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를 종종 의심받는 이 야심가에게서 독기가 빠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김창열이가 그 때 파리에서 말이지~”, “이우환이랑 내가 동경에서 이러저러 했다구~” 이처럼 이물 없이 회상하는 그의 오랜 벗들이, 물방울, 혹은 점과 선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주자로 세계 시장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때, 박서보는 ‘만년 3위’의 설움을 삼켜야 했다. 상황이 갑자기 뒤집어진 건 2015년의 일이었다. 2006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00호 묘법이 삼천만 원 선에 거래됐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홍콩 크리스티 경매 등에서 연달아 십억 원이 넘는 가격에 팔려나가기 시작했던 것. 현재 이들 밀리언 달러 작가들 중 호당 거래 가격 1위는, 박서보다.
서구의 ‘모노크롬(Monocrome)’이나 일본의 ‘모노하(Mono-ha, もの派)’가 아닌, 한국의 단색화라는 고유명사에 대한 시장의 관심은 2012년 즈음 시작됐다. 그러다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단색화 특별전을 통해 열풍과도 같은 존재감을 드러냈다. 2016년 영국 화이트큐브 갤러리의 박서보 개인전에서는 모든 작품이 ‘완판’됐다. 한국인으로서 화이트큐브에 입성한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이 무렵부터 박서보와 그의 시대를 둘러싼 학술적, 예술적 재조명도 활발해졌다. 2000년대 초, 중국의 저명 평론가 황두(Huang Du)가 “한국에 위대한 작가 박서보가 있다. 중국 작가들이 그를 가장 닮고 싶어한다.”고 쓴 이후, 마침내 진짜 그의 시대가 온 것. 박서보는 학교에서도, 미술관에서도, 그리고 시장에서도 승리했다.
그가 대의를 품고 예술을 꿈꾸는 동안,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했다. 그리고 보통 그것은 여자들의 몫이다. 홍대 미대를 그만두고, 세 아이들을 키우며 억척스레 살림을 꾸려온 부인 윤명숙 여사는, 수장고에 보관된 대작들의 먼지를 닦으며 뒤늦게 눈물을 닦았다. 팔리지도 않는 것을 지치지도 않고 그려대며 끝내 미래를 낙관한 자의 해피엔딩이었달까.
[박서보 :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국립현대미술관, 2019, photo by Hyunju Song
미술치료사로 활동하는 셋째딸 박승숙은 케이트 림과 같은 해 내놓은 평전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박서보의 삶과 예술(인물과사상사, 2019)>에서, 거인의 곁에서 상처와 치유를 주고 받았던 가족들의 속내를 드러내며 이렇게 결론 내린다. “내 아버지 박서보는 어머니 윤명숙 평생의 걸작이었다.” 둘째아들과 캠퍼스 커플이었던 며느리 김영림은,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아버지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 “어머니랑 저는, 십 년만 일찍 이런 날이 왔더라면, 우리 아버지 펄펄 날아다니셨을 텐데, 하고 웃어요.” 그러니 놀라지 않은 건 오직 박서보 자신 뿐.
“난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믿으셨어요?
“믿었지. <뉴요커> 기자와 인터뷰할 때, 내 작품이 천만 달러(약 백억 원)가 되는 것을 당신 생전에 보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고. 그랬더니 그 말을 크게 뽑아 썼더만.”
(*“I think it should go up tenfold to reflect the right price,” he said, before predicting a price of ten million dollars for his works. “It will happen. You’ll see.”, The New Yorker, “The Koreans at the top of the art world.”, By Natasha Degen and Kibum Kim, 2015년 9월 30일자)
Ecriture No.020725, 2002,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모노리스’를 세우며
전기 묘법 이후 박서보는 한 번 더 변신했다. 후기 묘법으로 알려진 색이 있는 그림들이다. 박서보는 색색의 골판지 같은 화면마다 작은 문/기둥/다리들을 세웠다. 스스로는 ‘숨구멍’이라고 부르는 숨 쉴 틈이다. 미술사적으로 아직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한 때 그는 첨단 과학기술의 신봉자였다. 일찍이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같은 SF에마저 눈을 떴다. 그 시절에 이미 로봇이나 인공지능 시대의 미술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마저 깊었다고 한다.
모두가 못 먹고 못 입던 때, 오늘날과 같은 비디오와 인터넷, 로봇과 인공지능 시대를 예언한 백남준의 존재도 기이하거니와, 아무래도 당대의 한국 미술에는 비현실적 행운이 겹쳐 있었던 것 같다. 박서보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두 아들에게 산업 디자인이라는 ‘미래지향적인’ 진로를 강권하고, 초창기 애플의 맥 컴퓨터를 사 날랐다. 그런 면에서조차 그는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그럴 듯하게 베껴내는 ‘환쟁이’가 아니라, 남들보다 앞서 미래를 내다 보고 그것을 현실로 가져오는 ‘비저너리’였던 게다.
그런 그가 작품에 슬며시 새겨놓은 문/기둥/다리들은, 어쩌면 잿더미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한국의 ‘모노리스(<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비석 형태의 금속 조형물로, 문명의 시작과 인류의 진화를 상징한다.)’는 아니었을까. 박서보는 그림마다 자신을 닮은 우뚝한 문과 기둥과 다리들을 세워두고, 연필로, 거기를 향해 가는 무수한 골짜기들을 팠다. 밭고랑 같은 골짜기들이었다. 그리고 고랑들 사이로 소담히 올라온 두둑에는 이야기들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그것은 강박적이고 금욕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적이며 육체적인 노동이었다. 딸 박승숙의 책에는 그 장면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어느 날인가는 서강대교를 보는데 가로등에 비친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거야. 다리를 받치는 축대들 사이로 네모가 그려졌는데, 참 재미난 게 어떨 때는 세 개로 어떨 때는 네 개로 보이는 거야.”
박서보의 그림에 색이 들어온 것은, 자기 수신에 더해 타인의 치유라는 목적이 하나 더 덧붙여지고 나서부터다. 2000년 가을, 그는 부인 윤명숙과 일본 후쿠시마 반다이산에 갔다가 충격적으로 새빨간 단풍을 만났다고 했다. 그 강렬한 빨강을 통해 자연의 색이 갖는 치유력을 깨달은 뒤, 무채색을 고집하던 오만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다시 한 번 변신한 셈. 이후 단풍색 외에도 스스로 ‘공기색’이라 부르는 무심한 색깔과 더불어, 오이의 속살 같은 연두색, 벚꽃색, 홍시색 등을 자유자재로 만들어 쓰고 있다. 그런 빛을 품은 박서보의 그림은 함부로 소리지르지 않는다.
“지금 세상에 아픈 사람들이 천지인데, 막무가내로 토해놓은 아우성들에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자기를 덜어내고 비워내서 보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지.”
[명상] 박서보 x 1OF0, 남산피크닉, photo by Taehoon Kwon, Courtesy of GLINT
회춘, 다시 봄
그래선지 박서보가 올 4월부터 9월까지, 신진 작가 ‘1OF0(원오브제로, 본명 박지환)’와 함께 한, 남산 <피크닉> ‘명상(mindfulness)’ 전은 인스타그램에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코비드-19 시대, 사전 예약과 현장 발열 확인 같은 번거로운 절차를 몇 겹이나 거치고도 관객들이 길게 줄을 섰다. 얼굴은 마스크에 가려졌지만, 입성으로 보아 대부분 청년들이었다. 말 그대로 전시가 당대의 청년들을 위로한 것은 물론, ‘인스타그래머블’ 하기도 했던 까닭이다.
원오브제로는 사실, 그와 살고 있는 하나뿐인 손자다. 더 어린 손녀 둘과 마찬가지로 미술을 공부했다. 영국 LCF(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 런던예술대학교(UAL)를 구성하는 여섯 개 연합의 하나로, 세계대학평가 예술부문에서 손꼽히는 명문이다.)에서 패션을 배운 힙스터다. 내로라 하는 미술 집안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의 이름을 마음 놓고 누릴 수도, 피할 수도 없어 속을 끓인다.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서도호가 현대 한국화의 거장 서세옥의 아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옛집들의 기억을 달팽이처럼 이고지고 지구를 떠돌아야 했던 것처럼, 누구의 아들이나 손자라는 이름은,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는 무게로 어깨를 짓누를 터다. 원오브제로 역시 서른 살이 되도록 방황하다, 얼마 전부터 이름을 감추고 패션부터 설치미술까지 두루 시도해보는 중이다. 명상 전에서는 작품을 고르고 배치하며 이야기를 부여하는 큐레이팅을 했다.
전시장 벽에는 박서보의 120호 잿빛 묘법을 교회당의 성화처럼 매달아 두고, 바닥에는 빨갛고 파란 조명 속에 8호짜리 작은 그림 여러 개를 높이를 달리해 눕혀 놓았다. 성전과 클럽이 뒤섞인 공간 속에서, 박서보라는 작가는 여전히 ‘컨템포러리’ 했다. 내부 촬영이 금지돼 손이 간지러울 법한 데도, 젊은 관객들의 발은 무거웠다. 전시장을 쉬 떠나지 못하는 이들과 거리를 둔 채 몇 바퀴를 맴돌며, 세운 그림은 올려다 보고, 누운 그림은 들여다 봤다.
그것은 분명 종교적 수행의 결과물처럼 엄격했지만, 질서 속에 자연스런 우연과 묘한 변칙들이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밀고 당김처럼도 여겨졌다. 이 무슨 불경이란 말인가. 명상을 주제로 한 전시에서 에로티즘의 흔적을 느끼다니. 그러나 삶의 비밀들이 은밀히 스며든 둔덕에서 새 속잎이 자라나고 어린 꽃이 피어나는 걸 막을 도리는 없었다.
-외람되지만 제게는 전시가 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작품들의 섬세한 변화는 문/기둥/다리들과 골짜기들의 대화 같기도 했고요. 회춘도 아주 전격적인 회춘이었어요, 선생님.
“그런가? 아무리 늙어도 그런 걸 할 수 있어야지. 살아있다는 뜻이니까.”
박서보는 함박, 웃었다.
photo by Kyungbum Kim
욕망하되 걸림이 없는
그는 심근경색과 뇌졸중으로 쓰러져, 이미 두 차례나 큰 생명의 고비를 넘긴 바 있다. 위기의 순간마다 그를 구한 것은 부인이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젊은 시절 그토록 강조하고 몰두했던 대작은 이제 무리다. 후유증으로 가벼운 파킨슨병 증상도 앓고 있다. 약물 패치를 붙였다는 왼쪽 손을 가늘게 떨었다. 그럼에도 박서보는 여전히 그 손으로 직접 에스키스(작품의 아이디어를 담아낸 작업 초안)를 만들고, 작품을 그린다. 그림으로 전향해 볼까 하면서도 쉽게 용기 내지 못하는 손자를 위해, 캔버스도 직접 당겨 매어준다고 했다. 술도 음식도 어지간한 젊은이들보다 왕성하게 즐기면서 말이다. 그랬다. 그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인터뷰 사진을 찍는 날, 박서보는 물감 한 방울 튀지 않은 새하얀 셔츠와 바지, 나이키 운동화 차림으로 나타났다. 커다란 알반지며, 귀갑으로 만든 안경은 이채로웠고, 손자가 탐내도 안 준다는 빈티지 샤넬 목걸이에 중절모, 지팡이마저 패셔너블했다. 식구들 중에서 가장 크다는 그의 옷방에는 습격하고 싶은 물건들이 가득했다. 박서보의 에너지는 잘 입고, 잘 먹고, 잘 마시며, 젊은 세대와의 소통과 사회적 발언을 아직 욕망하는 데서 나오는 듯 했다. 그랬다. 그는 여전히 욕망하고 있었다. 다만 정화된 욕망이었다. 욕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욕망하되 걸림이 없는 지경, 공자가 말하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작업노트를 겸해 평생을 써오던 일기장에, 일찍이 2030년까지의 계획을 적어둔 그다.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영국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의 세 번째 전시며, 프랑스의 고품격 와이너리 샤토 라코스테(Château La Coste) 특별전과 같은 귀중한 기회들이 2021년으로 밀렸지만, 이 노작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전후, 모든 것이 파괴된 그라운드 제로에서 시작했기에, 이런 절망의 순간이 낯설지가 않다는 게다.
대신 그는, 오래 사랑해 온 달항아리에 묘법을 올릴 궁리를 하고, 판화를 실험한다. 손자의 손을 빌어 티셔츠나 가방 같은 상품들을 만들며, 젊은 세대와 어울리기도 한다. 그 사이 부인 윤명숙은 정원에 바지런히 야생화들을 사다 심고, 고추장을 쑤어 담그며, 에세이를 쓴다. 이런 일상이 전달되는 통로는 인스타그램이다. 부부가 나란히 신년 인사를 하고, 장난스레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손자의 맥주를 얻어 마시며, 무심히 고양이와 노는 모습에서 무기력한 아흔 살 노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비켜서라고 소리쳐도 난 비켜설 의향이 없습니다. 자신 있거든 추월해 가시구려!”
그렇게 일갈했던 것이 칠순의 일이었으니. 거기서 다시 스무 해가 지나도록 이 청년은 건재하다.
마침내, 소년
박서보는 1994년 설립한 <서보미술문화재단(이사장 박승조)>에 이어, 2019년 <기지재단(이사장 박승호)>을 세웠다. 같은 DNA를 가진 기존 서보미술문화재단이 그의 예술적 행보를 기록하고 기념사업화한다면, 기지재단은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쪽에 초점을 맞춘다는 계획이다. 젊은 날의 자신처럼, 구태와 싸우고 내면을 찾는 젊은이들의 뒷배가 되겠다는 것.
코로나 시대 문화예술계 전체가 얼어붙었지만, 기지는 칼, 가죽공예, 타투 등 음지에 머물렀던 예술가들의 작업을 조명하고, 문학과 음악, 패션을 아우르는 행사들을 기획해 야금야금 실행하고 있다. 거인의 그림자는 이제 쉴만한 그늘로 형질전환 중이다.
두 차례의 인터뷰와 네 차례의 식사 자리를 통해 박서보라는 시대의 거인을 만났다. 평균의 인간 열 사람은 합친 에너지로 살아온 그는, 기억력마저
비상했다. 특유의 웅변과 달변으로 이런저런 추억들을 펼쳐 보이는 중에, 종종 귀여운 욕심을 부리기도 했다.
“적어도 백 살까지는 살아야지. 그 때까지는 내가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그 좋다는 이화여대 교수직을 정년보다 십 년 먼저 내려놓고, 기지의 초기 살림을 돌보고 있는 둘째아들은, 그 때마다 곁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아버지로서는 평생 다정한 법을 몰랐다는 박서보도, 나이가 들었다. 지난해 가족들과 갤러리 페로탕을 위시한 유럽 투어를 다녀온 것이 꽤나 좋았던 모양이다. 아들과 손자가 번갈아 몸을 씻겨주었다며 티없이 자랑하기에, 답을 알면서도 굳이 물었다.
-어느 편이 더 좋으셨어요?
“아, 그야 손자가 씻겨주는 게 훨씬 좋지.”
별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그의 얼굴엔, 아까보다 더욱 큰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너무 애쓰며 살지 마.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 문화 건달이 되여.”
왕년의 제자들이나 자녀들에게 했던 주문과는 사뭇 다른 말이다. 그러면서도 손자가 정작 아직은 할 생각이 없다는 결혼만은, 집요하게 조르고 또 조른다.
“아니, 대체 나를 은제 증조할아버지로 승격시켜 줄 거여.”
어느새 이 강인하던 육식동물은 누구에게나 무해한 식물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천진하게 웃는 잇속이 하이얀 박꽃 같았다. 1931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난 꼬마 재홍(在弘)은 거의 백 년을 살고 나서, 다시 소년이 되었다. 깃들일 서(栖), 클 보(甫). 전장에서 돌아와 마침내 거울 앞에 서서, 하냥 순해지는 어린 짐승을 보았다.
(1편에서 계속)
터닝 포인트
선의를 종종 의심받는 이 야심가에게서 독기가 빠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김창열이가 그 때 파리에서 말이지~”, “이우환이랑 내가 동경에서 이러저러 했다구~” 이처럼 이물 없이 회상하는 그의 오랜 벗들이, 물방울, 혹은 점과 선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주자로 세계 시장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때, 박서보는 ‘만년 3위’의 설움을 삼켜야 했다. 상황이 갑자기 뒤집어진 건 2015년의 일이었다. 2006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00호 묘법이 삼천만 원 선에 거래됐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홍콩 크리스티 경매 등에서 연달아 십억 원이 넘는 가격에 팔려나가기 시작했던 것. 현재 이들 밀리언 달러 작가들 중 호당 거래 가격 1위는, 박서보다.
서구의 ‘모노크롬(Monocrome)’이나 일본의 ‘모노하(Mono-ha, もの派)’가 아닌, 한국의 단색화라는 고유명사에 대한 시장의 관심은 2012년 즈음 시작됐다. 그러다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단색화 특별전을 통해 열풍과도 같은 존재감을 드러냈다. 2016년 영국 화이트큐브 갤러리의 박서보 개인전에서는 모든 작품이 ‘완판’됐다. 한국인으로서 화이트큐브에 입성한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이 무렵부터 박서보와 그의 시대를 둘러싼 학술적, 예술적 재조명도 활발해졌다. 2000년대 초, 중국의 저명 평론가 황두(Huang Du)가 “한국에 위대한 작가 박서보가 있다. 중국 작가들이 그를 가장 닮고 싶어한다.”고 쓴 이후, 마침내 진짜 그의 시대가 온 것. 박서보는 학교에서도, 미술관에서도, 그리고 시장에서도 승리했다.
그가 대의를 품고 예술을 꿈꾸는 동안,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했다. 그리고 보통 그것은 여자들의 몫이다. 홍대 미대를 그만두고, 세 아이들을 키우며 억척스레 살림을 꾸려온 부인 윤명숙 여사는, 수장고에 보관된 대작들의 먼지를 닦으며 뒤늦게 눈물을 닦았다. 팔리지도 않는 것을 지치지도 않고 그려대며 끝내 미래를 낙관한 자의 해피엔딩이었달까.
[박서보 :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국립현대미술관, 2019, photo by Hyunju Song
미술치료사로 활동하는 셋째딸 박승숙은 케이트 림과 같은 해 내놓은 평전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박서보의 삶과 예술(인물과사상사, 2019)>에서, 거인의 곁에서 상처와 치유를 주고 받았던 가족들의 속내를 드러내며 이렇게 결론 내린다. “내 아버지 박서보는 어머니 윤명숙 평생의 걸작이었다.” 둘째아들과 캠퍼스 커플이었던 며느리 김영림은,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아버지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 “어머니랑 저는, 십 년만 일찍 이런 날이 왔더라면, 우리 아버지 펄펄 날아다니셨을 텐데, 하고 웃어요.” 그러니 놀라지 않은 건 오직 박서보 자신 뿐.
“난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믿으셨어요?
“믿었지. <뉴요커> 기자와 인터뷰할 때, 내 작품이 천만 달러(약 백억 원)가 되는 것을 당신 생전에 보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고. 그랬더니 그 말을 크게 뽑아 썼더만.”
(*“I think it should go up tenfold to reflect the right price,” he said, before predicting a price of ten million dollars for his works. “It will happen. You’ll see.”, The New Yorker, “The Koreans at the top of the art world.”, By Natasha Degen and Kibum Kim, 2015년 9월 30일자)
Ecriture No.020725, 2002,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모노리스’를 세우며
전기 묘법 이후 박서보는 한 번 더 변신했다. 후기 묘법으로 알려진 색이 있는 그림들이다. 박서보는 색색의 골판지 같은 화면마다 작은 문/기둥/다리들을 세웠다. 스스로는 ‘숨구멍’이라고 부르는 숨 쉴 틈이다. 미술사적으로 아직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한 때 그는 첨단 과학기술의 신봉자였다. 일찍이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같은 SF에마저 눈을 떴다. 그 시절에 이미 로봇이나 인공지능 시대의 미술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마저 깊었다고 한다.
모두가 못 먹고 못 입던 때, 오늘날과 같은 비디오와 인터넷, 로봇과 인공지능 시대를 예언한 백남준의 존재도 기이하거니와, 아무래도 당대의 한국 미술에는 비현실적 행운이 겹쳐 있었던 것 같다. 박서보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두 아들에게 산업 디자인이라는 ‘미래지향적인’ 진로를 강권하고, 초창기 애플의 맥 컴퓨터를 사 날랐다. 그런 면에서조차 그는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그럴 듯하게 베껴내는 ‘환쟁이’가 아니라, 남들보다 앞서 미래를 내다 보고 그것을 현실로 가져오는 ‘비저너리’였던 게다.
그런 그가 작품에 슬며시 새겨놓은 문/기둥/다리들은, 어쩌면 잿더미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한국의 ‘모노리스(<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비석 형태의 금속 조형물로, 문명의 시작과 인류의 진화를 상징한다.)’는 아니었을까. 박서보는 그림마다 자신을 닮은 우뚝한 문과 기둥과 다리들을 세워두고, 연필로, 거기를 향해 가는 무수한 골짜기들을 팠다. 밭고랑 같은 골짜기들이었다. 그리고 고랑들 사이로 소담히 올라온 두둑에는 이야기들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그것은 강박적이고 금욕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적이며 육체적인 노동이었다. 딸 박승숙의 책에는 그 장면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어느 날인가는 서강대교를 보는데 가로등에 비친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거야. 다리를 받치는 축대들 사이로 네모가 그려졌는데, 참 재미난 게 어떨 때는 세 개로 어떨 때는 네 개로 보이는 거야.”
박서보의 그림에 색이 들어온 것은, 자기 수신에 더해 타인의 치유라는 목적이 하나 더 덧붙여지고 나서부터다. 2000년 가을, 그는 부인 윤명숙과 일본 후쿠시마 반다이산에 갔다가 충격적으로 새빨간 단풍을 만났다고 했다. 그 강렬한 빨강을 통해 자연의 색이 갖는 치유력을 깨달은 뒤, 무채색을 고집하던 오만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다시 한 번 변신한 셈. 이후 단풍색 외에도 스스로 ‘공기색’이라 부르는 무심한 색깔과 더불어, 오이의 속살 같은 연두색, 벚꽃색, 홍시색 등을 자유자재로 만들어 쓰고 있다. 그런 빛을 품은 박서보의 그림은 함부로 소리지르지 않는다.
“지금 세상에 아픈 사람들이 천지인데, 막무가내로 토해놓은 아우성들에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자기를 덜어내고 비워내서 보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지.”
[명상] 박서보 x 1OF0, 남산피크닉, photo by Taehoon Kwon, Courtesy of GLINT
회춘, 다시 봄
그래선지 박서보가 올 4월부터 9월까지, 신진 작가 ‘1OF0(원오브제로, 본명 박지환)’와 함께 한, 남산 <피크닉> ‘명상(mindfulness)’ 전은 인스타그램에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코비드-19 시대, 사전 예약과 현장 발열 확인 같은 번거로운 절차를 몇 겹이나 거치고도 관객들이 길게 줄을 섰다. 얼굴은 마스크에 가려졌지만, 입성으로 보아 대부분 청년들이었다. 말 그대로 전시가 당대의 청년들을 위로한 것은 물론, ‘인스타그래머블’ 하기도 했던 까닭이다.
원오브제로는 사실, 그와 살고 있는 하나뿐인 손자다. 더 어린 손녀 둘과 마찬가지로 미술을 공부했다. 영국 LCF(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 런던예술대학교(UAL)를 구성하는 여섯 개 연합의 하나로, 세계대학평가 예술부문에서 손꼽히는 명문이다.)에서 패션을 배운 힙스터다. 내로라 하는 미술 집안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의 이름을 마음 놓고 누릴 수도, 피할 수도 없어 속을 끓인다.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서도호가 현대 한국화의 거장 서세옥의 아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옛집들의 기억을 달팽이처럼 이고지고 지구를 떠돌아야 했던 것처럼, 누구의 아들이나 손자라는 이름은,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는 무게로 어깨를 짓누를 터다. 원오브제로 역시 서른 살이 되도록 방황하다, 얼마 전부터 이름을 감추고 패션부터 설치미술까지 두루 시도해보는 중이다. 명상 전에서는 작품을 고르고 배치하며 이야기를 부여하는 큐레이팅을 했다.
전시장 벽에는 박서보의 120호 잿빛 묘법을 교회당의 성화처럼 매달아 두고, 바닥에는 빨갛고 파란 조명 속에 8호짜리 작은 그림 여러 개를 높이를 달리해 눕혀 놓았다. 성전과 클럽이 뒤섞인 공간 속에서, 박서보라는 작가는 여전히 ‘컨템포러리’ 했다. 내부 촬영이 금지돼 손이 간지러울 법한 데도, 젊은 관객들의 발은 무거웠다. 전시장을 쉬 떠나지 못하는 이들과 거리를 둔 채 몇 바퀴를 맴돌며, 세운 그림은 올려다 보고, 누운 그림은 들여다 봤다.
그것은 분명 종교적 수행의 결과물처럼 엄격했지만, 질서 속에 자연스런 우연과 묘한 변칙들이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밀고 당김처럼도 여겨졌다. 이 무슨 불경이란 말인가. 명상을 주제로 한 전시에서 에로티즘의 흔적을 느끼다니. 그러나 삶의 비밀들이 은밀히 스며든 둔덕에서 새 속잎이 자라나고 어린 꽃이 피어나는 걸 막을 도리는 없었다.
-외람되지만 제게는 전시가 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작품들의 섬세한 변화는 문/기둥/다리들과 골짜기들의 대화 같기도 했고요. 회춘도 아주 전격적인 회춘이었어요, 선생님.
“그런가? 아무리 늙어도 그런 걸 할 수 있어야지. 살아있다는 뜻이니까.”
박서보는 함박, 웃었다.
photo by Kyungbum Kim
욕망하되 걸림이 없는
그는 심근경색과 뇌졸중으로 쓰러져, 이미 두 차례나 큰 생명의 고비를 넘긴 바 있다. 위기의 순간마다 그를 구한 것은 부인이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젊은 시절 그토록 강조하고 몰두했던 대작은 이제 무리다. 후유증으로 가벼운 파킨슨병 증상도 앓고 있다. 약물 패치를 붙였다는 왼쪽 손을 가늘게 떨었다. 그럼에도 박서보는 여전히 그 손으로 직접 에스키스(작품의 아이디어를 담아낸 작업 초안)를 만들고, 작품을 그린다. 그림으로 전향해 볼까 하면서도 쉽게 용기 내지 못하는 손자를 위해, 캔버스도 직접 당겨 매어준다고 했다. 술도 음식도 어지간한 젊은이들보다 왕성하게 즐기면서 말이다. 그랬다. 그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인터뷰 사진을 찍는 날, 박서보는 물감 한 방울 튀지 않은 새하얀 셔츠와 바지, 나이키 운동화 차림으로 나타났다. 커다란 알반지며, 귀갑으로 만든 안경은 이채로웠고, 손자가 탐내도 안 준다는 빈티지 샤넬 목걸이에 중절모, 지팡이마저 패셔너블했다. 식구들 중에서 가장 크다는 그의 옷방에는 습격하고 싶은 물건들이 가득했다. 박서보의 에너지는 잘 입고, 잘 먹고, 잘 마시며, 젊은 세대와의 소통과 사회적 발언을 아직 욕망하는 데서 나오는 듯 했다. 그랬다. 그는 여전히 욕망하고 있었다. 다만 정화된 욕망이었다. 욕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욕망하되 걸림이 없는 지경, 공자가 말하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작업노트를 겸해 평생을 써오던 일기장에, 일찍이 2030년까지의 계획을 적어둔 그다.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영국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의 세 번째 전시며, 프랑스의 고품격 와이너리 샤토 라코스테(Château La Coste) 특별전과 같은 귀중한 기회들이 2021년으로 밀렸지만, 이 노작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전후, 모든 것이 파괴된 그라운드 제로에서 시작했기에, 이런 절망의 순간이 낯설지가 않다는 게다.
대신 그는, 오래 사랑해 온 달항아리에 묘법을 올릴 궁리를 하고, 판화를 실험한다. 손자의 손을 빌어 티셔츠나 가방 같은 상품들을 만들며, 젊은 세대와 어울리기도 한다. 그 사이 부인 윤명숙은 정원에 바지런히 야생화들을 사다 심고, 고추장을 쑤어 담그며, 에세이를 쓴다. 이런 일상이 전달되는 통로는 인스타그램이다. 부부가 나란히 신년 인사를 하고, 장난스레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손자의 맥주를 얻어 마시며, 무심히 고양이와 노는 모습에서 무기력한 아흔 살 노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비켜서라고 소리쳐도 난 비켜설 의향이 없습니다. 자신 있거든 추월해 가시구려!”
그렇게 일갈했던 것이 칠순의 일이었으니. 거기서 다시 스무 해가 지나도록 이 청년은 건재하다.
마침내, 소년
박서보는 1994년 설립한 <서보미술문화재단(이사장 박승조)>에 이어, 2019년 <기지재단(이사장 박승호)>을 세웠다. 같은 DNA를 가진 기존 서보미술문화재단이 그의 예술적 행보를 기록하고 기념사업화한다면, 기지재단은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쪽에 초점을 맞춘다는 계획이다. 젊은 날의 자신처럼, 구태와 싸우고 내면을 찾는 젊은이들의 뒷배가 되겠다는 것.
코로나 시대 문화예술계 전체가 얼어붙었지만, 기지는 칼, 가죽공예, 타투 등 음지에 머물렀던 예술가들의 작업을 조명하고, 문학과 음악, 패션을 아우르는 행사들을 기획해 야금야금 실행하고 있다. 거인의 그림자는 이제 쉴만한 그늘로 형질전환 중이다.
두 차례의 인터뷰와 네 차례의 식사 자리를 통해 박서보라는 시대의 거인을 만났다. 평균의 인간 열 사람은 합친 에너지로 살아온 그는, 기억력마저
비상했다. 특유의 웅변과 달변으로 이런저런 추억들을 펼쳐 보이는 중에, 종종 귀여운 욕심을 부리기도 했다.
그 좋다는 이화여대 교수직을 정년보다 십 년 먼저 내려놓고, 기지의 초기 살림을 돌보고 있는 둘째아들은, 그 때마다 곁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아버지로서는 평생 다정한 법을 몰랐다는 박서보도, 나이가 들었다. 지난해 가족들과 갤러리 페로탕을 위시한 유럽 투어를 다녀온 것이 꽤나 좋았던 모양이다. 아들과 손자가 번갈아 몸을 씻겨주었다며 티없이 자랑하기에, 답을 알면서도 굳이 물었다.
-어느 편이 더 좋으셨어요?
“아, 그야 손자가 씻겨주는 게 훨씬 좋지.”
별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그의 얼굴엔, 아까보다 더욱 큰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너무 애쓰며 살지 마.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 문화 건달이 되여.”
왕년의 제자들이나 자녀들에게 했던 주문과는 사뭇 다른 말이다. 그러면서도 손자가 정작 아직은 할 생각이 없다는 결혼만은, 집요하게 조르고 또 조른다.
“아니, 대체 나를 은제 증조할아버지로 승격시켜 줄 거여.”
어느새 이 강인하던 육식동물은 누구에게나 무해한 식물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천진하게 웃는 잇속이 하이얀 박꽃 같았다. 1931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난 꼬마 재홍(在弘)은 거의 백 년을 살고 나서, 다시 소년이 되었다. 깃들일 서(栖), 클 보(甫). 전장에서 돌아와 마침내 거울 앞에 서서, 하냥 순해지는 어린 짐승을 보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