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두 번째 회고전 – 나이 아흔에 또 변해야
참, 많았다. 행렬은 또 길었다. 관람객 예상은 훨씬 빗나갔다. 내 회고전 《박서보 :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가 열린 2019년 5월 1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막 30분 전부터 전람회장 입구에 차려진 행사 단상 쪽으로 갑자기 물둑 떠진 것처럼 관람인파가 들이닥쳤다. 내빈석이 이내 꽉 차고, 뒤쪽 관객들이 병풍처럼 몇 겹으로 둘러 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중앙의 정보·매표창구를 지나 미술관 입구까지 길게 이어진 듯 했다. 오월 중순이라지만 한여름 열기만큼 후끈 달아올랐다. 드디어 오후 5시. 윤범모(尹凡牟) · 배순훈(裵洵勳) 현·전직 국립현대미술관장의 과찬하신 인사·축사에 이어 내 차례다. 벌써 10년 가까이해온, 준비한 원고를 꺼냈다.

“아직 5월인데, 한 여름이 찾아왔습니다.
기후 온난화의 여파라고들 합니다.
환경오염에 저도 한 몫 했습니다.
70년 넘게 그림을 그리며 얼마나 많은 물감을 흘려보냈겠습니까?
지구야 미안하다.
그 70년이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릅니다.
격동과 안식, 번갈아 찾아온 긴 세월이었습니다.
그 긴 시간을 여기 계신 여러분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매우 행복합니다.
1991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졌습니다.
그 해에 손주 두 녀석이 태어났습니다.
핏덩이 같은 녀석들이 성장해 이 자리에 함께 있습니다.
30년이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축복처럼 더해진 시간이었습니다.
그 30년의 세월을 더하여 오늘 이곳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두 번째 회고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광스럽습니다. (하략)”

“와!”하는 함성과 함께 간간이 터지는 웃음소리와 박수. 성능 좋은 앰프도 이런 순간음엔 맥을 추지 못한다. 그런데도 관람객들의 장내 질서는 정연했다. 얼핏 보아서 국내외 귀빈에 가족·친지, 미술관 스태프, 진행 요원 등 올 만한 사람들은 모두 온 것 같았다. 거기에 전날 기자 간담회 후 쏟아진 신문·방송 보도를 보고 몰려든 일반인까지, 미술관 측은 서울관 개관 이후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공식 개막 행사가 끝나고는 기념 촬영요청에 일일이 응하는 데도 한 시간 이상 걸렸다. 그 시간 인파는 다시 전시장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가 정상적인 관람이 불가능했다. 많은 사람이 뒷날 미술관을 다시 찾아 꼼꼼히 감상했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북새통이었다.
기자 간담회에도 엄청 많은 기자들이 몰렸다. 매체수가 늘어난 탓인가. ‘화업 40년’을 정리한 1991년 첫 회고전 때보다 참석 기자수가 훨씬 많아 보였다. 불참 기자들도 간담회 전후로 직·간접 취재에 열을 올렸다. 나는 간담회 때 개막 행사와 마찬가지로 휠체어를 타고도 지팡이를 들었다. 자칫 손님 앞에서 주인이 넘어져선 큰 낭패이기 때문이다. 독립(獨立)과 직립보행(直立步行)이란 단어들을 떠올리며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인사말은 내가 먼저 꺼냈다.
“여러분들이 나를 만나기 전에 ‘뿔 난 도깨비’ 같은 사람이라는 풍문을 들었을 겁니다. 아침에 (뿔을) 다 밀고 왔습니다.”
중절모를 벗고 머리를 쓰다듬는 친근한 몸짓도 잊지 않았다.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다. 기자들이 준비를 많이 했는지 수긍 가는 질문이 쏟아졌다. 한편으론 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짓궂은 질문이 빠질 리 없다. 이를 테면 내 작품의 독창성 여부, 혹은 특정 작가나 미술사조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것들을 물어 부아를 돋우는 식이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들이다. 이런 건 기청감(旣聽感)이라고 해야 하나. 가급적 냉정을 잃지 않고 단호하되 차분하면서도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 때 기자들의 질문에 휘말리지 않는 게 핵심이다. 그러나 무슨 질문이든 성실하게 받아 줘야 한다.
그렇지만 내가 마음먹고 꺼낸 ‘뿔 난 도깨비’엔 반응이 없다. 어느 기자는 ‘뿔 난 도깨비’임을 내가 스스로 알아 인사말 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 절반은 맞다. 63년 전인 1956년 ‘反《국전》선언’을 신호탄으로 현대미술운동을 벌이면서 별의 별 ‘낮도깨비 짓’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린이 동화’에 나올 법한 별호를 불러준 사람은 《국전》을 본거지로 기득권을 극력 사수하며 활동하던 분들이다. 사실주의 계열 작가들이 많았다. 별명 부르기는 양반이다. “천하의 몹쓸 놈” “《국전》만 매년 두들겨 패는 놈”에 심지어 전후 최상급 욕설인 “빨갱이”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1. 두 번째 회고전 – 나이 아흔에 또 변해야
참, 많았다. 행렬은 또 길었다. 관람객 예상은 훨씬 빗나갔다. 내 회고전 《박서보 :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가 열린 2019년 5월 1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막 30분 전부터 전람회장 입구에 차려진 행사 단상 쪽으로 갑자기 물둑 떠진 것처럼 관람인파가 들이닥쳤다. 내빈석이 이내 꽉 차고, 뒤쪽 관객들이 병풍처럼 몇 겹으로 둘러 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중앙의 정보·매표창구를 지나 미술관 입구까지 길게 이어진 듯 했다. 오월 중순이라지만 한여름 열기만큼 후끈 달아올랐다. 드디어 오후 5시. 윤범모(尹凡牟) · 배순훈(裵洵勳) 현·전직 국립현대미술관장의 과찬하신 인사·축사에 이어 내 차례다. 벌써 10년 가까이해온, 준비한 원고를 꺼냈다.
“아직 5월인데, 한 여름이 찾아왔습니다.
기후 온난화의 여파라고들 합니다.
환경오염에 저도 한 몫 했습니다.
70년 넘게 그림을 그리며 얼마나 많은 물감을 흘려보냈겠습니까?
지구야 미안하다.
그 70년이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릅니다.
격동과 안식, 번갈아 찾아온 긴 세월이었습니다.
그 긴 시간을 여기 계신 여러분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매우 행복합니다.
1991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졌습니다.
그 해에 손주 두 녀석이 태어났습니다.
핏덩이 같은 녀석들이 성장해 이 자리에 함께 있습니다.
30년이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축복처럼 더해진 시간이었습니다.
그 30년의 세월을 더하여 오늘 이곳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두 번째 회고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광스럽습니다. (하략)”
“와!”하는 함성과 함께 간간이 터지는 웃음소리와 박수. 성능 좋은 앰프도 이런 순간음엔 맥을 추지 못한다. 그런데도 관람객들의 장내 질서는 정연했다. 얼핏 보아서 국내외 귀빈에 가족·친지, 미술관 스태프, 진행 요원 등 올 만한 사람들은 모두 온 것 같았다. 거기에 전날 기자 간담회 후 쏟아진 신문·방송 보도를 보고 몰려든 일반인까지, 미술관 측은 서울관 개관 이후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공식 개막 행사가 끝나고는 기념 촬영요청에 일일이 응하는 데도 한 시간 이상 걸렸다. 그 시간 인파는 다시 전시장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가 정상적인 관람이 불가능했다. 많은 사람이 뒷날 미술관을 다시 찾아 꼼꼼히 감상했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북새통이었다.
기자 간담회에도 엄청 많은 기자들이 몰렸다. 매체수가 늘어난 탓인가. ‘화업 40년’을 정리한 1991년 첫 회고전 때보다 참석 기자수가 훨씬 많아 보였다. 불참 기자들도 간담회 전후로 직·간접 취재에 열을 올렸다. 나는 간담회 때 개막 행사와 마찬가지로 휠체어를 타고도 지팡이를 들었다. 자칫 손님 앞에서 주인이 넘어져선 큰 낭패이기 때문이다. 독립(獨立)과 직립보행(直立步行)이란 단어들을 떠올리며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인사말은 내가 먼저 꺼냈다.
“여러분들이 나를 만나기 전에 ‘뿔 난 도깨비’ 같은 사람이라는 풍문을 들었을 겁니다. 아침에 (뿔을) 다 밀고 왔습니다.”
중절모를 벗고 머리를 쓰다듬는 친근한 몸짓도 잊지 않았다.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다. 기자들이 준비를 많이 했는지 수긍 가는 질문이 쏟아졌다. 한편으론 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짓궂은 질문이 빠질 리 없다. 이를 테면 내 작품의 독창성 여부, 혹은 특정 작가나 미술사조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것들을 물어 부아를 돋우는 식이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들이다. 이런 건 기청감(旣聽感)이라고 해야 하나. 가급적 냉정을 잃지 않고 단호하되 차분하면서도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 때 기자들의 질문에 휘말리지 않는 게 핵심이다. 그러나 무슨 질문이든 성실하게 받아 줘야 한다.
그렇지만 내가 마음먹고 꺼낸 ‘뿔 난 도깨비’엔 반응이 없다. 어느 기자는 ‘뿔 난 도깨비’임을 내가 스스로 알아 인사말 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 절반은 맞다. 63년 전인 1956년 ‘反《국전》선언’을 신호탄으로 현대미술운동을 벌이면서 별의 별 ‘낮도깨비 짓’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린이 동화’에 나올 법한 별호를 불러준 사람은 《국전》을 본거지로 기득권을 극력 사수하며 활동하던 분들이다. 사실주의 계열 작가들이 많았다. 별명 부르기는 양반이다. “천하의 몹쓸 놈” “《국전》만 매년 두들겨 패는 놈”에 심지어 전후 최상급 욕설인 “빨갱이”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