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전쟁의 소용돌이
자유와 낭만이 넘치는 대학 생활은 석 달 보름 만에 일단락됐다. 6.25 전쟁이 터져서다. 옹진(甕津) 개성(開城) 장단(長湍) 동두천(東豆川) 의정부(議政府) 강릉(江陵) 춘천(春川) 등 적과 대치하고 있는 전 지역에서 인민군이, 그것도 동시에, 전면 남침을 기도했다는 뉴스가 한국과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3·8선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정예국군이 적을 요격 중이라는 뉴스가 숨 가쁘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일요일, 외출중인 군인들이 서둘러 귀대하는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띌 뿐 시민 대부분은 일상적인 생활을 계속했다. 우선 난데없는 전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거기에 정예국군이 반격하고 있다지 않은가. 시민들은 하루 이틀 차분히 지켜볼 심산이었다. 다음날에는 더욱 희망적인 소식이 들렸다. 국군이 용감히 싸워 인민군이 전선에서 패주하고 있다는 보도였다. 임진강(臨津江)에서는 강을 건너려는 적군을 물리쳤으며, 국군 일부는 해주(海州)에 진입해 시를 완전 점령했고, 대한해협에서는 육지에 상륙하려는 소련(蘇聯) 함정을 격침시켰다는 전과가 발표되었다. 급기야 27일 밤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서울사수 의지’ 육성이 거듭거듭 방송을 탔다. 한편으로는 서울 북쪽 지역에서 북한 탱크와 인민군 정규부대를 보았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이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상황은 전쟁 발발 사흘째인 6월 28일 급변했다. 《京鄕新聞(경향신문)》과 《東亞日報(동아일보)》같은 유력지들이 신문을 발행하지 않았다. 28일(수요일)은 신문을 내지 않는 휴간일(休刊日)이 아니었다. 두 신문은 9·28 ‘서울수복’ 후인 10월 4일에야 신문을 다시 낼 수 있었다. 여튼 낌새가 이상했다. 뭔가 있다. 길거리에 나와 웅성대는 시민들이 부쩍 늘었다.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피난민들이 나타났다. 수도 서울은 시간이 갈수록 동요의 몸살을 앓았다. 대치 전선은 이미 무너졌다는 절망적인 소문이들렸다. 머물고 있는 주인집 친척께 의논드리니 부모님 계신 안성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서울역으로 뛰었다. 벌써 거리는 혼란 자체였다. 좌익들이 뛰쳐나와 어느새 인민군의 수도 입성을 환영하고 만세를 불렀다. 북한 전차가 내는 무한궤도의 굉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나 어린 전차병이 포탑에 가슴을 내밀고 기관총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섬뜩했다. 서울역은 출입이 통제됐다. 떠나는 차가 있을 리 만무다. 용산 거쳐 노량진으로 내달렸다. 한강교와 철교는 새벽 2시 30분 이미 폭발 섬광과 함께 끊겼다. 북한 탱크의 도강과 남하를 저지한다는 미명 아래 퇴각하는 우리 국군이 서둘러 폭파하는 바람에 희생이 컸다. 강가에 나온 시민들이 처참한 몰골의 한강다리를 망연자실 바라본다. 인민군이 경계 근무에 들어간 지 벌써 오래다. 서울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는 데는 사흘이면 충분했다. 보초가 다가와 나를 아래 위 훑더니 “누구냐!”고 묻는다. “미술대학 다니는 학생”이라고 했다. 얼굴은 하얗고 머리를 기른 내 모습이 영락 화가 지망생으로 보였던지 고개를 끄덕인다. “안성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덧붙였다. 병사는 “일주일 뒤에 그곳에서 만나자”며 여유까지 부렸다.
용케 배를 얻어 타고 강을 건너, 며칠을 밤낮 걷고 걸어 안성에 도착했다. 가족들은 무사했다. 인민군은 어느새 우리를 앞질러 내려와서 이미 안성을 접수한 상태였다. 우리 집도 자기 사무실처럼 익숙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매일 주민들 인원·신분파악과 동태를 살피느라 분주했다.
그해 내 나이 스물. 인민군이든 국군이든 끌고 가기 가장 적합한 연령이다. 그러나 나는 북한 의용군에 강제 징집되지 않았다. 쓸모가 따로 정해졌다. 미술대학 재학생이란 이유로 선무공작대에 분류되었다. 공산주의를 고무 찬양하고, 전쟁과 점령의 목적을 홍보하는 연극 무대미술을 나에게 맡겼다. 농촌 무대에 올리는 연극이라 봤자 초가집 같은 단순한 장면을 그리고 만드는 것이어서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적에게 부역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하지만 무대장치도 잠시. UN군의 인천상륙과 낙동강 전투를 버텨낸 아군의 반격으로 수세에 몰린 인민군은 많은 젊은이에게 군(軍) 지원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방법이 없다. 거부하면 처단뿐인 게 현실이었다. 그들의 서슬에 지원서에 서명하고 동의했다. 나는 마침 엉덩이에 난 커다란 종기로 큰 고생을 하고 있었다. 치료약이 없던 시절이라 누군가 가르쳐준 처방에 따라, 한여름 강가에 나가 뜨겁게 달궈진 돌로 환부를 지지고 씻기를 반복했으나 차도가 없다. 환부가 크게 부어올라 제대로 앉을 수도, 설 수도, 누울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지내야 했다. 나는 오히려 빨리 치료를 마치고 군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그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찬바람이 나자 종기 응어리는 속으로 잠복하고, 겉살은 말짱하게 아물었다. 인민군은 나를 비롯한 선무공작대 몇 명과 여기저기서 끌어온 시민들을 안성에서 제법 크다는 광세(光世)여관에 강제로 집어넣고 군 지원에 필요한 절차를 밟았다. 밖엔 보초를 세워 탈출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밤이 되자 3, 4자(尺) 쯤 되는 광목천을 나눠주고 10cm 크기로 자를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헝겊 앞뒷면을 빨래비누로 고루 문지른 다음 발감개하고 취침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행군 시 발바닥과 뒤꿈치의 물집 예방을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었다. 얼마나 멀리 끌고 가려고 비누칠한 헝겊을 발에 동여매고 길을 나서는가 생각하니 부모님 생각만 절로 났다.
행군은 새벽 일찍 시작됐다. 경계 호위 병력이 행렬 사방으로 붙었다. 죽산(竹山)방면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인솔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몇 번을 강조했다. 주위를 돌아보니 일행 중에 열대여섯 살쯤 보이는 앳되고 키 작은 패잔병들이 아시보 장총을 질질 끌고 우리와 같이 행군하고 있었다.
▲ 남진하는 인민군(1950. 6.).
머잖아 행렬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갑자기 선두 쪽에서 “꽝! 꽝!” 포 소리가 났다. 인민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각자 몸을 숨길 은폐물을 찾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엔 후퇴하면서도 훈련을 하는 줄 알았다. 얼마쯤 지나자 이번엔 검은색 짚이 기관총을 쏘아대며 우리를 향해 돌진한다. 한눈에 미군이다. 선두권에서 걷던 우리 일행 셋은 순식간에 길옆 얕은 계곡에 몸을 던지고 힘껏 굴렀다. 우리는 산중 계류(溪流)가 지하 토관을 지나 논으로 나오는 토관 마지막 부분에 운 좋게 떨어졌다. 토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몸을 완전히 감추고 바깥 동향을 살폈다. 총소리와 미군병사들 왁자지껄 소리가 바로 옆인 듯 들렸다.
그 때 뒤편에 끌려오던 나의 안성 선배 ‘후라이보이’ 곽규석(郭圭錫, 1928-1999, 코미디언·목사)이 산으로 도망치다 기관포에 맞았다. 다행히 관통은 피한 채 등만 스치는 부상을 입었다. 주변 미군에 발견됐다. 그를 살린 건 “헬프 미! 헬프 미!” 영어 두 마디였다. 이어 미군과 영어로 대화가 가능해지자 미군 제1기갑사단 하우스 보이로 선택되었다. 이후 입심과 원맨쇼 능력이 추가로 알려져 공군 선무장교로 발탁됐다. 그 뒤엔 《쇼쇼쇼》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건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과 같다.
한참 만에 차 소리 사람소리가 끊기고 주변이 적막해졌다. 성격 급한 내가 조금 더 있다 나가자는 둘을 끌다시피 데려 나갔다. 두런거리는 미군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피해 산으로 뛰어올랐다. 이번엔 내 발로 적진에 들어갔다. 우리를 기다린 건 흩어진 인민군의 한 무리였다. 행색이 북쪽으로 끌려가던 주민임을 알아챈 그들은 길안내를 명했다. 그곳 지리를 알 리 없는 우리에겐 또 한 번 위기였다. 순간 기지를 발휘했다.
“우리 (인민위원회) 위원장 동무가 중요한 서류를 갖고 산 아래 있었습니다. 행동이 이상하리 만치 안절부절 못하더군요. 내가 바로 모셔오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졌다. 셋은 위원장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고 찾는 척하며 안성으로 내뺐다.
우리 선무공작대 일행이던 연극배우 최순모는 얼굴이 알려져서 경찰에 붙잡혀 수원에서 죽었다. 잘 생기고 능력 있는데다, 인품도 남달랐던 사람이다. 인민군이 재차 내려오자 수감 중인 그를 밥 한 끼 잘 먹여서 형장으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한 명 노래 부르던 편명희는 내 친구 누난데 어떻게 위기에서 탈출했으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나야 무대 뒤에서 일 한 ‘막후(幕後) 인생’이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스포트라이트 없는 막후에만 살긴 그때가 처음 아닌가 생각하니 쓴 웃음이 나온다.
슬픈 이야기도 하나 있다. 내 국민학교 친구 중에 서울 가 있다가 인민군 도움으로 보위부원 된 애가 있었다. 현장 순경인 셈이다. 이 친구가 철없이 사진 찍어 부모에게 안부 겸 자랑삼아 보냈다. 세상 물정 잘 모르는 부모는 아들이 출세했다고 동네방네 사진 보여주고 자랑했다. 국군이 서울 수복하자 이 친구가 걸어서 안성 집까지 도망쳤다. 그 친구를 본 동네 사람이 신고해서 결국 수원 끌려가서 죽었다. 사진 한 장으로 사람의 운명이 결정 난다니 그렇게 얄궂을 수가 없다. 이런 일들이 전쟁통에 무수히 일어났다. 난리가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전쟁의 소용돌이를 벗어날 재간은 그 아무에게도 없었다.
6. 전쟁의 소용돌이
자유와 낭만이 넘치는 대학 생활은 석 달 보름 만에 일단락됐다. 6.25 전쟁이 터져서다. 옹진(甕津) 개성(開城) 장단(長湍) 동두천(東豆川) 의정부(議政府) 강릉(江陵) 춘천(春川) 등 적과 대치하고 있는 전 지역에서 인민군이, 그것도 동시에, 전면 남침을 기도했다는 뉴스가 한국과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3·8선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정예국군이 적을 요격 중이라는 뉴스가 숨 가쁘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일요일, 외출중인 군인들이 서둘러 귀대하는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띌 뿐 시민 대부분은 일상적인 생활을 계속했다. 우선 난데없는 전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거기에 정예국군이 반격하고 있다지 않은가. 시민들은 하루 이틀 차분히 지켜볼 심산이었다. 다음날에는 더욱 희망적인 소식이 들렸다. 국군이 용감히 싸워 인민군이 전선에서 패주하고 있다는 보도였다. 임진강(臨津江)에서는 강을 건너려는 적군을 물리쳤으며, 국군 일부는 해주(海州)에 진입해 시를 완전 점령했고, 대한해협에서는 육지에 상륙하려는 소련(蘇聯) 함정을 격침시켰다는 전과가 발표되었다. 급기야 27일 밤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서울사수 의지’ 육성이 거듭거듭 방송을 탔다. 한편으로는 서울 북쪽 지역에서 북한 탱크와 인민군 정규부대를 보았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이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상황은 전쟁 발발 사흘째인 6월 28일 급변했다. 《京鄕新聞(경향신문)》과 《東亞日報(동아일보)》같은 유력지들이 신문을 발행하지 않았다. 28일(수요일)은 신문을 내지 않는 휴간일(休刊日)이 아니었다. 두 신문은 9·28 ‘서울수복’ 후인 10월 4일에야 신문을 다시 낼 수 있었다. 여튼 낌새가 이상했다. 뭔가 있다. 길거리에 나와 웅성대는 시민들이 부쩍 늘었다.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피난민들이 나타났다. 수도 서울은 시간이 갈수록 동요의 몸살을 앓았다. 대치 전선은 이미 무너졌다는 절망적인 소문이들렸다. 머물고 있는 주인집 친척께 의논드리니 부모님 계신 안성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서울역으로 뛰었다. 벌써 거리는 혼란 자체였다. 좌익들이 뛰쳐나와 어느새 인민군의 수도 입성을 환영하고 만세를 불렀다. 북한 전차가 내는 무한궤도의 굉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나 어린 전차병이 포탑에 가슴을 내밀고 기관총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섬뜩했다. 서울역은 출입이 통제됐다. 떠나는 차가 있을 리 만무다. 용산 거쳐 노량진으로 내달렸다. 한강교와 철교는 새벽 2시 30분 이미 폭발 섬광과 함께 끊겼다. 북한 탱크의 도강과 남하를 저지한다는 미명 아래 퇴각하는 우리 국군이 서둘러 폭파하는 바람에 희생이 컸다. 강가에 나온 시민들이 처참한 몰골의 한강다리를 망연자실 바라본다. 인민군이 경계 근무에 들어간 지 벌써 오래다. 서울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는 데는 사흘이면 충분했다. 보초가 다가와 나를 아래 위 훑더니 “누구냐!”고 묻는다. “미술대학 다니는 학생”이라고 했다. 얼굴은 하얗고 머리를 기른 내 모습이 영락 화가 지망생으로 보였던지 고개를 끄덕인다. “안성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덧붙였다. 병사는 “일주일 뒤에 그곳에서 만나자”며 여유까지 부렸다.
용케 배를 얻어 타고 강을 건너, 며칠을 밤낮 걷고 걸어 안성에 도착했다. 가족들은 무사했다. 인민군은 어느새 우리를 앞질러 내려와서 이미 안성을 접수한 상태였다. 우리 집도 자기 사무실처럼 익숙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매일 주민들 인원·신분파악과 동태를 살피느라 분주했다.
그해 내 나이 스물. 인민군이든 국군이든 끌고 가기 가장 적합한 연령이다. 그러나 나는 북한 의용군에 강제 징집되지 않았다. 쓸모가 따로 정해졌다. 미술대학 재학생이란 이유로 선무공작대에 분류되었다. 공산주의를 고무 찬양하고, 전쟁과 점령의 목적을 홍보하는 연극 무대미술을 나에게 맡겼다. 농촌 무대에 올리는 연극이라 봤자 초가집 같은 단순한 장면을 그리고 만드는 것이어서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적에게 부역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하지만 무대장치도 잠시. UN군의 인천상륙과 낙동강 전투를 버텨낸 아군의 반격으로 수세에 몰린 인민군은 많은 젊은이에게 군(軍) 지원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방법이 없다. 거부하면 처단뿐인 게 현실이었다. 그들의 서슬에 지원서에 서명하고 동의했다. 나는 마침 엉덩이에 난 커다란 종기로 큰 고생을 하고 있었다. 치료약이 없던 시절이라 누군가 가르쳐준 처방에 따라, 한여름 강가에 나가 뜨겁게 달궈진 돌로 환부를 지지고 씻기를 반복했으나 차도가 없다. 환부가 크게 부어올라 제대로 앉을 수도, 설 수도, 누울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지내야 했다. 나는 오히려 빨리 치료를 마치고 군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그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찬바람이 나자 종기 응어리는 속으로 잠복하고, 겉살은 말짱하게 아물었다. 인민군은 나를 비롯한 선무공작대 몇 명과 여기저기서 끌어온 시민들을 안성에서 제법 크다는 광세(光世)여관에 강제로 집어넣고 군 지원에 필요한 절차를 밟았다. 밖엔 보초를 세워 탈출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밤이 되자 3, 4자(尺) 쯤 되는 광목천을 나눠주고 10cm 크기로 자를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헝겊 앞뒷면을 빨래비누로 고루 문지른 다음 발감개하고 취침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행군 시 발바닥과 뒤꿈치의 물집 예방을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었다. 얼마나 멀리 끌고 가려고 비누칠한 헝겊을 발에 동여매고 길을 나서는가 생각하니 부모님 생각만 절로 났다.
행군은 새벽 일찍 시작됐다. 경계 호위 병력이 행렬 사방으로 붙었다. 죽산(竹山)방면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인솔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몇 번을 강조했다. 주위를 돌아보니 일행 중에 열대여섯 살쯤 보이는 앳되고 키 작은 패잔병들이 아시보 장총을 질질 끌고 우리와 같이 행군하고 있었다.
▲ 남진하는 인민군(1950. 6.).
머잖아 행렬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갑자기 선두 쪽에서 “꽝! 꽝!” 포 소리가 났다. 인민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각자 몸을 숨길 은폐물을 찾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엔 후퇴하면서도 훈련을 하는 줄 알았다. 얼마쯤 지나자 이번엔 검은색 짚이 기관총을 쏘아대며 우리를 향해 돌진한다. 한눈에 미군이다. 선두권에서 걷던 우리 일행 셋은 순식간에 길옆 얕은 계곡에 몸을 던지고 힘껏 굴렀다. 우리는 산중 계류(溪流)가 지하 토관을 지나 논으로 나오는 토관 마지막 부분에 운 좋게 떨어졌다. 토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몸을 완전히 감추고 바깥 동향을 살폈다. 총소리와 미군병사들 왁자지껄 소리가 바로 옆인 듯 들렸다.
그 때 뒤편에 끌려오던 나의 안성 선배 ‘후라이보이’ 곽규석(郭圭錫, 1928-1999, 코미디언·목사)이 산으로 도망치다 기관포에 맞았다. 다행히 관통은 피한 채 등만 스치는 부상을 입었다. 주변 미군에 발견됐다. 그를 살린 건 “헬프 미! 헬프 미!” 영어 두 마디였다. 이어 미군과 영어로 대화가 가능해지자 미군 제1기갑사단 하우스 보이로 선택되었다. 이후 입심과 원맨쇼 능력이 추가로 알려져 공군 선무장교로 발탁됐다. 그 뒤엔 《쇼쇼쇼》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건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과 같다.
한참 만에 차 소리 사람소리가 끊기고 주변이 적막해졌다. 성격 급한 내가 조금 더 있다 나가자는 둘을 끌다시피 데려 나갔다. 두런거리는 미군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피해 산으로 뛰어올랐다. 이번엔 내 발로 적진에 들어갔다. 우리를 기다린 건 흩어진 인민군의 한 무리였다. 행색이 북쪽으로 끌려가던 주민임을 알아챈 그들은 길안내를 명했다. 그곳 지리를 알 리 없는 우리에겐 또 한 번 위기였다. 순간 기지를 발휘했다.
“우리 (인민위원회) 위원장 동무가 중요한 서류를 갖고 산 아래 있었습니다. 행동이 이상하리 만치 안절부절 못하더군요. 내가 바로 모셔오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졌다. 셋은 위원장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고 찾는 척하며 안성으로 내뺐다.
우리 선무공작대 일행이던 연극배우 최순모는 얼굴이 알려져서 경찰에 붙잡혀 수원에서 죽었다. 잘 생기고 능력 있는데다, 인품도 남달랐던 사람이다. 인민군이 재차 내려오자 수감 중인 그를 밥 한 끼 잘 먹여서 형장으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한 명 노래 부르던 편명희는 내 친구 누난데 어떻게 위기에서 탈출했으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나야 무대 뒤에서 일 한 ‘막후(幕後) 인생’이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스포트라이트 없는 막후에만 살긴 그때가 처음 아닌가 생각하니 쓴 웃음이 나온다.
슬픈 이야기도 하나 있다. 내 국민학교 친구 중에 서울 가 있다가 인민군 도움으로 보위부원 된 애가 있었다. 현장 순경인 셈이다. 이 친구가 철없이 사진 찍어 부모에게 안부 겸 자랑삼아 보냈다. 세상 물정 잘 모르는 부모는 아들이 출세했다고 동네방네 사진 보여주고 자랑했다. 국군이 서울 수복하자 이 친구가 걸어서 안성 집까지 도망쳤다. 그 친구를 본 동네 사람이 신고해서 결국 수원 끌려가서 죽었다. 사진 한 장으로 사람의 운명이 결정 난다니 그렇게 얄궂을 수가 없다. 이런 일들이 전쟁통에 무수히 일어났다. 난리가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전쟁의 소용돌이를 벗어날 재간은 그 아무에게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