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ARCHIVE FOCUS⎮21호 박서보의 작업실(4) 신촌 창전동 개천가 집

2024-10-11

ARCHIVE FOCUS⎮21호 박서보의 작업실(4) 신촌 창전동 개천가 집


(1) 「[마이리빙] 박서보(朴栖甫)씨 (화가)」, 『주간경향』(1973년 10월 7일자) 제252호

자료 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 No.6

(2) 1973 주간경향에서 촬영 마포구(麻浦区) 창전동(倉前洞) 2-108호(号), 집에서

자료 출처: 박서보 사진자료집 No.2


[원문]


「[마이리빙] 박서보(朴栖甫)씨 (화가)」, 『주간경향』(1973년 10월 7일자) 제252호


지난 3일부터 서울 명동화랑에서 일체의 이미지나 형상을 배제한 낯선 경향의 작품 『묘법(描法)』 시리즈로 개인전을 가쳐 화단에 커다란 문제를 불러일으킨 서양화가 박서보(朴栖甫)씨(43·홍익대 교수 미협부이사장)는 늘 새로운 회화의 세계를 추구해온 작가다.

『나는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그리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박(朴)씨는 하나의 행위가 그저 반복될뿐 그것을 통해 인내하고 삶을 유지할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1년반, 하루도 쉬지 않고 14~15시간 아틀리에에 파묻쳐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어요』 캔버스에 유화물감과 연필을 계속 그려댔노라고 말한다.

『완전히 그로키상태입니다. 10일 개인전이 끝나면 단풍이 빠알갚게 물든 내장산이나 제주도에 가서 푹 쉬고 싶어요』 부인 윤명숙(尹明淑)씨(35·홍익대중퇴)가 『역마살』이 붙었다고 놀려댈 정도로 여행을 즐기지만 이번에는 휴양을 겸한 여행이 될 것이라고 했다.

주변에 두고 싶어서 이조시대의 장롱반다지상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 2년 전. 요즘에는 자기벼루 수집에도 손대고 있다고.

슬하에 승조(勝朝)(15·경성중2년), 승호(勝昊)(10·홍익국3년) 승숙(勝淑)(6) 등 3남매가 있다.


[사진 캡션] 새로운 회화의 세계, 『묘법(描法)』 시리즈 전시를 앞두고 마지막 작품 손질에 열을 내고 있는 박(朴)씨. 62년 제1회 전시회를 낸 이래 이번이 4회.

[사진 캡션] 『내집이라고는 이 집이 처음이에요』 대지 48평, 건평 20평의 창전동 박(朴)씨댁 화단에도 가을이 무르익었다.

[사진 캡션] 그림을 그리다 틈틈이 음악감상을 즐긴다. 요즘은 풍경, 목탁소리가 울리는 금강경과 굿거리등을 특히 즐긴다. 그러다가 꼬마들의 놀이에 끼어든다.

[사진 캡션] 주변에 두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이조자기 가구류를 수집하고 있다. 자기 30여점, 벼루 20여점, 상10여점 등… 호도기름으로 정성껏 매만지고 있다.


<표기 원칙>

- 한글본: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에 사용된 기호나 숫자는 현대한국어 문법에 맞추어 교정했다.


[자료 설명]


ARCHIVE FOCUS 21호의 주제는 연필 묘법을 공개한 시기의 박서보의 집과 작업실이다. 홍익대학교에 재직하기 시작하며 박서보는 신촌과 홍대 일대에서 여러 차례 주소를 옮겼다. 작가는 1969년 겨울에는 무허가 판잣집이던 “신촌 철길 근처의 집”을 정리하고 근처의 큰 집으로 이사한 처갓집의 건넛방에 잠시 깃들었다가, 이후 1971년 다시 독립하여 “창전동 개천가 집”라고 불리게 된 마포구 창전동의 집으로 이사했다.1) 박서보에게 연필 묘법의 영감이 찾아온 장소는 “신촌 철길 근처의 집”이었지만 지난한 탐구의 과정을 거쳐 자신감을 가지고 연필 묘법을 세상에 발표하게 된 것은 이 “창전동 개천가 집”에서였다.2)

이 시기 편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소지에 따르면, 박서보의 “창전동 개천가 집”은 북쪽으로는 경의중앙선 홍대입구역과 서강대역에 중간 지점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광흥창역을 조금 넘어서는 창전동의 오른쪽 경계를 이루었던 개천가 북단에 위치했다. 이 개천은 현재 복개되어 신촌에서 서강대교로 이어지는 서강로로 확인할 수 있다. 박서보는 1971년 금성출판사에서 교과서 제작을 맡게 되어 받은 착수금과 그의 아내가 그동안 저축한 돈을 더해 주소지가 등록된 첫 주택인 창전동의 집에 이사하고 개천 동쪽 건너편의 건물 2층도 임대해 작업실을 옮겼다.3) 이번 호에서는 박서보의 작업실과 서재의 이미지가 담긴 1973년 10월 7일자 『주간경향』의 기사와 당시 『주간경향』에서 제공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진모음집 속의 사진들을 다룬다.

『주간경향』은 1973년 6월 일본 무라마쓰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진 후 10월, 서울 명동화랑에서 다시금 개인전을 여는 박서보에게 주목하여 인터뷰하면서 당시의 작가의 집 곳곳을 촬영했다. 잡지에 실린 첫 번째 사진은 집에서 개천 건너편 건물에 위치했던 박서보의 작업실로 추정된다. 사진 속 작업대는 연필 묘법에 사용된 다량의 물감통과 수십개의 연필들로 가득 차 있다. 붓통에서 넓적한 페인트 붓을 꺼내 들고 살펴 보는 박서보의 뒤편으로 200호 가량의 연필 묘법 작품 두 개가 받침대에 세워져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이룩한 것을 자신이 허무는 일의 연속”4)인 새로운 미술의 탐색 과정에서 유전질과 허상 연작을 시도하고 전시로 발표하면서도 박서보는 훗날 연필 묘법으로 불리게 될 이 작품들을 계속하여 연구했다. 1968년 일본에서 처음 만나 교우하게 된 이후 한국에서 일정을 볼 때면 박서보의 집에서 신세를 지곤 했던 이우환이 1972년 우연히 박서보의 발표 전 연필 묘법 작업들을 보게 된 장소는 사진 속 작업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작업실에 더하여 『주간경향』에서는 창전동 집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박서보 가족의 모습을 담았다. 거실이나 서재, 혹은 안방으로 추정되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사진 속 공간들에서는 당시 박서보의 관심사와 취향을 엿볼 수 있다. 연필 묘법의 시작에 대해 설명하며 박서보는 그 배경으로 60년 중후반 수 년간 동양의 각종 고전을 읽으며 고민했던 시간을 언술해왔는데, 『주간경향』 기사 세 번째 사진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자녀들의 뒤편으로 거실의 한쪽 면을 차지하는 서적이 빼곡히 꽂힌 박서보의 책장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잡지에는 실리지 않았으나 박서보는 『주간경향』에서 책장 앞 자신을 찍은 사진을 따로 받아 사진모음집에 보관했다. 사진모음집 속 네 장의 사진 가운데 두 점에서 박서보는 책장 앞에서 도록을 살펴보는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1호 자료 세 번째 이미지로 실린 사진이 그 중 하나다. 사진 속 박서보의 책장에서는 백과사전 형식의 문화 예술사 관련 서적 시리즈의 높은 비중이 눈에 띄며, 서적의 언어로는 한글/한문과 영문, 그리고 일본어 등이 확인된다. 일반 사진들보다 훨씬 큰, A4 용지 거의 전면을 차지하는 사이즈로 인화된 사진들을 통해 박서보가 사진에 기록된 자신의 모습에 특별히 마음을 기울였음을 가늠해볼 수 있다.

21호의 세 번째 자료(네 번째 이미지)는 전통 기물들이 진열된 고가구들이 놓인 거실 혹은 안방으로 추정되는 공간에서 찍힌 것이다. 같은 공간이 『주간경향』 기사의 네 번째 사진에도 등장하는데, 두 사진 모두에서 전통 자기를 잘 정리해 놓은 것뿐만 아니라 고가구들을 이리저리 바닥에 늘어놓고 작가가 정성껏 호도기름을 바르고 있는 장면을 남긴 점이 인상적이다. 사진 속 모습에서는 수집품에 대한 박서보의 애정이 배어 나온다. 이렇듯 박서보는 자신의 일상 속에 묘법의 바탕이 된 한국의 전통 정신을 스며들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


<주석>

1) 박서보가 창전동 개천가 집으로 이사한 시기는 1971년에서 1973년 사이로, 정확한 시기를 확정할 수 있는 자료를 현 시점에는 확인할 수 없었다. 본 호에서는 작가 및 작가의 가족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서술된 박승숙의 책을 근거로 1971년으로 적는다. 박승숙,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박서보의 삶과 예술』(인물과 사상사, 2019), p. 226.

2) 연필 묘법은 1973년 6월 18일 오픈한 도쿄 무라마쓰화랑 《박서보(朴栖甫)》 전시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3) 박승숙, 위와 동일.

4) 박서보, 「[아뜨리에 수상] 감각의 시한성」, 『대한일보』(1967년 8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