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도망병 10년
1954년 12월 광주 육군보병학교생으로 이수헌과 함께 사격장에서
1954년12월 광주육군보병학교 CSMC 제21기생으로 입대한 제2중대 제3구대생들이 사격장에서
전쟁이 끝나자 우수한 장교 요원 확보문제가 중요 국방 정책과제의 하나로 꼽혔다. 육군사관학교 출신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1954년 정부는 CSMC 제도를 들고 나왔다. 그해 6월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1954년 9월 20일자 《경향신문》에는 ‘대학도특별군사훈련대(大學徒特別軍事訓鍊隊)’라는 이름에 영문약자 ‘C·S·M·C’를 붙였다. 훈련 받을 당시 원어에 대한 설명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1954.07.18 경향신문 3면 사회기사
1954.09.20 경향신문 2면 정치기사
간단히 설명하면 대학 졸업반 학생이 광주 보병학교에서 3개월간의 장교훈련을 받으면 장교 군번을 부여한다. 전쟁이 발발하면 재소집한다. 그 경우 후반기 3개월 과정의 훈련 마치면 정식 장교로 임관한다. 일반병 입소 희망자는 전반기 훈련을 받았으니 추가 훈련 없이 입대 가능하다는 게 당시 들었던 내용이다.
나는 CSMC 21기이다. 21기는 고려대와 홍익대 학생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고려대 친구들이 많다. 61년 파리 청년작가회의에 참석했을 때 나를 헌신적으로 도와준 신영철(申永澈, 1930-2016, 언론인), 박희진(朴喜璡, 1931-2015, 시인), 시사영어사 사장이었던 민영빈(閔泳斌, 1913-2018, 출판인)이 21기 동기다. 내 군번은 0004397. SO군번이라 불리는 장교 군번이다. 상당히 빠른 편이다.
하지만 자유당 정권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졸업식장에서 졸업생들을 마구 잡아간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나는 졸업식 날 미술학과를 대표해서 상을 타기로 예정돼 있었으나 참석을 포기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탈영병, 도망병이 되었다. 소집했는데도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그러나 소집영장이나 요구서를 본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앞의 《경향신문》 기사는 CSMC 1기생(7월12일-9월18일) 졸업식 기사이다. 행사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비롯해 문교장관(李瑄根, 1905-1983) 국방차관(李澔, 1914-97), 육군참모총장(丁一權)에 미8군 사령관(Msxwell Tayler, 1901-1987)이 참석했을 정도로 CSMC는 자유당 정부의 의욕에 찬 제도였으며 기대 또한 보통 크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민들 호응도 높았다.
이 자리에서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으로 이루어진 CSMC 1기생 195명의 일등병에게 군사훈련 수료증이 보병학교 서 준장(徐鍾喆, 1924-2010)이 수여됐다고 기사는 계속된다. 내가 알고 있던 내용과는 차이가 난다.
“(전략) 10주일 전에 입대할 때는 대학생이었던 것이 군사훈련을 마친 10주일 후인 오늘에 에비역 일등병으로 당당히 국군의 한 사람이 되어 재학하던 학교에 국군간부후보생의 자격을 얻어 제각기 돌아가는 것이다.”
위 기사만 종합하면 나는 국군간부후보생 자격을 갖고 있으며 전시에만 소집이 가능하다. CSMC 훈련 종료와 함께 일등병으로 예편하였으므로 탈영과는 무관하다. 입영 훈련 대상이 아니며 소집영장을 제시한 일도 없다.
1955년 3월에 있은 홍익대 졸업식 후 나는 안성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때 어머니가 육군 특무대원들이 들이닥쳐 아들의 행방을 대라며 윽박지르고 갔으니 집에 오지 말라고 하셨다. 5월 이후엔 가두 검색까지 시작됐다.
문제는 정부와 사회 전체가 성실하게 훈련받은 대학생들을 졸지에 도망병으로 만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하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이 자유당 정부의 한계였다. 1956년 6월 23일 《경향신문》 독자 투고 “SO군번에 일언(一言)”에 정확하게 나와 있다.
1956.06.23 경향신문 2면 사회기사
“(전략) 보병학교 교과과정 수료만으로도 예비역 자격이 충분하니 유사시에 한해서만 소집한다고 소위 지식층에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태는 돌변하여 졸업 직전에 영장소동을 일으키어 비난의 소리는 국회를 비롯하여 각계각층에서 비등하고 일시 사회 혼란까지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당국의 무책임한 행위에 대해서도~ (후략)”
5·16 이후 정부는 병역법을 개정하고 병역미필자들을 색출해 병역의무를 마치도록 하는 등 병역 체제 개혁에 나섰으나 근본적인 문제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병역미필자로 지목된 CSMC 도망병들은 집단소송을 벌여 겨우 ‘도망병’ 딱지만 뗀 셈이다. 1954년 훈련시작한 날부터 판결할 때까지 복무한 걸로 계산해 일등병으로 제대시키라는 주문이었다. 나는 1961년 파리에서 돌아와 국방부에 진정서를 제출해 63년인가 64년에 정식으로 예비역 일등병이 되었다. 비로소 자유인이 되었다. 그 사이 나는 가두 검색이 두려워 대로를 활보하지 못하고 도망 다녔다. 그게 10년이다.
8. 도망병 10년
1954년 12월 광주 육군보병학교생으로 이수헌과 함께 사격장에서
1954년12월 광주육군보병학교 CSMC 제21기생으로 입대한 제2중대 제3구대생들이 사격장에서
전쟁이 끝나자 우수한 장교 요원 확보문제가 중요 국방 정책과제의 하나로 꼽혔다. 육군사관학교 출신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1954년 정부는 CSMC 제도를 들고 나왔다. 그해 6월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1954년 9월 20일자 《경향신문》에는 ‘대학도특별군사훈련대(大學徒特別軍事訓鍊隊)’라는 이름에 영문약자 ‘C·S·M·C’를 붙였다. 훈련 받을 당시 원어에 대한 설명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1954.07.18 경향신문 3면 사회기사
1954.09.20 경향신문 2면 정치기사
간단히 설명하면 대학 졸업반 학생이 광주 보병학교에서 3개월간의 장교훈련을 받으면 장교 군번을 부여한다. 전쟁이 발발하면 재소집한다. 그 경우 후반기 3개월 과정의 훈련 마치면 정식 장교로 임관한다. 일반병 입소 희망자는 전반기 훈련을 받았으니 추가 훈련 없이 입대 가능하다는 게 당시 들었던 내용이다.
나는 CSMC 21기이다. 21기는 고려대와 홍익대 학생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고려대 친구들이 많다. 61년 파리 청년작가회의에 참석했을 때 나를 헌신적으로 도와준 신영철(申永澈, 1930-2016, 언론인), 박희진(朴喜璡, 1931-2015, 시인), 시사영어사 사장이었던 민영빈(閔泳斌, 1913-2018, 출판인)이 21기 동기다. 내 군번은 0004397. SO군번이라 불리는 장교 군번이다. 상당히 빠른 편이다.
하지만 자유당 정권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졸업식장에서 졸업생들을 마구 잡아간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나는 졸업식 날 미술학과를 대표해서 상을 타기로 예정돼 있었으나 참석을 포기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탈영병, 도망병이 되었다. 소집했는데도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그러나 소집영장이나 요구서를 본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앞의 《경향신문》 기사는 CSMC 1기생(7월12일-9월18일) 졸업식 기사이다. 행사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비롯해 문교장관(李瑄根, 1905-1983) 국방차관(李澔, 1914-97), 육군참모총장(丁一權)에 미8군 사령관(Msxwell Tayler, 1901-1987)이 참석했을 정도로 CSMC는 자유당 정부의 의욕에 찬 제도였으며 기대 또한 보통 크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민들 호응도 높았다.
이 자리에서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으로 이루어진 CSMC 1기생 195명의 일등병에게 군사훈련 수료증이 보병학교 서 준장(徐鍾喆, 1924-2010)이 수여됐다고 기사는 계속된다. 내가 알고 있던 내용과는 차이가 난다.
“(전략) 10주일 전에 입대할 때는 대학생이었던 것이 군사훈련을 마친 10주일 후인 오늘에 에비역 일등병으로 당당히 국군의 한 사람이 되어 재학하던 학교에 국군간부후보생의 자격을 얻어 제각기 돌아가는 것이다.”
위 기사만 종합하면 나는 국군간부후보생 자격을 갖고 있으며 전시에만 소집이 가능하다. CSMC 훈련 종료와 함께 일등병으로 예편하였으므로 탈영과는 무관하다. 입영 훈련 대상이 아니며 소집영장을 제시한 일도 없다.
1955년 3월에 있은 홍익대 졸업식 후 나는 안성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때 어머니가 육군 특무대원들이 들이닥쳐 아들의 행방을 대라며 윽박지르고 갔으니 집에 오지 말라고 하셨다. 5월 이후엔 가두 검색까지 시작됐다.
문제는 정부와 사회 전체가 성실하게 훈련받은 대학생들을 졸지에 도망병으로 만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하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이 자유당 정부의 한계였다. 1956년 6월 23일 《경향신문》 독자 투고 “SO군번에 일언(一言)”에 정확하게 나와 있다.
1956.06.23 경향신문 2면 사회기사
“(전략) 보병학교 교과과정 수료만으로도 예비역 자격이 충분하니 유사시에 한해서만 소집한다고 소위 지식층에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태는 돌변하여 졸업 직전에 영장소동을 일으키어 비난의 소리는 국회를 비롯하여 각계각층에서 비등하고 일시 사회 혼란까지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당국의 무책임한 행위에 대해서도~ (후략)”
5·16 이후 정부는 병역법을 개정하고 병역미필자들을 색출해 병역의무를 마치도록 하는 등 병역 체제 개혁에 나섰으나 근본적인 문제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병역미필자로 지목된 CSMC 도망병들은 집단소송을 벌여 겨우 ‘도망병’ 딱지만 뗀 셈이다. 1954년 훈련시작한 날부터 판결할 때까지 복무한 걸로 계산해 일등병으로 제대시키라는 주문이었다. 나는 1961년 파리에서 돌아와 국방부에 진정서를 제출해 63년인가 64년에 정식으로 예비역 일등병이 되었다. 비로소 자유인이 되었다. 그 사이 나는 가두 검색이 두려워 대로를 활보하지 못하고 도망 다녔다. 그게 10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