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CUS⎮20호 박서보의 작업실(3) 신촌 철길 근처 무허가 판잣집
(1) 1966. 동교동집: 쌍우물앞집에 살때, 박승조와 박승호
자료 출처: 박서보 사진모음집 No.1
(2) 박서보, 「[아뜨리에 수상] 감각의 시한성」, 『대한일보』(1967년 8월 24일)
자료 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 No.3
[원문]
박서보, 「[아뜨리에 수상(隨想)] 감각(感覺)의 시한성(時限性)」, 『대한일보』(1967년 8월 24일)
여름이라고 해서 피서(避暑)가는 버릇은 없다. 무취미한 탓인지 아니면 사정(事情)들이 무취미하게 만들어버린 까닭인지를 따져볼 필요는 없다. 예나 다름없이 올 여름도 땀 속에 파묻혀 있었다. 줄줄 땀방울이 맺혀 흐르는 것을 느끼며 짜증으로 한 여름을 보냈나 보다. 한밤중! 아직도 가시지 않은 지열이 어둠 속을 파고 든다. 열기(熱氣)에 지친 화실(畫室)에서 원형질(原形質) 시대(時代)의 구작(舊作)들을 들추어 본다. 어쩌면 그렇게도 무덥고 어둡기만한 밤과 닮아 있을까… 한때 나는 우리들을 전쟁세대(戰爭世代)라 불렀고 또한 전쟁 미학(戰爭美學)을 주창(主唱)했었다. 그 소산(所産)인데도 지금의 나와의 대화(對話)는 일치(一致)하지를 않는다. 어쩌면 전쟁체험(戰爭體驗)이 실감(實感)할 수 없는 망각지대(忘却地帶)로 사라진 때문이 아니겠는가. 벌써 3년 째 나는 변혁(變革)을 거듭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自身)이 이룩한 것을 자신이 허무는 일의 연속이다. 이룩해 놓은 세계(世界)를 허문다는 것은 이룩하는 과정의 몇 곱절의 진통을 겪어야 하는가보다. 이것은 덫에 걸린 나를 풀어주고 달아나는 나를 바라보는 심정이 아닐는지. 그러나 예술가(藝術家)에 있어 전위정신(前衛精神)이 고갈되지 않았다면 자신이 자신을 모방하는 위험성을 경계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자문(自問)해본다. 예술((藝術)은 여러 개의 샘을 동시에 파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샘을 깊이 파고드는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샘이 너무 깊어 샘의 둘레만큼만 하늘을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事實)이나 혹은 그 샘으로부터 뛰어나오지 못한다는 것도 오늘에 와선 일이긴 하다. 이러고 보면 시대는 달라졌다는 것 밖에 느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깊이를 더하는 것보다는 폭을 지닌다는 말로 의미가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오늘날 뭇 화가(畫家)들이 나왔는가 하면 어제의 화가(畫家)로 물러서는 것을 시대 변천의 속도가 빠른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현실 감각(現實感覺)이 급(急) 「템포」로 변화한다는 것과 아울러 감각(感覺)의 시한성(時限性)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 변천의 속도가 늦었던 저 옛날의 화가(畫家)들이 얼마나 행복(幸福)했을까? 오늘의 한 세대(世代)가 옛날의 한 세기(世紀)보다도 빠르니까 말이다. (서양화가(西洋畫家))
[한글]
여름이라고 해서 피서가는 버릇은 없다. 무취미한 탓인지 아니면 사정들이 무취미하게 만들어버린 까닭인지를 따져볼 필요는 없다. 예나 다름없이 올 여름도 땀 속에 파묻혀 있었다. 줄줄 땀방울이 맺혀 흐르는 것을 느끼며 짜증으로 한 여름을 보냈나 보다. 한밤중! 아직도 가시지 않은 지열이 어둠 속을 파고 든다. 열기에 지친 화실에서 원형질 시대의 구작(舊作)들을 들추어 본다. 어쩌면 그렇게도 무덥고 어둡기만한 밤과 닮아 있을까… 한때 나는 우리들을 전쟁 세대라 불렀고 또한 전쟁 미학을 주창(主唱)했었다. 그 소산인데도 지금의 나와의 대화는 일치하지를 않는다. 어쩌면 전쟁 체험이 실감할 수 없는 망각 지대로 사라진 때문이 아니겠는가. 벌써 3년 째 나는 변혁을 거듭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이룩한 것을 자신이 허무는 일의 연속이다. 이룩해 놓은 세계를 허문다는 것은 이룩하는 과정의 몇 곱절의 진통을 겪어야 하는가 보다. 이것은 덫에 걸린 나를 풀어주고 달아나는 나를 바라보는 심정이 아닐는지. 그러나 예술가에 있어 전위 정신이 고갈되지 않았다면 자신이 자신을 모방하는 위험성을 경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자문해 본다. 예술은 여러 개의 샘을 동시에 파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샘을 깊이 파고드는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샘이 너무 깊어 샘의 둘레만큼만 하늘을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나 혹은 그 샘으로부터 뛰어나오지 못한다는 것도 오늘에 와선 일이긴 하다. 이러고 보면 시대는 달라졌다는 것 밖에 느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깊이를 더하는 것보다는 폭을 지닌다는 말로 의미가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오늘날 뭇 화가들이 나왔는가 하면 어제의 화가로 물러서는 것을 시대 변천의 속도가 빠른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현실 감각이 급(急) 「템포」로 변화한다는 것과 아울러 감각의 시한성(時限性)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 변천의 속도가 늦었던 저 옛날의 화가들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오늘의 한 세대가 옛날의 한 세기보다도 빠르니까 말이다. (서양화가)
<표기 원칙>
- 한글본: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에 사용된 기호나 숫자는 현대한국어 문법에 맞추어 교정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어 표기 시 사용되는 낫표 「」는 생략, 겹낫표 『』는 의미상 사용에 따라 따옴표 ' ' 로 교정했다. 확인할 수 없는 글자는 ■로 표기한다. 변경된 명칭이나 번역자 주는 대괄호 [ ]로 표기하고 긴 내용의 경우에는 주석을 달았다.
[자료 설명]
ARCHIVE FOCUS 20호의 주제는 연필 묘법이 탄생한 박서보의 집과 작업실이다.
1961년 파리에서 10개월 간의 긴 타지 생활을 하고 돌아온 이후 박서보는 홍익대학교에 재직하게 되었다. 이 시기 신촌과 홍대 일대에서 여러 차례 거처를 옮기며 곁방살이, 월세, 전세를 오가던 박서보는 1963년 처음으로 집을 구매했다. 이 집은 박서보와 가족들에게 “신촌 철길 근처 무허가 판잣집” 혹은 “동교동 쌍우물 앞집”이라고 불리웠다.1)
20호의 첫 번째 자료인 1966년의 사진은 박서보가 오랫동안 함께 했던 홍익대학교를 떠나 스스로의 삶과 작업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시기, 묘법의 영감이 된 둘째 아들과의 일화가 있었던 장소인 “신촌 철길 근처 무허가 판잣집”의 분위기와 당시 가족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이다. 1966년의 사진 속에는 박서보의 두 아들이 담겨 있다. 사진이 찍힌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 만 7세였던 박서보의 첫째 아들 박승조과 당시 만 2세였던 둘째 아들 박승호는 열린 대문에 기대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박서보의 일대기를 가족으로서 접근할 수 있었던 사료와 인터뷰를 통해 정리한 박승숙의 묘사에 따르면, 작은 마당이 있던 이 20여 평의 집에는 두 개의 방 사이에 부엌이 있고 마당 너머에 하수도와 연결된 화장실이 있었다.2) 형제가 기대어 있는 철제 대문 뒤로 보이는 공간이 언급된 작은 마당과 화장실로 이어지는 문으로 추정된다. 당시 집과 작업실의 내부 사진은 박서보 사진모음집에 존재하지 않으나, 집의 외관과 동네의 모습은 1966년 이 날에 찍힌 사진들로 살펴볼 수 있다. 무허가 판자촌이기는 했으나 신촌의 첫 집은 벽돌과 시멘트로 된 견고한 구조에 기와 형태의 지붕이 덮여 있었고, 대문 앞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이 있어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박서보의 아내는 집 뒤쪽에 있던 철둑이 여름의 장대비로 무너지자 축대를 쌓는 공사를 진행하고 남은 공간에 가건물을 만들어 박서보의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3) 1963년 구매한 집과 작업실에서 박서보는 홍익대학교 전임강사 시절을 보내고 조교수가 되었고, 미술대학 내 학제 개편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지자 1966년 교직 사임 후 다시 홍대에 복직하기 직전인 1969년 겨울까지 6년간을 보냈다.4)
사진이 찍힌 시기인 1966년 박서보는 홍익대학교를 떠나게 되어 스스로의 삶과 작업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1년 여가 지난 1967년, 박서보의 고찰을 20호의 두 번째 자료인 『대한일보』 1967년 8월 24일자 기고글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아뜨리에 수상(隨想)”, 즉 작업실에서의 가벼운 생각이라는 제목의 코너에서 박서보는 “감각의 시한성(時限性)”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1965년 즈음부터 3년 째 작품에서 “변혁을 거듭”하고 있다고 밝히며, 그 이유가 50년대 앵포르멜 계열의 작품이나 원형질 연작이 다루고 있었던 한국 사회의 시대성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국 전쟁 이후 “전쟁 세대”의 미학이 담긴 원형질 작품들을 다시 들여다 본 박서보는 그 작품들과 “지금의 [자신은] 대화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이렇듯 시대 감각의 변화를 예민하게 느꼈던 작가에게 예술적 감각은 특정한 시대와 함께 태어나고 변화하는, 시한성을 가진 것이었다.
연필 묘법의 시작은 박서보가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미술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의 고유한 전통과 정신으로 돌아가 옛 고전을 읽고 고심하던 1967년 “신촌 철길 근처의 집”에서 찾아왔다. 1967년 박서보는 외출했다 귀가하여 어떠한 일에 몰두한 둘째 아들을 발견한다. 1966년의 사진에서보다 조금 더 자라 연필을 쥘 수 있게 된 둘째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형을 따라 방안지 노트에 글자를 적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네모난 빈 칸에 글자를 정확히 적어 넣고자 했지만 아직은 미숙한 아이의 글씨로는 이 칸 저 칸으로 삐져 나갔고, 결국 화가 난 아이는 연필을 마구 그어 글자를 지워 버리고는 포기하고 체념한다. 원하고 의도한 것을 이루어내려는 갖은 노력을 지워내면서 단념하고 놓아주는 어떤 순간. 박서보는 그 순간을 목격하고 드디어 고심하던 새로운 미술의 영감을 얻는다. 작가는 <묘법 No.6-67>과 같은 최초의 연필 묘법 작품들에 방안지와 닮은 격자를 그린 후 그 위에 연필선을 그리고 다시 지우는 것은 반복하며 자신을 비워내는 행위를 구현했다. 이렇듯 박서보의 연필 묘법에는 생계와 일상, 작업 사이를 줄다리기 하면서 신촌과 홍대, 동교동과 서교동을 오가며 새로운 시대의 미술을 고찰하던 작가의 삶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
<주석>
1) ‘신촌 철길’이라는 명칭에서 신촌역을 지났던 경의선 노선이 연상되지만 박서보의 회고, 그리고 서교동과 동교동이라는 주소지가 혼재하는 박서보 편지모음집의 60년대 편지들에 적힌 주소지들을 기반으로 추정했을 때 “신촌 철길 근처 판잣집”은 경의선숲길과 서강로가 교차하는 구간의 북서쪽, 현재의 마포구 동교동 혹은 서교동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2) 박승숙,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박서보의 삶과 예술』(인물과 사상사, 2019), p. 197.
3) 박승숙, 위의 책, pp. 198-199.
4) 이후 박서보는 1967년 8월경 신촌 로터리 부근에 따로 공간을 얻어 ‘진학 아카데미’를 운영하기 시작하여 두 군데의 작업실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8월 27일자의 『홍대학보』에 실린 화실 광고가 박서보 증빙자료집 No.3에서 확인된다. 「박서보 화실(朴栖甫 畫室)」, 『홍대학보』(1967년 8월 27일).
ARCHIVE FOCUS⎮20호 박서보의 작업실(3) 신촌 철길 근처 무허가 판잣집
(1) 1966. 동교동집: 쌍우물앞집에 살때, 박승조와 박승호
자료 출처: 박서보 사진모음집 No.1
(2) 박서보, 「[아뜨리에 수상] 감각의 시한성」, 『대한일보』(1967년 8월 24일)
자료 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 No.3
[원문]
박서보, 「[아뜨리에 수상(隨想)] 감각(感覺)의 시한성(時限性)」, 『대한일보』(1967년 8월 24일)
여름이라고 해서 피서(避暑)가는 버릇은 없다. 무취미한 탓인지 아니면 사정(事情)들이 무취미하게 만들어버린 까닭인지를 따져볼 필요는 없다. 예나 다름없이 올 여름도 땀 속에 파묻혀 있었다. 줄줄 땀방울이 맺혀 흐르는 것을 느끼며 짜증으로 한 여름을 보냈나 보다. 한밤중! 아직도 가시지 않은 지열이 어둠 속을 파고 든다. 열기(熱氣)에 지친 화실(畫室)에서 원형질(原形質) 시대(時代)의 구작(舊作)들을 들추어 본다. 어쩌면 그렇게도 무덥고 어둡기만한 밤과 닮아 있을까… 한때 나는 우리들을 전쟁세대(戰爭世代)라 불렀고 또한 전쟁 미학(戰爭美學)을 주창(主唱)했었다. 그 소산(所産)인데도 지금의 나와의 대화(對話)는 일치(一致)하지를 않는다. 어쩌면 전쟁체험(戰爭體驗)이 실감(實感)할 수 없는 망각지대(忘却地帶)로 사라진 때문이 아니겠는가. 벌써 3년 째 나는 변혁(變革)을 거듭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自身)이 이룩한 것을 자신이 허무는 일의 연속이다. 이룩해 놓은 세계(世界)를 허문다는 것은 이룩하는 과정의 몇 곱절의 진통을 겪어야 하는가보다. 이것은 덫에 걸린 나를 풀어주고 달아나는 나를 바라보는 심정이 아닐는지. 그러나 예술가(藝術家)에 있어 전위정신(前衛精神)이 고갈되지 않았다면 자신이 자신을 모방하는 위험성을 경계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자문(自問)해본다. 예술((藝術)은 여러 개의 샘을 동시에 파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샘을 깊이 파고드는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샘이 너무 깊어 샘의 둘레만큼만 하늘을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事實)이나 혹은 그 샘으로부터 뛰어나오지 못한다는 것도 오늘에 와선 일이긴 하다. 이러고 보면 시대는 달라졌다는 것 밖에 느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깊이를 더하는 것보다는 폭을 지닌다는 말로 의미가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오늘날 뭇 화가(畫家)들이 나왔는가 하면 어제의 화가(畫家)로 물러서는 것을 시대 변천의 속도가 빠른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현실 감각(現實感覺)이 급(急) 「템포」로 변화한다는 것과 아울러 감각(感覺)의 시한성(時限性)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 변천의 속도가 늦었던 저 옛날의 화가(畫家)들이 얼마나 행복(幸福)했을까? 오늘의 한 세대(世代)가 옛날의 한 세기(世紀)보다도 빠르니까 말이다. (서양화가(西洋畫家))
[한글]
여름이라고 해서 피서가는 버릇은 없다. 무취미한 탓인지 아니면 사정들이 무취미하게 만들어버린 까닭인지를 따져볼 필요는 없다. 예나 다름없이 올 여름도 땀 속에 파묻혀 있었다. 줄줄 땀방울이 맺혀 흐르는 것을 느끼며 짜증으로 한 여름을 보냈나 보다. 한밤중! 아직도 가시지 않은 지열이 어둠 속을 파고 든다. 열기에 지친 화실에서 원형질 시대의 구작(舊作)들을 들추어 본다. 어쩌면 그렇게도 무덥고 어둡기만한 밤과 닮아 있을까… 한때 나는 우리들을 전쟁 세대라 불렀고 또한 전쟁 미학을 주창(主唱)했었다. 그 소산인데도 지금의 나와의 대화는 일치하지를 않는다. 어쩌면 전쟁 체험이 실감할 수 없는 망각 지대로 사라진 때문이 아니겠는가. 벌써 3년 째 나는 변혁을 거듭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이룩한 것을 자신이 허무는 일의 연속이다. 이룩해 놓은 세계를 허문다는 것은 이룩하는 과정의 몇 곱절의 진통을 겪어야 하는가 보다. 이것은 덫에 걸린 나를 풀어주고 달아나는 나를 바라보는 심정이 아닐는지. 그러나 예술가에 있어 전위 정신이 고갈되지 않았다면 자신이 자신을 모방하는 위험성을 경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자문해 본다. 예술은 여러 개의 샘을 동시에 파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샘을 깊이 파고드는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샘이 너무 깊어 샘의 둘레만큼만 하늘을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나 혹은 그 샘으로부터 뛰어나오지 못한다는 것도 오늘에 와선 일이긴 하다. 이러고 보면 시대는 달라졌다는 것 밖에 느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깊이를 더하는 것보다는 폭을 지닌다는 말로 의미가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오늘날 뭇 화가들이 나왔는가 하면 어제의 화가로 물러서는 것을 시대 변천의 속도가 빠른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현실 감각이 급(急) 「템포」로 변화한다는 것과 아울러 감각의 시한성(時限性)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 변천의 속도가 늦었던 저 옛날의 화가들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오늘의 한 세대가 옛날의 한 세기보다도 빠르니까 말이다. (서양화가)
<표기 원칙>
- 한글본: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에 사용된 기호나 숫자는 현대한국어 문법에 맞추어 교정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어 표기 시 사용되는 낫표 「」는 생략, 겹낫표 『』는 의미상 사용에 따라 따옴표 ' ' 로 교정했다. 확인할 수 없는 글자는 ■로 표기한다. 변경된 명칭이나 번역자 주는 대괄호 [ ]로 표기하고 긴 내용의 경우에는 주석을 달았다.
[자료 설명]
ARCHIVE FOCUS 20호의 주제는 연필 묘법이 탄생한 박서보의 집과 작업실이다.
1961년 파리에서 10개월 간의 긴 타지 생활을 하고 돌아온 이후 박서보는 홍익대학교에 재직하게 되었다. 이 시기 신촌과 홍대 일대에서 여러 차례 거처를 옮기며 곁방살이, 월세, 전세를 오가던 박서보는 1963년 처음으로 집을 구매했다. 이 집은 박서보와 가족들에게 “신촌 철길 근처 무허가 판잣집” 혹은 “동교동 쌍우물 앞집”이라고 불리웠다.1)
20호의 첫 번째 자료인 1966년의 사진은 박서보가 오랫동안 함께 했던 홍익대학교를 떠나 스스로의 삶과 작업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시기, 묘법의 영감이 된 둘째 아들과의 일화가 있었던 장소인 “신촌 철길 근처 무허가 판잣집”의 분위기와 당시 가족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이다. 1966년의 사진 속에는 박서보의 두 아들이 담겨 있다. 사진이 찍힌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 만 7세였던 박서보의 첫째 아들 박승조과 당시 만 2세였던 둘째 아들 박승호는 열린 대문에 기대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박서보의 일대기를 가족으로서 접근할 수 있었던 사료와 인터뷰를 통해 정리한 박승숙의 묘사에 따르면, 작은 마당이 있던 이 20여 평의 집에는 두 개의 방 사이에 부엌이 있고 마당 너머에 하수도와 연결된 화장실이 있었다.2) 형제가 기대어 있는 철제 대문 뒤로 보이는 공간이 언급된 작은 마당과 화장실로 이어지는 문으로 추정된다. 당시 집과 작업실의 내부 사진은 박서보 사진모음집에 존재하지 않으나, 집의 외관과 동네의 모습은 1966년 이 날에 찍힌 사진들로 살펴볼 수 있다. 무허가 판자촌이기는 했으나 신촌의 첫 집은 벽돌과 시멘트로 된 견고한 구조에 기와 형태의 지붕이 덮여 있었고, 대문 앞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이 있어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박서보의 아내는 집 뒤쪽에 있던 철둑이 여름의 장대비로 무너지자 축대를 쌓는 공사를 진행하고 남은 공간에 가건물을 만들어 박서보의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3) 1963년 구매한 집과 작업실에서 박서보는 홍익대학교 전임강사 시절을 보내고 조교수가 되었고, 미술대학 내 학제 개편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지자 1966년 교직 사임 후 다시 홍대에 복직하기 직전인 1969년 겨울까지 6년간을 보냈다.4)
사진이 찍힌 시기인 1966년 박서보는 홍익대학교를 떠나게 되어 스스로의 삶과 작업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1년 여가 지난 1967년, 박서보의 고찰을 20호의 두 번째 자료인 『대한일보』 1967년 8월 24일자 기고글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아뜨리에 수상(隨想)”, 즉 작업실에서의 가벼운 생각이라는 제목의 코너에서 박서보는 “감각의 시한성(時限性)”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1965년 즈음부터 3년 째 작품에서 “변혁을 거듭”하고 있다고 밝히며, 그 이유가 50년대 앵포르멜 계열의 작품이나 원형질 연작이 다루고 있었던 한국 사회의 시대성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국 전쟁 이후 “전쟁 세대”의 미학이 담긴 원형질 작품들을 다시 들여다 본 박서보는 그 작품들과 “지금의 [자신은] 대화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이렇듯 시대 감각의 변화를 예민하게 느꼈던 작가에게 예술적 감각은 특정한 시대와 함께 태어나고 변화하는, 시한성을 가진 것이었다.
연필 묘법의 시작은 박서보가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미술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의 고유한 전통과 정신으로 돌아가 옛 고전을 읽고 고심하던 1967년 “신촌 철길 근처의 집”에서 찾아왔다. 1967년 박서보는 외출했다 귀가하여 어떠한 일에 몰두한 둘째 아들을 발견한다. 1966년의 사진에서보다 조금 더 자라 연필을 쥘 수 있게 된 둘째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형을 따라 방안지 노트에 글자를 적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네모난 빈 칸에 글자를 정확히 적어 넣고자 했지만 아직은 미숙한 아이의 글씨로는 이 칸 저 칸으로 삐져 나갔고, 결국 화가 난 아이는 연필을 마구 그어 글자를 지워 버리고는 포기하고 체념한다. 원하고 의도한 것을 이루어내려는 갖은 노력을 지워내면서 단념하고 놓아주는 어떤 순간. 박서보는 그 순간을 목격하고 드디어 고심하던 새로운 미술의 영감을 얻는다. 작가는 <묘법 No.6-67>과 같은 최초의 연필 묘법 작품들에 방안지와 닮은 격자를 그린 후 그 위에 연필선을 그리고 다시 지우는 것은 반복하며 자신을 비워내는 행위를 구현했다. 이렇듯 박서보의 연필 묘법에는 생계와 일상, 작업 사이를 줄다리기 하면서 신촌과 홍대, 동교동과 서교동을 오가며 새로운 시대의 미술을 고찰하던 작가의 삶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
<주석>
1) ‘신촌 철길’이라는 명칭에서 신촌역을 지났던 경의선 노선이 연상되지만 박서보의 회고, 그리고 서교동과 동교동이라는 주소지가 혼재하는 박서보 편지모음집의 60년대 편지들에 적힌 주소지들을 기반으로 추정했을 때 “신촌 철길 근처 판잣집”은 경의선숲길과 서강로가 교차하는 구간의 북서쪽, 현재의 마포구 동교동 혹은 서교동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2) 박승숙,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박서보의 삶과 예술』(인물과 사상사, 2019), p. 197.
3) 박승숙, 위의 책, pp. 198-199.
4) 이후 박서보는 1967년 8월경 신촌 로터리 부근에 따로 공간을 얻어 ‘진학 아카데미’를 운영하기 시작하여 두 군데의 작업실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8월 27일자의 『홍대학보』에 실린 화실 광고가 박서보 증빙자료집 No.3에서 확인된다. 「박서보 화실(朴栖甫 畫室)」, 『홍대학보』(1967년 8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