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젊은 4인이 쏘아 올린 ‘反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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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전 파동이 있은 1956년 《四人展(사인전)》을 연 것은 5월 16~25일 서울 명동(明洞) 동방(東邦)문화회관 3층 화랑이었다. 홍익대 출신인 나와 김영환(金永煥, 1928~2011) 김충선(金忠善, 1925~1994) 문우식 4명이었다. 나는 서양화과 1년 후배인 이들과 국전엔 내지 않되, 단체전을 갖고 우리의 세계를 알려보자고 했고, 넷은 의기투합했다.

 넷이 25점을 걸었다. 나는 〈가두〉 〈얼굴〉 〈영상〉 〈여명〉 등 4점을 냈다. 질식할 것 같은 현실에 대한 저항 심리를 은연중에 내비쳤다. 그림 내용도 남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내려 했다. 여러 차례 바르기로 화면에 층을 만들어 고대 고분벽화(古墳壁畫)와 같은 분위기를 내려 애썼다.

 전시 평을 쓴 한묵(韓黙, 1914~2016, 서양화)이나 정규(鄭圭, 1923~1971, 서양화·판화·도예) 모두 나에게 높은 평점을 주었다. 한묵은 ‘저항’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워 조선일보에 평을 썼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저항인 것이다. 우리는 작품에서 어떤 의상을 걸치고 나왔나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어떤 모양으로 살고 있는가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나타나는 결과보다도 그런 결과를 초래케 한 도정을 살피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술이 지니는 생명은 ‘테크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 있다는 말이 되는가 보다.

 박서보의 예술에는 ‘포에지(Poésie)’가 있었다. 그는 현실을 그린다. 가두에 굴러다니는 시장 인물과 기물(器物)들에 그의 관심이 간다. 그려가는 도정(道程)에서 그도 모르게 모든 형태는 원상(原狀)을 잃고 환상적인 무(無)의 세계로 끌려들어 가고 만다. 회화로서는 위험한 세계이면서 하나의 향기를 발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가두〉와 〈영상〉에서 그 특색이 잘 살아있다고 보았다. 특히 〈영상〉에서는 화면 처리에 참신한 데가 있었다.” (한묵. 〈모색하는 젊은 세대 : 4인전을 보고〉, 조선일보 1956년 5월 24일)

 한묵은 1955년부터 홍대에 강의를 나갔기 때문에 우리를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그는 《4인전》이 열린 그해 가을 이경성(李慶成, 1919~2009, 미술비평), 김영주(金永周, 1920~1995, 서양화), 김중업(金重業, 1922~1988, 건축), 최순우, 정규 등과 함께 ‘한국미술평론가협회’를 발족했다. 김영주가 협회 창립을 비롯해 한 해 미술계를 돌아보는 글을 경향신문(1956년 12월 23일)에 썼다. 글 제목이 〈싹트는 저항 의식과 신인 진출〉일 정도로 그해 《4인전》의 의미를 각별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친김에 이경성이 쓴 〈신인의 발언 : 홍대 출신 4인전 評〉(동아일보 56년 5월 26일)도 읽어 보자. 

 “(…) 서보는 감성적이라기보다 지적 냉철로 대상을 바라다보았으며 화면에서 어느 ‘판타지’를 얻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 그의 문학적인 설화성(說話性) 같은 것은 자칫하면 이론적인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으나 그래도 무엇인지 현대의 그림자를 연상시켜주었다. 강한 개성의 표출에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룬 〈얼굴〉, 현대적 비극의 영상이 비치는 〈여명〉 〈영상〉 같은 것이 인상에 남는다. (하략)”             

 반응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미술 평론가 유서화(劉瑞和)는 몇 년 뒤 “격동기에 처한 당시 20대의 몸부림이었다. 한국에 아방가르드가 탄생하는 우렁찬 발자국이기도 했다”(〈한국 전위 화가론 1, 2〉 《세대》 1962년 3월호)고 평가했다.
전람회의 관심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작품이지만, 전시장 입구에 써 붙인 ‘반국전 선언’에 더 집중되었다. 국전에 반대하거나 대항하는 집단적인 저항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때였기에 그렇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반정부, 반국가 행위쯤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뭇 봉건의 아성인 국전에 반기를 들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형 시각 개발과 아울러 가장 자유로운 창조 활동이 보장되는 명예롭고 혁신된 새 사회를 향해 창조적으로 참여할 것을 다짐한다.”

 선언문은 내가 작성했다. 국전을 식민잔재로 규정하고 사실주의 미학을 거부하며 새로운 미술 운동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내용은 유감스럽게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기록으로 남긴 게 없어서다. 위의 글은 10년쯤 지난 1966년 《공간》 창간호에 내가 체험한 현대미술 이야기를 쓰면서 당시 선언문을 기억나는 대로 옮긴 것이지만, 실제는 그것보다 훨씬 강했던 것 같다. 그때 기록의 중요성을 실감한 나는 이후 홍익대 교수가 되고서 사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카메라를 사들이면서 한때 수집벽에 빠지기도 했다. 그와 함께 내가 보고, 그리고, 겪고 느낀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의 대부분은 그간 써온 일기와 당시 신문기사 같은 공신력 있는 기록물에 내 기억을 더듬어 작성하고 있다. 

 ‘反국전 선언’의 파장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그 폭발력은 우리들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그간 국전에 표출된 불만과 비판과는 차원이 달랐다. 행동으로, 선언으로, 단체의 목소리로 드러난 것은 우리나라 미술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주변에선 우려의 시선이 많았다. 공식적인 출셋길을 스스로 막았기에 우선 그렇다. 불순 세력으로 몰릴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우리를 아끼는 선후배 작가들이나 그 선언이 못마땅한 사람들까지 과연 저들이 무사할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학교 선생님이나 선배들께 일언반구 한마디 없이 일을 저질렀느냐는 지적도 들었다. 의논하고 조언을 얻어 한 일이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공연히 내는 역정이었다. 모교 안팎에서 약간의 마찰과 사소한 다툼은 있었지만,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거기서 용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