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서양화과로 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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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양화과로 전과

전쟁이 난 1950년, 그해 12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 속을 가장 많이 썩인 나로서는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이 전쟁통에 어떻게 살아남을 지 얼마나 노심초사 끌탕 하셨을까. 마음이 괴로워서 잠 이루지 못한 날이 많았다. 그러나 현실은 천붕(天崩)의 슬픔에만 갇혀 있을 수 없었다. 우선 먹고 살아야 했다. 학업도 계속해야 한다. 등록금을 내주시던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니 스스로 벌어서 학비도 충당해야 했다.

홍익대 전시학교가 있는 부산에 내려갔다. 동양화과 교수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대책 없이 마냥 기다릴 수 없다. 서양화과로 과를 옮겼다. 같은 과 동기 이원용(李元鎔)도 함께 전과했다. 입학하고 한 학기도 꼬박 채우지 못했는데 어느덧 3학년이 된단다. 학년만 오르는 것이 한심했다. 경제적으로는 빨리 졸업하는 게 유리하다. 그러나 2학년 유급을 자청했다. 그게 1952년이었다. 동양화하다가 서양화를 하니 모든 게 새로웠다. 전과와 유급을 한꺼번에 하니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6) 선생과 설초(雪蕉) 이종우(李鍾禹, 1899-1981) 선생이 마침 그해 홍대에 오셨다. 나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김환기는 서울 미대에 근무하다가 장발(張勃, 1901-2001, 서양화) 선생과 기질적으로 맞지 않아 홍대로 옮긴 이후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 화가, 교육자, 미술 행정가로 많은 업적을 남긴다. 나의 롤 모델이다. 이종우는 한국인 최초의 도불화가로 1948년 이후 《국전》 심사위원으로 장기간 활동했다. 두 분 다 《국전》의 실력자였다.

학교 등록을 어렵사리 마쳤다. 하지만 부산에는 일거리가 없었다. 먹고 자는 게 늘 문제였다. 서울대 농과대학 수의학부에 다니는 안성 친구가 몇 있었다. 김복영(金福榮)과 김학녕(金鶴寧)이란 두 친구가 송도 산기슭 판자촌에 방 하나 세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 친구 자취방은 내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불쑥 찾아가선 “나 배고프다”며 숟가락 하나 더 놓으라고 했고 잠도 거기서 끼여 자기 일쑤였다. 불편한 기색 한번 내비치지 않은 무던한 친구들이었다.

송도 해변에서 박거영(朴巨影, 1916-1995) 시인이 운영하는 ‘시인의 집’도 자주 들르던 곳이다. ‘시인의 집’은 좁았지만, 추녀가 넓고 길어서 나 같은 노숙자에겐 안성맞춤이었다. 박 시인은 항상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내가 가면 차 한 잔을 공짜로 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내 얘기를 유난히 재미있어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친구 자취방을 찾기 미안할 때면 ‘시인의 집’ 추녀 아래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여름엔 바닷바람이 더없이 시원했고, 비가 내려도 추녀가 막아 줘 끄떡없었다.

朴巨影 長詩集 [孤獨한 反抗者] 人間社 1958년[초판본] 표지

박 시인은 함경남도(咸鏡南道) 원산(元山) 출신으로 중국 상하이(上海)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해방과 함께 귀국해 ‘시인의 집’을 운영하며 시낭송회와 연구회를 여러 차례 갖고 시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전쟁 끝나고 송도에서 최신식 경양식집을, 서울에서는 출판사를 운영했다는데 그 후 소식을 잘 모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 규모 시 낭독회가 1952년 부산의 이화여대 천막 강당에서 열렸다. 김규동(金奎東, 1925-2011) 시인의 발의와 박 시인의 경비(약 2000만 원) 후원으로 열렸으며 2,000여 청중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쟁통 시민들을 시로 ‘위로’하고 ‘치유’하겠다는 취지였던 것 같다.

잠자리보다 먹거리가 문제였다. 밥을 얻어먹을 만큼 임의로운 친구는 몇 안 됐다. 전쟁 통이라곤 하지만 넉살과 밥을 예사로 바꾸는 건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굶는 데는 내가 선수였다. 굶고 고생하면서 인내심을 배우고 사람이 됐다. 그런 고통과 경험들이 내 예술을 성숙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6·25 전쟁 없었더라면 오늘의 박서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6·25가 아니었다면 내 어릴 적 일본어 별명 ‘요와무시(弱)’처럼 연약하기 그지없는 벌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자주 들르는 곳 중의 하나가 송도에 있는 미군 대공 포대였다. 거기엔 미군이 내다 버린 전투식량인 ‘레이션 박스(Ration Box)’가 숱하게 많았다. 내 능력으론 살 수 없는 캔버스 대신 활용하려고 오며 가며 주워서 대신동 홍대 교실에 쟁여 놓았다. 어느 날 스위스제 GI 시계를 팔아 산 싸구려 오일 컬러로 레이션 박스에 빨간 베레를 쓴 자화상을 그렸다. 서양화과로 전과하고 그린 첫 유화다. 내 보기에도 감정표현이 썩 잘 된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스승 김환기가 거무튀튀한 내 그림을 보고는 “이걸 처음 그렸다고? 이 사람, 천재네. 이제 대가네, 대가!”라고 큰소리로 칭찬하는 게 아닌가. “훌륭한 그림이니 잘 보관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림을 20여 년 잘 보관했으나, 이사하려고 폐지 버릴 때 묻어 나간 것을 알고는 얼마나 상심했는지 모른다. 그 후 폐지 버릴 때는 두 번 세 번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1953년 홍대 미술학부 회화과 교실에서 배형식(사진 오른쪽)과 함께

서울에서도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당시 미대 학생들에겐 오일 컬러와 붓 같은 화구를 넣어 가방처럼 메고 다니는 화구박스 갖는 것이 로망이었다. 값비싼 화구박스를 살 형편이 안 되는 나는 목수에게 송판을 재단해달라고 부탁해서 손수 만들어 썼다. 미군 배낭끈을 멜빵으로 만들고, 철사로 고리 장식을 만들어 달았다. 나는 점심시간이면 그걸 메고 한 학년 후배인 문우식(文友植, 1932-2010, 서양화)과 함께 반도 호텔(지금 롯데호텔 자리) 옆 중국음식점 아서원(雅 園)으로 달려가 미군 얼굴을 드로잉했다. 시간이 많이 드는 초상화는 방학 때만 했다. 연필 드로잉은 한 점에 2달러씩 받았다. 혼자 온 병사보다는 한국 여자와 동행한 병사들이 우쭐한 마음에 한 장씩 주문했다. 문우식은 얼마나 빠른지 내가 두 점해낼 때 3~4점을 완성했다. 거기서 받은 달러를 회현동 달러 시장에서 바꾼 돈으로 미술 안료인 아연화(亞鉛華)를 사고, 동대문 시장에서 독하디독한 됫병 소주와 일명 ‘꿀꿀이죽’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한번은 문우식과 낙원동 낙원다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화구박스와 가방을 들고 다방에 나갔더니 여종업원이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다. 나무 상자에 담배며 은단 라이터 등을 넣어 팔러 다니는 잡상인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막무가내던 여종업원이 문우식 설명을 듣고 입장시켰다. 문우식이 제안했다. 돈이 없으니 《국전》에 냈던 정물을 다방에 걸어두었다가 작품값을 천천히 받아쓰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나는 혹해서 동의했으나 주인이 훗날 다방을 팔고 이사하는 바람에 작품만 잃어버리고 만 일도 있었다.


1953년 종로 장안백화점 뒤 홍익대 미술학부 교실에서 박서보,문우식,김학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