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CUS⎮22호 박서보의 작업실(5) 합정동 이층집
합정동 이층집에서의 사진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진: 1980년 7월 6일
세 번째 사진: 김구림 촬영, 1977년 6월 5일 박서보의 사진
네 번째 사진: 1975년 10월 3일 합정동 집에서 아내 윤명숙과 장남 박승조, 이남 박승호, 장녀 박승숙과 함께
자료 출처: 박서보 사진모음집 No.2, 3, 4
이흥우, 「화가의 하루: 박서보」, 『화랑』(1977년 겨울 No.18)
자료 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 No.6
[한글] (원문은 본 게시글 하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흥우, 「화가의 하루: 박서보」, 『화랑』(1977년 겨울 No.18) (사진: 유보미)1)
박서보 씨의 하루 하루의 삶은 세 가지의 일로 밝고 저문다. 미술 운동가로서의 일, 미술 교수로서의 일, 그리고 더욱 본업이 될 화가로서의 일이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예총 부회장, 홍익대 교수, 그리고 화가 박서보, 이 세 가지의 면모가 동시에 공존하며, 그의 인간적 저력과 정력이 격렬한 삼지창처럼 종횡무진, 각 방향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
미협 이사장, 예충[예총] 부회장 외에도 그는 72년(당시 미협 부이사장)부터 앙데팡당 전, 이어 75년부터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 전을 주재해 왔다. 박서보씨는 76년 말께부터 파리에서 3개월을 머무르다가 77년 2월에 귀국했고, 지난 8월 11일부터 8월말까지는 《한국·현대미술의 단면》 전(8월 16~28일·도쿄센트럴미술관·19명의 작가의 1백 점 전시)을 계기로 일본에 다녀왔다. 23번째의 외국 여행이었다.
1972년 박서보 씨가 미협에서 앙데팡당 전을 ‘조직’한 것은 그의 ‘예술 운동으로서의 이상’의 구현이었다. 젊고 패기 있는 작가들이 설 땅을 마련하기 위해서 였다.
새로운 일을 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심사위원의 안목과 일치되지 않아서 국전(國展)에서 몇 번을 떨어지고 초대전에서 모두 빠지게 되면 새로운 일, 좋은 일을 좀 해보려는 젊은 작가들은 맥이 빠지고 용기를 잃게 되기 쉽다. 앙데팡당 전은 그런 젊은 작가들은 위한 광장을 마련한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국제전(특히 젊은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출품 작가를 선정한다.
“과거에는 국제전 참가 작가를 미협 임원들이 뽑았는데, 새로운 세력이 클 소지가 적었다”고 그는 말한다.
앙데팡당 전은 무명유명(無名有名), 학벌, 인맥과 관계 없이 누구나 작품을 내놓으면 전시하고 그 일이 옳으면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광장으로서 마련된 것이었다. 77년 5회전이 열렸다.
“그런 광장, 실력있는 젊은 작가가 국내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고, 국제전 참가의 길이 열릴 수 있는 그런 광장을 제공하는 것이 내 임무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범위를 넓혀, 실제로 화단을 1년에 한 번쯤 씩 정리해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것이 에꼴 드 서울 전이다.”
에꼴 드 서울 전은 77년 6월 제 3회전을 가졌다. 그 시스팀[시스템]은 6~7명의 운영 위원이, 6명의 커미셔너를 지명한다. 3명은 비평가고, 3명은 30대의 작가이다. 커미셔너에 의해 에꼴 드 서울 전의 초대작가가, 유능한 신인과 기정작가를 가리지 않고 지명된다. 물론 그것은 그 한 해로 끝나고 다음 번에는 새로운 커미셔너에 의한 초대 작가들이 새로 지명된다. 에꼴 드 서울의 정신은 ⓵세계 어디에라도 이것이 오늘의 한국 회화다 하고 내놓을 수 있어야 하며 ⓶국제성을 지닌 작품이어야 한다는 기조 위에 선다.
“국제성을 잘못 받아들이면 무국적성으로 빠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이라는 말을 나는 ‘내셔널’의 정신기반 위에 ‘인터’가 붙여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에꼴 드 서울이 지향하는 국제성의 개념은 그런 것이다. 물론 각 작가의 방법론과 발상법은 다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 근거를 흐르는 공통성이 존재한다. 현대 미술에 있어서 국제적이라는 동시성을 지닌 공통의 문제, 그 속에 우리가 다른 나라하고 어떻게 달라야 하며, 어떻게 기여해야 할 것이냐, 이것이 에꼴 드 서울의 존재 이유이다.”
박서보 씨는 그런 공통성을 현대 미술에 있어서의 ‘집단 개성’이라고도 말한다. 도쿄에서의 《한국·현대미술의 단면》 전에서도 그런 의미에서의 집단 개성이 잘 나타났다고 그 곳 평자(評者)들은 말했다 한다.
“내가 미협 이사장 일을 하는 것은 그런 미술 이념을 추진하기 위한 수단으로”라고 박서보 씨는 말한다.
77년에 역시 3회전을 연 서울현대미술제는 ‘앙데팡당과 에꼴 드 서울의 에센스를 모아 더 광범한 공통의 장(場)을 이루어가는 미술운동’이다. 그것은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탈피하기 위해 대구, 부산, 춘천(강원현대미술제·각 지방 현대미술제는 그 곳 작가들이 주체가 되어 추진, 전국적인 규모로 열린다) 현대미술제로 확산되며 일종의 ‘미술 연방 체제’를 지향한다고도 한다.
“이런 미술 운동이 10년쯤 계속되면 무언가 기대해 볼만한 게 되어질 것이다.”
박서보 씨는 하루 자는 시간이 밤 중의 3시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낮에 잠깐씩 피곤을 풀기 위해 아무데서나 앉은 채로 눈을 붙인다. 매주 4일 홍대에 나가 대학과 대학원 강의(주 14시간)를 맡는다. 일(회의 등)이 있을 때마다 미협, 예총에 들른다. 강의 시간이 없는 수·목요일은 학교 연구실에서도 제작을 하고, 학교를 안 나가는 금·토·일요일에는 단체 일이 아니면 합정동 396-14 집에서 제작을 한다. 집의 작업장은 공간이 꽤 넓은 차고이다.
미술 운동, 미술 교수로서의 일들에 매이는 낮 시간보다 집에서 작업을 하는 시간은 대개 밤이 된다고 한다.
앙포르멜, 원형질, 기하학적 추상, 허상(虛像)과 실상(實像) 다채로운 작품 세계를 편력해온 박서보 씨가 탈(脫)이미지, 무목적성의 순수 행위로서 「묘법」을 추구해 온 것은 1967년께부터 였다.
흰색의 유성(油性) 페인트가 칠해진 캔버스에 연필로 같은 방향, 비슷한 크기의 규칙적인(사선·수평 등) 선을 빡빡하게 그어가는 것이다. 줄을 그렇게 그었다는 결과가 아니고 그렇게 긋는다는 행위 자체에 화가로서의 작업의 의미가 부여된다.
“나는 연필을 그리는 도구로서 쓰는게 아니라, 행위의 도구로서 연필을 선택한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위해서이다.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탈이미지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무목적성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행위 그 자체에서 살고자 해야 한다. 이미지나 형상, 어떤 환상을 쫓지 않는다는 그런 탈이미지의 무목적성은 도가사상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순수무위(無爲)행위라고 해도, 무위순수행위라고 해도 좋다. 그런 행위로써 근대미술이 쫓던 이미지라는 환상을 탈피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비로소 참다운 해방감을 맛본다. 거기에는 무엇을 그렸다든가 무엇을 의미했다든가 하는 환상이 없다.”
동양에서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도 나도 없는 상태’ 같은 것이 자주 말해지기도 했는데, 박서보 씨는 연필의 묘법을 통해 그런 상태에 대한 자기 나름의 현대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도 같다. 작가의 그런 행위는 행위의 결과로서 캔버스에 연필의 흔적(궤적과도 같은)을 남기게 된다. 관객은 그것을 그림으로서 받아들이고 마음껏 자유롭게 그것을 느끼면 된다. 화면의 그어진 흔적은 강도 산도 극단적으로 말하면 연필 자국도 아니므로 관람자는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이 자유롭게 느끼면 되는 것이다.
박서보 씨의 묘법은 초기 이후, 상당히 얌전한 규칙적인 포름[form; 양식] 속의 금욕적일 만큼 억제된 상태에서 겹겹이 행위되어 왔었다. 그 후 작품에 따라 그 선의 포룸[form; 양식]이 더 활달해지고 꽤 자재로움을 보이기 시작했다. 요즈음에는 차차 더 그랬다. 한 폭의 캔버스에 표현성이 배제되는 ‘연필로서의 행위’를 지속한다는 금욕성, 억제성은 유지하면서도 묘선(描線)들은 서서히 더 자재로운 세계로 펼쳐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표현의 체념, 또는 단념으로 상징되는 박서보 씨의 묘법에서의 금욕적인 상태에 대해 ‘정립된 제도 속에 자기 억제를 하면서 자기 순화를 해가는 유교적 윤리관(성장 환경이기도 한)과도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서서히 생각하게 된다”고 그 자신은 말한다.
그는 백색이 칠해진 캔버스, 혹은 불문(佛文) 신문지 등의 화면에도 작업을 해오다가 요즈음에는 마대의 화포(백색 유채 칠한)를 쓰기 시작했다.
탈이미지, 표현의 단념이 결과하는 순수행위의 결과는 ‘비창조·비개성적인 것으로 흘러가 중성적(中性的)이며 무명적 구조성(無名的 構造性)’을 드러낸다. 거기서 과거와 다른 오늘의 예술의 의미를 박서보 씨는 행위의 순수성을 통해 행위하고 있는 것이다.
<표기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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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설명]
ARCHIVE FOCUS 22호에서 살펴볼 박서보의 작업실은 합정동 이층집과 차고 작업실이다. 박서보는 1974년 3월 말 이후, 3여년을 살았던 신촌 창전동 개천가 집을 정리하고 합정동의 ‘미니 이층집’으로 이사했다. 74년 출판사 일조각에서 받은 교과서 작업 대금과 창전동 집을 처분한 자금, 그리고 저축을 합쳐 구입한 이 집은 빨간 벽돌로 된 외벽과 경사진 지붕이 특징적인 현대식 단독 주택이었다.2) 합정동 집에서 박서보는 그의 삶에서 대내외적으로 가장 활발히 활동했던 74년부터 86년까지의 열두 해를 보냈다.
70년대 대도시 지역에서 유행처럼 지어지며 소위 ‘불란서주택’이라고 불리던 주거 건축의 특징은 완만한 팔(八)자의 뾰족지붕과 아치형의 현관이나 대문, 그리고 콘크리트 기둥으로 이루어진 2층의 발코니이다.3) 불란서주택 양식으로 지어진 합정동 이층집의 특징적 모습들을 22호의 첫 번째 사진과 두 번째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사진에서 박서보는 대문 옆으로 서 있던 동네 이웃집의 외관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는데, 이 시기 종종 집에서 찍은 박서보의 사진들은 전시 도록 등에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되었다.4) 박서보가 거주했던 합정동 동네의 주택들은 다수가 사진 속 집처럼 뾰족 지붕과 발코니를 가진 이층의 단독 주택인 불란서주택 양식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 사진에는 불란서주택의 특징 중 하나인 기둥을 두른 발코니에 걸터 앉아 있는 박서보의 모습이 담겨 있다. 발코니의 기둥부는 주두부(capital)와 주초(base), 호리병이나 곡선의 조각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기둥(shaft)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실재하는 양식을 모방한 것이 아닌 고대 그리스 건축의 구성 요소나 기하학적인 기둥 형태를 통해 서양풍의 느낌만을 차용한 것이었다. 박서보의 아내 윤명숙은 “거실 한가운데 현란하게 반짝이는 샹들리에에 홀랑 빠져 덥석 그 집을 계약해 버렸다”고 회고했는데,5) 이처럼 합정동 이층집과 같은 불란서주택은 70년대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며 단독 주택을 수요로 하던 중산층을 겨냥하여 실제 프랑스 건축 양식과는 무관하지만 프랑스와 연관지었던 세련된 고급 문화의 이미지를 빌려 “꿈에 그린 집”6)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공급된 거주 공간이었다. 불란서주택은 대도시에서 유행 이후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된 농촌주택개량사업에서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70년대 한국를 대표하는 건축 양식 중 하나가 되었다.
현대화랑에서 발행한 잡지 『화랑(画廊)』의 주요 코너였던 ‘화가(画家)의 하루’로 실린 작가의 1977년 인터뷰(다섯 번째 이미지부터)에서는 합정동 이층집 시기 박서보의 삶과 작업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 『화랑』지의 기자는 이 시기 박서보가 미술운동가, 미술대학 교수, 그리고 화가 세 방면으로 모두 “종횡무진”하고 있었다고 묘사한다. 이후 기사에서는 작가가 한국미술협회와 예총이라는 미술 단체에서 주요한 요직을 맡으며 추진한 현대미술 3대 운동인 앙데팡당전, 에꼴 드 서울전, 그리고 서울현대미술제의 성격과 박서보의 의도를 상세히 소개된다. 박서보는 인터뷰에서 “실력있는 젊은 작가가 국내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고, 국제전 참가의 길이 열릴 수 있는 그런 광장을 제공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이를 체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방법들로 새로운 전시회들을 조직했다고 인터뷰한다. 국전에서 선정되지 않더라도 “무명유명(無名有名), 학벌, 인맥과 관계 없이” 작가들이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광장”을 마련한 앙데팡당전, 비평가와 30대 예술가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와 커미셔너단이 “오늘날의 한국회화”를 대표할 수 있으며 “국제성을 지닌” 것으로 판단한 작가들을 선보이는 에꼴 드 서울전, 그리고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탈피하기” 위해 대구, 부산, 춘천 등 지방 작가들이 주체가 되어 추진하는 전시행사인 서울현대미술제는 모두 체계적으로 젊은 현대미술 작가들을 발굴하여 국내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나아가 국제 미술계로의 진출과 교류를 적극적으로 도모하기 위한 기획들이었다.
뒤이어 『화랑』 기사에서는 이 시기 박서보의 주요 작업인 연필 묘법의 예술관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합정동 차고 작업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인터뷰에서 언급되었듯, 박서보는 이 시기 홍대에서 강의를 해야 하는 수요일과 목요일에서는 연구실을 사용하고 수업이 없는 금, 토, 일요일에는 합정동 이층집의 차고를 활용한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합정동 작업실은 작품들을 바닥에 놓고 작업하는 박서보의 작업 방식을 수용할 수 있을 만한 넉넉한 공간을 제공했다. 인터뷰에 양면으로 실린 사진⓺에서 박서보는 작업실 면적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200호 가량의 큰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작업을 위해 특별 설계한 철제 브릿지 위에서 몸을 숙여 가장자리에서부터 긴 연필 선을 반복하여 긋고 있다. 이 사진은 박서보의 70년대 연필 묘법 작업 과정을 담은 희귀한 기록이다. 작업실에는 크고 작은 캔버스들을 겹겹이 사방의 벽에 기대어 보관하고 한 구석에 철제 테이블을 두었는데, 테이블 위에는 연필 묘법에서 사용하는 붓과 연필, 안료를 만들기 위한 절구공이와 그릇, 그리고 각종 액체들이 담긴 용기들을 두고 작은 작품의 경우 바닥이 아닌 테이블 위에서 바로 작업하기도 하였다.
1975년 10월 3일의 사진(네 번째 사진)에서 박서보 가족의 뒤편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건물이 박서보의 작업실이었던 차고 건물로 추정된다. 철제 대문을 통과해 마당을 가로지르는 육각형의 돌길을 따라가면 마당을 향해 놓인 안락의자와 차고의 벽면이 보인다. 대문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의자 뒤쪽으로 차고의 외벽에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의 <만돌린을 든 집시 소녀>(1874)의 포스터를 붙여놓은 점이 인상적이다.
명암의 깊은 대비감이 두드러지는 『화랑』 지 인터뷰 표지 사진에 포착된 박서보는 인터뷰에서 묘사되었듯이 “저력과 정열”이 선연한 눈빛으로 화면 밖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작가는 합정동 이층집에서 작업한 연필 묘법 작품들을 1973년 무라마쓰화랑에서의 개인전을 통해 시작된 일본 화랑과의 교류에서 적극적으로 선보였고 또한 이 시기 편지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파리 주요 화랑에서 전시를 도모하기 위해 친구인 김창열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럽 화단의 인물들과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프랑스를 오가며 개인적으로는 세계 무대로의 진출을 도모하고 또한 사회적으로 현대미술 운동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토착화, 나아가 국제화를 추진했던 이 시기 박서보의 활동 기반에는 1975년과 77년의 사진들(세 번째, 네 번째 사진)에서 포착된 가족들과의 일상에서와 같이 홍대에서의 고정적인 수입과 이를 바탕으로 한 안정적인 주거 환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
<주석>
1) 박서보 사진집에는 합정동 차고 작업실에서의 찍은 동일한 사진에 촬영자가 류기성으로 기록되어 있어 기사 내 사진의 출처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2) 박승숙,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박서보의 삶과 예술』(인물과 사상사, 2019), p. 235.
3) 이하 불란서주택의 건축사적 정보는 주택건축사학자 박철수 교수가 작성한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불란서주택’ 항목을 참고하였다. https://folkency.nfm.go.kr/topic/detail/8388
4) 동일한 일자에 동일한 복장으로 촬영된 사진들 일부에는 아내인 윤명숙이나 첫째 아들이 찍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어 1980년의 두 사진들도 가족들이 촬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5) 박승숙, 위와 동일.
6) 박철수, 위와 동일.
[원문]
이흥우, 「화가(画家)의 하루: 박서보(朴栖甫)」, 『화랑(画廊)』(1977년 겨울 No.18)
화가(画家)의 하루
박서보(朴栖甫)
사진(写真)·유 보미
화가(画家)의 하루
박서보(朴栖甫)
박서보(朴栖甫)씨의 하루 하루의 삶은 세 가지의 일로 밝고 저문다. 미술운동가로서의 일, 미술교수로서의 일, 그리고 더욱 본업이 될 화가(畫家)로서의 일이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韓國美術協會 理事長), 예총(藝總)부회장, 홍익대(弘益大) 교수, 그리고 화가(畫家) 박서보(朴栖甫), 이 세가지의 면모가 동시에 공존하며, 그의 인간적 저력과 정력이 격렬한 삼지창처럼 종횡무진, 각방향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
미협이사장, 예충[총]부회장 외에도 그는 72년(당시 미협(美協)부이사장)부터 앙데팡당전(展), 이어 75년부터 서울현대미술제(現代美術祭), 에꼴 드 서울전(展)을 주재해 왔다. 박서보(朴栖甫)씨는 76년말께부터 파리에서 3개월을 머무르다가 77년 2월에 귀국했고, 지난 8월 11일부터 8월말까지는 「한국(韓國)·현대미술(現代美術)의 단면(斷面)」전(展)(8월 16~28일·도쿄[동경](東京)센트랄 미술관·19명의 작가의 1백점전시)을 계기로 일본(日本)에 다녀왔다. 23번째의 외국여행이었다.
1972년 박서보(朴栖甫)씨가 미협(美協)에서 앙데팡당전(展)을 「조직」한 것은 그의 「예술운동으로서의 이상」의 구현이었다. 젊고 패기있는 작가들이 설 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일을 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심사위원의 안목과 일치되지 않아서 국전(國展)에서 몇번을 떨어지고 초대전(招待展)에서 모두 빠지게 되면 새로운 일, 좋은 일을 좀 해보려는 젊은 작가들은 맥이 빠지고 용기를 잃게 되기 쉽다. 앙데팡당전(展)은 그런 젊은 작가들은 위한 광장을 마련한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국제전(國際展)(특히 젊은 작가(作家)를 대상으로 하는) 출품작가를 선정한다.
『과거에는 국제전(國際展) 참가 작가를 미협(美協)임원들이 뽑았는데, 새로운 세력이 클 소지가 적었다』고 그는 말한다.
앙데팡당전(展)은 무명유명(無名有名), 학벌, 인맥과 관계없이 누구나 작품을 내놓으면 전시하고 그 일이 옳으면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광장으로서 마련된 것이었다. 77년 5회전(展)이 열렸다.
『그런 광장, 실력있는 젊은 작가가 국내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고, 국제전 참가의 길이 열릴 수 있는 그런 광장을 제공하는 것이 내 임무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범위를 넓혀, 실제로 화단(畫壇)을 1년에 한번쯤씩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것이 에꼴 드 서울전(展)이다.』
에꼴 드 서울전(展)은 77년 6월 제3회전을 가졌다. 그 시스팀은 6~7명의 운영위원이, 6명의 커미셔너를 지명한다. 3명은 비평가고, 3명은 30대의 작가이다. 커미셔너에 의해 에꼴 드 서울전(展)의 초대작가가, 유능한 신인과 기정작가를 가리지 않고 지명된다. 물론 그것은 그 한해로 끝나고 다음번에는 새로운 커미셔너에 의한 초대작가들이 새로 지명된다. 에꼴 드 서울의 정신은 ⓵세계 어디에라도 이것이 오늘의 한국회화(韓國繪畫)다 하고 내놓을 수 있어야 하며 ⓶국제성을 지닌 작품이어야 한다는 기조위에 선다.
『국제성을 잘못 받아들이면 무국적성으로 빠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이라는 말을 나는 「내셔널」의 정신기반 위에 「인터」가 붙여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에꼴 드 서울이 지향하는 국제성의 개념은 그런 것이다. 물론 각작가의 방법론과 발상법은 다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 근거를 흐르는 공통성이 존재한다. 현대 미술에 있어서 국제적이라는 동시성을 지닌 공통의 문제, 그 속에 우리가 다른 나라하고 어떻게 달라야 하며, 어떻게 기여해야 할 것이냐, 이것이 에꼴 드 서울의 존재 이유이다.』
박서보(朴栖甫)씨는 그런 공통성을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집단개성(集團個性)」이라고도 말한다. 도쿄[동경](東京)에서의 「한국(韓國)·현대미술(現代美術)의 단면(斷面)」전(展)에서도 그런 의미에서의 집단개성이 잘 나타났다고 그곳 평자(評者)들은 말했다 한다.
『내가 미협이사장(美協理事長) 일을 하는 것은 그런 미술 이념을 추진하기 위한 수단으로』라고 박서보(朴栖甫)씨는 말한다.
77년에 역시 3회전(展)을 연 서울현대미술제(現代美術祭)는 「앙데팡당과 에꼴 드 서울의 에센스를 모아 더 광범한 공통의 장(場)을 이루어가는 미술운동」이다. 그것은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탈피하기 위해 대구(大邱), 부산(釜山), 춘천(春川)(강원현대미술제(江原現代美術祭)·각지방 현대미술제(現代美術祭)는 그곳 작가들이 주체가 되어 추진, 전국적인 규모로 열린다) 현대(現代)미술제로 확산되며 일종의 「미술연방(聯邦)체제」를 지향한다고도 한다.
『이런 미술운동이 10년쯤 계속되면 무언가 기대해볼만한 게 되어질 것이다.』
박서보(朴栖甫)씨는 하루 자는 시간이 밤중의 3시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낮에 잠간씩 피곤을 풀기 위해 아무데서나 앉은채로 눈을 붙인다. 매주 4일 홍대(弘大)에 나가 대학(大學)과 대학원(大學院)강의(주(週)14시간)를 맡는다. 일(회의 등)이 있을 때마다 미협(美協), 예총(藝總)에 들른다. 강의시간이 없는 수(水)·목(木)요일은 학교 연구실에서도 제작을 하고, 학교를 안나가는 금(金)·토(土)·일(日)요일에는 단체 일이 아니면 합정동(合井洞) 396-14 집에서 제작을 한다. 집의 작업장은 공간이 꽤 넓은 차고(車庫)이다.
미술운동, 미술 교수로서의 일들에 매이는 낮시간보다 집에서 작업을 하는 시간은 대개 밤이 된다고 한다.
앙포르멜, 원형질(原形質), 기하학적추상, 허상(虛像)과 실상(實像)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편력해온 박서보(朴栖甫)씨가 탈(脫)이미지, 무목적성의 순수행위로서 「묘법(描法)」을 추구해 온 것은 1967년 께부터였다.
흰색의 유성(油性) 페인트가 칠해진 캔버스에 연필로 같은 방향, 비슷한 크기의 규칙적인(사선(斜線)·수평(水平) 등) 선(線)을 빡빡하게 그어가는 것이다. 줄을 그렇게 그었다는 결과가 아니고 그렇게 긋는다는 행위 자체에 화가(畫家)로서의 작업의 의미가 부여된다.
『나는 연필을 그리는 도구로서 쓰는게 아니라, 행위의 도구로서 연필을 선택한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위해서이다.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탈(脫)이미지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무목적성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행위 그 자체에서 살고자 해야 한다. 이미지나 형상, 어떤 환상을 쫓지 않는다는 그런 탈(脫)이미지의 무목적성은 도가사상(道家)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순수무위(無爲)행위라고 해도, 무위(無爲)순수행위라고 해도 좋다. 그런 행위로써 근대미술이 쫓던 이미지라는 환상을 탈피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비로소 참다운 해방감을 맛본다. 거기에는 무엇을 그렸다든가 무엇을 의미했다든가 하는 환상이 없다.』
동양에서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도 나도 없는 상태」같은 것이 자주 말해지기도 했는데, 박서보(朴栖甫)씨는 연필의 묘법을 통해 그런 상태에 대한 자기 나름의 현대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도 같다. 작가(作家)의 그런 행위는 행위의 결과로서 캔버스에 연필의 흔적(궤적(軌跡)과도 같은)을 남기게 된다. 관객은 그것을 그림으로서 받아들이고 마음껏 자유롭게 그것을 느끼면 된다. 화면의 그어진 흔적은 강도 산도 극단적으로 말하면 연필자국도 아니므로 관람자는 그 어느것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이 자유롭게 느끼면 되는 것이다.
박서보(朴栖甫)씨의 묘법(描法)은 초기이후, 상당히 얌전한 규칙적인 포름[form; 양식] 속의 금욕적일만큼 억제된 상태에서 겹겹이 행위되어 왔었다. 그 후 작품에따라 그 선의 포룸[form; 양식]이 더 활달해지고 꽤 자재로움을 보이기 시작했다. 요즈음에는 차차 더 그랬다. 한폭의 캔버스에 표현성이 배제되는 「연필로서의 행위」를 지속한다는 금욕성, 억제성은 유지하면서도 묘선(描線)들은 서서히 더 자재로운 세계로 펼쳐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표현의 체념, 또는 단념으로 상징되는 박서보(朴栖甫)씨의 묘법(描法)에서의 금욕적인 상태에 대해 「정립된 제도속에 자기억제를 하면서 자기 순화를 해가는 유교적 윤리관(성장 환경이기도 한)과도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서서히 생각하게 된다」고 그 자신은 말한다.
그는 백색이 칠해진 캔버스, 혹은 불문(佛文) 신문지 등의 화면에도 작업을 해오다가 요즈음에는 마대(麻袋)의 화포(백색 유채(白色 油彩)칠한)를 쓰기 시작했다.
탈(脫)이미지, 표현의 단념이 결과하는 순수행위의 결과는 「비창조·비개성적인 것으로 흘러가 중성적(中性的)이며 무명적구조성(無名的構造性)」을 드러낸다. 거기서 과거와 다른 오늘의 예술의 의미를 박서보(朴栖甫)씨는 행위의 순수성을 통해 행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흥우 기(李興雨 記)>
ARCHIVE FOCUS⎮22호 박서보의 작업실(5) 합정동 이층집
합정동 이층집에서의 사진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진: 1980년 7월 6일
세 번째 사진: 김구림 촬영, 1977년 6월 5일 박서보의 사진
네 번째 사진: 1975년 10월 3일 합정동 집에서 아내 윤명숙과 장남 박승조, 이남 박승호, 장녀 박승숙과 함께
자료 출처: 박서보 사진모음집 No.2, 3, 4
이흥우, 「화가의 하루: 박서보」, 『화랑』(1977년 겨울 No.18)
자료 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 No.6
[한글] (원문은 본 게시글 하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흥우, 「화가의 하루: 박서보」, 『화랑』(1977년 겨울 No.18) (사진: 유보미)1)
박서보 씨의 하루 하루의 삶은 세 가지의 일로 밝고 저문다. 미술 운동가로서의 일, 미술 교수로서의 일, 그리고 더욱 본업이 될 화가로서의 일이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예총 부회장, 홍익대 교수, 그리고 화가 박서보, 이 세 가지의 면모가 동시에 공존하며, 그의 인간적 저력과 정력이 격렬한 삼지창처럼 종횡무진, 각 방향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
미협 이사장, 예충[예총] 부회장 외에도 그는 72년(당시 미협 부이사장)부터 앙데팡당 전, 이어 75년부터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 전을 주재해 왔다. 박서보씨는 76년 말께부터 파리에서 3개월을 머무르다가 77년 2월에 귀국했고, 지난 8월 11일부터 8월말까지는 《한국·현대미술의 단면》 전(8월 16~28일·도쿄센트럴미술관·19명의 작가의 1백 점 전시)을 계기로 일본에 다녀왔다. 23번째의 외국 여행이었다.
1972년 박서보 씨가 미협에서 앙데팡당 전을 ‘조직’한 것은 그의 ‘예술 운동으로서의 이상’의 구현이었다. 젊고 패기 있는 작가들이 설 땅을 마련하기 위해서 였다.
새로운 일을 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심사위원의 안목과 일치되지 않아서 국전(國展)에서 몇 번을 떨어지고 초대전에서 모두 빠지게 되면 새로운 일, 좋은 일을 좀 해보려는 젊은 작가들은 맥이 빠지고 용기를 잃게 되기 쉽다. 앙데팡당 전은 그런 젊은 작가들은 위한 광장을 마련한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국제전(특히 젊은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출품 작가를 선정한다.
“과거에는 국제전 참가 작가를 미협 임원들이 뽑았는데, 새로운 세력이 클 소지가 적었다”고 그는 말한다.
앙데팡당 전은 무명유명(無名有名), 학벌, 인맥과 관계 없이 누구나 작품을 내놓으면 전시하고 그 일이 옳으면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광장으로서 마련된 것이었다. 77년 5회전이 열렸다.
“그런 광장, 실력있는 젊은 작가가 국내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고, 국제전 참가의 길이 열릴 수 있는 그런 광장을 제공하는 것이 내 임무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범위를 넓혀, 실제로 화단을 1년에 한 번쯤 씩 정리해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것이 에꼴 드 서울 전이다.”
에꼴 드 서울 전은 77년 6월 제 3회전을 가졌다. 그 시스팀[시스템]은 6~7명의 운영 위원이, 6명의 커미셔너를 지명한다. 3명은 비평가고, 3명은 30대의 작가이다. 커미셔너에 의해 에꼴 드 서울 전의 초대작가가, 유능한 신인과 기정작가를 가리지 않고 지명된다. 물론 그것은 그 한 해로 끝나고 다음 번에는 새로운 커미셔너에 의한 초대 작가들이 새로 지명된다. 에꼴 드 서울의 정신은 ⓵세계 어디에라도 이것이 오늘의 한국 회화다 하고 내놓을 수 있어야 하며 ⓶국제성을 지닌 작품이어야 한다는 기조 위에 선다.
“국제성을 잘못 받아들이면 무국적성으로 빠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이라는 말을 나는 ‘내셔널’의 정신기반 위에 ‘인터’가 붙여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에꼴 드 서울이 지향하는 국제성의 개념은 그런 것이다. 물론 각 작가의 방법론과 발상법은 다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 근거를 흐르는 공통성이 존재한다. 현대 미술에 있어서 국제적이라는 동시성을 지닌 공통의 문제, 그 속에 우리가 다른 나라하고 어떻게 달라야 하며, 어떻게 기여해야 할 것이냐, 이것이 에꼴 드 서울의 존재 이유이다.”
박서보 씨는 그런 공통성을 현대 미술에 있어서의 ‘집단 개성’이라고도 말한다. 도쿄에서의 《한국·현대미술의 단면》 전에서도 그런 의미에서의 집단 개성이 잘 나타났다고 그 곳 평자(評者)들은 말했다 한다.
“내가 미협 이사장 일을 하는 것은 그런 미술 이념을 추진하기 위한 수단으로”라고 박서보 씨는 말한다.
77년에 역시 3회전을 연 서울현대미술제는 ‘앙데팡당과 에꼴 드 서울의 에센스를 모아 더 광범한 공통의 장(場)을 이루어가는 미술운동’이다. 그것은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탈피하기 위해 대구, 부산, 춘천(강원현대미술제·각 지방 현대미술제는 그 곳 작가들이 주체가 되어 추진, 전국적인 규모로 열린다) 현대미술제로 확산되며 일종의 ‘미술 연방 체제’를 지향한다고도 한다.
“이런 미술 운동이 10년쯤 계속되면 무언가 기대해 볼만한 게 되어질 것이다.”
박서보 씨는 하루 자는 시간이 밤 중의 3시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낮에 잠깐씩 피곤을 풀기 위해 아무데서나 앉은 채로 눈을 붙인다. 매주 4일 홍대에 나가 대학과 대학원 강의(주 14시간)를 맡는다. 일(회의 등)이 있을 때마다 미협, 예총에 들른다. 강의 시간이 없는 수·목요일은 학교 연구실에서도 제작을 하고, 학교를 안 나가는 금·토·일요일에는 단체 일이 아니면 합정동 396-14 집에서 제작을 한다. 집의 작업장은 공간이 꽤 넓은 차고이다.
미술 운동, 미술 교수로서의 일들에 매이는 낮 시간보다 집에서 작업을 하는 시간은 대개 밤이 된다고 한다.
앙포르멜, 원형질, 기하학적 추상, 허상(虛像)과 실상(實像) 다채로운 작품 세계를 편력해온 박서보 씨가 탈(脫)이미지, 무목적성의 순수 행위로서 「묘법」을 추구해 온 것은 1967년께부터 였다.
흰색의 유성(油性) 페인트가 칠해진 캔버스에 연필로 같은 방향, 비슷한 크기의 규칙적인(사선·수평 등) 선을 빡빡하게 그어가는 것이다. 줄을 그렇게 그었다는 결과가 아니고 그렇게 긋는다는 행위 자체에 화가로서의 작업의 의미가 부여된다.
“나는 연필을 그리는 도구로서 쓰는게 아니라, 행위의 도구로서 연필을 선택한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위해서이다.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탈이미지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무목적성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행위 그 자체에서 살고자 해야 한다. 이미지나 형상, 어떤 환상을 쫓지 않는다는 그런 탈이미지의 무목적성은 도가사상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순수무위(無爲)행위라고 해도, 무위순수행위라고 해도 좋다. 그런 행위로써 근대미술이 쫓던 이미지라는 환상을 탈피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비로소 참다운 해방감을 맛본다. 거기에는 무엇을 그렸다든가 무엇을 의미했다든가 하는 환상이 없다.”
동양에서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도 나도 없는 상태’ 같은 것이 자주 말해지기도 했는데, 박서보 씨는 연필의 묘법을 통해 그런 상태에 대한 자기 나름의 현대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도 같다. 작가의 그런 행위는 행위의 결과로서 캔버스에 연필의 흔적(궤적과도 같은)을 남기게 된다. 관객은 그것을 그림으로서 받아들이고 마음껏 자유롭게 그것을 느끼면 된다. 화면의 그어진 흔적은 강도 산도 극단적으로 말하면 연필 자국도 아니므로 관람자는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이 자유롭게 느끼면 되는 것이다.
박서보 씨의 묘법은 초기 이후, 상당히 얌전한 규칙적인 포름[form; 양식] 속의 금욕적일 만큼 억제된 상태에서 겹겹이 행위되어 왔었다. 그 후 작품에 따라 그 선의 포룸[form; 양식]이 더 활달해지고 꽤 자재로움을 보이기 시작했다. 요즈음에는 차차 더 그랬다. 한 폭의 캔버스에 표현성이 배제되는 ‘연필로서의 행위’를 지속한다는 금욕성, 억제성은 유지하면서도 묘선(描線)들은 서서히 더 자재로운 세계로 펼쳐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표현의 체념, 또는 단념으로 상징되는 박서보 씨의 묘법에서의 금욕적인 상태에 대해 ‘정립된 제도 속에 자기 억제를 하면서 자기 순화를 해가는 유교적 윤리관(성장 환경이기도 한)과도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서서히 생각하게 된다”고 그 자신은 말한다.
그는 백색이 칠해진 캔버스, 혹은 불문(佛文) 신문지 등의 화면에도 작업을 해오다가 요즈음에는 마대의 화포(백색 유채 칠한)를 쓰기 시작했다.
탈이미지, 표현의 단념이 결과하는 순수행위의 결과는 ‘비창조·비개성적인 것으로 흘러가 중성적(中性的)이며 무명적 구조성(無名的 構造性)’을 드러낸다. 거기서 과거와 다른 오늘의 예술의 의미를 박서보 씨는 행위의 순수성을 통해 행위하고 있는 것이다.
<표기 원칙>
- 한글본: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에 사용된 기호나 숫자는 현대한국어 문법에 맞추어 교정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어 표기 시 사용되는 낫표 「」는 생략, 겹낫표 『』는 의미상 사용에 따라 따옴표“ ”로 교정했다. 변경된 명칭이나 번역자 주, 오타 등의 수정은 대괄호 [ ]로 표기하고 긴 내용의 경우에는 주석을 달았다.
[자료 설명]
ARCHIVE FOCUS 22호에서 살펴볼 박서보의 작업실은 합정동 이층집과 차고 작업실이다. 박서보는 1974년 3월 말 이후, 3여년을 살았던 신촌 창전동 개천가 집을 정리하고 합정동의 ‘미니 이층집’으로 이사했다. 74년 출판사 일조각에서 받은 교과서 작업 대금과 창전동 집을 처분한 자금, 그리고 저축을 합쳐 구입한 이 집은 빨간 벽돌로 된 외벽과 경사진 지붕이 특징적인 현대식 단독 주택이었다.2) 합정동 집에서 박서보는 그의 삶에서 대내외적으로 가장 활발히 활동했던 74년부터 86년까지의 열두 해를 보냈다.
70년대 대도시 지역에서 유행처럼 지어지며 소위 ‘불란서주택’이라고 불리던 주거 건축의 특징은 완만한 팔(八)자의 뾰족지붕과 아치형의 현관이나 대문, 그리고 콘크리트 기둥으로 이루어진 2층의 발코니이다.3) 불란서주택 양식으로 지어진 합정동 이층집의 특징적 모습들을 22호의 첫 번째 사진과 두 번째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사진에서 박서보는 대문 옆으로 서 있던 동네 이웃집의 외관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는데, 이 시기 종종 집에서 찍은 박서보의 사진들은 전시 도록 등에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되었다.4) 박서보가 거주했던 합정동 동네의 주택들은 다수가 사진 속 집처럼 뾰족 지붕과 발코니를 가진 이층의 단독 주택인 불란서주택 양식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 사진에는 불란서주택의 특징 중 하나인 기둥을 두른 발코니에 걸터 앉아 있는 박서보의 모습이 담겨 있다. 발코니의 기둥부는 주두부(capital)와 주초(base), 호리병이나 곡선의 조각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기둥(shaft)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실재하는 양식을 모방한 것이 아닌 고대 그리스 건축의 구성 요소나 기하학적인 기둥 형태를 통해 서양풍의 느낌만을 차용한 것이었다. 박서보의 아내 윤명숙은 “거실 한가운데 현란하게 반짝이는 샹들리에에 홀랑 빠져 덥석 그 집을 계약해 버렸다”고 회고했는데,5) 이처럼 합정동 이층집과 같은 불란서주택은 70년대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며 단독 주택을 수요로 하던 중산층을 겨냥하여 실제 프랑스 건축 양식과는 무관하지만 프랑스와 연관지었던 세련된 고급 문화의 이미지를 빌려 “꿈에 그린 집”6)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공급된 거주 공간이었다. 불란서주택은 대도시에서 유행 이후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된 농촌주택개량사업에서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70년대 한국를 대표하는 건축 양식 중 하나가 되었다.
현대화랑에서 발행한 잡지 『화랑(画廊)』의 주요 코너였던 ‘화가(画家)의 하루’로 실린 작가의 1977년 인터뷰(다섯 번째 이미지부터)에서는 합정동 이층집 시기 박서보의 삶과 작업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 『화랑』지의 기자는 이 시기 박서보가 미술운동가, 미술대학 교수, 그리고 화가 세 방면으로 모두 “종횡무진”하고 있었다고 묘사한다. 이후 기사에서는 작가가 한국미술협회와 예총이라는 미술 단체에서 주요한 요직을 맡으며 추진한 현대미술 3대 운동인 앙데팡당전, 에꼴 드 서울전, 그리고 서울현대미술제의 성격과 박서보의 의도를 상세히 소개된다. 박서보는 인터뷰에서 “실력있는 젊은 작가가 국내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고, 국제전 참가의 길이 열릴 수 있는 그런 광장을 제공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이를 체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방법들로 새로운 전시회들을 조직했다고 인터뷰한다. 국전에서 선정되지 않더라도 “무명유명(無名有名), 학벌, 인맥과 관계 없이” 작가들이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광장”을 마련한 앙데팡당전, 비평가와 30대 예술가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와 커미셔너단이 “오늘날의 한국회화”를 대표할 수 있으며 “국제성을 지닌” 것으로 판단한 작가들을 선보이는 에꼴 드 서울전, 그리고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탈피하기” 위해 대구, 부산, 춘천 등 지방 작가들이 주체가 되어 추진하는 전시행사인 서울현대미술제는 모두 체계적으로 젊은 현대미술 작가들을 발굴하여 국내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나아가 국제 미술계로의 진출과 교류를 적극적으로 도모하기 위한 기획들이었다.
뒤이어 『화랑』 기사에서는 이 시기 박서보의 주요 작업인 연필 묘법의 예술관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합정동 차고 작업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인터뷰에서 언급되었듯, 박서보는 이 시기 홍대에서 강의를 해야 하는 수요일과 목요일에서는 연구실을 사용하고 수업이 없는 금, 토, 일요일에는 합정동 이층집의 차고를 활용한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합정동 작업실은 작품들을 바닥에 놓고 작업하는 박서보의 작업 방식을 수용할 수 있을 만한 넉넉한 공간을 제공했다. 인터뷰에 양면으로 실린 사진⓺에서 박서보는 작업실 면적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200호 가량의 큰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작업을 위해 특별 설계한 철제 브릿지 위에서 몸을 숙여 가장자리에서부터 긴 연필 선을 반복하여 긋고 있다. 이 사진은 박서보의 70년대 연필 묘법 작업 과정을 담은 희귀한 기록이다. 작업실에는 크고 작은 캔버스들을 겹겹이 사방의 벽에 기대어 보관하고 한 구석에 철제 테이블을 두었는데, 테이블 위에는 연필 묘법에서 사용하는 붓과 연필, 안료를 만들기 위한 절구공이와 그릇, 그리고 각종 액체들이 담긴 용기들을 두고 작은 작품의 경우 바닥이 아닌 테이블 위에서 바로 작업하기도 하였다.
1975년 10월 3일의 사진(네 번째 사진)에서 박서보 가족의 뒤편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건물이 박서보의 작업실이었던 차고 건물로 추정된다. 철제 대문을 통과해 마당을 가로지르는 육각형의 돌길을 따라가면 마당을 향해 놓인 안락의자와 차고의 벽면이 보인다. 대문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의자 뒤쪽으로 차고의 외벽에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의 <만돌린을 든 집시 소녀>(1874)의 포스터를 붙여놓은 점이 인상적이다.
명암의 깊은 대비감이 두드러지는 『화랑』 지 인터뷰 표지 사진에 포착된 박서보는 인터뷰에서 묘사되었듯이 “저력과 정열”이 선연한 눈빛으로 화면 밖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작가는 합정동 이층집에서 작업한 연필 묘법 작품들을 1973년 무라마쓰화랑에서의 개인전을 통해 시작된 일본 화랑과의 교류에서 적극적으로 선보였고 또한 이 시기 편지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파리 주요 화랑에서 전시를 도모하기 위해 친구인 김창열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럽 화단의 인물들과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프랑스를 오가며 개인적으로는 세계 무대로의 진출을 도모하고 또한 사회적으로 현대미술 운동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토착화, 나아가 국제화를 추진했던 이 시기 박서보의 활동 기반에는 1975년과 77년의 사진들(세 번째, 네 번째 사진)에서 포착된 가족들과의 일상에서와 같이 홍대에서의 고정적인 수입과 이를 바탕으로 한 안정적인 주거 환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
<주석>
1) 박서보 사진집에는 합정동 차고 작업실에서의 찍은 동일한 사진에 촬영자가 류기성으로 기록되어 있어 기사 내 사진의 출처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2) 박승숙,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박서보의 삶과 예술』(인물과 사상사, 2019), p. 235.
3) 이하 불란서주택의 건축사적 정보는 주택건축사학자 박철수 교수가 작성한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불란서주택’ 항목을 참고하였다. https://folkency.nfm.go.kr/topic/detail/8388
4) 동일한 일자에 동일한 복장으로 촬영된 사진들 일부에는 아내인 윤명숙이나 첫째 아들이 찍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어 1980년의 두 사진들도 가족들이 촬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5) 박승숙, 위와 동일.
6) 박철수, 위와 동일.
[원문]
이흥우, 「화가(画家)의 하루: 박서보(朴栖甫)」, 『화랑(画廊)』(1977년 겨울 No.18)
화가(画家)의 하루
박서보(朴栖甫)
사진(写真)·유 보미
화가(画家)의 하루
박서보(朴栖甫)
박서보(朴栖甫)씨의 하루 하루의 삶은 세 가지의 일로 밝고 저문다. 미술운동가로서의 일, 미술교수로서의 일, 그리고 더욱 본업이 될 화가(畫家)로서의 일이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韓國美術協會 理事長), 예총(藝總)부회장, 홍익대(弘益大) 교수, 그리고 화가(畫家) 박서보(朴栖甫), 이 세가지의 면모가 동시에 공존하며, 그의 인간적 저력과 정력이 격렬한 삼지창처럼 종횡무진, 각방향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
미협이사장, 예충[총]부회장 외에도 그는 72년(당시 미협(美協)부이사장)부터 앙데팡당전(展), 이어 75년부터 서울현대미술제(現代美術祭), 에꼴 드 서울전(展)을 주재해 왔다. 박서보(朴栖甫)씨는 76년말께부터 파리에서 3개월을 머무르다가 77년 2월에 귀국했고, 지난 8월 11일부터 8월말까지는 「한국(韓國)·현대미술(現代美術)의 단면(斷面)」전(展)(8월 16~28일·도쿄[동경](東京)센트랄 미술관·19명의 작가의 1백점전시)을 계기로 일본(日本)에 다녀왔다. 23번째의 외국여행이었다.
1972년 박서보(朴栖甫)씨가 미협(美協)에서 앙데팡당전(展)을 「조직」한 것은 그의 「예술운동으로서의 이상」의 구현이었다. 젊고 패기있는 작가들이 설 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일을 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심사위원의 안목과 일치되지 않아서 국전(國展)에서 몇번을 떨어지고 초대전(招待展)에서 모두 빠지게 되면 새로운 일, 좋은 일을 좀 해보려는 젊은 작가들은 맥이 빠지고 용기를 잃게 되기 쉽다. 앙데팡당전(展)은 그런 젊은 작가들은 위한 광장을 마련한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국제전(國際展)(특히 젊은 작가(作家)를 대상으로 하는) 출품작가를 선정한다.
『과거에는 국제전(國際展) 참가 작가를 미협(美協)임원들이 뽑았는데, 새로운 세력이 클 소지가 적었다』고 그는 말한다.
앙데팡당전(展)은 무명유명(無名有名), 학벌, 인맥과 관계없이 누구나 작품을 내놓으면 전시하고 그 일이 옳으면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광장으로서 마련된 것이었다. 77년 5회전(展)이 열렸다.
『그런 광장, 실력있는 젊은 작가가 국내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고, 국제전 참가의 길이 열릴 수 있는 그런 광장을 제공하는 것이 내 임무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범위를 넓혀, 실제로 화단(畫壇)을 1년에 한번쯤씩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것이 에꼴 드 서울전(展)이다.』
에꼴 드 서울전(展)은 77년 6월 제3회전을 가졌다. 그 시스팀은 6~7명의 운영위원이, 6명의 커미셔너를 지명한다. 3명은 비평가고, 3명은 30대의 작가이다. 커미셔너에 의해 에꼴 드 서울전(展)의 초대작가가, 유능한 신인과 기정작가를 가리지 않고 지명된다. 물론 그것은 그 한해로 끝나고 다음번에는 새로운 커미셔너에 의한 초대작가들이 새로 지명된다. 에꼴 드 서울의 정신은 ⓵세계 어디에라도 이것이 오늘의 한국회화(韓國繪畫)다 하고 내놓을 수 있어야 하며 ⓶국제성을 지닌 작품이어야 한다는 기조위에 선다.
『국제성을 잘못 받아들이면 무국적성으로 빠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이라는 말을 나는 「내셔널」의 정신기반 위에 「인터」가 붙여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에꼴 드 서울이 지향하는 국제성의 개념은 그런 것이다. 물론 각작가의 방법론과 발상법은 다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 근거를 흐르는 공통성이 존재한다. 현대 미술에 있어서 국제적이라는 동시성을 지닌 공통의 문제, 그 속에 우리가 다른 나라하고 어떻게 달라야 하며, 어떻게 기여해야 할 것이냐, 이것이 에꼴 드 서울의 존재 이유이다.』
박서보(朴栖甫)씨는 그런 공통성을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집단개성(集團個性)」이라고도 말한다. 도쿄[동경](東京)에서의 「한국(韓國)·현대미술(現代美術)의 단면(斷面)」전(展)에서도 그런 의미에서의 집단개성이 잘 나타났다고 그곳 평자(評者)들은 말했다 한다.
『내가 미협이사장(美協理事長) 일을 하는 것은 그런 미술 이념을 추진하기 위한 수단으로』라고 박서보(朴栖甫)씨는 말한다.
77년에 역시 3회전(展)을 연 서울현대미술제(現代美術祭)는 「앙데팡당과 에꼴 드 서울의 에센스를 모아 더 광범한 공통의 장(場)을 이루어가는 미술운동」이다. 그것은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탈피하기 위해 대구(大邱), 부산(釜山), 춘천(春川)(강원현대미술제(江原現代美術祭)·각지방 현대미술제(現代美術祭)는 그곳 작가들이 주체가 되어 추진, 전국적인 규모로 열린다) 현대(現代)미술제로 확산되며 일종의 「미술연방(聯邦)체제」를 지향한다고도 한다.
『이런 미술운동이 10년쯤 계속되면 무언가 기대해볼만한 게 되어질 것이다.』
박서보(朴栖甫)씨는 하루 자는 시간이 밤중의 3시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낮에 잠간씩 피곤을 풀기 위해 아무데서나 앉은채로 눈을 붙인다. 매주 4일 홍대(弘大)에 나가 대학(大學)과 대학원(大學院)강의(주(週)14시간)를 맡는다. 일(회의 등)이 있을 때마다 미협(美協), 예총(藝總)에 들른다. 강의시간이 없는 수(水)·목(木)요일은 학교 연구실에서도 제작을 하고, 학교를 안나가는 금(金)·토(土)·일(日)요일에는 단체 일이 아니면 합정동(合井洞) 396-14 집에서 제작을 한다. 집의 작업장은 공간이 꽤 넓은 차고(車庫)이다.
미술운동, 미술 교수로서의 일들에 매이는 낮시간보다 집에서 작업을 하는 시간은 대개 밤이 된다고 한다.
앙포르멜, 원형질(原形質), 기하학적추상, 허상(虛像)과 실상(實像)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편력해온 박서보(朴栖甫)씨가 탈(脫)이미지, 무목적성의 순수행위로서 「묘법(描法)」을 추구해 온 것은 1967년 께부터였다.
흰색의 유성(油性) 페인트가 칠해진 캔버스에 연필로 같은 방향, 비슷한 크기의 규칙적인(사선(斜線)·수평(水平) 등) 선(線)을 빡빡하게 그어가는 것이다. 줄을 그렇게 그었다는 결과가 아니고 그렇게 긋는다는 행위 자체에 화가(畫家)로서의 작업의 의미가 부여된다.
『나는 연필을 그리는 도구로서 쓰는게 아니라, 행위의 도구로서 연필을 선택한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위해서이다.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탈(脫)이미지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무목적성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행위 그 자체에서 살고자 해야 한다. 이미지나 형상, 어떤 환상을 쫓지 않는다는 그런 탈(脫)이미지의 무목적성은 도가사상(道家)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순수무위(無爲)행위라고 해도, 무위(無爲)순수행위라고 해도 좋다. 그런 행위로써 근대미술이 쫓던 이미지라는 환상을 탈피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비로소 참다운 해방감을 맛본다. 거기에는 무엇을 그렸다든가 무엇을 의미했다든가 하는 환상이 없다.』
동양에서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도 나도 없는 상태」같은 것이 자주 말해지기도 했는데, 박서보(朴栖甫)씨는 연필의 묘법을 통해 그런 상태에 대한 자기 나름의 현대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도 같다. 작가(作家)의 그런 행위는 행위의 결과로서 캔버스에 연필의 흔적(궤적(軌跡)과도 같은)을 남기게 된다. 관객은 그것을 그림으로서 받아들이고 마음껏 자유롭게 그것을 느끼면 된다. 화면의 그어진 흔적은 강도 산도 극단적으로 말하면 연필자국도 아니므로 관람자는 그 어느것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이 자유롭게 느끼면 되는 것이다.
박서보(朴栖甫)씨의 묘법(描法)은 초기이후, 상당히 얌전한 규칙적인 포름[form; 양식] 속의 금욕적일만큼 억제된 상태에서 겹겹이 행위되어 왔었다. 그 후 작품에따라 그 선의 포룸[form; 양식]이 더 활달해지고 꽤 자재로움을 보이기 시작했다. 요즈음에는 차차 더 그랬다. 한폭의 캔버스에 표현성이 배제되는 「연필로서의 행위」를 지속한다는 금욕성, 억제성은 유지하면서도 묘선(描線)들은 서서히 더 자재로운 세계로 펼쳐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표현의 체념, 또는 단념으로 상징되는 박서보(朴栖甫)씨의 묘법(描法)에서의 금욕적인 상태에 대해 「정립된 제도속에 자기억제를 하면서 자기 순화를 해가는 유교적 윤리관(성장 환경이기도 한)과도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서서히 생각하게 된다」고 그 자신은 말한다.
그는 백색이 칠해진 캔버스, 혹은 불문(佛文) 신문지 등의 화면에도 작업을 해오다가 요즈음에는 마대(麻袋)의 화포(백색 유채(白色 油彩)칠한)를 쓰기 시작했다.
탈(脫)이미지, 표현의 단념이 결과하는 순수행위의 결과는 「비창조·비개성적인 것으로 흘러가 중성적(中性的)이며 무명적구조성(無名的構造性)」을 드러낸다. 거기서 과거와 다른 오늘의 예술의 의미를 박서보(朴栖甫)씨는 행위의 순수성을 통해 행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흥우 기(李興雨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