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 재홍(在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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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 재홍(在弘)

나, 재홍(在弘)은 1931년 경상북도(慶尙北道) 예천(醴泉)에서 박(朴), 제(濟)자 훈(勳)자 아버지(1883-1950)와 남(南), 기(其)자 매(妹)자 어머니(1907-1997)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제국이 자작극을 통해 만주 침략을 개시한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킨 해였다. 일제는 전쟁과 침략에 광분하는데 반해 조선은 혹독하고도 야만적인 암흑기를 해방 때까지 무기력하게 견뎌야 했다. 그런 나라 안팎의 사정과 달리 나는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각별한 기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충북(忠北) 음성(陰城) 출신으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발령지 예천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법률 관련 일을 하는 아버지는 사주팔자에 “장가를 두 번 든다. 둘째 부인에서 얻은 세 번째 아들이 세계적인 인물이 된다”고 나왔다 한다. 예천에 왔을 때는 이미 상처한 상태였다. 어머니 집안은 예천군 하리면(下里面, 현재 은풍면·殷豊面)에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남고약(南膏藥) 본포(本鋪)를 개설했다. 남고약은 종기가 난 환부에 붙이는 ’이(李)고약‘이나 ’조(趙)고약‘과 달리 환(丸)으로 지어 입에 머금거나, 환부에 붙이는 고약으로 빨리 아무는 약효로 꽤나 유명했다.

 

어머니 사주는 “재취댁에 보내면 오래 산다. 또 훌륭한 아들을 낳는다”고 했단다. 이런 양쪽 이야기를 들은 동네 유지들이 당시 열일곱인 어머니를 마흔 하나 아버지와 짝을 맺도록 주선했다. 어머니는 사주에서 밝힌 것처럼 아흔 하나까지 사셨다.

어머니는 또 “꿈에 수염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더니 초롱불을 내게 밝혀주셨다. 그 불을 따라 가는 곳마다 소 발자국이 찍혀 있었고, 푹 팬 자리에는 크고 탐스런 알밤이모여 있었다. 밤새 불 따라 알밤을 앞치마에 담았다”는 태몽을 꾸었다고 들었다.   내가 산신령이 점지한 ‘신령의 자식’이므로 개고기를 먹어선 안 된다며 어머니는 틈날 때마다 각별히 당부했다. 나는 어머니가 이르신 금기를 철나서까지 지키려 노력했다. 사회생활을 하느라 지키지 못했을 때엔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자책한 일이 한두 번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 젖 떼자마자 아버지와 함께 사랑에서 생활했다. 이를 테면 아버지에게 직접 특별교육을 받으며 자란 셈이다. 아버지는 엄격하면서도 자상했다. 아침에 일어나 문 활짝 열고는 이불 개키고 청소하고 아침 식사 마친 후엔 천자문 공부하면서 하루 일과에 들어갔다. 아버지와 겸상인 밥상머리에서는 밥 먹는 예절부터 어른 공경하고 인사 잘 하는 법 등 어린 나에 맞게 조곤조곤 일러주셨다.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가끔 반주를 하실 때면 나를 곁에 앉히고 “남자는 술도 적당히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술에 지면 안 된다. 실수하게 된다”며 장성한 아들 타이르듯 주도에 대해서도 가르치셨다. 그땐 무슨 이야긴 지 몰랐으나 내가 자라면서 어머니가 틈날 때마다 말씀해 주셔서 알아들은 이야기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당신의 기대에 맞게 성장하길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경기도(京畿道) 안성(安城)에서 보냈다. 아버지가 해방 전에 가솔을 이끌고 예천을 떠나 안성에 터를 잡았기에 그렇다. 우리 집 사랑채에 대서소를 내고 주민들의 여러 어려운 일을 대신 처리해주기 시작했는데, 벌이가 쏠쏠해서 가정 엔 부족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