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쇼는 다 끝났소


손가락 총구를 향해 훅, 불었다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1964·세르조 레오네)  2020.07.11 조선일보

박서보(화가·89)






박서보(화가·89)


단역 배우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것은 영화 ‘황야의 무법자’였다. 이 젊은 배우의 무뚝뚝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는 그가 물고 있던 굵은 시가를 힘껏 빨며 생기는 눈가의 주름처럼 관객들 머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하지만 극장을 나서서도 반복적으로 내게 소환되었던 것은 빠르게 뽑아 여러 명의 상대를 쓰러뜨리는 그의 총 솜씨가 아니라, 총성이 멈추고 흐르는 청명한 휘파람 소리였다.  마침 그날은 임신한 아내와 둘째 아들의 손을 잡고 나선 모처럼의 시내 나들이였다. 

영화 '황야의 무법자' 영화 '황야의 무법자' 5살이 된 어린 아들이 2시간이나 되는 영화를 꼼짝도 하지 않고 집중해 보는 것도 신기했는데, 그 휘파람 소리가 녀석의 작은 입술에 신들리듯 들러붙어서는 쉬익쉬익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는데도 그 리듬만큼은 비교적 정확히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라디오에서 영화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다 후다닥 내 옷장을 열어 오래된 나의 중절모를 삐딱하게 걸쳐 쓰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가락 총구를 향해 훅 바람 부는 흉내를 내는 것이다. 제풀에 지칠 때까지 서너 달은 지속했고, 그 사이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장난감 권총과 벨트를 사줬다. 

연기력에 변화는 없었으나 담요를 들고 와 판초로 뒤집어쓰는 등 소품 응용력만큼은 창조적으로 키워가는 것 같았다. 후일 이 작은 녀석이 디자인전공의 대학교수가 되었는데, 따지고 보면 그게 다 휘파람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 휘파람이 석양 아래 낮게 깔려 흐르는  영화 ‘황야의 무법자’의 주제곡을 작곡한 엔니오 모리꼬네가 엊그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보석처럼 빛나는 많은 영화음악으로 관객의 심금을 울렸지만, 내게 기억되는 모리꼬네는 시네마 천국의 모리꼬네도, 이스트우드의 시가를 떠올리는 모리꼬네도 아닌, 5살 꼬맹이의 불꽃 연기에 불을 붙이던 휘파람 소리의 작곡가 모리꼬네가 있을 뿐이다. 

모리꼬네는 왠지’ 황야의 무법자’에서 주인공 이스트우드가 내뱉은 말 “쇼는 다 끝났소.”라는 대사를 읊으며 눈을 감았을 것 같아 그의 죽음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그는 나보다 세 살이 많다. 그의 석양이 졌다. 내게도 석양은 깊게 드리워져 있고.




출처 :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10/20200710025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