음 달인 2월 6일 새로 ‘국전 운영위원회(위원장 류경채)’를 구성했다. 그리고 25인을 선임했다. 그간 개혁 작업을 해온 나도 합류했다. 여기서 시일이 촉박한 봄 국전 운영문제가 논의되었다. 제29회 국전은 종전대로 개최하되 시상은 종전의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문공부장관상 제도를 없애고 각 부문에 고루 대상 하나씩과 약간의 특선을 부여한다는 제29회 국전 개최요강을 마련했다. 결국, 요강대로 종전처럼 열렸다. 다만 가을 국전 대상 수상자 6명에게 3개월간 해외여행의 기회를 준 것이 특기할 만하다.
국전은 1981년 30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온갖 잡음과 말썽, 분규로 얼룩졌지만,신인 등용문으로 일정 역할을 한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이 관전의 한계였다. 그리고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당대 미술인들의 역량이었다.
- 일생의 실수, ‘국전 추천작가’
나는 국전 개혁 작업에 몇 차례 관여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 ‘반국전 선언’을 한 뒤 국전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옳지 못한 것을 참지 못하고 쏘아대는 나의 바른말은 국전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현상 진단과 처방에 대한 공식 요청이 많았던 것 같다.
1974년 4월 재야작가의 국전 추천작가 영입이 있었다. 재야작가를 영입해 국전을 범 미술계 미술행사로 통합·확대하려는 정부의 노력으로 본다. 서양화 비구상에서는 나 외에도 윤형근 (尹亨根, 1928~2007), 정영렬(鄭永烈, 1935~1988), 조용익(趙容翊, 1934- ) 하인두(河麟斗, 1930~1989) 하종현(河鍾賢, 1935- ) 전성우(全晟雨, 1934~2018) 등이 뽑혔다. 그러나 국전을 외면하고 비판해온 작가들을 중견이라는 이유로 대거 추천작가로 기용한 것은 국전이 신인 등용문이라는 성격을 흐리게 한다는 언론의 비판도 일부 있었다.
나, 하종현 조용익 정영렬, 김영중(金泳仲, 1926~2005, 조소)이 정부의 추천작가 영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논의하기 위해 청진동 해장국 집에 모였다. 내가 먼저 국전 참여 불가론을 꺼냈다. 지금까지 국전을 비판한 것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해 저항한 것이 아니다. 국전이 지향하는 이념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그간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의 비판은 국전이 정상 궤도에 올라 순항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 아니었느냐. 나는 안 가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영렬이 말했다. 선생님은 그간 말하길 국전이 배우는 학생들 이중인격을 형성한다고 했다.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가 가만있어선 안 된다. 학부모들은 자녀가 국전에서 입선하지 못하면 실망한다. 그리고 자녀 또래들과 비교한다. 그러면 부담을 느낀 학생은 ‘국전용’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 입선이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낙선하면 곤란해진다. 학생들에겐 보통 혼란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걸 막아 학생들이 좋은 작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러자면 국전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국전 참여에는 동의할 수 없다.
돌아가며 한마디씩 했다. 다 듣고 보니 나만 반대였다. 모두 나와 생각이 같을 줄 알았다. 평소 나의 주장에 흔쾌히 동의해오던 사람들이었기에 그렇다. 설사 이탈이 있다 하더라도 나처럼 반대 입장이 많을 것으로 믿었다. 나의 착각이었던 거였다. 그러면서 약속한 대로 다수결로 결정하자는 거였다.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참여는 했지만 나는 국전 전람회에 처음 한 번 작품을 냈고, 그다음엔 출품을 거부했다. 전람회장에도 가지 않았다. 추천작가라는 이름은 내 경력 어디에도 쓴 일 없다. 내 일생 몇 안 되는 큰 실수였다.
- ‘反국전’ 오랜 불이익을 당해
반면 ‘반국전 선언’에 따른 불이익은 오랫동안 감수해야 했다. 특히 국전을 주도했던 김경승·김인승 형제가 내게 불이익을 가장 많이 안겨줬다. 5·16을 기념해 1962년 문공부가 제정한 〈5월 문예상〉 후보에 몇 차례 올랐지만, 그 때마다 이들의 반대로 수상하지 못했다. 국전 심사위원이 그 상 심사위원까지 겸했기 때문이다. 첫 회에 1930년생 이전 작가에 주는 장려상 후보로 추천받았으나 이화여대 미대 학장이던 김인승이 학교 제자 이수재(李壽在, 1933~ , 서양화)를 미는 바람에 떨어지고 말았다.
1964년엔 내가 여러 곳의 추천으로 단일후보가 되었으나 〈5월 문예상〉을 타지 못했다. 마침 심사위원이었던 김병기 등 많은 사람이 “박서보는 좋은 작가”라며 지원에 나섰지만 막무가내였다. “남은 상금을 국고에 반납하는 일이 있어도 박서보만은 안 된다.”며 수상자 선정을 거절했다. 그해 본상 후보에 오른 천경자(千鏡子, 1924~2015, 동양화)가 내 처지가 딱했던지 심사위원들에게 함께 인사 돌자는 것을 “구차하게 상 타기 싫다”며 거절했다. 호의를 베푸는 천경자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그런 인물들에게 굽실거리면서까지 상을 타고 싶은 의향은 없었다. 내 자존심이 허락할 리 없다. 그해 장려상 없이 천경자가 미술 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그 후 몇 차례 후보에 올랐으나 꼭 한두 표 부족해 수상하지 못 하는 일이 계속됐다. 〈5월 문예상〉의 뜻을 접었다. 그러자 정영렬이 한번 도전하겠다고 했다. 나는 오히려 정영렬의 수상을 열심히 도왔다. 나를 가르친 프랑스 유학 1호 작가 이종우 선생께 말씀드려 1968년 정영렬은 힘 안 들이고도 그 상을 탈 수 있었다.
국전 주도 작가 중 한 분인 도상봉은 늘 나보고 “저놈의 빨갱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나를 무척 아껴줬고, 나 역시 그분을 존경했다. 그의 호 도천(陶泉)이 말해주듯 백자 항아리에 어우러진 라일락은 품격이 있었다. 스승 김환기가 존경하다 보니 나 역시 싫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빨갱이” 소리는 듣기 싫었다.
한번은 윤효중이 부르더니 “혹시 6·25 때 의용군 간 일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도상봉을 쏘아붙일 ‘묘방’이라며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일러주는 대로 도상봉에게 말했다. “저만 보면 빨갱이라고 하시는데, 저는 의용군 간 일 없습니다. 선생님 아드님은 의용군 갔다면서요.” 도상봉은 할 말을 잊었다. 그 후론 “빨갱이” 소리를 듣지 않았다.
- ‘민전 개혁’에도 도전
한국일보가 1970년 창설한 《한국미술대상전)》은 우리나라 첫 민전으로 첫 회부터 미술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일반 공모와 초대작가를 지명하는 지명 공모로 나눠 진행했다. 제1회 지명공모 대상 수상자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를 낸 나의 스승 김환기였다. 절친한 친구 김광섭(金珖燮, 1905~1977, 시인)의 시 〈저녁에〉의 한 구절에서 따 이름 붙인 작품이다. 점묘로 가득 찬 전면 점화였다. 주최자인 한국일보는 뉴욕까지 가서 김환기 작품을 받아왔다.
그런 김환기와 대상을 놓고 경합한 것은 제자인 나였다. 내 출품작은 오사카 엑스포에 냈던 벽화 〈허상〉을 다시 제작한 것이었다. 끝까지 표 경합이 치열했다. 그러나 막판 내 표가 넘어가 김환기의 대상이 확정됐다. 4대 7이었다던가. 나는 “아주 잘 된 결정”이라며 진심으로 축하했다. 내 스승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라고 여겼다.
일화 한 토막 소개하겠다. 당시 홍대 교수였던 남관이 《한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한번은 홍대 교수 몇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 음식 대접을 했다. 그는 “김환기가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은 심사에서 끝까지 나를 밀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2~3일 뒤에 《주간 한국》에 심사과정이 전부 실렸다. 그는 나한테도, 김환기한테도 표를 주지 않았다. 일반 공모에 출품한 홍대 출신 여운(呂運, 1947~2013, 서양화)에 표를 던졌다. 지명공모 대상을 심사하는데 일반 공모에 표를 던진 것은 사표(死票)가 된다. 김환기나 나를 택하지 않고 기권한 셈이다. 다행히 여운은 일반 공모 우수상을 타게 되었다.
1978년 한국일보사는 첫 회 이후 방향이 크게 흔들린 《한국미술대상전》을 개혁해 최고의 공모전으로 발돋움한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갖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나름 상황을 분석하고 직접 〈시행규칙〉을 만들어 당시 홍유선(洪惟善, 1926~1999) 부사장을 만났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를 캐어 그것을 세계 속에 조명하고 부각하는 것을 공모전의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면 외부 압력 없는 공정한 심사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분은 이해가 빨랐고 점잖았다. 홍 부사장은 “과연 듣던 대로 대단하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럼 “절대로 〈시행규칙〉을 한 글자 바꾸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달라고 했다. 공모전이 성공하면 외부인들이 끼어들어 원래 취지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홍 부사장은 흔쾌히 각서에 서명했다.
그 해 제5회전에서 이경성이 지명공모 작가를 선정할 총 커미셔너, 나와 서세옥, 이일(李逸, 1932~1997, 미술비평), 오광수(吳光洙, 1938~, 미술비평) 유준상(劉俊相, 1932~2018, 미술기관장)이 심사를 맡았다.
“한국미술대상전은 흔히 말하는 미술의 총체적인 소개라고 하는 백화점 진열장식의 고려를 배제하면서 오늘의 차가운 비평의 눈으로 현대미술의 정황, 넓게는 문화일반의 정황을 분명하게 끄집어내기 위하여 종전의 제도를 일대 개혁하게 되었다.”
장강재(張康在, 1945~1993) 한국일보 사장은 《한국미술대상전》의 제도 개선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물론 그 개혁안은 내가 만든 것이다. 그 해 윤형근이 지명 공모에서 대상을 차지하고 최우수상은 최명영(崔明永, 1941~ , 서양화)과 서승원(徐承元, 1942~ , 서양화)에게 돌아갔다. 또 일반 공모 대상은 진옥선(秦玉先, 1950~ , 서양화)이 영예를 안았다. 전람회는 성공적이었다. 미술인들이 참여하고 싶은 전시회였다. 잠깐 주춤했던 공모전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외국인들도 보고 훌륭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홍 부사장이 만나자고 했다. 요지는 국전에 활동 중인 추상작가들까지 넣어서 전람회를 하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나는 그들이 추상이라고 해도 이념이 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미술대상전》은 이념을 분명하게 현대적으로 설정해놓았기에 곤란하다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조금 양보하라” “좀 더 폭넓게 운영하자”며 절충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국전파’에서 자꾸 충동질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럼 국전과 다를 게 무엇인가. 회사 측 안목과 의지가 딱히 그렇다면 계속 할 필요가 없었다. 홍 부사장 개인의 결단만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손을 뗐다.
《한국미술대상전》은 미술사에 기록할만한 공모전이었다. 계속 이어 갔으면 정말 훌륭한 전람회로 발전했을 것이다. 내가 《한국미술대상전》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1978년 다른 신문사에서 《동아미술제》와 《중앙미술대전》을 창설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더 아까운 일이다. 결국, 1980년을 끝으로 역사 속에 묻혔다.
국전과 나
- 앵포르멜 작품 국전서 시선 끌어
4·19와 5·16은 미술계에도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괄목할만한 변화는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국전과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반국전’ 움직임은 여전했다. 1960년 10월 국전이 열리는 덕수궁 바깥 돌담에서 열린 두 건의 전시회는 이런 움직임에서였다. 김정현(金正炫, 1915~1976, 동양화), 김형대(金炯大, 1936~ , 서양화·판화) 등 서울미대 재학생 10여명으로 구성된 ‘벽 동인회’가 덕수궁 정동길 돌담을 전시장 삼아 1일부터 15일까지 《벽전》을 열었다.
또 윤명로와 김봉태, 김종학, 이주영(李柱榮, 1934~ ,서양화) 등 서울대와 홍익대 졸업생으로 구성된 ‘60년 미술협회’ 회원 12명이 곧이어 5-15일 영국 대사관 입구의 덕수궁 벽에서 앵포르멜 화풍의 작품으로 제1회 《60년 전》을 열었다. 이들은 대부분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나에게 미술을 배우고 같은 이념을 추구한 ‘안국동파’ 동지들로 뒷날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작가다.
둘로 갈라진 ‘대한미협’과 ‘한국미협’이 예술단체 통합 원칙에 따라 61년 12월 18일 당시 수도여사대(현 세종대)에서 총회를 열고 단일 단체인 ‘한국미술협회(미협)’를 탄생시켰다. 초대 이사장에 박득순, 부이사장에 김세중 김환기였다.
국전의 실질적인 쇄신은 5·16 군사정변 이후 이루어졌다. 1961년 국전에 군림해온 몇몇 원로와 중진 등을 고문으로 추대해 중임 심사위원에서 배제하고, 정당한 참여가 봉쇄돼온 재야 중견작가들을 영입했다. 심사위원은 추천작가 전체 회의에서 천거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국전 운영 규정〉 개정이 이뤄졌다. 미술발전에 기여했다면서 추대한 고문은 고희동 허백련(許百鍊, 1891~1977, 동양화) 김은호(金殷鎬, 1892~1979, 동양화) 이상범 노수현 이종우 장발 도상봉 손재형(孫在馨, 1902~1981, 서예) 김용진(金容鎭, 1878~1968, 서화)이었다. 그러나 국전이 임박해 발표한 심사위원에는 도상봉과 손재형이 들어 있었다. 그나마 고문 제도는 12회 국전 때까지만 이어졌다.
고무적인 것은 1959년 제8회 국전에 앵포르멜 풍의 작품이 출품되더니, 1961년 10회전에서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이 서울미대에 재학 중이던 김형대의 앵포르멜 계열의 작품 〈환원(還元) B〉에 돌아간 것이다. 국전에서 추상미술로 수상한 최초의 작가가 되었다. 완전한 보수적 권위를 고집하던 국전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 제도개선 촉구한 ‘국전의 검은 백서’
국전은 해마다 말썽과 시비가 잇따랐지만, 점진적인 변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다만 만족할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1968년 정부 기구 개편에 따라 국전 운영은 새로 생긴 문화공보부가 문교부로부터 인계받았다. 문공부는 국전 개선에 엄청난 의욕을 보였다. 제18회 국전을 한 달여 앞둔 9월 초 〈운영개선방안〉을 내놓았다. 그 골자는 심사 위원은 연속 중임을 피하고 동일 유파, 사제관계, 친분 등을 피해 균형 있게 안배하며 그 자격은 연임한 일이 없는 현역 작가로만 한다는 것이었다. 국전을 격년제로 하되, 열리지 않는 해에는 국제전을 열기로 했지만, 국전 주도 작가들의 반대에 부딪혀 취소하는 소동을 벌였다.
정부의 의욕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몇 가지 문제를 낳았다. 그해 대통령상은 이은상(李殷相, 1903~1982, 시인)의 〈애국시〉를 한글 전서로 쓴 서희환(徐喜煥, 1934~1995)이 차지했다. 서예 부문의 첫 대통령상이다. 하지만 담합 심사와 수상작의 자질 시비를 불렀다.
그해 대통령상은 서예 부문에서 나온다는 소문이 심사 전부터 파다했던 터였다. 파리에서 갓 돌아온 남관(南寬, 1911~1990)이 서양화 분과위원장으로 심사에 참석했다가 심사 도중 퇴장하고는 기자 회견을 하고 담합 심사라며 폭탄 발언을 했다.
남관은 “7개 분과위원장이 참석한 종합심사에서 서양화와 공예가 1표씩 나오는 데 반해 나머지 5표가 일치하여 대통령상·국회의장상·국무총리상으로 똑같이 몰렸다”고 했다. 그는 심사가 사전 담합에 의한 ‘돌려먹기’라는 것임을 알아채고 바로 심사 도중 심사장을 뛰쳐나와 지상에 폭로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건축과 서양화 등 2개 부문 문공부장관상 선정을 거부했다. 그런데도 남관의 퇴장 이후 심사위원들이 그와 가까워 보이는 홍대 출신 이승조(李承祚, 1941~1990, 서양화)의 추상작품 〈핵(核) F90〉을 문공부장관상에 선정했다. 말하자면 ‘입막음’용 선심이었다.
또 전 해 대통령상 수상작가인 김진명(金鎭明, 1916~2011, 서양화)이 낸 작품이 낙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뒤늦게 안 심사위원이 재심을 요구했으나 투표 결과 낙선했다. 또다시 어느 심사위원이 재고를 요청해 심사위원장에게 일임했으나 끝내 낙선하고 말았다. 보통 치욕이 아니다. 애초 대통령상에 오를 수준이 아니었단 말 아닌가.
게다가 서예부의 추천 작가인 김응현(金應顯, 1927~2007)이 서희환의 대통령상 수상작을 “그것은 글씨도 아니다”라는 혹평을 어느 주간지에 발표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해 심사 부위원장이자 서희환의 스승인 손재형의 국문 전서를 모방한 것으로 대통령상을 줄 만한 작품이 못 된다고 본 것이다.
또 “추상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오지호(吳之湖, 1905~1982, 서양화)가 서양화분과에서 추상미술을 심사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추상과 구상을 분리 심사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그 이전에 그는 “추상을 심사할 수 없다”며 심사위원직을 고사했어야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불합리하고 황당한 사례들을 〈국전의 검은 백서(白書)〉라는 글을 통해 고발하고 국전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월간 중앙》 1968년 11월호에서다.
나의 제안은 국전을 봄, 가을 2회 개최하여 봄에는 새로운 예술이념을 촉진하는 선정에 집중하고, 가을에는 ‘수구적인 사실’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구상을 대상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즉 ‘전위’와 ‘수구’로 나누자는 것이었다.
또 동·서양화부로 나누지 말고, 회화부로 묶고, 판화부와 조각부 3부만으로 구성하자고 했다. 무엇보다 작품 심사를 공개하자고 했다. 심사위원 선출제도를 개선해 예술원 회원들의 전횡을 막을 ‘특별 자문위원회’ 같은 기구를 구성하자는 의견을 냈다.
나의 글은 화단과 정부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 야인으로 ‘국전 개혁’에 참여
문공부는 1969년 제18회 국전을 맞아 새 규정과 방법을 마련했다. 국전 심사위원 천거를 새로 발족할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회에 위임키로 했다. 예술원이 심사에서 손을 떼도록 할 심산이었다. 또 ‘추천작가제’를 초대작가와 추천작가로 다시 구분해서 시행하고, 서양화부만 구상과 추상을 분리 심사하기로 했다. 예술원은 곧바로 반발했다. 심사위원 추천권을 예술원에 둔 기존 심사위원회 규정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주장을 폈다. 이와 함께 국전 제도 개선을 총괄하고 있던 이춘성(李春成) 문공부 차관의 고체를 요구하며 대정부 건의를 했다.
하지만 정부는 문공부 안을 확정하고 10월 1일 15명의 운영자문위원회 명단을 발표했다.
동양화 : 이상범 김은호 장우성
서양화(1부) : 도상봉 김인승 박고석(朴古石, 1917~2002)
서양화(2부) : 이준(李俊, 1919~ ) 박서보 김영주
조각 : 김경승(金景承, 1915~1992) 김세중
공예 : 이순석(李順石, 1905~1986)
건축 : 배기형(裵基瀅, 1918~1979)
사진 : 이경모(李坰謨, 1926~2011)
명단에 국전과 관계없는 야인은 나 하나였다. 또 예술원 회원이 아닌 사람은 또 김세중 김영주 나 정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예술원 결의에도 참여하고 운영자문위원회에도 낀 인사들이 꽤 있었다는 점이다. 10월 6일 문공부 주재 회의에 나갔더니 도상봉 김경승 김인승 손재형 장우성 등 국전을 주도해온 위원들이 나를 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점심 식사 후 손재형이 나에게 오더니 “박 선생을 초대작가로 추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저 “감사하다.”며 웃었다.
하지만 오후에 속개된 회의에서 나는 “세 번 이상 출품한 추천작가가 초대작가가 되고, 심사권은 초대작가에 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간 원칙 없이 초대작가를 추대하다 보니 제도가 무질서해졌다.”며 국전 주도 세력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회의는 격론을 거듭하다 겨우 몇 개 합의하고 해산했다. 문공부에서는 나에게 장관이 다음날 발표할 개혁안 작성을 요청했다. 나는 기자들의 눈을 피해 정릉의 산속 호텔에서 밤새 글을 썼다. 회의에서 한 말들을 글에 다 넣었다.
운영자문위원회는 심사위원 40명을 추천했다. 운영자문위원회는 그것으로 끝났다. 정부는 1970년 새로운 국전 운영 혁신방안 마련에 들어갔다.
그해 대통령상은 박길웅(朴吉雄, 1941~1997, 서양화)의 〈흔적-백(白)/F75〉가 차지했다. 추상회화가 대통령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주의 편향의 보수적인 국전에 변혁의 상징처럼 되었다.
여기에도 엄청난 비화가 숨겨져 있다. 심사위원들은 심사 발표 전날 대통령상으로 이승조의 작품을 정해놓고 헤어졌다. 다음날 형식적인 논의를 한 번 더 거쳐 발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한 조간신문에 〈대통령상에 이승조〉 기사가 단독으로 난 것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전날 결정을 무효화하고 박길웅을 3위에서 1위로 끌어올려 대통령상으로 발표했다. 이승조는 서양화 비구상 부문 특선으로 내려앉았다.
이는 미술계에 알려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동아일보는 〈국전과 잡음〉이라는 69년 10월 17일 자 사설에서 “대상을 바꿔치기했다느니 자파(自派) 작품을 당선시키기 위해 최우수작을 낙선시켰다느니 잡음이 한둘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1980년에는 국전 민영화 방안이 논의되었다. 문공부는 이미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국전 개최업무를 이관한다는 공문을 보내놓은 상태였다. 나는 또 다시 정부 의뢰로 국전 개혁의 한 축을 맡게 되었다. 문예진흥원은 1월 ‘대한민국미술제 준비위원회’ 7인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시안을 만들도록 했다. 김원(金源, 1912~1994, 서양화) 서세옥, 김경승, 김태(金泰1931~, 서양화) 이준, 이경성, 그리고 내가 위원이었다. 위원장은 김원이었으며, 시안은 내가 기초했다. 이 안은 30일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열린 4차 준비위원회 모임과 31일 100여 명이 참석한 전체 초대작가 회의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원안대로 사단법인 발족작업에 들어갔다.
이때도 내가 보고를 했다. 나는 특히 내가 정부 용역을 받아 실기한 ‘국전 추천·초대작가 지정과 심사위원 선정’ 조사 결과의 통계치를 들어 그간 국전 운영의 난맥상을 고발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설명했다. 국전을 주도해온 사람들의 반발이 보통 아니었다. 그럼에도 국전은 내가 제시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으며, 이는 대세였다.
다음 달인 2월 6일 새로 ‘국전 운영위원회(위원장 류경채)’를 구성했다. 그리고 25인을 선임했다. 그간 개혁 작업을 해온 나도 합류했다. 여기서 시일이 촉박한 봄 국전 운영문제가 논의되었다. 제29회 국전은 종전대로 개최하되 시상은 종전의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문공부장관상 제도를 없애고 각 부문에 고루 대상 하나씩과 약간의 특선을 부여한다는 제29회 국전 개최요강을 마련했다. 결국, 요강대로 종전처럼 열렸다. 다만 가을 국전 대상 수상자 6명에게 3개월간 해외여행의 기회를 준 것이 특기할 만하다.
국전은 1981년 30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온갖 잡음과 말썽, 분규로 얼룩졌지만,신인 등용문으로 일정 역할을 한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이 관전의 한계였다. 그리고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당대 미술인들의 역량이었다.
- 일생의 실수, ‘국전 추천작가’
나는 국전 개혁 작업에 몇 차례 관여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 ‘반국전 선언’을 한 뒤 국전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옳지 못한 것을 참지 못하고 쏘아대는 나의 바른말은 국전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현상 진단과 처방에 대한 공식 요청이 많았던 것 같다.
1974년 4월 재야작가의 국전 추천작가 영입이 있었다. 재야작가를 영입해 국전을 범 미술계 미술행사로 통합·확대하려는 정부의 노력으로 본다. 서양화 비구상에서는 나 외에도 윤형근 (尹亨根, 1928~2007), 정영렬(鄭永烈, 1935~1988), 조용익(趙容翊, 1934- ) 하인두(河麟斗, 1930~1989) 하종현(河鍾賢, 1935- ) 전성우(全晟雨, 1934~2018) 등이 뽑혔다. 그러나 국전을 외면하고 비판해온 작가들을 중견이라는 이유로 대거 추천작가로 기용한 것은 국전이 신인 등용문이라는 성격을 흐리게 한다는 언론의 비판도 일부 있었다.
나, 하종현 조용익 정영렬, 김영중(金泳仲, 1926~2005, 조소)이 정부의 추천작가 영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논의하기 위해 청진동 해장국 집에 모였다. 내가 먼저 국전 참여 불가론을 꺼냈다. 지금까지 국전을 비판한 것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해 저항한 것이 아니다. 국전이 지향하는 이념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그간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의 비판은 국전이 정상 궤도에 올라 순항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 아니었느냐. 나는 안 가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영렬이 말했다. 선생님은 그간 말하길 국전이 배우는 학생들 이중인격을 형성한다고 했다.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가 가만있어선 안 된다. 학부모들은 자녀가 국전에서 입선하지 못하면 실망한다. 그리고 자녀 또래들과 비교한다. 그러면 부담을 느낀 학생은 ‘국전용’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 입선이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낙선하면 곤란해진다. 학생들에겐 보통 혼란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걸 막아 학생들이 좋은 작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러자면 국전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국전 참여에는 동의할 수 없다.
돌아가며 한마디씩 했다. 다 듣고 보니 나만 반대였다. 모두 나와 생각이 같을 줄 알았다. 평소 나의 주장에 흔쾌히 동의해오던 사람들이었기에 그렇다. 설사 이탈이 있다 하더라도 나처럼 반대 입장이 많을 것으로 믿었다. 나의 착각이었던 거였다. 그러면서 약속한 대로 다수결로 결정하자는 거였다.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참여는 했지만 나는 국전 전람회에 처음 한 번 작품을 냈고, 그다음엔 출품을 거부했다. 전람회장에도 가지 않았다. 추천작가라는 이름은 내 경력 어디에도 쓴 일 없다. 내 일생 몇 안 되는 큰 실수였다.
- ‘反국전’ 오랜 불이익을 당해
반면 ‘반국전 선언’에 따른 불이익은 오랫동안 감수해야 했다. 특히 국전을 주도했던 김경승·김인승 형제가 내게 불이익을 가장 많이 안겨줬다. 5·16을 기념해 1962년 문공부가 제정한 〈5월 문예상〉 후보에 몇 차례 올랐지만, 그 때마다 이들의 반대로 수상하지 못했다. 국전 심사위원이 그 상 심사위원까지 겸했기 때문이다. 첫 회에 1930년생 이전 작가에 주는 장려상 후보로 추천받았으나 이화여대 미대 학장이던 김인승이 학교 제자 이수재(李壽在, 1933~ , 서양화)를 미는 바람에 떨어지고 말았다.
1964년엔 내가 여러 곳의 추천으로 단일후보가 되었으나 〈5월 문예상〉을 타지 못했다. 마침 심사위원이었던 김병기 등 많은 사람이 “박서보는 좋은 작가”라며 지원에 나섰지만 막무가내였다. “남은 상금을 국고에 반납하는 일이 있어도 박서보만은 안 된다.”며 수상자 선정을 거절했다. 그해 본상 후보에 오른 천경자(千鏡子, 1924~2015, 동양화)가 내 처지가 딱했던지 심사위원들에게 함께 인사 돌자는 것을 “구차하게 상 타기 싫다”며 거절했다. 호의를 베푸는 천경자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그런 인물들에게 굽실거리면서까지 상을 타고 싶은 의향은 없었다. 내 자존심이 허락할 리 없다. 그해 장려상 없이 천경자가 미술 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그 후 몇 차례 후보에 올랐으나 꼭 한두 표 부족해 수상하지 못 하는 일이 계속됐다. 〈5월 문예상〉의 뜻을 접었다. 그러자 정영렬이 한번 도전하겠다고 했다. 나는 오히려 정영렬의 수상을 열심히 도왔다. 나를 가르친 프랑스 유학 1호 작가 이종우 선생께 말씀드려 1968년 정영렬은 힘 안 들이고도 그 상을 탈 수 있었다.
국전 주도 작가 중 한 분인 도상봉은 늘 나보고 “저놈의 빨갱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나를 무척 아껴줬고, 나 역시 그분을 존경했다. 그의 호 도천(陶泉)이 말해주듯 백자 항아리에 어우러진 라일락은 품격이 있었다. 스승 김환기가 존경하다 보니 나 역시 싫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빨갱이” 소리는 듣기 싫었다.
한번은 윤효중이 부르더니 “혹시 6·25 때 의용군 간 일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도상봉을 쏘아붙일 ‘묘방’이라며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일러주는 대로 도상봉에게 말했다. “저만 보면 빨갱이라고 하시는데, 저는 의용군 간 일 없습니다. 선생님 아드님은 의용군 갔다면서요.” 도상봉은 할 말을 잊었다. 그 후론 “빨갱이” 소리를 듣지 않았다.
- ‘민전 개혁’에도 도전
한국일보가 1970년 창설한 《한국미술대상전)》은 우리나라 첫 민전으로 첫 회부터 미술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일반 공모와 초대작가를 지명하는 지명 공모로 나눠 진행했다. 제1회 지명공모 대상 수상자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를 낸 나의 스승 김환기였다. 절친한 친구 김광섭(金珖燮, 1905~1977, 시인)의 시 〈저녁에〉의 한 구절에서 따 이름 붙인 작품이다. 점묘로 가득 찬 전면 점화였다. 주최자인 한국일보는 뉴욕까지 가서 김환기 작품을 받아왔다.
그런 김환기와 대상을 놓고 경합한 것은 제자인 나였다. 내 출품작은 오사카 엑스포에 냈던 벽화 〈허상〉을 다시 제작한 것이었다. 끝까지 표 경합이 치열했다. 그러나 막판 내 표가 넘어가 김환기의 대상이 확정됐다. 4대 7이었다던가. 나는 “아주 잘 된 결정”이라며 진심으로 축하했다. 내 스승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라고 여겼다.
일화 한 토막 소개하겠다. 당시 홍대 교수였던 남관이 《한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한번은 홍대 교수 몇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 음식 대접을 했다. 그는 “김환기가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은 심사에서 끝까지 나를 밀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2~3일 뒤에 《주간 한국》에 심사과정이 전부 실렸다. 그는 나한테도, 김환기한테도 표를 주지 않았다. 일반 공모에 출품한 홍대 출신 여운(呂運, 1947~2013, 서양화)에 표를 던졌다. 지명공모 대상을 심사하는데 일반 공모에 표를 던진 것은 사표(死票)가 된다. 김환기나 나를 택하지 않고 기권한 셈이다. 다행히 여운은 일반 공모 우수상을 타게 되었다.
1978년 한국일보사는 첫 회 이후 방향이 크게 흔들린 《한국미술대상전》을 개혁해 최고의 공모전으로 발돋움한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갖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나름 상황을 분석하고 직접 〈시행규칙〉을 만들어 당시 홍유선(洪惟善, 1926~1999) 부사장을 만났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를 캐어 그것을 세계 속에 조명하고 부각하는 것을 공모전의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면 외부 압력 없는 공정한 심사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분은 이해가 빨랐고 점잖았다. 홍 부사장은 “과연 듣던 대로 대단하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럼 “절대로 〈시행규칙〉을 한 글자 바꾸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달라고 했다. 공모전이 성공하면 외부인들이 끼어들어 원래 취지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홍 부사장은 흔쾌히 각서에 서명했다.
그 해 제5회전에서 이경성이 지명공모 작가를 선정할 총 커미셔너, 나와 서세옥, 이일(李逸, 1932~1997, 미술비평), 오광수(吳光洙, 1938~, 미술비평) 유준상(劉俊相, 1932~2018, 미술기관장)이 심사를 맡았다.
“한국미술대상전은 흔히 말하는 미술의 총체적인 소개라고 하는 백화점 진열장식의 고려를 배제하면서 오늘의 차가운 비평의 눈으로 현대미술의 정황, 넓게는 문화일반의 정황을 분명하게 끄집어내기 위하여 종전의 제도를 일대 개혁하게 되었다.”
장강재(張康在, 1945~1993) 한국일보 사장은 《한국미술대상전》의 제도 개선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물론 그 개혁안은 내가 만든 것이다. 그 해 윤형근이 지명 공모에서 대상을 차지하고 최우수상은 최명영(崔明永, 1941~ , 서양화)과 서승원(徐承元, 1942~ , 서양화)에게 돌아갔다. 또 일반 공모 대상은 진옥선(秦玉先, 1950~ , 서양화)이 영예를 안았다. 전람회는 성공적이었다. 미술인들이 참여하고 싶은 전시회였다. 잠깐 주춤했던 공모전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외국인들도 보고 훌륭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홍 부사장이 만나자고 했다. 요지는 국전에 활동 중인 추상작가들까지 넣어서 전람회를 하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나는 그들이 추상이라고 해도 이념이 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미술대상전》은 이념을 분명하게 현대적으로 설정해놓았기에 곤란하다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조금 양보하라” “좀 더 폭넓게 운영하자”며 절충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국전파’에서 자꾸 충동질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럼 국전과 다를 게 무엇인가. 회사 측 안목과 의지가 딱히 그렇다면 계속 할 필요가 없었다. 홍 부사장 개인의 결단만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손을 뗐다.
《한국미술대상전》은 미술사에 기록할만한 공모전이었다. 계속 이어 갔으면 정말 훌륭한 전람회로 발전했을 것이다. 내가 《한국미술대상전》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1978년 다른 신문사에서 《동아미술제》와 《중앙미술대전》을 창설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더 아까운 일이다. 결국, 1980년을 끝으로 역사 속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