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국전 파동’
장발의 ‘대한미협 접수기도’는 장발의 참모인 장우성(張遇聖, 1912-2005, 한국화)과 김병기(金秉麒, 1916- , 서양화)의 전략이었다고 당시 ‘대한미협’에서는 분석했다. 서울미대에는 1954년부터 4명의 대우조교수가 들어갔다. 부족한 교원을 충원한다는 명목으로 만든 〈대우 교원에 관한 규정〉에 근거하고 있다. 조교수로 대우하면서 촉탁해 1년마다 재임용하며 특정과목을 담당하도록 하는 일종의 강의 교수제도다. 문교부가 임명하는 직제가 아니다. 무대미술 실기를 담당한 김정환(金貞桓, 1911-1973)을 제외한 김병기, 박득순(朴得錞, 1910-1990, 서양화), 장욱진(張旭鎭, 1917-1990, 서양화) 3명은 누가 보아도 서울대 세를 확장하기 위해 예우를 갖춰 영입했다고 봐야한다. 재미있는 것은 장욱진을 한층 더 예우하기 위해 일반실기도 아닌 ‘고등실기’ 담당으로 영입했다는 점이다. 총회 당일 정족수 문제를 이의 제기한 류경채(당시 이화여대 교수)도 훗날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대한미협’과 ‘한국미협’, ‘홍대파’와 ‘서울대파’. 미술계는 양분됐고 《국전》 주도권 다툼은 노골화되었다. 이듬해인 1956년 제5회 《국전》 심사위원 위촉에서 뒤늦게 출범한 ‘한국미협’이 ‘대한미협’보다 많은 수를 차지했다. 이에 《국전》을 주도해온 ‘대한미협’은 문교부 처사에 〈국전 보이콧 성명〉까지 내며 강력 반발했다. 문교부는 《국전》 개막을 연기하며 회원 규모가 절대적으로 큰 ‘대한미협’에 심사위원을 3명 추가토록 해 분규를 봉합했다. 이번에는 ‘한국미협’ 측의 서세옥(徐世鈺, 1929- , 한국화) 김세중(金世中, 1923-1986, 조소) 등 젊은 작가 회원 10여 명이 《국전》 거부 항의시위를 벌였지만 열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그 사이 《국전》 분규는 미술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국회로까지 번졌었다. 당시 좁게는 미술계, 넓게는 대한민국의 역량이었다. 그해 《국전》은 예정보다 한 달 늦은 11월에야 겨우 지각 개막했다.
그 해 《국전》 심사에서도 사달이 났다. 동양화분과에서 변관식(卞寬植, 1899-1976)이 노수현(盧壽鉉, 1899-1978)과 티격태격 입씨름을 하다 일을 저질렀다. 변관식은 《동아일보》에 〈편파적인 심사구성〉이란 글을 쓸 정도로 대한미협 측에 불만을 쌓아왔다. 문교부가 심사위원에게 제공한 점심 냉면을 먹고 나서도 분을 삭이지 못한 변관식이 첫 심사에 들어갔다가 《국전》의 핵심이었던 노수현에게 냉면 놋그릇을 던져 이마를 크게 찢어 놓은 것이다. 1956년 〈국전파동〉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일들이었다.
박수근의 <집> 1953년(제2회 국전 특선) 재질:캔버스에 유채, 80.3×100cm 서울미술관
《국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박수근(朴壽根, 1914-1965, 서양화) 선생에 대한 기억이다. 그는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집〉이란 작품으로 특선했다. 내가 보기엔 거무튀튀하지만 아주 맛깔스러운 작품이었다. 문제는 그걸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독학으로 공부해 원근법도 모르는 작가라고도 했다. 화단을 장악한 주요 심사위원들이 대부분 일본 유학파들이니 박수근을 크게 낮춰본 것임에 틀림없다. 공예적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럼 공예적이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박수근은 바른 말 잘하는 나를 좋아해 동대문 밖 신설동(新設洞) 자택에도 함께 갈 정도였다. 가끔 술자리에 어울려서는 “선생님 작품이 미술대학 나온 사람들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위로 해드리기도 했다.
신작에 대한 얘기도 오갔다. 나는 거무스름한 그림이 좋다. 그러니까 검정톤 그림은 이번 제3회 《국전》에 종전처럼 출품하고 새롭게 시도한 밝은 느낌의 작품은 무감사 출품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했다. 무감사 출품작엔 낙선이 없었다. 내 말을 기꺼이 따라주었다. 하지만 결과는 무감사 〈풍경〉 〈절구〉를 제외하고는 2회 때 특선작 같은 작품들은 모두 낙선했다. 심사위원들이 뒤늦게 ‘낙선 분풀이’를 한 것이다.
박수근은 1957년 제6회 《국전》에 야심작 〈세여인〉을 출품했다가 뜻밖에 낙선했다. 그 충격을 폭음으로 달래려다 간을 크게 다쳤다. 거기에 생활고로 백내장을 제때 수술하지 못해 왼쪽 눈을 실명하기에 이르렀다. 1959년 이후 뒤늦게 국전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이 되어 명예를 다소 회복할 수 있었으나 간염과 신장염이 재발해 65년 끝내 세상을 떴다.
당시 미술계 유일한 등용문인 《국전》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기대를 할 수 없었다. 뜻있는 작가들의 마음에서 《국전》은 멀어지기 시작했다. 선에 들지 못한 작가들이 《낙선전(落選展)》을 열기도 했다. 나 역시 한때는 《국전》을 화단 등단의 창구로 생각했다. 1953년, 1955년 두 번이나 입선해서 호평을 듣고 인정받았던 나였다. 모교 홍익대에서 나를 《국전》 차기 세력으로 키우려 했던 것을 알면서도 《국전》은 내 갈 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홍대파’나 ‘서울대파’ 누가 주도해도 《국전》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그런 제도 속에 안주하면서 우리나라 미술 발전을 가로 막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3. ‘국전 파동’
장발의 ‘대한미협 접수기도’는 장발의 참모인 장우성(張遇聖, 1912-2005, 한국화)과 김병기(金秉麒, 1916- , 서양화)의 전략이었다고 당시 ‘대한미협’에서는 분석했다. 서울미대에는 1954년부터 4명의 대우조교수가 들어갔다. 부족한 교원을 충원한다는 명목으로 만든 〈대우 교원에 관한 규정〉에 근거하고 있다. 조교수로 대우하면서 촉탁해 1년마다 재임용하며 특정과목을 담당하도록 하는 일종의 강의 교수제도다. 문교부가 임명하는 직제가 아니다. 무대미술 실기를 담당한 김정환(金貞桓, 1911-1973)을 제외한 김병기, 박득순(朴得錞, 1910-1990, 서양화), 장욱진(張旭鎭, 1917-1990, 서양화) 3명은 누가 보아도 서울대 세를 확장하기 위해 예우를 갖춰 영입했다고 봐야한다. 재미있는 것은 장욱진을 한층 더 예우하기 위해 일반실기도 아닌 ‘고등실기’ 담당으로 영입했다는 점이다. 총회 당일 정족수 문제를 이의 제기한 류경채(당시 이화여대 교수)도 훗날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대한미협’과 ‘한국미협’, ‘홍대파’와 ‘서울대파’. 미술계는 양분됐고 《국전》 주도권 다툼은 노골화되었다. 이듬해인 1956년 제5회 《국전》 심사위원 위촉에서 뒤늦게 출범한 ‘한국미협’이 ‘대한미협’보다 많은 수를 차지했다. 이에 《국전》을 주도해온 ‘대한미협’은 문교부 처사에 〈국전 보이콧 성명〉까지 내며 강력 반발했다. 문교부는 《국전》 개막을 연기하며 회원 규모가 절대적으로 큰 ‘대한미협’에 심사위원을 3명 추가토록 해 분규를 봉합했다. 이번에는 ‘한국미협’ 측의 서세옥(徐世鈺, 1929- , 한국화) 김세중(金世中, 1923-1986, 조소) 등 젊은 작가 회원 10여 명이 《국전》 거부 항의시위를 벌였지만 열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그 사이 《국전》 분규는 미술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국회로까지 번졌었다. 당시 좁게는 미술계, 넓게는 대한민국의 역량이었다. 그해 《국전》은 예정보다 한 달 늦은 11월에야 겨우 지각 개막했다.
그 해 《국전》 심사에서도 사달이 났다. 동양화분과에서 변관식(卞寬植, 1899-1976)이 노수현(盧壽鉉, 1899-1978)과 티격태격 입씨름을 하다 일을 저질렀다. 변관식은 《동아일보》에 〈편파적인 심사구성〉이란 글을 쓸 정도로 대한미협 측에 불만을 쌓아왔다. 문교부가 심사위원에게 제공한 점심 냉면을 먹고 나서도 분을 삭이지 못한 변관식이 첫 심사에 들어갔다가 《국전》의 핵심이었던 노수현에게 냉면 놋그릇을 던져 이마를 크게 찢어 놓은 것이다. 1956년 〈국전파동〉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일들이었다.
박수근의 <집> 1953년(제2회 국전 특선) 재질:캔버스에 유채, 80.3×100cm 서울미술관
《국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박수근(朴壽根, 1914-1965, 서양화) 선생에 대한 기억이다. 그는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집〉이란 작품으로 특선했다. 내가 보기엔 거무튀튀하지만 아주 맛깔스러운 작품이었다. 문제는 그걸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독학으로 공부해 원근법도 모르는 작가라고도 했다. 화단을 장악한 주요 심사위원들이 대부분 일본 유학파들이니 박수근을 크게 낮춰본 것임에 틀림없다. 공예적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럼 공예적이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박수근은 바른 말 잘하는 나를 좋아해 동대문 밖 신설동(新設洞) 자택에도 함께 갈 정도였다. 가끔 술자리에 어울려서는 “선생님 작품이 미술대학 나온 사람들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위로 해드리기도 했다.
신작에 대한 얘기도 오갔다. 나는 거무스름한 그림이 좋다. 그러니까 검정톤 그림은 이번 제3회 《국전》에 종전처럼 출품하고 새롭게 시도한 밝은 느낌의 작품은 무감사 출품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했다. 무감사 출품작엔 낙선이 없었다. 내 말을 기꺼이 따라주었다. 하지만 결과는 무감사 〈풍경〉 〈절구〉를 제외하고는 2회 때 특선작 같은 작품들은 모두 낙선했다. 심사위원들이 뒤늦게 ‘낙선 분풀이’를 한 것이다.
박수근은 1957년 제6회 《국전》에 야심작 〈세여인〉을 출품했다가 뜻밖에 낙선했다. 그 충격을 폭음으로 달래려다 간을 크게 다쳤다. 거기에 생활고로 백내장을 제때 수술하지 못해 왼쪽 눈을 실명하기에 이르렀다. 1959년 이후 뒤늦게 국전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이 되어 명예를 다소 회복할 수 있었으나 간염과 신장염이 재발해 65년 끝내 세상을 떴다.
당시 미술계 유일한 등용문인 《국전》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기대를 할 수 없었다. 뜻있는 작가들의 마음에서 《국전》은 멀어지기 시작했다. 선에 들지 못한 작가들이 《낙선전(落選展)》을 열기도 했다. 나 역시 한때는 《국전》을 화단 등단의 창구로 생각했다. 1953년, 1955년 두 번이나 입선해서 호평을 듣고 인정받았던 나였다. 모교 홍익대에서 나를 《국전》 차기 세력으로 키우려 했던 것을 알면서도 《국전》은 내 갈 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홍대파’나 ‘서울대파’ 누가 주도해도 《국전》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그런 제도 속에 안주하면서 우리나라 미술 발전을 가로 막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