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봉상회화연구소와 ‘안국동파(派)’

1956년 안국동 이봉상회화연구소 옥상에서
그에 앞서 1955년 늦은 봄 어느 날, 홍익대 이봉상(李鳳商, 1916-1976, 서양화) 교수를 명동에서 만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묻기에 “그림만 그리고 산다”고 했더니 내게 부탁을 했다. 처음엔 그가 낸 미술교과서의 판로 개척과 관련한 일인 줄 알았다.
“동덕여대(同德女大) 설립자 중 한 분(李錫九)의 아들로 동덕여대 학사에 관여하고 있는 이능우(李能雨, 1920-2006, 국문학자) 숙명여대 교수가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하니 자네가 한 달 가량 수고 좀 해줄 수 있겠나?”
이능우는 점잖은 선비스타일의 미술애호가였으며 여기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체계적으로 그림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훗날 일요화가회에 나가 활동했으며 전시회를 열기도 했고, 상업화랑을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로 소설을 여러 편 썼다. 동덕여대 재단이사장, 숙명여대 총장, 학술원 회원을 지냈다. 존경할 만한 분이다.
장소는 지금의 관훈동(寬勳洞) 동덕빌딩 뒷마당에 있던 동덕여대 별관 2층이었다. 가보니 큰 방이 두 개 있었다. 무척 탐났다. 나는 거기서 자고, 그림 그리는 한편 젊은 학생들도 가르칠 겸 미술연구소를 만들자고 이봉상에게 건의해 그 이름을 딴 ‘이봉상회화연구소’를 여는 데 성공했다. 이능우 역시 나의 미술수업이 마음에 들었는지 비워달라고 할 때까지 무상으로 쓰라며 흔쾌히 협력했다.
가을부터 학생을 받기 시작했다. 큰 방 하나는 내가 쓰고, 또 한 방은 유화 가르치는 교실로 썼다. 복도를 막아서 교과서 집필 등 시내 나와 상담할 때 사용하라며 이봉상 교수 방도 별도로 만들었다.

1956년 안국동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소문이 금세 났다. 유능한 학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맨 처음 온 학생이 이만익(李滿益, 1938-2012, 서양화)이었다. 경기고(京畿高) 2학년 학생이었다. 그리고 ‘설악산(雪嶽山) 화가’ 김종학(金宗學, 1937- , 서양화). 이만익보다 1년 선배다. 이어 김서봉(金瑞鳳, 1930-2005, 서양화 서예)이 데생을 배우러 왔다. 이봉상과 상의했다. 김서봉이 데생 배우러왔다고는 하나 심심풀이로 온 것 같다. 이미 대학을 졸업(서울대, 1954년)했으니 학생이라기보다는 지도교수가 낫겠다고 해서 데생 지도교수로 모셨다.
김종학과 이만익이 56년, 57년 연거푸 서울대에 입학하면서 연구소의 성가가 더욱 올랐다. 딱딱하고 자질구레한 규칙이나 제한 없이 자유롭게 그리고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에 학생들이 호감을 가졌던 것 같다. 첫 방에서는 내가 수백 호, 수천 호짜리 앵포르멜(Informel) 대작을 한참 할 때였으니 학생들은 늘 출입하면서 추상미술을 직접 몸으로 익힐 수 있었다. 연구소 올 때마다 내 그림은 바뀌었다. 때려 부수고는 다시 그리고, 그런 일을 수없이 되풀이할 때였다. 그들은 그걸 늘 보면서 공부하고 성장했다. 서울대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장면들이고, 볼 수 없는 작품들이었다. 아니 그런 교수들을 볼 수가 없었다.
김종학이 서울대에 입학한 윤명로(尹明老, 1936- , )와 37년 생 동갑내기 김봉태(金鳳台) 방혜자(方惠子) 김재임(金載姙)을 데려 왔다. 또 최관도(崔寬道, 1938- , 서양화)와 이성미(李成美, 1939- , 미술사)도 데려왔다. 회화를 전공한 이성미는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립대와 프린스턴 (Princeton)대학에서 미술사 석사, 박사학위를 하고 덕성여대 교수 및 박물관장, 한국학대학원장을 역임한 원로 미술사학자이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나와 함께 현대미술운동에 앞장섰다.
살면서 갖게 된 나의 신념 중 하나가 “궁핍은 창조의 어머니”다. 그 때도 가난해서 제대로 된 오일 컬러를 사서 쓰지 못했다. 그래서 고안해낸 방법이 을지로에서 값싼 색깔별 안료 가루와 정제되지 않은 린시드 오일(linseed oil), 흰색 용 아연화(亞鉛華, zinc white)를 사다가 창문턱을 팔레트 삼아, 소주병으로 개어 사용하는 것이었다. 쓰기 알맞을 농도로 개서는 빈 콜드크림 병에 담고 건조되지 않도록 물을 부어 갖고 다니며 부족함 없이 사용했다. 연구소에 나오는 학생들도 모두 그랬다. 연구소 바깥, 특히 서울대 측에선 그런 우리를 유별나게 보았는지 ‘안국동파’, 혹은 ‘안국동패거리’라고 불렀다. 그 독특한 물감 탓에 ‘안료파’라는 별명도 따라 다녔다.
안국동 미술연구소는 또 앞으로 이야기할 ‘현대미술가협회’ 회원들의 늘 모이는 ‘기지’노릇을 톡톡히 했다. 평론가와 신문 기자들도 바늘에 실처럼 따라 들렀다. 미술인 외에는 시인들과 교류가 많았다. 문학평론가 이어령(李御寜, 1934- ) 유종호(柳宗鎬, 1935- ) 정창범(鄭昌範, 1932- ), 시인 박희진(朴喜璡, 1931-2015) 성찬경(成賛慶, 1930-2013) 민재식(閔在植, 1932- ) 고은(高恩, 1933- )이 자주 들렀으며, 나는 많은 이들의 평론집이나 시집 표지를 그려주기도 했다.
그 후 이봉상 선생이 나오지 않겠다고 하여 1957년 쯤 ‘서울회화연구소’로 이름을 바꿔 운영하다가 교실을 비워달라는 학교측 요청으로 신설동으로 이전했다. 얼마 후 다시 종로5가로 옮겼다가 모두 닫고 홍릉으로 이사했다. 그렇지만 ‘현대미협’과 서울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60년 미술가협회’의 주요 작가들과의 만남은 모두 안국동 연구소에서 이루어졌다. 이 이야기들은 앞으로 자세히 쓸 것이다.
11. 이봉상회화연구소와 ‘안국동파(派)’
1956년 안국동 이봉상회화연구소 옥상에서
그에 앞서 1955년 늦은 봄 어느 날, 홍익대 이봉상(李鳳商, 1916-1976, 서양화) 교수를 명동에서 만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묻기에 “그림만 그리고 산다”고 했더니 내게 부탁을 했다. 처음엔 그가 낸 미술교과서의 판로 개척과 관련한 일인 줄 알았다.
“동덕여대(同德女大) 설립자 중 한 분(李錫九)의 아들로 동덕여대 학사에 관여하고 있는 이능우(李能雨, 1920-2006, 국문학자) 숙명여대 교수가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하니 자네가 한 달 가량 수고 좀 해줄 수 있겠나?”
이능우는 점잖은 선비스타일의 미술애호가였으며 여기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체계적으로 그림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훗날 일요화가회에 나가 활동했으며 전시회를 열기도 했고, 상업화랑을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로 소설을 여러 편 썼다. 동덕여대 재단이사장, 숙명여대 총장, 학술원 회원을 지냈다. 존경할 만한 분이다.
장소는 지금의 관훈동(寬勳洞) 동덕빌딩 뒷마당에 있던 동덕여대 별관 2층이었다. 가보니 큰 방이 두 개 있었다. 무척 탐났다. 나는 거기서 자고, 그림 그리는 한편 젊은 학생들도 가르칠 겸 미술연구소를 만들자고 이봉상에게 건의해 그 이름을 딴 ‘이봉상회화연구소’를 여는 데 성공했다. 이능우 역시 나의 미술수업이 마음에 들었는지 비워달라고 할 때까지 무상으로 쓰라며 흔쾌히 협력했다.
가을부터 학생을 받기 시작했다. 큰 방 하나는 내가 쓰고, 또 한 방은 유화 가르치는 교실로 썼다. 복도를 막아서 교과서 집필 등 시내 나와 상담할 때 사용하라며 이봉상 교수 방도 별도로 만들었다.
1956년 안국동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소문이 금세 났다. 유능한 학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맨 처음 온 학생이 이만익(李滿益, 1938-2012, 서양화)이었다. 경기고(京畿高) 2학년 학생이었다. 그리고 ‘설악산(雪嶽山) 화가’ 김종학(金宗學, 1937- , 서양화). 이만익보다 1년 선배다. 이어 김서봉(金瑞鳳, 1930-2005, 서양화 서예)이 데생을 배우러 왔다. 이봉상과 상의했다. 김서봉이 데생 배우러왔다고는 하나 심심풀이로 온 것 같다. 이미 대학을 졸업(서울대, 1954년)했으니 학생이라기보다는 지도교수가 낫겠다고 해서 데생 지도교수로 모셨다.
김종학과 이만익이 56년, 57년 연거푸 서울대에 입학하면서 연구소의 성가가 더욱 올랐다. 딱딱하고 자질구레한 규칙이나 제한 없이 자유롭게 그리고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에 학생들이 호감을 가졌던 것 같다. 첫 방에서는 내가 수백 호, 수천 호짜리 앵포르멜(Informel) 대작을 한참 할 때였으니 학생들은 늘 출입하면서 추상미술을 직접 몸으로 익힐 수 있었다. 연구소 올 때마다 내 그림은 바뀌었다. 때려 부수고는 다시 그리고, 그런 일을 수없이 되풀이할 때였다. 그들은 그걸 늘 보면서 공부하고 성장했다. 서울대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장면들이고, 볼 수 없는 작품들이었다. 아니 그런 교수들을 볼 수가 없었다.
김종학이 서울대에 입학한 윤명로(尹明老, 1936- , )와 37년 생 동갑내기 김봉태(金鳳台) 방혜자(方惠子) 김재임(金載姙)을 데려 왔다. 또 최관도(崔寬道, 1938- , 서양화)와 이성미(李成美, 1939- , 미술사)도 데려왔다. 회화를 전공한 이성미는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립대와 프린스턴 (Princeton)대학에서 미술사 석사, 박사학위를 하고 덕성여대 교수 및 박물관장, 한국학대학원장을 역임한 원로 미술사학자이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나와 함께 현대미술운동에 앞장섰다.
살면서 갖게 된 나의 신념 중 하나가 “궁핍은 창조의 어머니”다. 그 때도 가난해서 제대로 된 오일 컬러를 사서 쓰지 못했다. 그래서 고안해낸 방법이 을지로에서 값싼 색깔별 안료 가루와 정제되지 않은 린시드 오일(linseed oil), 흰색 용 아연화(亞鉛華, zinc white)를 사다가 창문턱을 팔레트 삼아, 소주병으로 개어 사용하는 것이었다. 쓰기 알맞을 농도로 개서는 빈 콜드크림 병에 담고 건조되지 않도록 물을 부어 갖고 다니며 부족함 없이 사용했다. 연구소에 나오는 학생들도 모두 그랬다. 연구소 바깥, 특히 서울대 측에선 그런 우리를 유별나게 보았는지 ‘안국동파’, 혹은 ‘안국동패거리’라고 불렀다. 그 독특한 물감 탓에 ‘안료파’라는 별명도 따라 다녔다.
안국동 미술연구소는 또 앞으로 이야기할 ‘현대미술가협회’ 회원들의 늘 모이는 ‘기지’노릇을 톡톡히 했다. 평론가와 신문 기자들도 바늘에 실처럼 따라 들렀다. 미술인 외에는 시인들과 교류가 많았다. 문학평론가 이어령(李御寜, 1934- ) 유종호(柳宗鎬, 1935- ) 정창범(鄭昌範, 1932- ), 시인 박희진(朴喜璡, 1931-2015) 성찬경(成賛慶, 1930-2013) 민재식(閔在植, 1932- ) 고은(高恩, 1933- )이 자주 들렀으며, 나는 많은 이들의 평론집이나 시집 표지를 그려주기도 했다.
그 후 이봉상 선생이 나오지 않겠다고 하여 1957년 쯤 ‘서울회화연구소’로 이름을 바꿔 운영하다가 교실을 비워달라는 학교측 요청으로 신설동으로 이전했다. 얼마 후 다시 종로5가로 옮겼다가 모두 닫고 홍릉으로 이사했다. 그렇지만 ‘현대미협’과 서울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60년 미술가협회’의 주요 작가들과의 만남은 모두 안국동 연구소에서 이루어졌다. 이 이야기들은 앞으로 자세히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