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연(鳶)에 푹 빠진 국민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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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鳶)에 푹 빠진 국민학생

  우측 상단이 아버지, 그 앞이 나다. 왼쪽은 여동생 봉희를 안고 있는 형 원홍.


아버지는 내가 법대에 진학해 변호사가 되길 바랐다. 내가 또래 중에서는 두뇌 명석하고 총명하다고 판단하셨기에 한층 기대에 부푸셨을 것이다. 우선 경기중학교 진학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며 당장의 목표를 정해주셨다. 그러나 그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놀기 팔려서 공부를 게을리한 탓이다. 책에 파묻혀야 할 그 때 나는 과도하리 만치 연(鳶)에 집착했다. 책상에서 책을 펼치다가도 창공을 나는 연 모습이 떠올라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감시가 조금만 소홀해도 몰래 빠져나가 친구와 연을 만들고 놀았다.

쇳가루나 유리조각, 사금파리를 곱게 빻은 가루를 풀에 섞어 명주 연실에 먹이면 실이 움직일 때마다 반짝반짝 빛이 나 여간 멋있는 게 아니었으며, 단박에 상대방 연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를 장착한 강력한 연이 된다. 하늘 높이 띄워 날릴 때는 물론 공중에서 좌 우 급전·급상승·급강하를 거듭하며 곡예를 펼칠 때나, 남의 연줄을 끊어 먹는 연싸움을 할 때도 연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나는 어린 나이에 이미 손맛을 터득했던 것 같다. 나만의 연을 만드는 창작 과정부터, 동력장치 없는 연을 비행기 몰 듯 하는 기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승부욕까지 나는 연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어린 내 손은 빠르고 정확했다. 손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만들고 그리는 것은 항상 자신 있었다. 또 지기 싫었다. 내 연만큼은 땅바닥에 처박히거나 나뭇가지에 걸려 의식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결국 엉뚱한 중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적잖이 실망했지만 변호사에 대한 기대만큼은 쉽사리 접지 않으셨다. 나는 나대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환쟁이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도 나의 미술대학 진학을 막지 못했다. 서울대는 원서 접수 기회를 놓쳤다. 1년 뒤를 기약하려다가 신문에서 홍익대에 기라성 같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 고암(顧庵) 이응노(李應魯, 1904-1989) 선생이 동양화 교수로 있다는 기사를 읽고 홍대를 선택했다.

홍익대 합격증을 꺼내 놓았을 때 아버지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몸져누웠다. 어머니가 자식들 없는 틈을 타 “화가가 되는 것도 재홍이 팔잡니다. 왜 아들 운명을 당신이 결정하시려 합니까?”며 울면서 호소하자 아버지도 뜻을 굽히고 일어나셨다.  2주 만이었다. 그리고 등록금을 대주셨다. 

홍익대 동양화과 2기생이다. 정원이 3명. 서울대를 이기려면 천재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소수 인원만 뽑았다. 학생은 문학부하며 인기 좋은 곳에 몰리니까 최소한의 인원만 선발한 것이란다. 동기 중 한 명이 이원용(李元鎔, 1930-2018)이고, 또 한 명은 6·25 이후 보이지 않아 기억에서 지워졌다. 나는 서울에 올라와 지금 신세계백화점 본점 부근인 회현동(會賢洞) 친척집에 기거하면서 서울 효창동(孝昌洞) 홍익대에 통학했다. 재미있는 것은 1949년 입학한 한 해 선배 중에는 교수님보다 나이 든 학생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긴 머리에 파이프 물고 있는 멋있는 분이 보이기에 나는 응당 교수려니 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1기 선배였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나 국내에서 공부하다 중간에 그만두었다가 홍익대에 미술대가 생기니까 새로 입학한 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