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서보는 2022년 (재)광주비엔날레에 미화 100만 달러를 기부하고 그것을 통해 역량있는 작가들을 발굴하여 수상할 수 있도록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을 제정하기로 한다. 이에 광주비엔날레는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지속하여 오던 "눈" 예술상을 개편하여 2023년 제14회 광주비엔날레부터 매 대회때 마다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과 상금 10만 달러를 수여하기로 한다.
  • 루이비통과의 협업으로 Artycapucine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전세계 6명의 작가와 협업하여 200점만을 한정생산하는 루이비통의 아트 프로젝트로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참여하게 된다. 
  • 리졸리(Rizzoli)사의 로자 마리아(Rosa Maria)의 편집으로 『Park Seo-Bo: Écriture』를 출판한다.
  • 10월 22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제19회 문화의 달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한다. 이는 1969년부터 문화예술계의 발전 유공자에게 주어지는 대한민국 최고 영예의 상으로, 박서보가 단색화의 선구자로서 한국미술을 추상화하고 그것을 전세계에 널리 알린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 고향인 예천군이 단색화의 거장의 이름을 딴 공립미술관 설립을 희망하여 "예천군립 박서보미술관" 건립을 위한 미술관 건립 및 작품기증 협약을 체결한다. 2025년 건립을 목표로 한다.  
  •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주관 제40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에서 공헌예술가상을 수상한다. 
  • 미술심리 치료사로 일하는 딸 박승숙이 바라본 아버지 박서보의 삶과 작업은 다룬 책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인물과 사상, 2020)을 출판한다.  
  • 서보미술문화재단에 이어 둘째 아들 박승호와 함께 기지재단(GIZI Foundation)을 설립한다. 연희동에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로 설립된 기지재단의 외관은 박서보의 작품이 드러내는 단순함과 깊이감을 갖추고 미묘한 변화가 드러나는 건축물로 작가의 공기색을 원용한 색채를 띠도록 건축가 조병수에 의해 설계되었다. 기지재단의 설립 목적은 청년 예술가의 발굴 지원을 목적으로 한다. 
  • 대한민국예술원에서 주최하는 제64회 대한민국 예술원상(미술부분)을 수상한다.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박서보의 초기작부터 신작(작품 130여점 및 아카이브 100여점)을 망라하는 대규모 회고전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2019. 5. 18. - 2019. 9. 1.)을 개최하며 단색화의 세계적 열풍 속에서 박서보가 우리미술계와 미술사에 미친 영향 등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기회를 갖는다.  
  • 홍콩 아시아소사이어티(Asia Society)에서 아시아 아츠 게임 체인저 상(Asia Arts Game Changer Award)을 수상한다.
  • 제주도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단 한 점의 작품만 전시하는 일점미술관 설립을 계획하고 건축가 조병수에게 미술관 설계를 의뢰한다.
  • 박서보의 <묘법 No.940770>가 『Art Fundamentals Theory & Practice』(10판, Mcgraw-Hill 출판사, 미국)의 표지화로 실리고 같은 책 131쪽에는 박서보 작업에 대한 논평이 실린다.
  • 런던 메이슨스 야드(Mason's Yard) 화이트큐브갤러리(White Cube Gallery)에서 《Ecriture 1967-1981》(2016. 1. 14. - 3. 12)가 개최된다. 
  •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단색화(DANSAEKHWA)》(2015. 5. 7.- 8. 15, 팔라조 콘타리니 폴리냑(Palazzo Contarini-Polignac))가 열리게 된다. 이 전시들을 눈여겨본 세계 화상들이 박서보에게 러브콜을 하기 시작한다. 
  • 이후 2015년 11월 홍콩 크리스티 이브닝세일에서 <묘법 No.65-75>이 당시 환율 약 13억 9천만 원(940만 홍콩달러)에 낙찰되었고 2016년 런던 메이슨스 야드(Mason's Yard) 화이트큐브갤러리(White Cube Gallery)에서 《박서보: 묘법 (描法) 1967-1981(Park Seo-Bo: Ecriture (描法) 1967-1981)》(2016. 1. 14. - 3. 12) 개인전이 열렸으며 16점의 출품작이 완판되는 쾌거를 이뤘다. 같은 해 4월에는 일본 도쿄갤러리에서 《마음을 비우다: 박서보의 예술(Empty the Mind: The Art of Park Seo-Bo)》(2016. 3. 30. - 5. 14.) 개인전이 개최되었다.
  • 허시혼박물관이 개관 40주년을 맞아 11월 9일 뉴욕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개최한 운영기금 마련 갈라 행사에 초청된다. 스미소니언 재단에서 운영하는 허시혼박물관은 이 행사를 개최하며 현대미술계에서 동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주요 아티스트 40명을 수상자로 선정한다. 척 클로스(Chuck Close),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와 함께 한국 작가로는 박서보와 이우환이 수상하게 된다.
  • 디아미술재단(Dia Art Foundation)이 2015년 11월 8일,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개최한 행사 'Dia Fall Night Honoring Robert Ryman'에 아티스트 커미티(Artist Committee)로 선정되어 초청받는다.
  • 2013년 프리즈 마스터스의 성공을 발판으로 국제갤러리는 윤진섭을 초빙하여 한국 모더니즘의 맥락에서 단색화를 재조명하는 《단색화의 예술》전(2014. 8. 28. - 10. 19)을 마련한다. 이 전시에는 김기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이 참가한다. 국제갤러리는 한국 3대 비엔날레가 동시에 열리는 빅시즌에 맞춰 이 전시의 부대행사로 컨퍼런스를 열게 되는데 구겐하임미술관의 알렉산드라 먼로(Alexandra Munroe),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큐레이터 샘 바르뒬(Sam Bardaouil)과 틸 펠라스(Till Fellrath), 홍콩 엠플러스(M+)의 정도련 등 세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다. 
  • 이후 단색화는 급속도로 해외 곳곳에 퍼지기 시작한다. 미국 뉴욕 알렉산더그레이갤러리(Alexander Gray Associates)에서는 《현대 단색화를 극복하다: 한국 모노크롬 운동(Overcoming the Modern; Dansaekhwa: The Korean Monochrome Movement)》(2014. 2. 19. - 3. 29), 블룸앤포갤러리(Blum & Poe Gallery)에서는 조앤 기(Joan Kee)가 기획한 《모든 측면에서: 추상 속의 단색화(From All Sides: Tansaekhwa on Abstraction)》(2014. 9. 13. - 11. 8)가 열린다. 
  • 또한 같은 해 세계적인 화랑인 갤러리 페로탕(Galerie Perrotin)에서는 김용대가 기획하고 큐레이팅한《묘법(描法)(Ecriture)》(2014. 11. 6. - 12. 20) 개인전이 열린다. 이 전시에서 박서보는 1974년부터 2013년까지 그의 대표작 37점을 전시한다. 김용대는 이 전시에서 “1970년대작 ‘백색 묘법’부터 최근의 색채 작품까지, 자연 채광이 좋은 갤러리의 특성을 살려 배치했다”고 전했다. 이 개인전은 박서보가 국제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한 전시로 평가되고 있다.
  • 2014년 6월 24일 중도일보가 주최하고 이동훈미술상운영위원회와 대전시립미술관이 주관한 제12회 이동훈미술상 본상을 수상한다. 2015년에는 제12회 이동훈미술상 수상작가 초대전 《박서보: 묘법》(2015. 11. 13. - 12. 13)이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 한국 단색화 및 박서보에 대한 세계적인 재평가의 분위기 속에서 박서보의 작품이 엠플러스 미술관, 유즈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2014), 모마 미술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울리 지그 콜렉션, 조제 이코노무 콜렉션 (2015) 등 전세계적인 미술관 및 콜렉션에 소장되기 시작한다.    
  • 2012년 《한국의 단색화》전시를 필두로 2013년 국제갤러리는 프리즈 아트페어(Frieze Art Fair) 마스터스 섹션(Frieze Masters)에서 박서보를 비롯한 하종현, 권영우 등의 단색화 작품들을 세계 시장에 선보인다. 때마침 해외 미술계 유행이 모노크롬으로 향해있던 즈음, 중국, 일본에 비해 저평가된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이 컬렉터들의 눈을 끌게 되면서 출품된 단색화 작품들은 완판 된다.
  • 2월 25일 막내 딸 박승숙 표진웅과 재혼.
  • 2012년 대구미술관과 갤러리신라에서 개인전이 열린다.(《박서보(Park Seo Bo)》(대구미술관, 2012. 3. 6. - 7. 29), 《박서보(Park, Seo-Bo)》(갤러리신라, 2012. 9. 17. - 10. 9))
  • 평론가 윤진섭이 기획한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 Korean Monochrome Painting)》(2012. 3. 17. - 5. 13)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다. 박서보를 비롯한 윤형근, 이우환, 정창섭 등 17명의 전기 단색화 작가와 이강소, 문범 등 14명의 후기 단색화 작가의 작품 150여 점이 소개된다. 
  • 문화체육관광부가 10월 15일 문화의 날을 맞아 예술 발전에 기여한 문화예술인 33명을 포상하는 자리를 마련하는데, 박서보는 이 시상식에서 은관문화훈장(2등급 문화훈장)을 수훈한다.
  • 팔순을 맞는 박서보의  40여 년 작업세계를 조망하며 서울과 부산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잇따라 열린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그의 미술세계의 변천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는 《박서보, 한국 아방가르드의 선구자: 화업 60년》(2010. 12. 11. - 2011. 2. 20), 부산 조현화랑에서는 《박서보 개인전(Park Seo-Bo)》(2010. 12. 11. - 2011. 1. 30), 11월 서울 국제갤러리에서는 근작 대작과 드로잉 50여 점을 선보인 《박서보(Park Seo-Bo)》전(2010. 11. 25. - 2011. 1. 20)이 열린다. 이즈음 박서보는 미술의 치유 기능을 강조하면서 과거의 미술작품이 작가 자신의 주장을 쏟아내는 마당이었다면 현대 사회의 미술작품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안을 얻는 장(場)이자,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빨아들이는 흡인지가 되어 치유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5월 14일 큰 아들 박승조 김은희와 재혼.
  • 2010년 11월 17일 서울가든호텔에서 팔순연이 열린다. 이두식과 김태호가 주축이 되어 마련된 이 행사에는 그의 가족들과 김봉태, 김창열, 박석원, 심문섭, 심선희, 서승원, 진옥선, 정강자, 정경연, 윤명로, 이태현, 최명영, 조순천 등의 동료, 제자, 평론가들이 참석하였다.
  • 3월 20일 석주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석주미술특별상을 수상한다.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립예정지 기무사터에서 열린 《신호탄》(2009. 10. 21. - 12. 6)에 참여한다.
  • 20대때부터 40여 년간 하루에 14시간씩 작업에 매진하던 박서보는 갑작스럽게 뇌경색으로 쓰러진다. 급격히 건강의 악화를 느낀 그는 작업량을 반으로 줄이기로 결심하고 하루에 8시간씩 작업하면서 점차 건강이 호전되기 시작한다.
  • 독립큐레이터 조순천과 미술사학자 바바라 블로밍크(Barbara C. Bloemink)가 공동 저술한 『Empty the Mind: The Art of Park Seo-Bo』가 애슐린(Assouline)에서 출간된다.
  • 미국 뉴욕 아라리오갤러리에서 《Park, Seo Bo: Empty the Mind》(2008. 5. 1. - 5. 31) 개인전이 열린다.
  • 12월 5일 한국미술협회에서 주관하는 2008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에서 2008 대한민국 미술인상을 수상한다.
  • 2007년 3월 제주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2층 규모의 작업실을 완공하고 입주한다. 박서보는 제주도의 작업실을 '쉼터'라고 명하는데, "복잡한 생각들을 버리고 명상하면 그 다음 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곳에서 다양한 에스키스를 하는데 그 가운데 몇몇의 에스키스는 작품 제작까지 이어진다.
  • 경기도미술관에서 《박서보의 오늘, 색을 쓰다》(2007. 5. 11. - 7. 8) 개인전이 열린다. 이 전시에는 2000년대 이후 색을 사용한 묘법시리즈 작업이 대거 출품되어 박서보의 또 다른 시기가 열렸음을 천명한다.
  • 중국 베이징 아라리오갤러리에서 《박서보(朴栖甫)》(2007. 9. 22. - 11. 18) 개인전이 열린다. 
  • 2005년 11월 서보미술문화재단에서 로버트 모건(Robert C. Morgan)과 진행한 인터뷰가 『더 브루클린 레일(The Brooklyn Rail)』 7월호에 실린다.
  • 생테티엔 메트로폴 근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e, Saint-Etienne Métropole)에서  박서보의 드로잉전을 개최한다.(《박서보 개인전(Park, Seo-Bo: Cabinet des Dessins)》(2006. 11. 24. - 2007. 1. 26) ). 당초 미술관은 전시 기획단계에서 박서보의 대표작을 조망할 수 있는 회고전 성격의 전시를 열고자 했으나 파리 화단에서 무명의 한국 작가를 후원할 기업이나 단체를 찾기가 힘들다는 것을 점차 인식하게 된다. 관장으로 있던 로랑 에기(Lóránd Hegyi)는 후원인을 모집하기 위해 프랑스 작가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s) 또는 로만 오팔카(Roman Opalka)와의 2인전을 추진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뜻대로 되지 않는다. 로랑 에기는 고심하던 끝에 저예산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박서보의 드로잉 전시를 기획한다.
  • 샘터화랑에서 《박서보: 묘법(朴栖甫: 描法)》(2005. 7. 1. - 7. 20) 개인전이 열린다.
  • 마니프(MANIF; Manifestation d’Art Nouveau International et Forum) 조직위원회에서 수여하는 제9회 마니프 대상을 수상한다.
  • 10월 14일 큰 형 박원홍(1925–2004) 병환으로 사망.
  • 갤러리크세쥬(Gallery Que Sais Je)에서 신작 소품전인 《박서보 신작 소품展(Park, Seo-Bo: The Small)》(2004. 12. 20. - 2005. 1. 19)가 열린다.
  • 월드컵 개최와 맞물려 이 해에는 총 6번의 박서보 개인전이 열린다. 갤러리현대 《박서보: 묘법(朴栖甫: 描法) 1967-2001》(2002. 3. 20. - 4. 7)에서는 대규모 회고전, 박여숙화랑 《박서보: 묘법(朴栖甫: 描法)》(2002. 4. 2. - 4. 20)에서는 묘법시리즈 신작전, 갤러리세줄 《박서보(朴栖甫):에스키스-드로잉&평면(平面) 1996-2001》(2002. 5. 30. - 7. 31)에서는 월드컵 기념 드로잉 전시, 대구 시공갤러리 《박서보: 묘법(朴栖甫: 描法)》(2002. 9. 10. - 10. 5), 부산 조현화랑에서는 《박서보: 묘법》(2002. 9. 25. 10. 24)과 같은 지방 순회 개인전, 미국 L.A. 렘바 갤러리에서는 《Park, Seo-Bo: New Editions》(2002. 4. 20. - 6. 1) 판화전이 개최되었다.
  • 2001년 11월 20일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박서보의 칠순 및 『에스키스 드로잉(Esquisse-drawing)』 화집 발간 축하연이 열린다. 그는 화집 출판회 답사에서 지난 날 "앞에 가는 똥차 비키시오."라고 선배들을 향해 소리쳤다고 회고하며 이제는 그 말이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온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역사로부터 부채를 져서는 안되며 관 뚜껑에 못질할 때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하면서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며 "자신 있거든 나를 추월해 가시구려."라고 소리쳤다. 
  • 박서보의 칠순을 기념하며 도쿄화랑에서 《박서보(朴栖甫)》(2000. 10. 23. - 11. 11) 개인전이 열린다. 통상적으로 도쿄화랑에서는 박서보의 개인전이 4년에 한번씩 열리는데 2000년에는 칠순기념으로 2년 만에 단풍이 절정인 가을에 개인전을 개최한다. 전시 오픈 후, 박서보는 그의 가족들, 도쿄화랑 대표와 함께 단풍으로 유명한 후쿠시마현(福島県)의 반다이산(磐梯山)을 방문한다. 이 곳에서 그는 형형색색의 단풍을 보며 자연에 완전히 탄복하게 되며, 인간이 감히 위대한 자연에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연의 색을 화면에 그대로 가져와 치유의 도구로 삼고자 함으로써 화면은 색채의 향연을 구가하게 된다. 
  • 2월 22일 홍익대학교 명예미술학 박사학위를 수여받는다.
  • 1월 22일 막내딸 박승숙이 손녀 로이나 보웬 출산.
  • 박서보는 제1회 자랑스러운 미술인상에서 창작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어 상을 수여받는다. 이 상은 한국미술협회가 미술인의 창작의지 고취와 미술문화 발전에 공헌한 미술인과 사회 각 층에서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인사를 찾아 그 공로를 치하하고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 대구 시공갤러리와 갤러리신라 두 곳에서 1975년부터 근작까지 박서보의 작품 흐름을 볼 수 있는 회고전 성격의 개인전이 열린다. 시공갤러리 《박서보(朴栖甫)》(1999. 3. 18. - 4. 10) 개인전에서는 전·후기 묘법을, 갤러리신라 《Park, Seo-Bo: Drawings and Paintings- Recent Works》 개인전에서는 에스키스 후기 묘법 작품들을 선보인다. 같은 해 9월 부산 조현화랑에서도 《박서보: 묘법 1974-1996(朴栖甫: 描法 1974-1986)》(1999. 9. 3. - 9. 22) 개인전이 열린다.
  • 일본 도쿄화랑에서 《박서보(朴栖甫)》(1998. 4. 6. - 4. 26)이 열린다. 
  • 3월 27일 막내딸 박승숙 영국인 스티브 보웬과 결혼.
  • 1월 27일 어머니 남기매 (1907-1997) 사망.
  • 1997년 3월 5일 홍익대학교 교수 정년퇴임후, 4월 15일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서보미술문화재단 건물에 작업실을 마련하여 정착하게 된다. 건축가 이현재가 설계한 이 건물은 천장에 이중유리를 끼워 햇빛이 자연스럽게 실내로 들어오게 하여 자연 채광에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며 8m가 넘는 건물의 층고는 1,000호 이상의 대작을 제작하거나 전시하는데도 손색이 없도록 설계되었다.
  • 입체판화공정을 이용한 믹소그라피아(Mixografia) 기법을 시도한 작업을 렘바갤러리(Remba Gallery)  《박서보: 묘법(Park, Seo-Bo "Ecriture")》(1997. 1. 9. - 3. 1) 개인전에서 선보인다. 같은 해 3월에는 시공갤러리 《박서보 판화전(朴栖甫 版畵展)》(1997. 3. 28. - 4. 10), 4월에는 홍익대학교 정년퇴임을 기념하며 갤러리현대에서 근작들을 중심으로 《박서보(朴栖甫)》(1997. 4. 1. - 4. 15) 개인전을 연다.
  • 에이스갤러리(Ace Gallery)에서 《박서보 개인전(Park Seo-Bo)》(1997. 9. 29. - 11. 30)이 열린다. 500호 10여 점을 비롯하여 200호가 넘는 대작들을 중심으로 총 40여 점의 작품들이 전시된다. 9월 29일 오프닝 행사에는 사물놀이와 민속춤의 축하공연이 있었는데 이는 한국문화원측에서 후원한 것이었다.
  • 1997년 8월 보울링그린주립대학교 출판사(Bowling Green State University Press)에서 발간한 대학교재 『Art Fundamentals Theory & Practice』 중  6장 텍스처(texture) 부문에 <묘법 No.931215> 작품이 수록된다.
  • 10월 박여숙화랑에서 《박서보(朴栖甫) 1995-1996》(1997. 10. 21. - 10. 31) 개인전을 연다.
  • 1996년 대구 시공갤러리(《박서보(朴栖甫)》, 1996. 2. 27. - 3. 23)와 부산 조현화랑(《박서보(朴栖甫)》, 1996. 4. 2. - 4. 22)에서 개인전을 연다. 이 개인전들은 1994년 12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1년에 걸친 투병 끝에 마련한 재기전으로 출품작은 대부분 1995년 봄부터 강행군으로 완성된 근작으로 이루어졌다.
  • 경기도 안성 작업실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을 마치고 안성에서 보관 중이던 100-1000호의 작품 300여 점이 불타 소실된다. 결국 박서보는 안성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서울 서교동으로 작업실을 옮겨 서울에서 작업하기 시작한다.
  • 1996년 박서보는 박여숙화랑과 《바젤아트페어(Basel Art Fair)》(1996. 6. 12. - 6. 17), 조현화랑과 《FIAC '96》(1996. 10. 2. - 10. 7)에 참여하는 등 국제 아트페어에 활발하게 진출한다. 이 가운데 23회를 맞이한 《FIAC '96》은 1996년을 ‘한국의 해’로 정함에 따라, 한국의 15개 화랑, 35명 작가가 대거 참여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한국 미술의 세계시장 진출의 발판이 마련되기 시작한다.
  • 홍익대학교 교수로 30여 년간 재임하면서 후진들의 미술교육에 힘쓴 박서보는 1996년 11월 8일 홍익대학교 와우관 세미나실에서 열린 정년퇴임 기념 「현대미술과 나」 강연에서 자신의 인생과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회고하는 시간을 가진다.
  • 1948년 제정되어 1994년 44회를 맞는 서울시 문화상은 문화예술 진흥에 기여한 인사들에게 주는 상으로 43회까지 480여 명이 수상했다. 박서보는 1995년 10월 1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44회 서울시 문화상 시상식에서 미술부문 문화상을 수상한다. 
  • 1990년대 초반 작가는 이전시기 화면의 지그재그 묘법에서 참선의 선긋기 방식으로 이행하기 시작한다. 지그재그식 후기 묘법의 착상과 방법론을 계승하고 있지만 한층 절제되고 금욕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텍스처의 응축과 교직이 줄어든 반면, 수직적 패턴의 전면성과 반복성은 엄격성을 더하고 있다. 흑색톤으로 통일된 색조 역시 수사적인 경건함과 엄숙함을 발산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검은색이 아니라 주변의 빛과 공기를 흡수하는 심연처럼 깊은 정신성의 세계로 다가온다. 이처럼 정신성을 지향하며 중도와 수신의 색으로 선택한 검정색은 단일한 색이 아닌 자연으로부터 오랜 세월을 두고 쌓여온 깊이있는 색인데, 이러한 이유로 박서보의 이 시기 검정은 검은데 검지 않고 흰데 희지 않은 자연의 색이다. 
  • 박서보는 묘법시리즈의 또 다른 변신을 꾀하며 1994년 박영덕화랑(現 BHAK)에서 1994년 11월 7일부터 19일까지 화업 40년을 결산하는 《박서보(Park, Seo-Bo)》전을 개최한다. 
  • 박서보는 한국현대미술의 가치정립과 국제화를 기치로 내걸고 1994년 재단법인 서보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한다. 경기도 안성군 보개면 기좌리 5천여 평에 재단부설 미술관을 설립하고 5백여 평의 전시공간과 작품보존실, 자료실, 휴게 및 숙박시설을 갖추고자 인공화랑 황현욱, 건축사 박현기가 설계 작업에 들어갔다. 박서보는 그간 수집해온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 170여 점을 재단에 기증하고 모아둔 전시인쇄물, 사진 등 귀한 사료를 재단에 보관하였다. 또한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아시아 현대미술 작가들과 국제적인 교류를 통해 현대미술의 정수를 집약하고자하는 등 많은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1996년 3월 안성 한서당에 화재가 발생하고 안성에서의 모든 생활을 서울로 옮기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 일본 도쿄화랑에서 《박서보(朴栖甫)》(1994. 1. 17. - 2. 5) 개인전이 열린다.
  • 1994년 10월 20일 문예진흥원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문화훈장 시상식에서 문화훈장(옥관)을 수훈한다.
  • 10월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렘바갤러리(Remba Gallery)와 11월 박영덕화랑에서 개인전 《박서보》(렘바갤러리, 1994. 10. 29. - 12. 3; 박영덕화랑, 1994. 11. 7. - 11. 19)가 열린다. 이 전시에는 후기 묘법 시리즈 회화 작품과 L.A.에 있는 판화공방 믹소그라피아(Mixografia)에서 요철이 가능하도록 특수 제작한 판화를 선보인다. 판화전문 렘바갤러리 대표 루이스 렘바(Luis Remba)가 동판과 석판 등 여러 질감의 기법을 섞어 발명해낸 이 판화기법은 입체작품들을 주물로 떠내듯 복제하는 것으로, 회화에서 찾을 수 없는 표현방식을 지니고 있어 주목을 받았다.
  • 서세옥 선생과 저녁 먹고 새벽에 들어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간다. 삼성의료원에서 수술.
  • 일본 미야기현미술관(宮城県美術館)에서 우리나라 회화와 조각의 흐름을 단적으로 소개하는 《한국·현대미술의 12인(韓國·現代美術の 12人)》(1993. 7. 24. - 9. 15)이 열린다. 미야기현미술관 초대전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전시에는 박서보, 윤형근, 정창섭, 하종현, 김태호, 서승원, 심문섭, 이강소, 이동엽, 이명미, 정경연, 최명영이 참여하였다. 이 전시는 한 작가당 18-25m2 정도의 전시 공간을 할애하여 초기 작업부터 근작까지의 대표작을 소개하면서 특정작가들의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 한국 나비스 화랑 김성희의 노력으로 1992년 4월 테이트 리버풀(Tate Gallery Liverpool), 6월 바비칸센터(Barbican Centre)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영국에 소개하고 양국의 미술교류에 물꼬를 트는 기회의 장이 마련된다. 바비칸센터에서 개최된 《한국에서 온 물결전(A Wave from Korea)》(1992. 6. 22. - 7. 24)에는 이강소, 이대원, 하종현, 황용엽이 참여한다. 영국 테이트 리버풀 전시에는 박서보를 비롯하여 김창열, 정창섭, 이강소, 이우환, 윤형근이 참여하였다. 당시 테이트 리버풀 관장으로 있던 루이스 빅스(Lewis Biggs)는 전시 준비차 1991년 6월, 1992년 1월 두 차례 한국을 방한하여 작가들의 아틀리에에서 출품작을 선정하는데 이때 출품작 10여 점을 선정한다. 당시 박서보는 그에게 "철저하게 자연의 한 부분으로써 살기를 원한다"고 작품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이후 《자연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 속에 깃든 전통정신(Working with Nature: Traditional Thought in Contemporary Art from Korea)》(1992. 4. 8. - 6. 21)이라는 제목으로 전시가 열리며 한국 현대미술은 국제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한다. 
  • 1월 11일 큰 아들 박승조에게서 손녀 박정원 탄생.
  •  2월 15일 둘째 아들 박승호에게서 손자 박지환 탄생.
  • 그의 회갑을 맞이하며 국립현대미술관과 두손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앵포르멜 시기 작품부터 1990년대 후기 묘법 시리즈까지 그의 대표작 120여 점을 망라한 대규모 회고전 《박서보 회화 40년》(1991. 10. 25. - 11. 24) 전시가 개최된다. 두손갤러리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1년까지의 후기 묘법 시리즈 《박서보: 근작전》(1991. 10. 23. - 11. 5)이 열린다. 미네무라 도시아키(峯村敏明)는 "구미의 근대회화와는 다른 문맥으로 출발한 아시아 제국의 현대회화"로서 "더 한층 우리의 정신의 갈망에 대응하는" 작품세계를 박서보가 만들어내고 있다며 그의 후기 묘법세계를 극찬한다.1 이 시기 박서보는 갤러리현대에서 두손갤러리로 전속화랑을 옮기는데, 두손갤러리에서는 박서보의 개인전을 맞아 『아트 인 아메리카(Art in America)』와 『아트 포럼(Art Forum)』에 광고를 싣는다. 때마침 이를 보고 박서보 작품에 감명받은 에이스갤러리(Ace Gallery)의 설립자 더글라스 크리스마스(Douglas Chrismas)는 두손갤러리에 연락하여 박서보와의 만남을 약속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두손갤러리의 경영부실로 갤러리가 문을 닫게 되자 그와 연락이 끊긴다. 이후 우여곡절 속에 박서보의 제자 조숙진, 이수현 등의 도움을 받아 더글라스와 연락이 닿게 된 박서보는 1997년 에이스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된다. 
  • 또한 부산의 갤러리월드와 갤러리공간(現 공간화랑)에서도 그의 회갑을 맞이하여 《박서보》(1991. 12. 5. - 12. 12) 개인전이 열린다.



1. 미네무라 도시아키(峯村敏明)[미네무라 도시아끼], ⌜중단과 잠복(潛伏)⌟, 『박서보: 근작전 브로셔』(1991. 1. 31), p. 7-11.

  • 박서보는 이해 서초동에 신축된 법원 신청사에 대형 벽화작업을 진행한다. 윤명로, 이종상, 이만익, 민경갑과 함께 참여한 이 프로젝트에 박서보는 검찰청 1층 로비 왼쪽에 300x680cm 크기의 묘법을 제작한다. 한편, 1989년을 전후하여 박서보는 무채색의 화면에서 벗어나 바탕에 원색을 사용하여 이랑의 무채색과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작업이나 화면의 색감이 밝아지는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이전시기까지 무채색 위주의 작업에 천착하던 것에서 벗어나 새롭게 색채의 실험기를 거친다.  
  •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하며 프랑스 퐁피두센터를 포함한 4개의 기관에서 대규모 단체전이 열린다. 퐁피두센터와 파리시립근대미술관 국립조형예술센터에는 백남준, 아랍문화센터에는 이우환, 파리아트센터에는 문신, 박서보가 참여한다. 파리아트센터에서 열린 《Revolution: Flash Back》(1989. 7. 11. - 8. 26)에는 건축, 홀로그래피, 회화, 사진, 조각, 텍스타일 6개 분야에 전세계 대표작가 24명이 참여하였는데 박서보는 이 전시에 3점으로 구성된 1,500호(300.5x684cm) 가량의  <묘법 No.890530>(아카이브 공식명칭: <묘법 No.890530-1>, <묘법 No.890530-2>, <묘법 No.890530-3>)을 출품한다. 현재 이 세트 중 한 점은 2014년 파리에서 열린 갤러리 페로탕(Galerie Perrotin) 개인전에 출품된 후 해당 갤러리에 소장되었고, 다른 한 점은 유즈재단(Yuz Foundation) 설립자 부디 텍(余德耀, Budi Tek), 또 다른 한 점은 작가가 소장하고 있다. 
  • 로스앤젤레스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제4회 국제현대아트페어: ART LA 89》(1989. 12. 7. - 12. 11) 진화랑 부스에 참여한다. 이 행사에서 진화랑은 기존에 선보였던 단체전 형식에서 벗어나 한 작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자했는데 그 첫 단추가 박서보였다. 미국에서의 그의 첫 개인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행사에서 박서보는 <묘법> 시리즈 10여 점을 출품하게 된다.   



  • 《제43회 베니스비엔날레(Esposizione Internazionale d'arte La Biennale de Venezia)》 이탈리아 국제관 특별전에 초청을 받아 참여한다. 박서보는 이 전시를 둘러보던 당시 총감독 지오반니(Giovanni Carandente)에게 비엔날레 정원에 위치한 국가관 중 일본관 옆에 한국관을 건립해달라고 부탁한다.
  •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을 기념하며 로이드 신 화랑(Lloyd Shin Gallery, 대표: 신길균)이 주관한 올림픽 아트 판화 및 포스터 제작에 참여한다. 이 작업에는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짐 다인(Jim Dine),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 밈모 팔라디노(Mimmo Paladino) 등 국외 작가 19명과 김기창, 남관, 박서보, 김창열, 이반을 포함한 국내 작가 5명이 참여했다. 한국의 5명의 작가들은 3개월간 미국 시카고 랜드펄(Landfall) 판화공방에 3개월간 머무르며 작품을 제작했다. 제작된 포스터와 판화는 국외 순회전을 하며 서울올림픽을 세계에 홍보하였다. 하지만 당초 예정된 100여 개국의 순회전은 예산이 부족하여 난항을 겪었고 세계적인 작가를 선정하고도 짧은 제작기간으로 말미암아 작가의 역량에 제대로 발휘되지 못해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한편, 정부는 88 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치루고자하는 목적으로 막대한 예산을 들여 《세계현대미술제(Olympiad of Art)》(1988. 8. 17. - 10. 5)를 개최한다. 《세계현대미술제》는 《세계현대회화전(Exhibition of Olympic Painting)》(1988. 8. 17. - 10. 5,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세계야외조각심포지엄(Symposium of Olympic Sculpture)》(1988. 3. 11. - 4. 30, 올림픽공원), 《세계야외조각전(Open Air Sculpture Exhibition)》(1988. 9. 10. - 10. 5, 올림픽공원)으로 나뉘어 전시된다. 서울올림픽을 맞이하여 준비된 이 행사는 세계 작가들과 한국 작가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명분으로 마련되었다. 《세계현대회화전》에 박서보는 <묘법 No.57-84>, <묘법 No.390-86>, <묘법 No.105-87>, <묘법 No.871230>, <묘법 No.870907>, <묘법 No.1-85>를 출품한다. 한편, 세계현대미술제의 참여작가의 명단이 발표되자 한국화 작가들과 구상계열 및 민중미술계열 작가들이 소외되었다는 이유로 선정에 대한 이의 제기가 속출하기도 하였다.이 중 특히, 역대 최대의 예산이 투여된 대대적인 행사로 올림픽 조각공원의 틀을 마련한 《국제야외조각 초대전》의 경우, 사전에 충분한 검토없이 졸속으로 이루어져 많은 문제들을 남기는 한편 공공미술과 관련한 화두가 미술계에서 전격적으로 논의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 갤러리현대에서 《박서보》(1988. 11. 21. - 11. 30) 개인전이 열린다. 1970년대 캔버스 작업에서 1980년대 종이작업으로 실험을 거듭해온 박서보는 이 전시에서 캔버스에 유채와 연필 드로잉, 한지에 수성물감과 연필 드로잉을 종합하고 다양한 색채를 사용한 작품 30여 점을 선보인다. 


  • 1987년 도야마현립근대미술관(現 도먀아현립미술관)에서 열린 《제3회 도야마국제현대미술전(第三回富山國際現代美術展)》(1987. 7. 4. - 9. 3)에 참여한다. 1981년 처음 개최된 이래, 매 3년마다 열려 1987년 3회를 맞은 《도야마국제현대미술전》에는 미국, 캐나다, 한국, 일본 4개국의 22인 작가 71점 작품이 출품되었다. 한국섹션에는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었던 이경성이 커미셔너를 맡았으며 정경연, 하종현, 황주리, 박권수, 박서보, 심문섭 6명의 작가가 참여하였다. 박서보는 같은 해 7월 5일, 전시연계강연회 《도야마에서의 또 하나의 발언(富山發: もうひとつの發言)》에서 「한국의 현대미술: 70년대의 한지를 중심으로(韓國の現代美術: 70年代の韓紙を中心に)」을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한다. 이 전시를 계기로 도야마현립근대미술관은 박서보의 작품 <묘법 No.390-86>을 소장하게 된다. 
  • 대구 인공갤러리에서 《박서보 묘법(描法)전》(1987. 5. 29. - 6. 12)이 열린다.
  • 1987년 로스앤젤레스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제2회 국제현대아트페어: ART LA 87)》(1987. 12. 10. - 12. 14)에 한국 화랑을 대표하여 선화랑, 진화랑, 갤러리현대가 처음으로 참가한다. 이 세 곳의 화랑은 한국 갤러리의 국제교류시대를 여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 중 남관, 서세옥, 이우환 등과 함께 진화랑 부스에 참여한 박서보는 <묘법 No.354-86>을 미국에서 개최되는 국제아트페어에 처음으로 선보인다.
  • 1987년도 12월 8일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주최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제1회 예총예술문화대상식에서 미술부문 예술문화대상을 수상한다. 
  • 도쿄화랑에서 《박서보(朴栖甫)》전(1986. 6. 16. - 6. 28)이 열린다. 이 전시에는 1985년을 전후하여 드러나기 시작하는 짧게 끊어진 선의 묶음이 일정한 방향성을 드러내는 작업들이 출품된다. 한지의 발견 후 전기 묘법시기의 호흡이 긴 지속적인 드로잉이 짧게 토막진 반복적인 획선으로 변화된다. 작품의 서포트는 캔버스, 그 위에 세네 겹의 한지를 배접하고, 수성 페인트로 채색한 후, 그린다는 행위의 물리적 궤적이 화면 전체를 덮는다. 그 궤적은 그대로 회화적 마티에르로 화면에 지그재그의 형태로 정착되며, 그 결과 화면은 방향성과 리듬성, 역동성을 드러낸다. 즉, 바탕의 종이와 그 위에 콜라주된 소단위의 종이가 하나의 표면으로 통합되며, 한지 특유의 텍스쳐와 거기에 각인된 손의 움직임이 완전히 일체화되어 드러난다.
  • 1986년부터 1990년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교 학장을 역임하면서 입학제도의 개혁, 전공 학과로의 분리, 판화과와 예술학과 신설, 미술학 박사과정 신설 등을 이뤄낸다. 특히 미술대학 내에 이론과로서의 예술학과 신설은 이후 우리나라 미술계에 초창기 큐레이터 양성을 위한 인큐베이터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박서보는 미술대학교 학장을 지내면서 정작 안성 작업실을 돌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도난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고 앵포르멜 시기 작품과 80호 이하 소품 수십 점이 사라지게 된다. 1990년 11월에는 앵포르멜 시기 작품과 그의 화실 안에 있던 조선시대 민화 10여 점, 신라시대 토기 5점이 도난당하기도 한다. 다행히 도난당한 앵포르멜 시기 10여 점은 극적으로 되찾아 1991년 10월에 개최된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에 출품한다.
  • 이낙스갤러리(伊奈畵廊)에서 《박서보전: 종이작업(朴栖甫展: 紙の仕事)》(1985. 7. 3. - 7. 29)이 열린다. 이 전시를 통해 박서보는 화면 위에서 자신의 행위가 이미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의 순수성에 의해 화면의 물성과 합일되는 경지를 구현하고 있다.
  • 1985년부터 1987년까지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원장을 역임한다. 이 보직때문에 박서보는 쉬는 날 없이 원장실 자리를 지켜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그러던 중 합정동의 옛집을 처분하고 동교동에 새집을 마련하면서 지하실에 아틀리에를 만든다. 하지만 지하실의 천정고가 낮아 대작 제작이 어렵게 되자 아틀리에의 바닥을 파내는 공사를 하여 1986년 6월에 열릴 도쿄화랑 개인전에 출품할 작품들을 제작한다.
  • 1984년 5월 워커힐미술관(초대관장: 이경성)이 개관기념전으로 《60년대의 한국현대미술: 앵포르멜과 그 주변》(1984. 5. 20. - 7. 15, 워커힐미술관)을 개최하며 미술사를 정리, 안착시키는 작업을 시작한다. 워커힐미술관은 이후 굵직한 국내외 작가 초대전 및 미술사를 갈음하는 전시들을 기획하며 1980-90년대 우리 화단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 타이페이시립미술관(台北市立美術館)의 요청으로 박서보가 기획한 《한국현대미술전: 70년대의 조류(韓國現代美術展—七十年代之潮流)》(1984. 5. 1. - 6. 24)전이 개최된다. 이 전시에는 한국화가를 포함한 56명의 작가가 참여하였다.
  • 12월 5일, 교육문화발전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국민훈장(석류장)을 수훈한다.
  • 국내 화랑 최초로 진화랑이 《FIAC》에 가입하게되면서 김기린, 남관, 박서보, 이종학, 이우환, 오세열, 류경채, 황주리 등이 《FIAC '84》(1984. 10. 20. - 10. 28, 파리 그랑팔레(Grand Palais))에 참가한다. 당시 박서보는 <묘법 No.42-78-79-82>을 출품한다. FIAC과 같은 국제적인 규모와 수준의 미술시장에 우리 화단이 정식으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의미와 함께 한국 현대미술의 국제무대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자극제가 되었다.


촬영: 김우일 

  • 일본 교토(京都)의 박물관, 미술관, 화랑 등 30여 곳에서 종이와 관련된 전시회, 회의가 개최된다. 《현대(現代)∙종이의 조형(造形): <한국(韓國)과 일본(日本)>전(展)》 이 교토시쿄세라미술관(1983. 2. 21.- 3. 6)과 사이타마현립근대미술관(1983. 4. 2. - 6. 7)에서 열리고 《'83 국제종이회의(國際紙会議, IPC '83)》(1983. 2. 16. - 2. 21)가 개최된다. 이 국제행사 가운데 2월 21일 '현대조형과 종이'라는 주제로 분과회의가 열리는데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이다 쇼이치(井田照一), 박서보가 각국의 대표 패널로 참여한다. 박서보는 이 자리에서 종이작품 제작과정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일반적으로 서양의 종이는 가해진 행위의 신체성을 드러내는데 반해 동양의 종이, 특히 한지는 행위를 흡수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행위와 물성을 일체화하는데 가장 적합한 전달매체라고 주장한다. 한지의 사용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신체성은 곧 1970년대 우리나라의 미술양식의 중요특질이기도 하다. 한편, 이 회의에서는 각국의 전통적인 종이 제작의 역사는 물론 그 특징들이 논의되는 한편, 실제 중국, 일본, 이탈리아, 미국, 한국 등의 전통 종이제작 방식이 시연되기도 하는데, 여기에 우리나라에서는 김영연과 장광선의 시연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특히, 이 회의에 참여하여 시연을 보였던 종이장인 김영연은 강원도 원주에서 한지를 제조하는 전문가로 이후 박서보의 한지작업과 관련한 많은 조언은 물론 재료를 제공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대규모 국제행사였던 이 회의와 관련하여 당시 일본의 신문과 잡지들은 종이를 예술의 새로운 미디어로 특필하고 있다. 
  • 공간미술관(現 공간화랑)에서 《박서보(朴栖甫) 종이와 묘법전(描法展)》(1983. 4. 8. - 4. 18)이 열린다. 당시 박서보는 김영연에게 특별 주문한 닥종이를 니코틴으로 처리한 뒤, 이를 다시 물 속에 담가 작업재료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이 시기의 작업은 니코틴 특유의 자연에서 우러난 갈색이 주조를 이루며, 용액의 농도에 따라 검기에 차이를 보이게 된다. 한편 『공간』 잡지에서는 당시 국제종이회의의 참관 및 박서보의 개인전을 맞아 「〔특집: 박서보〕 박서보의 묘법 (1967-1983)」이라는 50여 쪽에 달하는 특별 기획기사를 통해 박서보 묘법의 탄생과 한지 사용까지의 전개과정을 대대적으로 조명한다.
  • 타이페이의 스프링갤러리(春之畵廊)에서 《신서울화파대전-종이와 형태 특별전(新漢城畵派大展-紙與造形專題)》(1983. 8. 16. - 8. 24)전이 열렸다. 또한 타이페이 일화랑(一畵廊)에서는 《한국전위창작7인전(韓國前衛創作七人展)》(1983. 11. 22. - 12. 4) 전시가 개최되었으며 박서보, 정창섭, 최명영, 김형대, 서승원, 김태호, 이두식이 참여하였다.






  • 《현대(現代)∙종이의 조형(造形): <한국(韓國)과 일본(日本)>전(展)》(1982. 12. 13. - 12. 27, 국립현대미술관)에 일본작가 30명, 한국작가 32명이 참여한다. 박서보는 평론가 이경성과 함께 이 전시를 기획하며 '종이'가 갖는 물성에 대해 많은 것을 공부하게 되고 처음으로 한지를 이용한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된다. 
  • 이후 기존의 <묘법>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병행하면서 한지 작업을 안성 작업실에서 연마하고, 4년여 년간의 축적된 경험으로 1986년에 한지를 이용한 대작을 선보인다. 당시 한지에 대한 관심은 70년대 중반 이후 국내적으로는 드로잉에 대한 관심의 고조, 국제적으로는 쉬포르 쉬르파스(Supports/Surfaces)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움직임이며, 이후 우리화단에 한지와 종이를 이용한 작품들이 대거 유행하는 계기가 된다.  이전 시기 박서보는 두텁게 칠해진 백색의 유채 모노크롬 캔버스에 연필을 이용한 일종의 회화적 드로잉을 시도하였다면, 이러한 동향 속에서 박서보는 80년대 초반 한지를 작업에 적극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작가는 캔버스 위에 여러 겹의 한지를 올린 후, 그 위에 수성안료를 사용하여 적셔 한지가 마르기 전에 화면 위에 행위를 쌓아올리는 작업으로 진행해 나아간다. 박서보는 점차 종이작업에 중점을 두면서, 종이 특유의 재료로서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화면에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그 결과 한지는 단순한 바탕이나 하나의 서포트가 아니라 화가의 행위와 일체화되는 구조로서의 마티에르로 변화하게 된다.
  • 단색화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지속적으로 증대되어 1980년대에도 대형기획전이 꾸준히 개최된다. 1982년에는 교토시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의 위상》(1982. 3. 22. - 3. 28), 1983년 6-12월까지 도쿄도미술관(東京都美術館, 1983. 6. 11. - 7. 10), 도치기현립미술관(栃木県立美術館, 1983. 7. 17. - 8. 14),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國立國際美術館, 1983. 8. 20. - 9. 25), 홋카이도근대미술관(北海道立近代美術館, 1983. 10. 29. - 11. 20), 후쿠오카시미술관(福岡市美術館, 1983. 12. 8. - 12. 27) 등 일본 내 5개 지역 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전: 70년대 후반·하나의 양상(韓國現代美術展: 70年代後半·ひとつの様相)》 순회전이 열린다. 한일문화교류사업의 일환으로 문예진흥원과 일본 국제교류기금이 공동주최한 이 순회전은 그동안 도쿄를 중심으로 소개되던 한국미술을 일본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에서의 호평은 국내에서 단색화의 지속적인 번성을 보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박서보는 이 전시에서 <묘법 No. 42-78-79-82>, <묘법 No.105-79-82-83>, <묘법 No.10-79-83>을 출품하였다. 이 가운데 <묘법 No.105-79-82-83>은 전시 이후 도쿄도미술관에서 구입했으며, 현재는 이관되어 도쿄도현대미술관(東京都現代美術館, MOT)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전시는 또한 문예진흥원 미술회관(現 아르코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전: 70년대 후반·하나의 양상(様相)-귀국전》(1984. 2. 3. - 2. 12)이라는 이름으로 귀국보고전이 열린다.




  • 유년시절을 보내던 경기도 안성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퇴계 이황의 한서암(寒棲菴)에 기인하여 한서당(寒栖堂)이라 명명한다. 박서보는 1980년 신군부의 위수령과 더불어 안성으로 칩거하게 된다. 한서당 서쪽은 작업실로, 가운데 방은 그림을 쌓아놓는 창고로, 동쪽은 침실, 부엌, 화장실, 거실로 꾸며 그동안 모아두었던 반닫이와 골동품으로 장식했다. 안성 작업실의 높은 천장과 자연채광은 한지작업의 밑거름이 되었는데, 이러한 작업환경은 작가로 하여금 자연의 색을 더욱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게 한다.
  •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현대화랑(現 갤러리현대)은 한국화, 구상 회화뿐만 아니라 1976년에 김창열, 1978년에 이우환과 같은 단색화 화가들의 개인전을 유치하게 되는데 박서보 역시도 이에 합류하여 1981년 현대화랑에서 1976년 이후 5년만에 《박서보》(1981. 11. 3. - 11. 9) 개인전을 열고 <묘법>시리즈 40여 점을 선보인다. 이처럼 단색화 작가들은 상업화랑의 개인전에 본격적으로 초대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모습을 보인다. 작가별 개인전이 꾸준히 개최되는 가운데, 단색화는 여러 해외전과 국제전에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로 지속적으로 소개되면서 안정적인 단계로 이행된다.  또한 한국 경제성장과 더불어 아파트의 보급과 서구식 주거환경의 도입으로 대중들의 미술 작품의 취향도 변화함에 따라 추상미술은 미술시장에서도 각광받게 된다. 
  • 《한국판화·드로잉대전》(1980. 8. 19. - 9. 4, 국립현대미술관)에 <묘법 No.100-80>을 출품한다.  이 해에 《국전》이 민간에 이양되어 체제개선을 시도하나 결국 유야무야된채 1980년 《국전》은 종전대로 치루어진다. 이와 더불어 미협총회 이후 다양한 경향들이 표현되기 시작하며 70년대 후반 민전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던 구상회화 경향이 좀더 확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 《제11회 파리비엔날레》(1980. 9. 20. - 11. 2) 커미셔너로 선정되어 박현기, 정찬승, 형진식, 김장섭, 김용진 등 5명의 작가를 한국대표로 선정한다.
  • 후쿠오카시는 문화교류의 본산으로서 역사를 되살린다는 취지하에 시립미술관을 건립하고 일련의 아시아미술에 대해 2차례에 걸친 기획전을 추진한다. 1979년 《아시아미술전》과 1980년《아시아현대미술전》이 그 결과였다. 1979년 《아시아미술전》은 인도, 중국, 일본의 전통미술이 근대화되면서 미술의 변용이 어떠한 방식으로 독자성을 유지, 발전하였는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다. 1980년 《아시아현대미술전》은 스리랑카, 인도, 네팔, 일본 등 아시아 13개국의 현대미술 현황을 점검하고 지역 간의 교류와 이해를 기저에 두고 아시아 지역에서 서구미술의 영향문제, 독자적인 미술문화 형성의 문제 등 아시아라고 하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현대미술을 다각도로 검토하고자 했다. 《아시아현대미술전(Asian Artists Exhibition Part 2: Festival: Contemporary Asian Art Show, 1980)》(1980. 11. 1. - 11. 30, 후쿠오카시미술관)에 박서보는 한국관 커미셔너로 참여하였다. 한국관에는 김기린, 김창열, 박서보, 서승원, 윤형근, 이동엽, 이우환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으며 어떤 하나의 색채를 지니고 있는 통일성 면에서 단연 뛰어났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집단적 개성의 추구로 인해 개별성의 약화를 초래하였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게 된다. 결국 한국관은 전시기획자 아오끼 히데(靑木秀)가 이 전시를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정신성 짙은 전통문화 재인식, 재흡수"에 부합하는 전통의 자각과 아시아 미술에 있어서 서구미술 영향의 극복과 독자적인 미술문화 형성의 한 전형을 제시했다.1



1. 아오끼 히데, "《아시아현대미술전》에 붙여", 『한국 현대미술 다시 읽기 III』 (오상길 엮음) Vol. 1, ICAS, 2003, pp. 157-159; 권영진, "1970년대 한국 단색조 회화 운동", 국내박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14, p. 100에서 재인용.

  • 박서보는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한국미술대상전의 운영위원장을 맡아 한국미술대상전의 체제를 개편함으로써 새롭게 다가온 민전시대를 확고히 한다. 한국일보는 이 해에 새롭게 총커미셔너 제도를 신설하여 이일 교수를 위촉하고, 1979년 한국미술대상전의 테마로 "방법론으로의 미술"을 제시한다. 민전을 기반으로 한 이러한 활발한 활동은 바야흐로 민전의 시대가 개막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테마로 제기된 방법론으로의 미술은 기존의 단색화에 대한 인식의 확장에 따른 것이자 다른 한편 반성적 고찰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방법론이란 양식, 형식, 기법, 재료상의 문제와 발상 등 미술이념의 설정과 그 실현에 관련된 작업상의 전체적인 문제를 가리킨다. 이는 모더니즘의 패러다임을 벗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現 아르코미술관)의 개관기념전으로 개최된 《신축개관기념전 한국미술: 오늘의 방법》(1979. 5. 21. - 6. 10)전을 통해 예술을 아우르는 철학과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반영되어 드러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새로운 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게한다.
  • 10월 20일 문화공보부 주최 제11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미술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 1978년 도쿄화랑에서 《박서보》(1978. 6. 5. - 6. 17) 개인전이 열린다. 나카하라 유스케는 "박서보의 선은 부피, 조밀, 방향과 움직임에 변화가 있기는 하되 연필에 의한 선묘가 그의 작품을 결정짓는 요소"라면서 "그 선이 그어짐으로써 물감의 면 그 자체가 새롭게 형성되고 또 다시 그 면은 선묘의 바탕이 아니라 선과 일체화된 것으로 드러난다"고 평한다. 또한 박서보 작품의 특징이 "드로잉과 페인팅 사이에서 기묘한 균형"을 이루는 양의성이라고 평가한다. 이 전시에는 <묘법 No.3-78>, <묘법 No.5-78>, <묘법 No.41-75>, <묘법 No.10-78>, <묘법 No.34-77>, <묘법 No.6-78> 등이 출품된다.
  • 미술계는 《국전》에 대한 개혁, 민전시대의 개막 등, 새로운 변혁의 바람이 부는 가운데 미술사를 정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개진된다. 1978년 하반기에 개최된 전시로 《서양화 1950년대 회고전》(1978. 11. 1. - 11. 13, 문화화랑)과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1978. 11. 3. - 11. 12, 국립현대미술관)이 그러한 움직임을 대변한다. 이중,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은 1957년을 전후하여 시작되었다고 평가되는 한국현대미술 운동의 파장을 그 시대의 대표적인 그룹 중심으로 미술사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한 전시로, 6.25 이후 새롭게 대두된 세대에 의한 추상미술운동을 집대성하였다. 이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미술협회의 주최로 개최된다. 이 전시에 박서보는 제1부에는 원형질 시리즈 <원형질 No.3-62>을 비롯하여 6점, 제2부에 유전질 시리즈 <유전질 No.1-68-A>을 비롯한 6점, 제4부에 <묘법 No.3-77>을 포함한 3점을 출품한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사를 1957-1965년 뜨거운 추상운동의 태동과 전개(현대미협, 60년 미협, 악뛰엘 등을 포함하는 앵포르멜기), 이후 1966-1970년 차가운 추상의 대두와 회화 이후의 실험(오리진, 논꼴, 무동인 등을 포함하는 기하학적 추상), 세번째로는 1969-1975년 개념예술의 태동과 예술개념의 정립기(A.G., S.T. 등을 포함하는 실험미술) 그리고 마지막으로 1970-1977년 탈이미지와 평면의 회화화(앙데빵당, 에꼴 드 서울 등을 포함하는 단색화의 시기)로 구분한 이 방식은 이후 한국 현대미술사 기술의 근거를 제시한다. 한편, 이러한 시기 구분은 "창조의 정신을 메마르게 하는 기존 가치관에 대한 집단적 항거운동"이라는 준거틀에 의한다.1
  • 1978년 파리 그랑팔레(Galeries Nationales du Grand Palais)에서 《제2회 국제현대미술전: 한국 9인의 작가(Secondes Rencontres Internationales D'art Contemporain: Corée 9 Peintres)》(1978. 11. 9. - 1979. 1. 29)전이 열린다. 이 국제전은 프랑스 외무성 산하 프랑스예술활동협회(AFAA)가 주관한 것으로 한국을 비롯한 튀니지, 시리아, 그리스, 베네수엘라 등 5개국이 초청된다. 한국에서는 김환기, 권영우, 류경채, 박서보, 변종하, 심문섭, 윤형근, 이우환, 하종현 총 9명이 참여했으며 작품 27점을 출품한다. 박서보는 <묘법 No.41-78>, <묘법 No.45-78>, <묘법 No.55-78>을 출품한다. 당시, 단색화 중심으로 구성된 이 국제전을 두고 조선일보 파리주재 특파원 신용석은 편파적인 작가선정의 문제를 지적하며, 작품 자체가 천편일률적이며 서구흉내만 낸 전시라고 혹평한다. 이에 대응하여 박서보, 하종현 등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언론에 반론을 연속적으로 게재하고, 이후 현지 특파원의 반론이 다시 『조선일보』에 실리면서 국제전 출품을 둘러싼 논쟁이 수개월 동안 지속된다. 이 논쟁으로 국제전 출품작가 선정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한국적 추상 양식이라는 평판을 구축하며 국제미술계에 진출해오던 단색화는 이 사건으로 타격을 받게 되며, 높아진 비판적 분위기를 타고 『공간』(1979년 4월호)지는 「그랑팔레전 그 세평과 시비와 문제점」이라는 특별기사를 게재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이후 우리화단에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는데, 국제전 출품과 관련된 파벌의 문제, 작가선정이 비평가나 큐레이터에 의해 이루어지진 않고 있다는 점, 미술비평이 전문화되지 못한 점 등 당시 미술계가 안고 있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역할을 담당한다. 더 나아가, 보다 직접적으로는 국제전 참여 작가선정에 대한 개선의 움직임이 일어 작가선정에 있어 작가가 관여하는 것을 막는 동시에 박서보 개인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1980년 4월 제11대 한국미협 이사장 선거에서 반(反) 박서보 세력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1. 김용익, 「한국현대미술(韓國現代美術)의 아방가르드: '한국현대미술20년의 동향전(動向展)'과 더불어 본 그 궤적(軌跡)」, 『공간』, 1979. 1., pp. 53-59.

  • 1977년에 이르러 박서보는 '흰 그림'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소박한 자연관을 개입시킨다. 그가 새롭게 첨언한 '흰 그림'과 소박한 자연관의 관계는 당시 문화계에서 무수히 논의되고 있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의 민예미로 대변되는 소박한 자연관과 백색 미학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 사이 박서보가 작품에 대해 인식하는 틀이 변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한국·5인의 작가: 다섯가지 흰색》(1975)을 주최한 도쿄화랑 야마모토 다카시 사장이 한국의 미를 바라보는 관점과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결국 박서보는 예술창작을 내면적 수양의 과정으로 승화시키는 특유의 미학을 통해 서구의 모노크롬과의 변별력을 확보하게 된다.
  • 1975년 개최된 《에꼴 드 서울》 창립전은 다양한 경향의 현대미술 작품이 선보였던데 반해, 3회전에 이르면 특색이 확연히 드러난다. 《제3회 에꼴 드 서울》(1977. 6. 25. - 6. 30, 국립현대미술관)에는 김기린, 김진석, 김창열, 박서보, 서승원, 윤형근, 이우환 등을 포함한 3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하였는데, 대부분의 출품작이 단색화였다. 한편, 에꼴 드 서울은 1976년 운영위원과 커미셔너제를 도입한다. 하지만 전문적인 운영체제를 갖추기보다 박서보와 뜻을 같이 하는 몇몇 작가들에 의한 협의체로 확대되는데 그치고 만다. 즉, 1975년 박서보가 개인 자격으로 창설한 에꼴 드 서울은 이후에도 초대작가를 겸했던 운영위원과 커미셔너들이 자신과 주변 작가들을 초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양상을 보이며, 결국 1996년 서보미술문화재단으로 운영권이 이관되었다가 2000년에는 자진해산을 선언하게 된다.
  • 1977년 8월 도쿄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현대미술의 단면(韓國·現代美術の断面)》(1977. 8. 16. - 8. 28)전을 준비하고 있던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가 내한했다. 그는 《제3회 에꼴 드 서울》전을 참관하고 작가들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하여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 초대작가를 선정했다. 그 결과 곽인식, 권영우, 김구림, 김기린, 김용익, 김진석, 김창열, 박서보, 박장년, 서승원, 심문섭, 윤형근, 이강소, 이동엽, 이상남, 이승조, 이우환, 진옥선, 최병소가 참여하게 된다. 이 가운데 몇몇 작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3회 에꼴 드 서울》에 참여한 작가들이었다. 《에꼴 드 서울》이 단색화의 장(場)으로 변모되는 시점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일본에 소개하는 전시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일은 《한국·현대미술의 단면》 리뷰에서 이 전시의 참여 작가들을 “70년대의 작가들”로 분류하였고 오광수는 “모노크롬은 1970년대 초 몇몇 작가들의 작품 속에 산재하다가 1977년에 오면 하나의 거대한 연대형식으로 떠오른 양상이 된다”고 정리했다. 이 시점부터 단색화는 명실상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경향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러한 집단화 경향 뒤에는 미술 행정가로서의 박서보의 노력이 있었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1977. 8. 23, 이미지 반전되어 실림)에서는 당시 전시에 출품했던 박서보의 <묘법 No.24-76>이  대작은 아니지만 그의 묘법 제작기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업으로 설명하고 있다.
  • 박서보는 1977-1980년까지 미협 이사장으로 재직함에 따라,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렸던 국제전 참여와 관련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미협의 이사진은 직접 참여보다는 참여 작가의 선정권을 가지며, 작가선정은 《앙데빵당》에 참여한 작가 중에서 선정한다는 것이 그것이다.1 또한, 박서보는 《국전》에 반대하는 개인적인 입장과는 달리 미협의 임원진이 된 이후에는 미협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1974년 《제23회 국전》(1974. 5. 2. - 5. 31, 국립현대미술관)에 <묘법 No.60-73>를 출품, 1976년 《제25회 국전》(1976. 5. 3. - 5. 31, 국립현대미술관)에 <묘법 No.3-74> 또는 <묘법 No.12-74>(연구팀 작품제목: <묘법 No.12-74(묘법 No.72-74)>)를 출품하는가 하면, 1977년 《제26회 국전》(1977. 9. 30. - 10. 31)에 추천작가로 <묘법 No.40-77>(1977)를 출품한다. 특히, 《제26회 국전》에는 박서보 이외에 정영렬, 김영중, 조용익, 최명영 등 비구상계열 작가들이 대거 진입하여 수상하게 된다. 한편 회화 및 조각부문의 구상, 비구상을 가을로 모으고, 서예, 공예, 사진, 건축을 봄 국전으로 모은 《국전》 개편은 봄 국전이 외면당하자 다시금 개편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한다. 이처럼 해마다 《국전》체제의 재검토에 대한 의견이 대두되자 지방지인 『전남매일』 신문이 전국적인 규모의 민전을 개최하였고, 또 78년부터는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서도 민전개최를 서두르기 시작함으로써, 서서히 관전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10대 이사장을 역임한 박서보는 1980년 4월 제11대 이사장 선거에 재출마한다. 당시 단색화의 북유럽 순회전을 계획하고 있던 그에게 재임은 반드시 필요한 관문이었지만, 화단의 지나친 세력화, 획일화 현상을 견제한 반(反) 박서보 세력의 결집에 부딪혀 연임에 실패한다. 제11대 미협 이사장에는 반(反) 박서보 세력이 지지한 김영중 후보가 당선된다. 이로써 미협의 제도적 지원을 받던 단색화의 공식적 번성기는 일단락된다. 또한 유사한 시기인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박서보는 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 박서보는 현대미술의 중앙집권화 현상을 극복하고 미술문화중심지의 다변화를 촉진하기 위해 전국 도청 소재지 등을 돌며 강연회를 갖고 지역 작가들과 만나 대화, 설득하며 현대미술의 지역 확산운동을 위해 힘쓴다. 각 지역 도시가 주체적으로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일련의 사업들을 자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때 능동적인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례로 박서보는 1977년 10월 22일 한국미술협회 군산지부에서 주최한 「현대미술 세미나」 특강에서 '현대미술은 어디까지 왔나: 현대미술의 현시점에서의 방향'을 주제로 쉬지 않고 6시간 동안 강연을 하며 현대미술 확산운동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여러 지역 도시에서 현대미술운동이 확산되었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문화구조가 다변화되면서 문화연방체제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서울 및 지방 현대미술제( [예] 대구현대미술제(1977년 3회), 강원현대미술제(1977년 1회 및 2회), 광주현대미술제(1977년 2회), 부산현대미술제(1978년 2회) 등)와 같이 중앙과 지방의 현대미술의 격차를 없애고, 보다 넓은 현대미술의 광장을 마련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현대미술의 지방 확산을 모토로 만들어진 일련의 전시들과 연계 선상에 있다. 
  • 《제3회 서울현대미술제》(1977. 12. 8. - 12. 18, 국립현대미술관)에 운영위원이자 출품작가로 참여한다.  이 전시의 브로슈어에는 박서보의 <묘법 No.41-77>의 도판과 작품정보가 실려있으나, 실제 출품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1.「미협 새 이사장 박서보씨: "활발한 국제전 참가·창작분위기 조성위해 힘쓰겠다"」,『중앙일보』, 1977. 3. 28)


  • 9월 통인화랑에서 《박서보의 회화: 손의 여행기》(1976. 9. 1. - 9. 30) 개인전이 열린다. 일본에 체류하면서 활동하던 미국인 평론가 조셉 러브(Joseph Love)는 평론을 통해 박서보의 회화가 동양화가가 걸어간 자리 하나하나를 빼놓지 않고 동일한 감정을 가지고 손으로 표현하여 청화백자와 같이 심오한 공간을 이루는 동시에 두께를 느낄 수 없이 안착된 공간을 만든다고 하며 그의 작품을 "손의 여행기(Travel Diary of the Hand)"라고 명명한다. 이 전시에는 <묘법(描法)> 초창기부터 1976년까지의 작품 29점이 출품되었다.  
  • 1976년 10월 6일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창립 10주년 기념사업으로 1975년에 제정된 이래 2회를 맞이하는 중앙문화대상 시상식에서 박서보는 예술부문의 장려상(대상 없음)을 수상한다.  
  • 박서보는 1976년 말에서 1977년 2월까지 파리에서 3개월간 체재한다. 이 시기 동안 그는 기존에 사용하던 캔버스라는 지지대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신문지에 <묘법>을 제작한다. 당시 김창열 역시도 신문지에 <물방울> 연작을 제작하던 때로 50년대 후반 이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두 작가의 영향관계를 살필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신문지 위에 행한 <묘법> 작업은 그가 이 시리즈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던 물아일체의 세계와 부합되지 않고 잠깐 동안의 실험으로 그치고 만다.    
  • 아름화랑에서 열린 《추상작가에 의한 구상작품전》(1975. 3. 20. - 3. 31)에 박서보가 유학시절 그린 <파리 풍경> 3점이 출품되어 오광수로부터 구성력과 회화적 분위기 등이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출품된 <파리 풍경> 3점은 박서보가 파리 유학 당시 아들 승조의 우유값을 벌기 위해 그렸던 구상 작업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작품은 확인되지 않는다. 
  • 1970년 겨울 문을 연 명동화랑은 이후 5년 동안 명동, 충무로, 안국동으로 장소를 옮기면서 해외 유명작가의 판화전은 물론 《한국현대미술(韓國現代美術) 1957-1972: 추상(抽象)=상황(狀況), 조형(造形)과 반조형(反造形)》 등과 같은 대규모 기획전을 개최하였다. 이와 더불어 작품이 팔리지 않아 화랑가에서 외면당하던 비구상의 젊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을 전폭지원하는가 하면, 조각가 권진규를 도와 3회에 걸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미술문화 발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결국 도산하게 되고, 이후 작가들이 유지를 모아 도산 7개월 만에 명동화랑 재개를 위해 《명동화랑 40인전》을 개최하는데, 박서보 역시 참여한다.
  • 1963년 《제7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7명의 작가를 처음 참가시킨 이후, 조각가 김정숙이 커미셔너를 맡은 《제13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은 17명 작가의 49점 회화와 조각을 출품한다. 박서보는 이 전시에 <묘법 No.60-73>, <묘법 No.9-73>, <묘법 No.3-74>, <묘법 No.59-74>, <묘법 No.64-74>을 출품한다.
  • 한일 교류전의 성격을 띈 《한국·5인의 작가 다섯가지 흰색》(1975. 5. 6. - 5. 24)이 도쿄화랑에서 열린다. 한국측에서는 이일, 도쿄화랑측에서는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가 이 전시의 커미셔너로 활동하면서 박서보, 허황, 이동엽, 권영우, 서승원을 출품작가로 선정한다. 이 전시는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서 뽑은 ‘1975년 일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 베스트 5’에 선정되기도 하는 등 일본화단에서 호평을 받는다. 전시를 주최하고 기획한 도쿄화랑 야마모토 다카시 사장은 이에 용기를 얻어 박서보에게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을 제안하게 되며, 그 결과 1977년 도쿄센트럴미술관에서 전시(1977. 8. 16. - 8. 28)가 개최된다. 한국에서는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의 교류전으로 1981년 《일본현대미술전》(1981. 11. 6. - 11. 23, 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이 열린다. 《한국·5인의 작가 다섯가지 흰색》은 우리화단에서 진행되고 있는 움직임을 철저히 일본인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전시였다. 이 전시를 주최한 야마모토 사장은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한 해에도 서너 차례 한국에 건너와, 한국의 도자기, 민화, 목가구, 초상화 등 고미술품과 청전(靑田) 이상범, 소정(小亭) 변관식 등 한국 근대 동양화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구입해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야마모토 사장은 한국 사람들이 흰색에 대해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그러한 감각이 이조백자에서부터 현대미술에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한국·5인의 작가 다섯가지 흰색》 개최로 이어지며, 이 전시를 통해 백색이라고 하는 색채감각이 우리나라 전통과 연계되어 재논의되기 시작한다. 한국 현대미술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해외전으로 기록된 이 전시를 계기로 단색화는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한국미술에 있어 ‘흰색’이 조형적 요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정서와 민족적 색채를 대변하는 것으로 공식화된다.
  • 《한국·5인의 작가 다섯가지 흰색》 전시 2달 후인 7월 《에꼴 드 서울》 창립전이 개최된다. 에꼴 드 서울은 단순한 전시나 친목단체를 넘어 "전통을 재발견"하고 "시대성에 대해 고찰"하며, 이러한 이념에 부합하는 작가들을 선정하여 "가치관의 집대성화"를 지향하며 창설되었다. 특히, 에꼴 드 서울은 한국 작가들의 해외 프로모션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작가선정에서부터 모든 것을 박서보가 주도한다. 당시, 작가들은 해외 프로모션을 위해 각자 분담하는 방식으로 브로슈어를 제작하여 해외에 송부하기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에꼴 드 서울》 창립전(1975. 7. 30. - 8. 5)은 24명 작가의 입체와 설치작품을 비롯하여 다양한 경향을 망라하고 있으나, 평면회화가 다수를 차지했다. 박서보는 이 전시에 <묘법 No.10-75>, <묘법 No.22-75>(전시 출품작 출처: 《에꼴·드·서울, 1975》 창립전 도록, 1975), <묘법(描法) No.26-75>, <묘법(描法) No.27-75>(전시 출품작 출처: 작품 뒷면 작가의 기록)을 출품한다. 이후 1994년까지 지속된 에꼴 드 서울은 '집단개성주의, 엘리트주의, 미술 화단의 획일화·단순화 현상을 일으킨 집단'이라는 비판과 함께 소위 한국의 모노크롬이라고 불리는 '단색화'를 견인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단체로 평가받는다. 
  • 서울현대미술제가 발족되고 3년이 지난 1975년 12월이 되어서야 박서보의 주도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제1회 서울현대미술제(Seoul Contemporary Art Festival)》(1975. 12. 16. - 12. 22)가 열린다. “모든 창조적 현대미술인이 참여하는 공동의 광장”을 만든다는 취지 아래 윤형근, 박서보, 하인두, 정영렬, 최대섭, 최기원, 김구림, 이승조, 심문섭, 이강소가 운영위원을 맡았으며 작가들의 응모를 받아 총 100여 명의 작가들이 참여한다. 이후 박서보는 현대미술의 저변확대를 위해 중앙에 집중되어 있는 미술문화를 지역으로 확산시키고자 부산, 대구, 광주, 전주, 군산에 현대미술제 설립을 주도한다. 1975년에는 처음으로 《에꼴 드 서울》, 《앙데빵당》, 《서울현대미술제》가 잇달아 개최됨으로써 박서보의 한국 현대미술 토착화를 위한 3대 미술운동 '발굴, 확산, 집약’의 체제가 확립된다.
  • 1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2회 앙데빵당》(1974. 12. 20. - 12. 26)의 전시를 관람하기 위하여 일본에서 세키네 노부오(関根伸夫),  조셉 러브(Joseph Love)가 내한한다. 박서보는 이 시기 깊어진 전통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한국을 찾는 외국 미술인들에게 한국의 전통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한국의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경주의 석굴암, 불국사 등의 유적지를 방문할 수 있게 주선한다. 이를 위해 박서보는 《앙데빵당》과 《현대미술제》 또는 《에꼴 드 서울》의 전시 개막일을 일주일 간격으로 붙여놓아 국외의 평론가 및 미술 관계자들이 이 전시들을 모두 관람하고 돌아갈 수 있게 안배하였다. 즉, 전시 폐막 즈음에 도착하여 전시를 보고, 다음 전시 개최까지 남는 시간에 경주 등의 국내 유적지를 방문하게 하여 한국의 전통미와 정신을 느낄 수 있게 함으로써 한국 전통으로부터 내려온 자연관을 비롯해 국내 작가들 작품의 독자성과 정신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문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이를 토대로 국외에 작품들을 소개하여 그들과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1974년 《앙데빵당》을 계기로 방문한 이들 인사들은 박서보, 심문섭, 이우환과 함께 경주를 방문하여 석굴암, 불국사 등의 유적지를 방문한 뒤 일본으로 돌아간다. 조셉 러브는 『Art International』에 이 경험을 기고했으며1 이 글은 『홍대학보』에 번역되어 게재된다.2 미술협회 주최로 열린 《제2회 앙데빵당》에 박서보는 <묘법 No.59-74>(현재 통용되는 작품제목: <묘법 No.59-74-77>, 2015년 MoMA 소장), <묘법 No.64-74>를 출품한다.
  • 1975년 《제13회 상파울루비엔날레》 한국대표로 선정되며, 《제9회 카뉴국제회화제》(1977)에 박서보는 <묘법 No.11-77>, <묘법 No.12-77>, <묘법 No.20-77>, <묘법 No.21-77>을 출품한다.
  • 《국전》에 반대하며 아방가르드 운동을 펼치던 박서보는 《제23회 국전》(1974. 5. 2. - 5. 31, 국립현대미술관) 서양화부에 참여한다. 1974년 《국전》은 기존의 《국전》을 4부로 분리하고, 각각의 부에 대통령상을 신설하였으며, 봄 가을로 《국전》을 개최하는 한편 《국전》에 반대하던 재야작가를 추천작가로 적극 끌어들여 개혁을 모색한 때였다. 《국전》의 이러한 제도개혁은 이전 《국전》이 8개 분야를 종합하여 최고상인 대통령상이나 기타 입상작을 선정함으로써, 그 과정에서 잡음이 있었던 것을 불식하기 위한 것으로, 이러한 개혁을 통해 미술계를 통합하고자 하는 취지였다. 당시 미협의 간부였던 박서보는 이러한 정부의 시책에 따라 미술계 통합이란 차원에서 《국전》에 <묘법 No.60-73>을 출품하게 된다. 이후 박서보는 《제25회 국전》(1976. 5. 3. - 5. 31, 국립현대미술관), 《제26회 국전》 (1977. 9. 30. - 10. 31, 국립현대미술관)에 출품하게 된다.



1. Joseph Love, “The Roots of Korea’s Avant-Garde Art,” Art International, vol. xix/ 6, (June 15, 1975), pp. 30~32, 35.

2. 임정숙 역,「번역평론: Joseph. Love. S. J의 한국전위미술(韓國專爲美術)의 근원(根源)」, 『홍대학보』, 1975. 7. 15.

  •  <유전질> 시리즈에서 시대에 부합하는 조형어휘를 찾지 못했다고 판단한 작가는 어떻게 그릴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둘째 아들의 글씨 쓰기 연습과정에서 '체념의 미학'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 어떻게 그릴 것인가의 문제가 곧 나에 대한 문제라고 인식한 작가는 도를 닦듯 자신을 닦는 '비움'과 '수신'의 방법으로써 <묘법>을 제작한다.  
  • 《한국현대미술(韓國現代美術) 1957-1972: 추상(抽象)=상황(狀況), 조형(造形)과 반조형(反造形)》(1973. 2. 17. - 3. 14, 명동화랑)은 우리나라 현대미술 15년을 되돌아 보며 현대미술 1기를 추상-상황으로, 2기를 조형과 반조형으로 규정하며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미술사적 자리매김을 처음으로 시도한 전시라 할 수 있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이 국전의 관리와 운영을 주요 운영목적으로 하며, 전문직에 의한 전시 기획보다는 대관전을 위주로 운영되던 상황에서 명동화랑에서의 이와 같은 활동은 미술관의 역할에 대한 대안적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일본에서 먼저 인정을 받으면 한국에서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이우환의 조언과 권유로 박서보는 도쿄 무라마쓰화랑(村松画廊)에서 《박서보》(1973. 6. 18. - 6. 24)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 전시에는 <묘법(描法) B>(<묘법 No.9-73>), <묘법(描法) C>(현재 통용되는 작품제목: <묘법 No.5-73>), <묘법(描法) No.3-73>, <묘법(描法) No.72-73>, <묘법(描法) No.8-73>을 포함한 200-300호 대작 20여 점을 출품한다. 당시 『선데이서울』, 『홍대학보』 등의 기사는 이 전시에 출품한 그의 작품 제목을 <가변질(可變質)>로 소개하고 있으며, 작품 경향 역시 흰 바탕에 연필로 선을 반복한다고 되어 있다. 한편 1973년 8월 『미술수첩』에는 <작품(作品)>으로 실린 바 있다. 현재 <묘법>이라고 알려진 명제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일본의 『동양경제일보(東洋経済日報)』(6월 22일자)에 실린 기사로 무라마쓰화랑 개인전이 열리고 있던 시기인 6월 말이며 국내에서 처음 게재된 기사는 개인전이 끝난 비슷한 시기인 6월 24일자 『조선일보』이다. 이로 미루어 <묘법>이라는 제목은 일본으로 건너가기 직전이나 건너간 이후에 고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 박서보는 무라마쓰화랑 개인전 출품작 중 200호 사이즈 작품 앞면에 72년, 뒷면에 73년이라고 서명(발표시기)했다. 당시 작품의 디스플레이를 도쿄화랑 사장인 야마모토 다카시(山本孝)가 진두지휘했는데 이때 앞면에 서명된 박서보의 작품을 보고 "앞면 서명이 작품과 맞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자 박서보는 이후부터 작품의 서명을 캔버스 뒷면에 하게된다. 한편,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류병학이 1999년 11월부터 2000년 6월까지 『미술세계』에 「한국미술 따라잡기」를 8개월 간 연재하는 가운데 「이우환 죽이기-박서보 제몫 찾아주기」(2000. 1)에서 박서보 <묘법> 제작연도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 방근택의 권유로 프랑스어로 '글을 쓰다'는 의미의 명사 ‘에크리튀르(écriture)’라고 <묘법>을 부르기 시작한다. 이들 제목은 명동화랑에서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의 명제로 쓰이는데 당시 작가는 아직 작품의 명제를 붙이는 규칙을 마련하기 전으로 <묘법 A>, <묘법 B>, <묘법 No.11-73> 등과 같은 방식의 명제를 사용하고 있다.
  • 10월 명동화랑에서 열린 4번째 개인전 《박서보 묘법전》(1973. 10. 4. - 10. 10)에는 일본에서 개최된 개인전의 여파를 몰아 100-300호 대작 9점을 포함한 "흰 그림" <묘법> 시리즈 25점을 전시한다.  출품작은 <묘법 A>(현재 통용되는 작품제목: <묘법 No.10-72>), <묘법 B>(<묘법 No.9-73>), <묘법 C>(현재 통용되는 작품제목: <묘법 No.5-73>), <묘법 No.72-73>, <묘법 No.44-73>, <묘법 No.53-73>, <묘법 No.11-73> 등이다. 특히, <묘법 No. 55-73>은 일본에서 구입한 8B와 9B연필로 제작한 작품으로, "너무 검다"고 여겨졌지만 후에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뉴욕)에 소장된다. 또한 작가는 이 전시를 통해 작품을 10cm 가량 벽면에서 띄워 설치하는 등 새로운 전시방법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박서보는 이 시기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조의 도공들이 아무 생각없이 물레를 돌리듯, 자신 역시 캔버스 위에서 반복적으로 직선을 무수히 그려나감으로써 얻게된 행위의 결과물로 규정하며, 이를 "순수 무위진동의 자연"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화면 위에서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행위와 그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비움과 구도의 과정에 주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한국일보가 주최한 색채에 대한 토론회에서 다양한 색채를 이야기하면서도 흰색에 대한 관심과 천착을 드러낸다.  
  • 일본 교토 시그넘 화랑에서 《서울=현대미술 13인전: 한국현대미술전 전기》(1973. 10. 29. - 11. 10)가 열린다. 갤러리와 박서보가 공동기획한 이 전시는 일본에서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된 시기에 맞추어 개최된 전시로, 한국 현대작가들의 성공적인 도일전으로 평가된다. 이 전시에는 최명영, 하종현, 하인두, 허황, 정영렬, 김종학, 김진석, 김구림, 권영우, 이승조, 박서보, 서승원, 윤형근이 참가했고 '서울' 작가의 전시에 이어 부산의 혁동인(爀同人) 작품전 《한국현대미술전·후기》(1973. 1. 11. - 11. 24)가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 한국미술협회를 주관하면서 박서보는 현대미술을 활성화하기 위해 현대미술의 발굴, 확산, 집약을 위한 미술운동을 벌인다. 그것은 '앙데빵당'을 통해 신인을 발굴하고, '현대미술제'를 통해 중앙에 집중되어 있는 문화를 지방(서울, 대구, 부산, 광주 및 전라북도)으로 확산시키고, '에꼴 드 서울'을 통해 현대미술이 집약될 수 있도록 전시 체계를 갖추어 한국화단의 기초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중에서 특히 '앙데빵당'의 경우는 미협 주관으로 신인작가 발굴을 위해 무심사로 실시되었는데, 《제1회 앙데빵당》은 《제8회 파리비엔날레》와 《제5회 스페인비엔날레》 후보지명을 위해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한국미협이 학력, 경력, 회원, 비회원을 가리지 않고 만 19세부터 35세까지의 젊은 작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전시작품 215점 가운데 종래의 전시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래, 칠판, 유리병, 밀가루, 휴지, 통나무 등 낯선 재료를 사용한 작품들을 선보임으로써 관람객들 사이에 장난이냐 예술이냐는 화제를 낳기도 한다. 《제8회 파리비엔날레》 출품작가로는 이동엽, 허황, 심문섭, 이건용이 지명되었고, 《제5회 스페인비엔날레》 작가로는 김종일, 이원화, 이반, 김종호, 박원준, 김동규, 김태호가 선발되었다. 이와 더불어 중앙집중화 되어 있는 현대미술운동의 지방 확산을 위해 실시한 '현대미술제' 중 대구현대미술제의 경우, 지방화단에서 새로운 현대미술사를 기술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는 장으로 역할 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또한, 앙데빵당과 현대미술제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가는 에꼴 드 서울에 지목되기도 하였다. 한편, 현대미술의 확산과 정착을 위한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은 이후 국제전 출품작가 선정과 연동되며 미술계 내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함과 동시에 소위 ‘박서보 사단’이라고 불릴 만큼 미술계에서 막강한 권력행사를 하기에 이른다.
  • 1972년 11월 16일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창립 10주년 기념 전국 문화예술인대회가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다. 이 날 대회에서 예술인들은 10월 유신을 지지하고 민족문화창달에 이바지할 것을 다짐하며 문예중흥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한다. 이에 정부는 유공자 99명을 포상했는데, 박서보는 당시 미협 부이사장 자격으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 박서보는 1972년 6월 14일부터 7월 2일까지 김기창, 김원, 이마동, 박영선, 임직순, 오승우, 장두건, 천경자 등과 함께 베트남에 파병 중이던 백마부대와 맹호부대 등에 종군화가단으로 파견된다. 당시 문화공보부는 ‘파월 국군의 용맹한 활약상을 재현하겠다’는 목표로 국방부의 협조 아래 종군화가단을 파견한다. 종군화가들에게는 전투현장과 부대, 병원 등을 방문해 참전 용사들의 활약상을 기록하고 현장 시찰 후 4개월간 1인당 300호 2점을 의무적으로 제작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이때 박서보는 일본에서 '마스타 슈퍼' 유화물감 등 재료 일체를 구입하여 종군화가단에 포함된 작가들에게 지급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는 200호 크기의 <몬타나족 수용소 대민의료지원>와 300호 크기의 <중대기지 경계>를 제작하고  이 작품들을 같은 해 1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월남전 기록화 전시회》(1972. 12. 8. - 12. 22)를 통해 국민에게 공개한다. 당시 출품된 작품들은 전쟁과 그 본질을 충분히 수렴하지 못하거나 작가 개인의 작품경향과 동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박서보의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 한편, 박서보는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대대적으로 실시된 민족기록화사업에도 참여한다. 1967년 5.16 기념재단 주관으로 한 차례의 민족기록화 사업이 시행되긴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1973년부터 체계적인 예산편성과 함께 대대적 민족기록화 사업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그에 의거하여 사업을 실행한다. 박서보는 민족기록화사업에 참여하여 1973년 경제편의 결과로 <수출선박>, 1976년 구국위업편의 결과로 <설법(說法)으로 왜장(倭將)을 감동(感動)시킨 사명당(四溟堂)(松雲大師)>을 제작한다. 한편, 민족기록화사업으로 제작된 대다수 작품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의 고증이 불충실하거나 잘못되어 기록화로서의 가치가 의심스럽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러한 결과는 작가 선정과정만 살펴도 예측가능한데, 국가의 주력 문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원래 화풍을 무시한 채, 추상화가에게 구상적인 민족기록화를 제작하도록 선정한 것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 1972년 12월 20일 《서울현대미술제》가 발족된다. 매해 국내외의 건전한 작가를 대상으로 초대전과 일반 공모전을 개최하기로 하고, 1973년 제1회전을 위해서 73점의 작품을 선정하기도 한다. 특히, 《서울현대미술제》는 지방의 능력있는 작가를 초대함으로써 단절상태에 있는 지방화단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활발한 현대미술의 보급이 이루어지도록 계획되었다.  1973년 6월 20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서울현대미술제》 창립전을 가질 계획을 세우고 출품작가 선정까지 마쳤으나, 이전까지 경복궁내에 위치하던 국립현대미술관이 1973년 덕수궁내 석조전으로 이관하고 대대적인 이관전을 개최함으로써 장소 섭외 등의 문제로 무산된다. 결국 1975년 12월에 가서야 전시 개최가 가능하게 된다. 
  •  서울‐부산 현대작가 교류전 (혁동인 주최), 숙녀화랑, 부산.
  • 한국 현대회화전, 프랑스 & 서독. (1972년까지)

  • 「인류의 진보와 조화」라는 주제로 1970년 오사카에서 개최된 《엑스포'70》 한국관에 김수근의 요청으로 <허상> 시리즈를 출품한다. 이 작품은 일본 미술잡지인 『미술수첩』(1969. 4.)에 소개된 조지 시걸 특집 기사와 당시 개봉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달착륙 같은 새로운 우주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업이다. 박서보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인체가 빠져나간 옷을 굳혀 수십 개의 옷이 하늘을 향해 뛰어올라가는 모습을 구현하였다. 동시에 한쪽 옆에는 관을 만들어 관에 사람을 파묻고 모래와 함께 설치했으나 이후 작품의 제목과 내용이 반(反)정부적이라는 이유로 전시 중간에 철거된다. 한편, 화학약품을 이용하여 옷을 굳히는 제작과정을 포함하고 있는 이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 모델을 구하지 못해 자신이 직접 모델이 되어 작업한 결과, 이후 작가는 오랜 기간 피부질환을 앓게 된다.
  •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박서보는 일본화랑에 한국작가를 추천하고 선정하는 커미셔너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일환으로 그는 1970년 토키와 화랑(ときわ画廊)에서 열린 《한국현대작가 6인전》(1970. 5. 4. - 5. 9)에 20명을 추천하는데, 이후 일본 평론가의 최종 검토를 거쳐 박서보, 하종현, 김한, 신학철, 이승조, 정강자가 선정된다.
  • 6월 한국일보사 주최로 열린 《한국미술대상전》(1970. 6. 9. - 7. 9, 국립현대미술관(경복궁))에 <대위(對位)>를 출품한다. <대위>는 스프레이를 사용한 정밀한 테크닉을 보여준 작품으로 내용은 두개의 곡면으로 이루어져 한면은 열려진 문이 그려져 있고 다른 한면에는 이를 향해 걸어가는 가방을 든 중절모의 신사가 그려져 있다. 추상표현시대의 <원형질> 시리즈를 청산하고 작가가 새롭게 추구하기 시작한 <허상> 시리즈 중의 한 점이라 할 수 있다.1 당시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박서보의 <대위>는 김환기의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및 남관의 <성분생태 4>와 최종까지 각축을 벌였지만, 대상의 영예는 김환기에게 돌아간다. 또한 각 분야별로 당선자를 선발하여 조각부문 우수상에는 심문섭, 동양화는 김동수, 서양화는 여운, 판화부분은 송번수에게 돌아갔다.2 한국일보가 주최한 《한국미술대상전》은 국전위주로 미술계의 판도가 형성되어 있던 당시 화단에 아카데미즘이 주도하는 관전과는 다른 민전 시대의 신호탄을 알린 것이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민전시대는 1970년대 후반까지 유예되고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점차 우리 미술계의 장이 다변화 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게 한다.  
  • 12월 제자 노희영이 운영하던 서울화랑에서 《박서보 유전질전》(1970. 12. 10. - 12. 17)이 열린다. 이 전시에 출품된 작업들은 당시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전통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후 박서보는 "양식적인 계승만 추구하다보니 정신적인 계승이 미흡한 전시"라고 평가하면서 “조금은 애매한, 팝하고.. 다 짬뽕된 것이라.. 나는 성공적인 것이라고 보질 않습니다.”라고 회고한다. 하지만 당시 이 전시에 대한 평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준상은 《박서보 유전질전》이 보여준 허구적 인간상과 고도의 기계적 숙련을 바탕으로 처리한 화면, 대담한 원색의 배열은 무중력, 전광, 투영성, 무한공간에의 확대를 지향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 시대의 시각예술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3 한편, 작가는 이 전시에 출품한 작품들을 제작함에 있어 새로운 시대정신을 조형적 측면에서도 반영하기 위해 붓 대신 에어스프레이를 사용하는데, 형식적으로는 서구의 팝아트 영향을 보여주면서도 작가 개인에게 있어서는 1969년 달 착륙과 관련하여 무중력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방독면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에어스프레이 기법에 의한 미립자의 안료가 호흡기에 많은 피해를 준다는 점을 점차 인식하게 된다.
  • 명동화랑은 1970년부터 1982년까지 김문호에 의해 운영된 화랑으로, 1970년대 미술계의 최일선에서 실험미술은 물론 비구상 회화 및 추상계열의 젊은 작가들에게 전시공간을 제공하는 등,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의 기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화랑이다. 명동성당 건너편 건설빌딩에 60평 규모로 개관한 명동화랑은 1970년 2월 동양화, 서양화, 판화, 조각분야의 대표작가 70여 명을 선정하여 《명동화랑 개관기념 초대미전》(1970. 12. 19. - 1971. 1. 18)을 개최하는데 박서보도 출품한다. 이후 명동화랑은 1971년 9월에는 충무로, 1972년 8월에는 안국동으로 이전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975년 1월 문을 닫게 된다. 그러다가 오태학, 송영방 등의 화가들의 도움으로 1976년에는 관훈동에서 재개관하였으나 1982년 김문호가 타계한 후 그가 작고하기 전 마지막으로 기획한 《재불작가 3인전》(1982. 5. 21. - 5. 27)을 끝으로 문을 닫게 된다.
  • 1970년 5월 14일 홍익대학교에 부교수로 복귀하여 같은 해 6월 15일에는 홍익대학교 조형미술연구원장으로 임명된다. 이후 1997년 정년퇴임까지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근무한다.
  • 주류화단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던 박서보는 태도를 선회하여 국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함은 물론 국제전 참여작가 선정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미술협회에 가담한다. 그는 1971년 1월부터 1977년 3월까지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7, 8, 9대), 1977년 4월 부터 1980년 3월까지 이사장(10대)을 역임하는가 하면, 국제분과위원장을 역임함으로써 《상파울루비엔날레》, 《파리비엔날레》 등의 국제전에 출품하는 작가들에 대한 선정권을 행사하게 된다.

1. 오광수, 「한국화단의 모방풍토: 창작과 표절의 한계」, 『월간 신동아』, 1972. 2, pp. 248-249.

2.「화단대망의 출범: 한국미술대상전」, 『한국일보』, 1970. 6. 10.

3. 유준상, 「〔화랑〕 새로운 시각 예술성 보여: 박서보유전질전」, 『대한일보』, 1970. 12. 17.

  • 1969년 세계문화자유회의 일본 사무국 주최로 열린 《제5회 국제청년미술가전 아시아·일본전》에 박서보, 윤명로, 김차섭, 서승원, 이우환, 곽덕준이 참가한다. 박서보는 이 전시에 <유전물질(遺伝物質)Ⅰ>를 출품한다. 박서보가 이 시기 추구한 새로운 작업방향은 신구상, 옵아트, 팝아트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당시 박서보의 작업에 대해 “오프아트적인 밝고 강한 각종 원색과 기술적으로 수련된 선”, “기하학적인 선이나 면의 분리" 그리고 “기하학적인 구도, 혹은 현대적인 시각으로 잡은 현실의 일각" 등이라는 평은 박서보가 구현하고자 했던 작업세계의 단면을 살필 수 있게 한다.
  • 일본 미술잡지 『미술수첩(美術手帖)』(1969. 4)은 1963-68년까지 조지 시걸(George Segal, 1924-2000)의 작품이 다루고 있는 다양한 직업군, 일상생활 속의 다양한 인체형태를 소개한다.2 이들 작업에서 영감을 받아 박서보는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13회 현대작가초대전》(1969. 7. 1. - 7. 10, 중앙공보관화랑)에 오브제로 사람을 굳혀서, 사람이 빠져나가고 옷만 있거나, 옷만 걷는 형태의 작업인 <허상(虛像)> 시리즈 2점을 출품한다. 이를 눈여겨 본 건축가 김수근은 오사카에서 열릴 《엑스포(Expo)'70》 한국관에 <허상>시리즈의 출품을 권유하고 박서보는 이를 흔쾌히 승낙한다.



  • 196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설립되면서 문화공보부는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회를 개설한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국전의 효율적이며 원활한 운영을 최대 목표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운영자문위원회 역시 미술관의 실질적, 정책적인 논의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국전개혁을 위한 위원회였다. 대다수 예술원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던 이 위원회에 이춘성 차관은 박서보를 가담시킨다. 박서보는 이에 힘입어 첫째, 국전에 별도의 심사위원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둘째, 입선, 특선에서 추천작가, 특선작가로 구분짓는 것에 대한 원칙을 세우고, 셋째, 반국전 대책의 일환으로 현대미술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1. 「기술적으로 세련된 원색의 허상」, 『조선일보』, 1970. 12. 15; 「박서보 유전질전, 스프레이가 이루는 환각세계」, 『서울신문』, 1970. 12. 16; 정무정, 「파리 비엔날레와 한국현대미술」,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23, 서양미술사학회, p.263에서 재인용.

2. 도노 요시아키(東野芳明), 「ヅョーヅ・ツーガル: るいはあアメリカの非劇」, 『미술수첩(美術手帖)』, 1969. 4, pp.30-73.

3. 정무정, 『2014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238 박서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2015, pp.141-143.

  •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과 최초의 공식 교류인 《한국현대회화전》(1968. 7. 19. - 9. 1)이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이 전시에 선정위원으로 위촉된 평론가 최순우, 이경성, 임영방, 이일, 유준상은 박서보, 유강열, 유영국, 윤명로, 이성자, 이세득, 정창섭, 하종현 등 18명의 작가들을 선정하고 도쿄 주재 한국공보관에서는 재일작가 곽인식과 이우환을 선정한다. 
  • 7월 18일 변종하, 김상유 등과 함께 일본을 처음 방문한 박서보는 곽인식, 이우환, 이타미 준을 만난다. 자연스럽게 이 전시의 참여 작가인 김종학과 윤명로는 박서보에게 서울대학교 동기생인 이우환을 소개하고 이우환은 도쿄화랑, 시로타화랑, 무라마쓰화랑에 그를 소개한다. 결국 박서보는 이 전시를 통해 재일작가들과 사상적인 교류를 이어가며 일본교류의 물꼬를 트게 된다. 이 전시에 박서보는 앵포르멜 이후 시도하고 있던 강한 원색의 기하학적 추상 <유전질(遺傳質)> 시리즈를 출품한다. <유전질> 시리즈는 전통적인 색과 단청 등의 색채를 활용한 것으로 전통에 대한 박서보의 고민을 담고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적 분위기는 ‘민족적인 민주주의’나 ‘민족성’을 강조하던 때라 박서보 역시 자신도 모르게 민족성을 전통 속에서 찾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전시에 이우환은 채도와 명도를 달리한 형광색을 스프레이 작업한 <풍경> 시리즈 3점, 이외 작가들도 원색과 기하학적 패턴의 추상작품과 옵아트적 성향의 작품을 출품한다. 이 전시에 대해 평론가 혼마 마사요시(本間正義)는 “화려하게 치장된 이조 궁녀의 무늬” 혹은 “포장지 등에까지 일반화된 옵(Op)적 경향”이라고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 이로써 일본화단에서 화려한 원색과 다채로운 색채의 전통은 그다지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전쟁의 상흔을 넘어서 새롭게 도래하는 시대의 조형적 특성은 이전시기의 조형원리와는 다름을 인식하고, 새로운 조형원리를 바탕으로 한 전위적 조형운동을 새로운 차원에서 시도하기 위하여 "조형 제2시대"형성의 필연성을 통감하며 '한국 조형작가회의'(1968. 2. 10., 예총회관)의 창설에 참여한다. 이 회의는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종합적인 창조를 실천하고자 창설된 단체로 박서보, 정창섭, 조용익 등을 포함한 회화 22명, 김영중, 김영학, 김세중 등을 포함한 조각 13명, 김수근, 윤승중, 한창진 등을 포함한 건축 28명으로 총 63명이 참여하여 발족한다. 이들은 포화상태에 이른 과거 제1시대의 조형의 침체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원전 및 공모전 개최, 국제교류 활동, 서울비엔날레(가칭) 개최, 도서출판연구회, 장학제도 등을 추진하기로 한다.  
  • 1968년 10월에 예정되어 있던 개인전을 또 다시 한차례 미룬다. 이 시기 작가는 새롭게 도래한 시대감각과 그것을 반영한 작업을 제작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한다. 이와 같은 고민은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감수성을 담은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감상한 후 환상적이며 초현실적인 입체 작업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피력한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막내 딸 박승숙 출생 (4월).
  • 박서보는 4여 년만에 여는 두 번째 개인전 《무제전(巫祭展)》(10월 15일 신세계화랑에서 개최 예정)을 앞두고 이를 돌연 취소한다. 그는 화단의 지나친 관심도 부담이었지만 국제전을 통해 경험한 동향을 내적으로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전시 연기의 가장 큰 이유였다고 회고한다. 이는 서구미술의 추세에 맞추어 앵포르멜 다음 단계를 생각해볼 때, 변화의 사회적 계기나 작가의 내적 요구의 필연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같은 해 열린 《제2회 한국회화 10인전》(1967. 9. 1. - 9. 8, 신세계화랑) 리플릿에는 <무제(巫際) 66>, <무제(巫際) 67-1>이 출품작으로 실려 있으나,  『동아일보』 9월 14일 이일의 기사 「〔미술평〕 제2회 한국회화 10인전: 올가미 속에 갇힌 모호한 성격의 그룹전」에는 "박서보씨의 불참으로 9인전이 되고 말았다"고 적혀있어 박서보는 이 전시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재단법인) 5.16 민족상이 민족의 얼을 담고 민족사를 아로새긴 기록화를 통해 문화민족의 전통을 올바로 세우겠다는 정부의 시책에 따라 전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한 사업에 55명의 작가들이 참여하였다. 박서보는 《민족기록화전》(1967. 7. 12. - 8. 31, 경복궁미술관)에 1000호 크기의 <음성지역포위섬멸전(陰城地区包圍殲滅戰)>을 출품한다.


  • 이 시기 박서보는 목탄, 크레파스, 파스텔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가벼운 채색과 드로잉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지는 경향을 시도한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국제미술계의 흐름인 옵아트나 팝아트와의 관련성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작가는 점차 전통적인 요소에 흥미를 갖게 되며 전통 굿놀이 혹은 신풀이, 성황당 같은 것을 추상화하여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여 표현하기 시작한다. 
  • 4월 신세계화랑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1966. 4. 19. - 4. 29)에 <무제(巫祭) 1-66>, <무제(巫祭) 2-66>을 출품한다. 이일은 전시평을 통해 구작의 재전시는 피해야 하며, 준비 중인 개인전에서 새로운 경지를 기대한다고 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작품의 명제는 바뀌었으나 이 시기 작품 경향의 대대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이전의 <원형질> 연작과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12월 26일, 교수방식을 둘러싼 내부 갈등으로 홍익대학교에 사표를 내고, 교직생활을 중단한다.
  • 제11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 (조선일보 주최), 서울.



  • 박서보는 《제4회 파리비엔날레》(1965. 9. 28. - 11. 3, 전시기간 출처: 《제4회 파리비엔날레》 도록, 1965)의 한국 커미셔너로 활동한다. 커미셔너의 변에서는 "세계미술의 경향은 새로운 표현주의를 낳고 있으며 전쟁미학을 어떻게 표상하고 이미지 전달에서 포름 구성에서 구체성을 어떻게 살리느냐에 중점을 두고 그러한 경향을 찾으려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선정된 정상화, 하종현, 정영렬, 이양노, 최만린, 박종배, 김종학은 앵포르멜 계열의 작가이며, 출품작들도 그와 유사한 계열로, 박서보가 말한 '새로운 표현주의'라고 하는 것은 이전의 앵포르멜 미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프랑스판 그림에 불과하다는 냉정한 평가만 있었다. 반면 《제4회 파리비엔날레》의 전반적 작품 경향은 옵아트, 팝아트, 신구상의 집합체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1965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서도 이와 같은 흐름은 동일하였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이 시기 박서보의 화면 색채는 밝아지고 물감층 역시 얇아지기 시작한다.
  •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1965. 9. 4. - 11. 28, 파빌량 비에나우, 이비라푸에라 공원)에 김병기의 인솔하에 김환기, 권옥연, 이세득, 이응노, 김흥수, 정창섭, 김창열, 김종영 등과 함께 참여한다. 김환기는 특별전에 <Echo> 시리즈를 포함한 14점의 작품을 출품하고 박서보는 <원형질(Primordial) No.20>, <원형질(Primordial) No.21>, <원형질(Primordial) No.22(작품제목 출처: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 도록, 1965)> 총 3점을 출품한다.
  • 9월 1일 홍익대학교 조교수로 임명된다.
  • 《제4회 세계문화자유초대전》(1965. 11. 14. - 11. 20, 예총회관 화랑)에 권옥연, 유영국, 김영주, 윤명로 등과 함께 참여한다. 이 전시의 브로슈어에는 박서보의 <원형질(Protoplasm) No.22-1965>(연구팀 작품제목: <원형질 No.21-65>)의 작품정보가 도판과 함께 실려있으나, 실제 출품작인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 1965년 박서보는 동교동 기찻길옆 굴다리 근처로 이사하게 되면서 난생 처음으로 집을 장만하게 된다. 하지만 녹록치 않은 생활로 화실을 마련할 수 없던 그는 고민 끝에 집 뒤에 무허가 화실을 만드는데, 이 작업실은 <원형질>시리즈의 산실이 된다.
  • 박서보는 1964년 홍익대학교의 전임강사로 위촉된 후, 개혁적인 교육방식을 선보인다. 그것은 학생들이 교수를 선택할 수 있는 교실제 개혁안으로 한 교실당 25명의 정원제를 도입하여 등록순으로 학생수를 제한하고 여러 교수들이 지도할 수 있는 별도의 다목적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결과 부진했던 학교의 등록률은 높아지고 학생들은 원하는 교수의 수업을 수강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당시 박서보는 '박서보 교실' 입구에 패널 벽을 세우고 "첫째, 절대로 역사의 부채를 지지 말라. 둘째, 지도교수를 닮지 말라. 셋째, 학생들끼리 서로를 닮지 말라." 라는 ‘급훈(級訓)’을 적고 폐물 완구, 각종 공산품들을 고물상에서 구입하여 교실 벽에 걸거나 공중에 매달아 내리곤 했다. 학생들이 인위적인 정물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대상물을 선택하여 화면을 구성하는 교육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예술의 존립이 남들과 달라야 가능하다는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이러한 교육 방안은 1968년까지 이어졌고 박서보를 작가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성공의 길을 걷게 한다.
  • 《제3회 세계문화자유회의초대전》(1964. 11. 2. - 11. 11, 신문회관)에는 권옥연, 김영주, 박서보 등 11명의 작가가 참여하였으며, 박서보는 <작품(作品) 8>(작품제목 출처: 「새로운 차원에의 배전(排戰): 제3회 문화자유초대전」, 『동아일보』, 1964. 11. 2.), <원형질(Primordialis) 63-2>(작품제목 출처: 1) 《제3회 세계문화자유초대전》 브로슈어, 1964, 2) 박서보, 「체험적 한국전위미술(體驗的 韓國前衛美術)」, 『공간』, 1966. 11.)(연구팀 작품제목: <원형질 No.5-63>)), <원형질 No.3-63>(작품제목 출처: 작품 뒷면 작가 친필 기록)을 출품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더불어 전시와 함께 「한국미술의 현실」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문화 세미나에서 박서보는 작가의 입장에서 전통의 의미에 대해 개진하는데, 전통이라는 것이 이어받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새로운 창조의 동인이 되기 위해서는 전통에 반동하며 전통에 대한 유산 상속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글을 발표한다. 이러한 박서보의 의견 피력은 전통을 강조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란 점에서 60년대 후반 박서보의 작업모색을 살필 수 있는 단초가 된다.   
  • 둘째 아들 박승호 출생 (9월).


  • 1963년은 한국의 국제전 참가가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룬 해이다. 《제3회 파리비엔날레》(1963. 9. 28. - 11. 3, 파리시립현대미술관)와 이 전시의 부대행사로 세계문화본부가 갤러리 랑베르(Galerie Lambert)에서 《한국청년작가전(Jeunes Peintres Coréens)》(1963. 10. 1. - 11. 3) 개최를 제안하였고 상파울루비엔날레 본부의 한국 공식 참가요청이 있었다. 이에 한국 작가들의 국제전 참가에 대한 기대감도 커져갔다. 각 선정위원회는 심사를 거쳐 《제3회 파리비엔날레》에는 박서보, 윤명로, 최기원, 김봉태, 《한국청년작가전》에는 박서보, 권옥연, 정상화, 김종학, 《상파울루비엔날레》에는 김환기, 김영주, 유영국, 김기창, 서세옥, 한용진, 유강열의 작품을 출품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작가 선정이 발표되자 미협위원들이 편파적인 작가선정과 구상 및 동양화부에 대한 경시를 이유로 일찍이 없었던 화단의 반발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국제전 성격을 고려하여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정하였다는 주장과 미술계 정화운동 차원의 노력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지만 이미 선정작가들의 명단과 작품 목록이 통보된 상황이었기에 논쟁자체가 유야무야 되어버렸다.
  • 박서보는 《제3회 파리비엔날레》에 <원형질(Primordial) 1>(작품제목 출처: 아르(Arts), 연구팀 작품제목 <원형질 No.1-62>), <원형질(Primordial) no.2(작품제목 출처: 《제3회 파리비엔날레》 도록))를 출품한다.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 주간지 아르에 실리며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며(잡지에 도판이 위, 아래가 바뀌어 실린 것을 확인한 작가는 본인의 자료집에 본래의 작업 이미지로 바꾸어 스크랩해놓았다.)《한국청년작가전》에도 참여한다. 당시 《제3회 파리비엔날레》에 출품된 국외작가들의 작품경향은 팝아트, 옵아트와 공동작업이 부각되는 양상을 보였다. 박서보는 이러한 새로운 경향을 인식하고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앵포르멜 이후의 작업방향을 모색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한국청년작가전, 파리

  • 박서보 홍익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 《제1회 문화자유초대전》(1962. 5. 6. - 5. 12, 중앙공보관화랑)에 <원형질(原形質)>(연구팀 작품제목: <원형질 No.1-62>), <유전질(遺傳質) A>(작품제목 출처: 1) 《제1회 문화자유초대전》 리플릿 출품작 목록, 1962, 2) 이경성, 「독자적 조형의식의 발현: 제1회 문화자유회의초대전평」, 『조선일보』, 1962. 6. 27.), <유전질(遺傳質) B>(작품제목 출처: 《제1회 문화자유초대전》 리플릿 출품작 목록, 1962)를 출품하였다.
  • 현대미술가협회와 60년 미술가협회가 통합하고 주변에 있던 작가들이 결집하여 악뛰엘(Actuel)을 창립한다. 악뛰엘은 박서보, 하인두, 윤명로, 정상화, 김종학, 김창열, 이양노, 김봉태, 장성순 등 13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시회와 더불어 "제3선언"을 발표한다. 1962년 8월 창립전을 열고 활동하였으나 1964년 2회전을 끝으로 해체된다.  1962년 창립전에 박서보는 앵포르멜 계열의 <원죄(原罪) B>(작품제목 출처: 《악뜌엘》 브로슈어, 1962)를 출품한다.

해진 존엄(尊嚴)들 여기 도열(睹列)한다. 그리하여 이 검은 공간(空間)속에 부등켜 안고 홍소(哄笑)한다. 모두들 그렇게 현명(賢明)한데 우리는 왜 이처럼 전신(全身)이 간지러운가. 살점 깍으며 명암(明暗)을 치달아도 돌아오는 마당엔 언제나 빈손이다. 소득(所得)이 있다면 그것은 광기(狂氣)다. - 제3선언문

  • 초등학교 시절 스승이자 당시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있던 최태호의 도움으로 최초의 개인전 《박서보 원형질전》(1962. 10. 18. - 10. 25, 국립중앙도서관화랑)을 연다. "어떤 생명물질의 진화 이전의 형태"를 표현하고 전쟁미학을 화폭에 담고자 했던 그는 이 전시에서 <원형질> 시리즈 17점을 선보인다.


  • 1월 국제조형예술협회(IAA,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Art) 프랑스위원회 주최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Jeunes Peintres du Monde à Paris)》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40달러를 가지고 파리로 떠난다. 하지만 대회가 연기된 것을 모른채 떠났기에 10개월을 파리에서 체재하게 되며, 이후 10월에 개최된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사르셀(Sarcelles) 주제 콩쿨에서 1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고 11월 13일에 귀국한다. 
  • 파리 체재시 그는 작품의 변화를 모색한다. 1961년 봄 파리 체재시의 작품제작 사진과 가을 《세계청년작가 파리대회》 합동전에 출품한 작품을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는데, 이 시기 작가는 검은색 바탕 위에 토치램프를 이용하여 가죽을 화면에 태워 붙이거나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스타킹 등을 화면에 붙이는 방법을 활용한 <원형질(原形質)> 시리즈에서 주로 나타나는 기법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 합동전에 출품한 <원죄(Péché Originel)>의 경우 흑색으로 뒤덮인 화면에 적색이 좌단의 위로부터 아래로 쭉내려와있고, 화면 중앙에 플라스틱 재료로 된 달걀형처럼 생긴 형태가 페인팅 나이프로 거칠게 처리되어 있으며, 그 밑에  요철형의 구멍이 뚫려있다. 요철형의 구멍 뒤로 자루가 달려 있는데, 그곳에 철사가 마구 틀어박혀있다. 이 작품을 보고 파리의 비평가들은 비극에 찬 신음의 얼굴이며 그것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죄에서 온 동양의 정신적 체험을 전달하고 있다고 평하였다 한다. 
  • 한편, 박서보는 파리 도착 후 파리의 전위적 화랑들이 모여 있는 뤼 드 센(Rue de Seine)를 방문하고 파리화단에 실망한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출신의 미야레스(Manolo Millares)나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àpies), 안토니오 사우라(Antonio Saura), 그리고 쿠이샤르트(Modest Cuixart)를 제외한 거의 모든 프랑스 작가들에게서 테크닉이 에너지를 압도하는 것을 보면서 실망한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한국 현대미술의 에너지가 훨씬 더 가능성이 크다고 확신하며 당시 프랑스 한국 유학생회 회장인 신영철과 이일도 부추겨 주불한국대사관의 노영찬 영사를 설득하여 파리 비엔날레 사무국에 서류를 내어 한국 역사상 최초로 국제전 참가가 결정되었다. 이는 파리의 박서보와 한국의 김창열이 함께 성사시킨 것으로 추상미술의 발전과 전개, 한국 현대미술의 해외진출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제2회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박서보는 1963년 《제3회 파리비엔날레》 참여 작가, 1965년 《제4회 파리비엔날레》 커미셔너로 참여하면서 한국 미술의 국제무대 진출에 핵심적인 인물로 거론되기 시작한다. 
  • 박서보는 작가로서 국내외로 인지도를 쌓아가는 동안 경제적으로는 힘든 시절을 보낸다. 다행히 구상화에도 재주가 있던 그는 파리의 이곳, 저곳의 풍경을 그려 첫째 아들 승조의 우유값을 벌기도 한다. 



  • 이봉상 회화연구소는 1960년 1월 서울미술연구소로 개명한 뒤 신설동으로 옮긴다.
  • 60년에 개최된 《60년미술가협회전》이나 《벽전》은 전통적인 전시공간에서 개최되는 《국전》과는 달리 야외 공간인 덕수궁 담을 이용하여 개최되었다는 점은 《국전》으로 대변되는 관전에 대항하는 반국전 정서를 드러내는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12월 《제6회 현대전》(1960. 12. 4. - 12. 20, 경복궁미술관)은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기금모금을 기치로 내세우며 행정 당국의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과 국제전 참여에 대한 후원을 호소한다. “시기적으로 보나 또 우리 화단의 실력으로 보나 지금이야말로 국제전 (이것 중에서 중요한 것은 베니스의 그것에 이어 브라질의 상파울로 비엔날레, 파리의 청년비엔날레, 그리고 동경의 비엔날레 등이 있다)참가에의 실현단계”라는 국제전 참가에 대한 고조된 열망을 표출한다.



  • 박서보는 1959년 겨울, 김중업이 1957년 설계하고 1959년에 완공한 주식회사 유유(Yuyu)산업 안양공장현관에 벽화를 제작한다. 하지만 몇 번의 리모델링으로 그의 벽화는 소실되었으며 현재 이 건물은 김중업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큰아들 박승조 출생 (11월).


  • 방근택 등이 이봉상 회화연구소를 드나들며 열심히 전파한 새로운 미술경향을 반영한 작품을 제작하여 《제3회 현대전》(1958. 5. 15. - 5. 22, 화신백화점 화랑)에 <회화(繪畵) No.1>에서 <회화(繪畵) No.7>에 이르는 7점의 회화 시리즈를 출품한다. 이 가운데 <회화 No. 1>은 “앵포르멜의 한국적 성격”을 드러내면서 비정형화풍으로의 변화를 선도한 작품으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추상표현주의 작업과 비견되지만 실제 제작 방식은 색을 화면에 가한 후 숫돌로 갈아내고, 그 위에 다시 색을 뿌리는 방식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 미셸 타피에 (Michel Tapié)의 앵포르멜 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 "Un Art Autre/An Other Art"가 일본 잡지에 수록된다. 이세득이 "유럽에서 유행하는 앵포르멜"이라며 그 복사본을 구해와 대한미협회원들 및 1958년 늦가을 덕수궁미술관에서 개최된 《제4회 현대전》에 출품한 회원들간에 돌려보게 되고, 대거 앵포르멜로의 작품경향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 또한 500호의 커다란 캔버스를 앞에 놓고 에나멜 통에 빗자루를 담구면서 격정의 대결을 감행하였으며 이러한 앵포르멜 회화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몸짓은 여러 작가들에게 전파되어 열병과도 같이 젊은 작가들의 화면을 잠식했다. 
  • 《제4회 현대전》(1958. 11. 28. - 12. 8, 덕수궁미술관)에 박서보는 1,000호 이상의 대작 <No.> 시리즈를 출품하며 작품 크기가 대형화된 경향을 보인다. 출품된 <No.7>(작품제목 출처: 《제4회 현대전》 리플릿, 1958)은 캔버스 3개(각 333x248.5cm)를 연결한 것으로 박서보가 운영하던 안국동 화실에서 동교동 기찻길옆 굴다리 근처로 이사하면서 유실된다. 후에 박서보는 이 작업이 판자집의 지붕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 12월 28일 오전 11시 효자동 종점에 위치한 백운장에서 고희동의 주례로 이봉상 회화연구소에서 만난 윤명숙과 결혼한다. 신혼여행지는 온양온천이었는데, 군 기피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어 도망병 신세에 처한 박서보를 위해 경찰 경위로 재직 중이던 김창열이 대동한다.


  • 대학졸업 후에도 이렇다 할 직업을 구하지 못하자 대학시절 스승인 이봉상이 이 해 2월 안국동에 새롭게 문을 연 이봉상 회화연구소(現 동덕미술관 자리)에 합류하게 된다. 당시 이봉상 회화연구소는 젊은 예술인들의 집합소로 방근택과 안상철, 전상수, 김창열 등이 초기 강사진으로 있었으며, 김종학, 윤명로, 김봉태, 손찬성, 방혜자, 이만익, 김재임 등의 학생들과 함께 앵포르멜이라는 새로운 경향을 선보임으로써 안국동파(安國洞波)라고 불린다. 박서보 역시 초기 앵포르멜 작업을 구축하는데 많은 영감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한국 추상미술계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한 곳이라 할 수 있다.
  • 또한 1957년은 월드하우스 갤러리(World House Galleries)에서 개최되는 《한국 현대회화(Contemporary Korean Paintings)》(1958. 2. 25. - 3. 22)의 커미셔너 엘렌 프세티(Ellen D. Psaty 조지아 대학의 동양미술 교수, 현재 Ellen P. Conant이라는 이름으로 활동)가 한국을 방문하여 국전과 예술원 중심으로 추천된 작가명단을 거부하고, 무명이라도 동시대 한국에서 진행되는 미술 경향을 보고싶다며 숙명여자중학교 강당에서 출품작 107점을 직접 선정(실제 전시는 70점)함으로써 미술계가 기대에 부풀었던 해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박서보의 작품은 총 2점 선정되었으나 전시에는 1점(<Street Corner)>)만 출품된다.
  • 이 해는 한국현대미술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해이다. 국전에 대항하는 재야세력이 여러 가지 형태로 그룹운동을 가시화함으로써, 화단구조가 국전주도에서 벗어나 재야 활동이 촉발되기 시작한다. '모던아트협회', '현대미술가협회' 등의 단체들이 설립되며, 한국현대미술사에 다양성이 용인되기 시작하였음을 알린 해라 할 수 있다. 한편, 박서보는 《한국현대미술가협회전》의 명칭을 《현대전》으로 변경하는 것과, 일년에 두 번 전시하는 것을 조건으로 제2회 《현대전》(1957. 12. 8. - 12. 14, 화신백화점 화랑)부터 참여한다. 이 전시에 암벽에 음각화된 것 같은, 숫돌로 화면을 갈아낸 작품 <얼굴>을 출품한다. 이와 더불어 박서보는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현대작가초대전》에 참여하기로 약속하여 출품의뢰서에 이름이 인쇄되기도 하지만, 문우식, 나병재를 제외한 《현대전》 작가들이 초대되지 않자 《현대전》 작가를 초대할 것을 조선일보측에 요청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자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을 거부한다. 이후 작가는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현대작가초대전》에는 1958년 2회전부터 출품한다. 


  • 박서보는 김충선, 김영환, 문우식과 함께 동방문화회관에서 《4인전》을 개최하고 ‘반국전 선언’을 한다. “뭇 봉건의 아성인 국전에 반기를 들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형시각 개발과 아울러 가장 자유로운 창조 활동이 보장되는 명예롭고 혁신된 새사회를 향해 창조적으로 참여할 것을 다짐”한 반국전 선언은 국전이 화단의 모든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국전이 드러낸 잘못된 관행에 대한 젊음의 패기를 대변하며 맞선 상징적 사건이었다. 비록 반국전 선언에도 불구하고 《4인전》에서 보여준 작업방식은 여전히 이전 시기의 작품과 다르지 않으나, 반국전 선언이 드러내는 아방가르드 정신은 이후 작가의 화단활동에 중심축으로 작용한다.
  • CSMC를 수료한 이후에도 군대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졸업식날 소집명령이 내려지자 졸업식에 참여하지 못한 채 2월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서양학과를 졸업한다. 졸업 후 《제4회 국전(문교부 주최, 경복궁미술관)》에 <그림>을 출품하고 입선한다. 이 시기의 작품은 현존하는 <정물(靜物)> 등의 작품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구상적이면서도 단순화된 형태를 특징으로 한다.
  • 1955년 《창립9주년 신축교사낙성기념 제2회 미전》에서 발표한 <여인좌상(女人座像)>은 같은 해 제작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양지(陽地)>의 표현주의적 색채와 필선과는 달리 입체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날카로운 선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한복의 옷주름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면분할, 군데 군데 사용된 선명한 색채는 당시 도입된 입체주의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동안 다양한 화풍을 선보이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 이 시기가 화풍의 모색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 친구(맹인재)의 도움으로 박재홍(朴在弘)이라는 이름을 박서보(朴栖甫)로 개명한다. CSMC를 수료한 이후에도 군대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한동안 불명예스럽게 낮동안의 활동을 자제하고 피해다니는 신세가 되는데, 이러한 생활은 1961년 5.16 군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하여 명예가 회복될 때까지 지속된다. 한편, 이 해 미술계에서는 대한미협과 한국미협간에 국전 심사위원 선정에 대한 문제가 불거져 그간 암암리에 이루어졌던 국전 파행운영의 민낯이 그대로 노출되며 미술계에 개혁을 요구하는 움직임도 팽배해 간다.



  • 광주육군보병학교 CSMC 21기로 입대(군번 0004397)하여 3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는다. 장교훈련에 참여한 사람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한 군대에 소집되지 않는다는 약속을 믿고 훈련에 참여하게 된다. 이 곳에서 당시 육군 통신장교로 있던 방근택과 평생의 은인이자 절친인 신영철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후 시사영어사 대표가 되는 민영빈, 시인 박희진 등을 만나게 된다. 방근택과는 이후 앵포르멜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동지적 활동을 펼쳐나간다. 
  • 4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당시 김환기의 추천으로 1954년 《제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출품하여 <나체(裸體)(A)>와 <해바라기> 두 점 모두 입선한다.  


  • 서울로 환도한 후,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클럽 벽화를 그려주면서 돈을 벌어 등록금과 미술재료를 마련한다. 전쟁 중에 겪은 트라우마와 부(父)를 잃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자신의 형편에 낙담하고 전후 한국의 어지럽고 초라한 모든 상황에 울분을 토하며 맹렬히 작업에만 매달린다.
  • 큰 형 박원홍의 고향 친구가 연대장으로 있던 부대에서 특별 배려를 해주어서 일찍 제대하고 1952년 부산 부평동과 대신동에 설립된 홍익대학교 전시대학(戰時大學)에 복학을 한다. 배운 것도 없는데 3학년이 되어 있어 2학년으로 다시 학년을 내려 등록하고, 동양화과 교수들이 전쟁통에 모두 흩어져 실망한 나머지 프랑스 유학파인 이종우 선생과 김환기 선생이 교수로 있는 서양화과로 전과한다. 
  • 당시 미군 씨레이션(C-ration) 박스를 칼로 잘라 토막 내어 그 위에 유화로 작업하였는데, 그 최초의 작품이 <자화상>이다. 역광을 이용하여 그린 이 작품은 동료들과 김환기에게 호평을 받게되며 이를 계기로 박서보는 김환기의 눈에 들게 된다. 이 작품에 애착을 가진 박서보는 서울로 올라와서도 30여 년간 소중히 보관했지만, <자화상>은 결국 1986년경 합정동에서 동교동으로 이사하는 과정에서 다른 짐들과 함께 소실되고 만다.


종로1가 장안백화점 뒤에 있던 홍익대학교 미술과 실기실에서 박서보(左)와 배형식(右)
 들고 있는 작품은 지금은 원작의 소재가 불명한 <자화상>이다.

  • 1.4 후퇴 때 다시 어머니와 형제들을 안성에 두고 국군 의용대원이 되어 피난민들과 함께 남으로 내려간다. 여러 대대를 전전하면서 시키는 일을 한다.




  •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가 되기를 희망하여 고암(顧庵) 이응노 선생과 청전(靑田) 이상범 선생이 교수로 있는 홍익대학교 문학부 미술과(동양화, 서양화, 조각 전공) 동양화과에 입학한다.
  • 대학에서 한 학기도 마치기 전에 6.25 전쟁이 발발, 가족들이 사는 경기도 안성으로 내려가던 길에 인민군을 만나 여기저기 끌려다니면서 선무공작대의 무대장치를 만들어주는 일을 하게 된다.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중부전선을 따라 미군이 기세를 몰아 다시 올라올 때 구사일생으로 풀려나 안성으로 돌아온다. 훗날 '후라이보이'가 된 안성 친구 곽규석도 같이 있다가 부상을 당하는 통에 미군 부대 병원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미군 클럽의 연예인이 된다. 
  • 12월 7일에 아버지 박제훈 (1883-1950) 갑작스럽게 병사한다.
  • 경기도 안성으로 옮겨와 1934년에서 1950년까지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낸다. 당시 안성에는 이당(以堂) 김은호가 소개령에 따라 내려와 조약국에 은거하며 약국에서 바둑을 두곤 하였는데, 박서보는 이런 그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흠모하며 중고등학교 시절 <미인도>를 여러 차례 모사한다. 이러한 <미인도> 모사는 법률가가 될 것을 기대하셨던 부친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미술가로의 길을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동양화과를 선택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된다.
  • 박서보는 1931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예천, 하리면(下里面)에서 박제훈(朴齊勳)과 남기매(南其妹)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기 이름은 박재홍(朴在弘)이었다. 부친은 경찰로 근무하다 직장 상사와의 마찰로 경찰복을 벗고 박서보를 법률가로 키우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