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ARCHIVE FOCUS⎮23호 박서보의 작업실(6) 안성 한서당-1

2024-12-17

ARCHIVE FOCUS⎮23호 박서보의 작업실(6) 안성 한서당-1


(1) 「특집(特輯): 화가(畫家)와 아뜰리에 건축(建築): 안성 한서당」, 『공간(空間)』(1982년 3월)

자료 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 No.15

(2) 1982년 4월 10일 안성, 대림동산 내 한서당 박서보 촬영

자료 출처: 박서보 사진자료집 No.5

(3) 「특집(特輯): 박서보의 묘법(1967~1983)」, 『공간(空間)』(1983년 4월) 수록 사진

자료 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 No.16


[한글]


「특집: 화가와 아뜰리에 건축」, 『공간』(1982년 3월)


안성 한서당

Hanseo-dang in Ansung

박서보씨 화실

설계/ 박홍

photo/ 정정웅


건물명칭/ 박서보교수 ‘아틀리에’(한서당(寒栖堂)). 위치/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90~32/ 대지면적/ 1,580m². 건축면적/ 173m². 구조·층수/벽: 적연과 치장쌓기, 지붕: 스페니쉬 기와잇기. 내부마감/ 바닥·벽: 고압벽돌 미장쌓기, 천정(스튜디오): 유절미송후로링. 외부창호/ 발색알미늄 칼라샷시+(모라돈). 설계기간/ 40일(1980년 8월~9월). 공사기간/ 3개월(1980년 9~12월)


(사진캡션/ 왼쪽) 동남쪽에서 본 외관, 외벽재 적연

(오른쪽) 동북쪽에서 본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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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 「안성한서당: 박서보씨 화실」, pp. 46-50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50분쯤 달리다 보면 ‘안성인터체인지’에 이른다. 여기서 좌측 방향이 경기도 안성 땅. 허허벌판의 경기 평야가 펼쳐지면서 5분 가량 달리기를 계속하면 ‘대림동산’이라는 별장 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글자 그대로 자그마한 동산을 단지로 일구어 놓은 조용한 마루턱 아래 양지바른 구형(矩形)의 땅을 찾아간 것이다.

아름드리 노송들이 울울창창한 사이로 소슬바람이 초여름의 이마를 식히고 이따금 방울이 구르는 듯한 멧새소리가 산사(山寺)와도 같은 적막함을 깨치는 곳이었다.

나는 여기서 이제부터 짓고자 할 ‘아틀리에’의 주인이자, 내 형인 박 화백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이곳에 대한 애착은 우리 형제들이 자라난 고향이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도시를 훌쩍 떠나고파했던 그의 바람 때문이리라. 그가 얼마나 자연을 그리워 하고 또 자연에 귀의코자 했던가는 설계하기 전부터 ‘풍경’이랑 ‘연자방아’ 등을 구해다 놓고, 손수 뙤약볕아래 나무에 물을 주는 수선스러움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설계는 시작되었다. 그것도 한 달 간의 여유 밖에 주지 않고 아주 급하게….

이 건물은 애초부터 형태보다는 기능에 충실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게다가 훗날 자신의 유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전용(転用)한다는 기능의 요구와 함께….

건물의 배치는 암입동선(岩入動線)으로 보아 후문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시켜 장래 증축코자 하는 살림채(주택)와의 연관과 전망 좋은 정원을 확보하는 데 두었다.

평면 계획은 회화작업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하나의 공간이면서도 세 개의 ‘쳄바’[방; chamber]로 구획되는 기능의 배분과 공간의 변화를 꾀했으며 벽체의 엇막음이 구조체의 역할과 함께 작업 면적과 전시 벽면의 확대 효과를 더해준다.

좁고 긴 창문이 모서리마다 설치된 것은 좀 더 넓은 벽 면적의 확보를 위함이고 더 이상의 채광 조절은 천정 높이 설치된 고창(高窓)이 담당케 했다. ‘제 1스튜디오’의 고창을 북쪽에 둠에서 오는 밝지 못함을 커버하고 정원 조망을 위해 창문을 시원스레 튼 것은 이 방이 휴식, 응접, 식사 등 다목적으로 쓰여지게 될 것이라는 기능적 배려이고, ‘제 3스튜디오의’의 고창을 남쪽으로 역배치한 것은 외부의 형태적 조화와 함께 계절과 시각변화에 따른 공간 이용의 자유로움을 부여하는 데 있다.

외벽에 돌출된 ‘조각대’는 벽체를 지탱시키는 ‘부축벽’의 구조적 부산물이고 벽돌벽의 단조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릴리프’[부조 조각; relief]는 시공되지 않았다.

어느 건물이거나 각기 요구되는 기능이 있기 마련이지만 설계자는 형태적인 추구를 즐거워 한다. 그러나 이 건물의 경우에는 그것이 허용되지 못한 아쉬움 만을 남겼다. 더구나 먼 훗날 미술관이라는 기념성을 지닌 건물이 되고자 한다면 좀 더 조형적인 구성이 허용되지 못함이 원망스럽다. 그것은 자신은 별스러우면서도 별스런 건물이 되는 것을 싫어 했던 그의 화가스런 고집과 예산의 한정, 공사 진행의 무계획이 빚은 졸속이었으며 타협과 설득력이 부족했던 나 자신을 자책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연을 벗삼아 노닐면서 작품 제작에 열중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가장 큰 나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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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조정권, 「박서보씨와의 대화: 안성 한서당─그 현장을 찾아서」, pp. 51-58


「안성 한서당─그 현장을 찾아서」

A Visit of the Newly-built Hanseo-dang in Ansung

-박서보씨와의 대화-


대화자: 조정권

CHO Choung-kwun


“나는 우리 사회에서 진실 아닌 것들에 의해 매도 당하고, 어느 사람의 주장이 주장으로서 받아 들여지기 보다는 저 사람 자기 얘기만 하다고 매도되는 그런 모순된 현실을 많이 봅니다. 그래서 나는 죽어서 욕 먹을 짓은 전혀 안 한다. 살아 있는 동안 주위로부터 오해 당해서 매도된다 해도 그걸 감수하겠다. 그러니까 종교적 의미에서의 영생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영생을 택하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고독속에서 자신과 대면을

서울을 벗어나 한 50분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면 경기도 안성 땅. 정류장에서 내려 눈앞에 전개되는 허허한 평야를 사이에 두고 그는 한적한 길을 일부러 걷는다. 택시로 가면 7, 8분쯤 걸릴까 하는 거리를 걷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에게는 이곳이 바로 고향 땅이요 그가 나서 자라고 뜻을 키우던 곳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90의 32. 조그마한 산등성이를 깍아 내린 약 5백평 정도의 언덕, 양지바른 터전에 아담한 스페인 풍의 기와를 얹은 벽돌집. 그는 수요일이나 목요일 정오면 어김 없이 이곳에 도착해있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어김 없이 서울에 도착해있다. 마당에는 정자가 있고 연자방아, 석등, 망부석, 철쭉, 백목련, 목백일홍…. 옛말에 각병[연]년(却病[延]年)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에게는 이곳이 도시에서 묻혀온 마음의 때를 벗고, 세사(世事)의 병을 잊는 작업에 몰두하며 뼈를 깎고 정신의 수명을 연장하는 곳이다. 전화가 있을 리가 없다. 문을 걸어 잠그면 완전히 외부와 단절되는 곳.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저만치 떼어놓고 바라보는 방법을 터득해 온 것이다. 아니 이 경우 터득이라는 표현보다는 차라리 심득(心得)이라는 말이 적절하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된다. 그가 이곳에서 자연과 접하며 무자서(無子書)나 읽고 소나무와 정자를 벗하며 무현금(無絃琴)을 뜯으며 자족(自足)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에게 있어 이곳은 자기자신을 본래의 일상적인 의미(작가)로 환원시켜 놓고 거기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심전지(心戰地)이요 그 현장인 것이다.

기자는 우선 시골생활에 대해 질문을 했다.

조(趙): 선생님의 화실을 한서당(寒栖堂)이라고 이름지은 데에는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읍니까?

박(朴): 특별한 뜻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마음에 드는 이름이예요. 퇴계가 나이 오십에 낙향해서 정자를 하나 지었는데 그게 바로 한서암(寒栖岩)입니다. 최명영 씨가 퇴계를 읽다가 발견하고서 저에게 한서당이 어떠냐고 하더군요. 공교롭게 나도 나이 오십에 고향을 찾아 화실을 지었고, 퇴계도 오십에 낙향했다는 것이 일치되고, 차가울 ‘한(寒)’ 자의 의미가 앞으로 내 인생과 삶을 그 속에다 몰아 붙이며 살아가려는 어떤 의지와 생명력을 다시 주는 것 같아요. 또 ‘서(栖)’ 자도 내 이름자 중에 한 글자이고요. 그래서 그렇게 정해버린 거죠.

: 벌써 햇수로 2년인가요. 선생님의 경우는 낙향하신 게 아니지만, 만나 뵈니까 여전히 건강하고 작업도 왕성하시군요. 어때요? 안성 생활이.

: 내가 나이 쉰이 되도록 변변한 아틀리에 하나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도 아틀리에를 지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장소를 시골을 택한 이유는 나를 사회로부터 단절시키고 고립화 시킴으로써, 자신의 근원적인 문제부터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게 첫째 이유였어요. 둘째 이유는 경제적 이유죠. 집 자체야 도시에 짓는 거나 시골에 짓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도시에 지으려면 땅값이 많이 들어요. 그리고 저는 반드시 도시에 있어야 예술이 된다고는 생각질 않아요.

시골에 화실을 짓고 그 생활속에서 제일 보람으로 느끼는 것은 어떤 인생의 쓰라린 밑바닥 같은 것을 경험해 본다는 거죠. 일주일이면 일주일, 열흘이면 열흘을 가족이나 기타 모든 것하고도 완전히 단절되어 지내야 하는 고독을 경험하면서, 저는 고통을 겪지 않고는 예술이 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어요. 2년동안의 그런 경험 위에서 저는 시골로 내려가길 정말 잘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 거기서는 그러면 선생님이 직접 끓여 잡수시는지요?

: 그럼요. 끓여 먹는 것도 익숙해지니까 별로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처음에 안성가서 한 반 년 가장 고통을 겪었어요. 이런 경험은 겪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을 거예요. 이 경험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인생이 무엇이구나 하는 것을 음미할 나이에 이러한 경험을 하니까 이것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오는 거예요. 만약에 나처럼 시골에 혼자가서 그림을 그린다든가 사색 한다든가 하는 일을 20대나 30대에 한다면 지금 내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맛이 안 날거예요. 처음에는 자연으로부터의 공포, 아주 적막한 환경에서 오는 공포감이랄까, 겨울철같은 때 소나무 사이로 서풍이 불고, 밖에 나가면 뺨이 도려져 나가는 것 같이 춥고 할 때 자연으로부터 받던 공포감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컸어요. 처음 서너달 동안 그걸 경험하고 나니까 기습해 오는 게 고독감이예요. 그 고독감이란 청소년들의 어떤 센티멘탈한 바탕에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아주 냉랭하게 대좌하는 데서 오는 고독감입니다. 나는 20대부터 죽어라고 전위운동을 한다든가, 일평생을 돈 안생기는 일, 욕만 먹는 일로 뛰던 사람이거든요. 그렇게 살다가 이제 전화도 없고 일체의 정보하고 단절되어서 살게 되니까, 그런데서 오는 고독감이라는 게 어떤 걸 유발하냐 하면요. 인생 그 자체에 대해서 자기 반성을 하게 돼요. 내가 이제까지 살아 온 삶의 태도라든가,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스스로 반성해 보게 되더군요. 내가 나이 쉰을 넘겼으니까 앞으로 산다고 해야 20년이 못 돼요. 대체로 그림이라는 게 동양인에게는 65세까지를 한계로 하더군요. 동양화가나 서예가는 조금 다르지만요. 서양화를 하는 사람들, 우리같이 행위를 주로 하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체력과의 관계가 절대로 중요하다고 봐요. 행동 반경이 굉장히 넓거든요. 하루 종일 앉았다 일어났다, 체력의 소모가 대단한데, 그런 일을 하다보면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보다 자기 한계 연령에 대해서 절감하게 돼요. 나는 내 자신이 다른 화가들보다는 꽤 타고난 체력이 있다고 자위하고 있거든요. 하루 18시간 20시간 하는 작업을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계속해도 비교적 견디는 편이니까요. 그런 점에서는 다른 화가들보다 타고난 체력이 있다고 보지마는, 내 자신을 볼 때 65세까지가 가장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닌가, 그리고 65세 넘어서 70세까지를 일단 한계로 볼 때, 내 경우는 앞으로 18년정도 남았는데, 최소한도 3분의 2를 저쪽 가서 산다 하면 앞으로 20년을 잡아도 7년 밖에는 가족하고 같이 사는 시간이 없는 셈이예요. 그런 데서 오는 전반적인 문제, 경험하지 않았던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아주 차근차근히 펼쳐서 생각하게 되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여유 또한 내가 그런 환경에 놓여졌기 때문에 생긴 거지요.


자연을 통해 그림 속에서 찾은 여유

: 처음 6개월 정도가 선생님께서 만들어 놓은 환경,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환경에서 오는 엄습감에 적응하는 데 걸린 시간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후에는 어떤 심경의 변화가 오셨는지요?

: 그 다음부터는 아주 평화로왔어요. 내 일평생 어느 때보다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주 심신에 안정을 가지게된 때였어요. 심신에 안정이 오니까 서두르지도 않고 다그치지도 않고 아주 유유하게 인생을 관조할 수 있다 하는 것이 하나의 소득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서울 와 있는 시간이 골이 아파요. 때로는 이게 모든 것에 대한 체념이 아닌가, 또 이 체념이 자신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하지만 내가 볼 때는 나 나름대로 이러한 생활에서 가장 이상적인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현실과 떨어져서만 산다면 오늘날 같이 정보 물량화된 시대에 현실 감각에서 너무 벗어날 수도 있는데, 사흘은 서울 와서 골을 썩히다, 나흘은 시골에서 머리를 식히는 생활을 반복하니까 시대 감각과도 동떨어지지 않는 조화를 맞출 수 있다고 봅니다.

: 이제야말로 자연 속에 몰입을 해서 작업을 하시게 되었는데 작품 상에 어떤 변화를 느끼시지 않습니까?

: 나 자신은 엄청나게 변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관념적으로 사물을 보는 경향이 대단히 강하니까 박서보의 그림이라면 흰 바탕에 연필로 직직 그은 것이고 항상 그게 그거라고 보지만요. 그건 아주 관념적으로 파악하는 거지요. 나 자신은 과거의 그림하고 굉장히 달라졌다고 보는 게, 과거에는 그림을 그림처럼 만들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림이 어떻게 되는 가엔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행위를 통해서 산다는 일에 충실하려 해요. 그림의 결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 그림이 되어 가는 거라고 봐요. 그만큼 여유를 갖는 거니까요. 이런 것이 과거하고 근본적으로 변화가 생겼다고 보는 점이죠.


작가로 성공하려며 대작이어야

: 선생님은 항상 “나는 예술을 하려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예술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도 지워버리고 있다”는 식으로 말씀해오셨는데, 논리의 역설을 경험하면서 예술에 보다 더 깊숙이 도달하시려는 철학이 아니었읍니까?

: 예, 그런 얘기는 70년대 들어서부터 얘기해 왔죠. 그러면서도 그 당시는 예술을 하려고 하는 의식이 강했어요. 그런데 최근에 시골로 가면서 부터는 전혀 그런 게 없어졌어요. 예를 들면 선을 그리다가 그게 뭉그러져도 관심이 없어요. 그걸 다시 바로 잡으려고 하질 않는 거죠. 그러니까 훨씬 어떤 여유감이 생기지 않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 부분을 지적해서 평가하는 작가들이 꽤 있어요.

: 그 부분이 아주 중요한 부분 같은데요. 이전까지의 작업이 정신적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였다면 지금부터의 작업은 그것을 생활화하면서 정신의 육화(肉化)를 꾀하고 있다고 봅니다. 막상 시골에 내려가서 보니까 이제까기 나를 구속해왔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들로 부터도 해방되는 여유감이 생긴 것 같아요. 이제까지 선생님이 해오신 「묘법」시리즈는 모두 몇점이나 됩니까?

: 이번에 그림을 차곡차곡 정리를 해봤어요. 정확히 세어보니까 1천 점이 넘더군요. 그러나 1년 전 것, 2년 전 것, 10년 전 것이 그렇게 달라요. 그래서 내 그림의 변화를 알기 위해서는 역시 회고전 식의 전람회를 열어야 많은 사람들이 실감있게 느끼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관념적으로, 내 그림 그저 허옇고 연필로 선이나 직직 그은 거로 한데 의미를 넣어 버리거든요..

: 그 이전 작품들은 전부 어디 갔읍니까?

: 전부 없어졌어요. 팔렸다는 것이 아니라 없어진 겁니다.

: 안성에 있는 아틀리에에 묘법만 천 여 점이라 하셨는데 외국에 나가있는 작품도 꽤 되지 않습니까?

: 꽤 되지요.

: 얼마나 됩니까?

: 2백 여 점 될까요?

: 작년에 안성화실을 방문했을 때도 대작(大作)들이 거의 인 것 같던데요.

: 네, 여기에는 3백호, 2백호 주로 대작들만 있어요. 나는 대작을 주로 하니까요. 나는 작가가 결국은 대작을 가지고 성공한다고 봐요. 세계 어느 미술가도 대작을 가지고 성공해요. 그런데 우리나라를 보면 팔아 먹기에 바빠서 대작들을 안해요. 안하는 이유가 간수하기도 힘들고 갖다 놀 장소도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장소 없다는 것도 핑계지요. 왜 장소없는 사람들이 집은 그렇게 잘 해놓고 살아요? 집을 팔아서라도 화실 중심으로 집을 지으면, 왜 꼭 도시에 있어야 하나요? 변두리로 나가면 되지요. 요는 작가의식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내 인생을 살아갈까 하는 철저한 생각이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문제예요. 나도 저 화실 돈 있어서 지은 거 아니예요. 월급타면 모두 이자 갚고, 빚은 빚을 낳고, 내 저것 때문에 몇 년 고생했읍니다. 나는 공간이라는 게 작가에게 절대로 중요하다고 봐요. 예를 들어서 장욱진 선생 같은 분은 커다란 방에서 그림 그리라 하면 절대로 그림 못 그린다고 생각됩니다. 조그맣고 따뜻한 방안에 앉아야 그분은 그림 그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건 특수한 경우예요. 그런데 나는 현대 미술일 수록 공간이 넓어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합정동 집의 차고를 화실로 썼을 때 천장 높이가 꼭 2m였어요. 그러니까 대작을 제작하기엔 아주 거북한 데죠. 그런데서 제작을 하다가 공간이 넓은 데에 가니까 캔버스가 마치 자연이라고 생각이 되더군요. 그 자연을 대하는 자기의 기본적인 태도가 달라져요. 그래서 거리감이 훨씬 더 생기고 스케일이 커지고 호흡거리가 깊어지지요. 공간이 좁으면 왜소해질 수 밖에 없거든요. 그런 작업현장에서 주는 것이 내 커다란 변화 속의 하나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연 채광 속에서 칼라 상의 변화가

: 안성 화실은 선생님이 순수하게 작업만 하시려고 지으셨는데, 제일 높은 천정 벽이 얼마나 됩니까?

: 6m 50cm입니다. 화실 내부는 세 파트로 나뉘어져 있고, 그것을 하나로 트면 55평이 전체 작업장으로 될 수도 있읍니다. 작년 겨울에는 연료를 아끼려고 첫방 응접실에서 제작을 했거든요. 그런데 거기는 소파도 있고 목기 같은 것도 몇 개 있으니까 제작 공간은 서울보다 훨씬 넓은 데도 그러한 것들이 방해가 되어 제작을 못하겠어요. 그래서 금년에는 안쪽에 스토오브를 하나 더 달고 그 쪽에서만 제작을 하는데 훨씬 더 능률이 있더군요.

나는 작년 말 현대화랑에서의 개인전을 끝내고도 꽤 여러 점 시작하고 있는데 모두 대작들이예요. 이번엔 150호짜리 190개를 한번에 맞추어 가지고 시작했죠.

: 작가와 공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차고를 화실로 사용하실 때는 천장이 2m이고 안성 화실 높이는 6m인데, 이제 스케일도 넓어지고 캔버스와 자신과의 간격도 훨씬 넓어져 간 것 아닙니까? 또 곁들여 말할 수 있는 건 차고에서는 조명이 백열등이었는데 여기서는 자연채광 아닙니까? 거기에서 오는 어떤 칼라의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 좋은 점 지적해 주셨는데, 나는 그전 작품이 그렇게 누렇다고는 생각질 않았어요. 그런데 여기서 그린 것을 자연 채광 속에서 보니 어쩌면 그렇게 누런지 모르겠어요. 또 전반적으로 흰 톤이 침울하리만큼 너무 가라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자연으로 가니까 흰색에 대한 미묘한 반응이 훨씬 더 예민해졌다는 거예요. 역시 자연 채광 속에서 직접 칼라는 개어 가지고 톤을 봐 가면서 하니까 색에 대한 민감도가 훨씬 달라지더군요. 또 하나, 서울에서는 화실 밖으로 나가면 사방이 시멘트 벽들로 공간이 밀폐돼 있었는데 시골에서는 수십 리로 사방이 트여 있으니까 자기 가슴을 여는 폭이나 호흡거리가 전혀 달라져요. 이렇게 자연이 주는 영향이 큰 것 같아요.

: 안성에선 밤에는 작업을 안하시죠?

: 왜요. 밤에도 하지요. 낮에는 태양 광선이 조금 너무 밝게 들어오니까 정신적으로 산만해요. 과거에 밤을 주로 이용했던 습관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요즘은 밤이건 낮이건 모두 이용해서 작업을 해요. 미리 낮에 오일 칼라(흰색)를 전부 개어 놓는데, 언뜻 보면 같은 흰색이지만 그게 전부 달라요. 육안으로는 내가 봐도 그게 그거지만 제작한 후에 보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통에 번호를 매겨 놓지요.

: 이제는 안성의 화실 생활에 아주 익숙해지셨겠네요.

: 익숙이라기 보다는 그렇게 사는 게 아주 틀에 박힌 것 같이 돼 버렸어요. 수요일이나 목요일 아침에 내려가서는 일요일 저녁이나 월요일 아침에 올라오죠. 일단 내려가서는 대문 잠궈버리고 집밖에 나오질 않아요. 일이 다 끝나면 대림동산에서 버스 타고 올라 오니까 안성읍에는 별로 안 나가지요.


[후략]


<표기 원칙>

- 한글본: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에 사용된 기호나 숫자, ‘-읍니다’ 등의 표현을 현대한국어 문법에 맞추어 교정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어 표기 시 사용되는 낫표 「」는 생략, 겹낫표 『』는 의미상 사용에 따라 홑따옴표 ‘ ’ 와 겹따옴표 “ ” 로 교정했다. 확인할 수 없는 글자는 ■로 표기한다. 변경된 명칭이나 오기, 편집자 주는 대괄호 [ ]로 표기하고 긴 내용의 경우에는 주석을 달았다.


[자료 설명]


ARCHIVE FOCUS 22호의 주제는 박서보의 안성 한서당 작업실이다. 1974년 합정동 미니 이층집에 터를 마련하고 6년 후인 1980년 말, 오십 세의 박서보는 경기도 안성에 오랜 숙원이었던 화실을 마련했다. 오십 세에 한서암으로 낙향한 퇴계 이황의 이야기에서 착안하여 ‘찰 한(寒)’ 자에 박서보의 이름에 쓰인 ‘깃들일 서(栖)’ 자를 사용하여 한서당(寒栖堂)이라는 당호가 붙여진 이 작업실은 온전히 박서보의 기획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첫 번째 작업실이다. 1980년대 12월부터 1996년 화재로 전소되기까지 16년간 유지된 박서보의 안성 작업실은 이 시기 박서보의 작품들과 예술계에서의 활동에 대한 이해를 제공한다. 작가의 생각을 반영하여 건축가인 박서보의 동생 박홍이 설계한 안성 한서당의 모습은 1980년대부터 1996년까지 10여 개의 잡지와 기사에 담겼다. 특히 1982년 3월의 『공간』지는 ‘화가와 아틀리에 건축’이라는 특집으로 건축가의 작업기, 아틀리에 면면의 사진에 더하여 작가가 작업실 공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와 새로운 작업실이 제공하는 환경, 그 공간이 작품과 작가로서의 삶에 미치는 영향까지 박서보의 작업실을 심층적으로 취재하고 있어 이번 호의 핵심 자료로 다룬다. 22호에서는 1982년 3월의 『공간』지의 전반부에서 다루어지는 안성 한서당의 공간적 환경과 박서보의 작업과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1979년 1월 한 잡지의 기고글에서 박서보는 자신이 늘 소망하는 아틀리에를 묘사했다.1) 그 공간은 “낮으막한 남향마지에 40평짜리 화실, 제작 도중 짬짬이 쉴 수 있는 아늑한 방과 방습처리와 통풍이 제대로 된 창고를 한쪽에 곁드려 그동안 제작해 놓은 작품들을 그놈의 쥐와 곰팡이로부터 완전히 보호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설”을 갖춘 곳이다. 이에 더하여 작가는 산으로 둘러싸여 북창으로 내다볼 수 있고 탱자나무 울타리로 담을 나지막하게 둘러싸보고자 상상하는데, 이는 박서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작업실이 전통적이고 고즈넉한 풍경 속에 있는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60년대와 70년대 초에는 한 해에도 여러 차례 작품이 가득한 짐을 꾸려 이사해야 했던 작가에게 이러한 작업실은 요원했다. 1974년 합정동 이층집 차고에 작업실을 마련했지만, 캔버스 수가 계속 늘어나 차고 밖 길가의 담장에다 기대어 놓고 작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2) 박서보는 꿈꾸어 오던 작업실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 곳곳과 인근 지역을 답사하기 시작했고3) 마침내 고향 친구의 주선으로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현재 안성시 공도읍 마정리)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의 땅을 구매했다.4) 처음으로 “땅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된 박서보는 안성에서 여생을 머물 생각으로 인부들과 함께 땅을 고르는 일부터 직접 작업실의 설계에 참여했다.

아틀리에가 지어진 경기도 안성은 박서보가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보낸 마음의 고향과 같은 장소였다.5) 그러나 1982년 3월의 『공간』지에 실린 건축가 박홍의 글에 따르면 작업실의 입지는 이러한 개인적 애착보다도 자연에 귀의하고자 하는 작가의 예술관에 따른 것이었다. 안성 한서당은 서울 남부, 수원 방향으로 차로 50여 분 정도 달려 빠져 나와서야 도달하는 경기 평야 한복판의 작은 산등성이를 깎아 내린 언덕에 위치했다. 500평 정도의 대지에 아틀리에와 정자 외에는 한 쪽으로는 울창한 노송과 사면으로 전망이 트인 잔디 정원으로 구성되어, “산사(山寺)와도 같은 적막함”이 머무는 공간으로 건축가는 묘사하고 있다.

박서보는 『공간』지의 편집자였던 조정권과의 긴 대화에서 작가에게 공간이 가지는 절대적 중요성에 대해 설파하며 안성 한서당이라는 공간의 특징들을 설명했다. 무엇보다 작가에게 안성 한서당은 속세에서 벗어나 “모든 것하고도 완전히 단절되어 지내야 하는 고독”을 경험하는 곳이다. 박서보는 홍대에서의 수업을 주초에 몰아두고 수요일이나 목요일 정오면 한서당에 내려왔고, 일정이 허용하면 일주일이나 열흘까지도 머물며 아틀리에의 문을 걸어 잠그고 가족이나 기타 모든 것에서 떨어져 생활했다. 조정권의 서술에 따르면 작가는 작업실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정류장에 내리면 눈 앞으로 펼쳐지는 평야를 가로질러 차로 7, 8분쯤 걸리는 걸리는 한적한 길을 일부러 걸어 오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호의 두 번째 자료인 박서보 사진모음집의 1982년 4월 10일자의 사진들(자료 (2))은 모두 한서당을 둘러 싼 주변 환경을 기록하고 있다.6) 작가의 카메라는 작업실보다도 구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흰 빛으로 고요한 대기로 우리의 시선을 유도한다. 작업실이 위치한 언덕 아래로 이어지는 평야 또한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하늘로 스며 든다. 박서보의 안성 한서당 사진들에는 사방이 트인 공간감과 청명한 공기, 그리고 햇빛이 담겨 있는 듯하다.

안성 한서당 아틀리에의 구조는 증빙자료집에는 스크랩되어 있지 않지만 1982년 당시 『공간』지에 실렸던 설계도를 통해 면밀히 확인 가능하다. 정문 방향에서 잔디를 가로 지르면 마주할 수 있는 작업실은 대지 면적의 1/10에 해당하는 50평 정도(173m2)의 건물이었다.(1982년 3월 『공간』지 ⓵번 이미지 왼쪽 사진) 건물은 스페인 풍의 기와 지붕과 거무스름하게 구운 벽돌으로 외벽을 마감하고 층고가 높은 단층 구조로 이루어졌다. 『공간』지에 수록된 박홍의 글에 따르면 아틀리에를 후대에 미술관으로 사용할 계획이 있었기에 형태적으로 더 많은 고안을 해보고 싶었던 건축가의 욕심과는 달리 “자신은 별스러우면서도 별스런 건물이 되는 것을 싫어”한 박서보의 의지가 반영되었다. 건물은 휴식, 응접, 식사 등 다목적으로 사용될 제1스튜디오와 작업실과 수장고로 사용될 제2, 제3스튜디오 세 부분으로 크게 구성되었다. 내부 천장은 나무, 내벽과 바닥은 별도의 처리를 하지 않은 회백색의 벽돌로 마감되었으며, 천정 높이에 설치된 고창 외에는 대체로 창을 공간의 모서리에 좁고 길게 배치하여 자연스럽게 광선이 작업실 내부에 공간에 퍼질 수 있도록 하고 최대한의 벽면을 확보했다.7)

제1스튜디오는 휴식 및 식사를 하며 정원을 조망할 수 있도록 넓은 통창을 낸 것이 특징이다.(자료 (1) ⓶번 이미지, 상단 왼쪽) 창에는 무늬가 있는 간유리를 사용하여 햇빛이 은은하게 여과되어 들어오며, 7-8인 정도가 마주하여 모여 대화할 수 있도록 배치한 소파를 중심으로 다양한 크기의 연필 묘법 작품들이 벽에 전시되어 있었다. 층고가 높은 공간을 데우기 위해 천장을 가로지르는 철제 연통이 설치되어 있고 박서보가 애정을 가지고 수집해 온 고가구와 백자가 곳곳에 놓였던 것도 확인된다. 제1스튜디오 공간의 동북측에 있던 박서보의 침실 겸 서재 공간이 ⓶번 이미지 상단 오른쪽 사진에 해당하는데, 벽의 전면이 책과 박서보가 수집한 자기로 가득 찬 책장으로 메워져 있고 카페트가 깔린 바닥과 한쪽 구석의 침대 모서리를 엿볼 수 있다. 제1스튜디오의 통창의 반대편은 제2, 3스튜디오로 이어지지만 평소에는 미닫이 가벽으로 공간을 구분했다.8)

박서보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들에서 제2스튜디오의 사진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1스튜디오 응접실 공간과 제3스튜디오(작업실)에서 찍은 구도의 사진들에서 작품을 보관하는 철제 랙의 일부를 관찰할 수 있어 주로 수장고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작가의 주된 작업실로 기능했던 제3스튜디오의 모습은 ⓶번 페이지 우측 전면 사진과 이어지는 이번 호의 사진 자료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982년의 『공간』지 특집에 싣기로 선택한 단 한 점의 제3스튜디오 작업실 사진에서는 공간의 높은 층고와 고창을 통해 작업실에 드리우는 햇빛의 효과가 극적으로 드러난다. 1982년 3월 1일, 『공간』지와 거의 동일한 시기에 김장섭이 촬영한 박서보 사진모음집의 안성 한서당 사진들에서도 창을 통해 공간에 드리우는 은은한 빛과 그림자의 효과가 드러나는 장면들이 다수 촬영되어, 작업실을 찾아온 이들이 느낀 작업실의 전반적인 인상에서 자연광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음을 짐작하게 한다.9) 또한 천장 높이가 2m에 불과했던 합정동 이층집의 차고 작업실과 달리, 제일 높은 벽이 6m 50cm, 즉 일반 주택 두 개 층 정도 높이인 한서당의 작업실에서는 『공간』지 사진에서와 같이 100호가 넘는 연필 묘법 작품을 벽에 세워 두고도 그 위로 몇십 호의 묘법을 더 걸어둘 수 있을 만한 층고가 조성되었다. 조정권과의 인터뷰에서 박서보는 안성 한서당이라는 작업 환경에서 “캔버스가 마치 자연이라고 생각”되었다고 서술한다. 작가에게 이는 캔버스/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하여 작업과 더욱 거리감을 가지게 되고 다루는 범위와 호흡이 더욱 커지고 깊어진 것을 의미했다. 박서보가 안성 작업실에서 체화하게 된 공간의 감각을 1983년 『공간』지 기사에 수록된 사진들에서도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수 있다.10) 높은 층고에 벽돌로 된 작업실에는 당호에서처럼 정신을 또렷하게 하는 차가운 한기가 내려 앉는다. 작업실의 한기를 데워보기 위한 미약한 시도로 난로와 연통이 공간을 가로지르고, 고창과 간유리를 통해 작업실 내부를 채우는 자연광이 작업실을 밝힌다. 아틀리에 한복판에 서 있는 박서보의 모습은 풍경화 속의 인간처럼 조그맣게 보인다. 천장의 고창과 모서리의 창문 외에는 사방이 벽으로 가로 막힌 건축이지만 아틀리에 안에서는 마치 야외에 있는 듯한 공간감이 느껴지고, 연필을 쥔 손과 신체의 행위를 제한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안성 한서당에서의 작업 후 11개월여 만에 현대화랑에서 개최한 6년만의 개인전을 소개한 기사 인터뷰에서는 전시작들이 박서보의 안성 작업실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언급되며, 작가는 “요즘들어 내 작품에서 기(技)보다 기(氣)가 앞서고 있다면 그것은 속진[俗塵, 속세의 티끌]을 떨쳐버린 새 화실주변의 자연 덕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11) 이렇듯 박서보는 이 시기 연필 묘법 작품들에 안성 한서당이라는 공간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인지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이 시기 작가의 작품들에서도 구체적인 변화가 감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2)

안성에서의 시간은 박서보의 삶과 작업 전반에 지속적으로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작업 환경의 공간적 변화는 1982년부터 박서보가 탐구하기 시작한 새로운 매체인 한지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성 작업실이 박서보의 한지 묘법과 맺은 관계와 이 장소가 박서보의 예술적 삶 뿐만 아니라 사회적 삶에서 작동했던 방식들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다.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

<주석>

1) 박서보, 「아뜨리에 작만의 꿈」, 『동서문화(東西文化)』(1979년 1월), 페이지 미상.

2) 박서보, 「나의 창작실: 누에의 흰색 꿈이 간직된 곳」, 『삼성문화(三星文化)』(1990년 가을호·겨울호), 통권 제12호, p. 67.

3) 박서보는 1979년 기고글에 작업실을 위한 공간을 찾기 위해 서울 세검정 근처의 택지를 살펴보러 갔다가 느낀 단상을 적었다. 박서보, 「역마살」, 『엘레강스』(1979년 5월), 페이지 미상.

4) 박서보, 「나의 창작실: 누에의 흰색 꿈이 간직된 곳」, 위의 책, pp. 67-69.

5) 「〔작가의 고향 <93>〕 안성: 나를 지우는 묘법(描法)의 고장」, 『월간조선』(1992. 2.), pp. 497-503.

6) 박서보가 이 날 촬영한 사진들 가운데 총 29장의 사진이 박서보 사진모음집 No.5에 보존되어 있다. 29장의 사진들은 세 장을 제외하고 모두가 23호의 사진과 유사한 구도로 한서당을 둘러 싼 주변 환경을 담고 있다. 아카이브에 보존된 수십 장의 안성 한서당 사진들 가운데 그 곳을 방문한 동료 친지들과의 시간을 담은 경우를 제외하고 이 29장의 사진은 유일하게 박서보가 작업실의 모습의 기록에 집중한 것이다.

7) 박서보, 「나의 창작실: 누에의 흰색 꿈이 간직된 곳」, 위의 글, pp. 67-68. 작업실 내부가 기록된 81년도의 박서보 사진모음집 사진들에서는 벽면의 벽돌 사이 마감이 어두운 색으로 남아 있어 별도의 마감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되나, 1983년도의 사진과 1986년도 12월 『한국화보』에 실린 사진에서는 벽을 흰 페인트로 칠하여 마무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8) 1984년 박서보의 아틀리에를 취재한 『현대주택(現代住宅)』의 기자는 작가가 응접실의 벽을 밀어제쳐 화실로 이어지는 통로를 열어 보이자 가볍게 놀란다. 강정자, 「[그사람/그집/그생활] 자연에 붙안긴 한서당의 삶과 예술」, 『현대주택(現代住宅)』(1984. 7.), pp. 40-44. (박서보 증빙자료집 No.18)

9) 박서보 사진모음집 No.5에는 김장섭이 촬영한 흑백 사진 23점이 보관되어 있다. 김장섭은 작업실 뿐만 아니라 한서당 곳곳의 사소한 기물들을 기록했으며 고창에서 쏟아지는 극적힌 빛을 활용하여 작가의 프로필 사진을 두 점 남겼다.

10) 1983년 4월의 『공간』지는 1년만에 다시금 박서보에 대한 기사를 다루며 이번에는 아틀리에가 아닌 작가의 묘법 예술관에 대해 깊이 있게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박서보의 안성 작업실의 모습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어 부득이 사진 자료들을 위주로 이번 호에 싣는다. 「특집(特輯): 박서보의 묘법(1967~1983)」, 『공간(空間)』(1983년 4월), pp. 25-26에서 발췌.

11) 「[인터뷰] 「묘법(描法)」개인전(展) 갖는 박서보(朴栖甫)씨」, 『한국일보』(1981년 11월 3일) (박서보 증빙자료집 No.14)

12) 작가는 조정권과의 인터뷰에서 작품에서 선을 명확하게 통제하려는 욕심 대신 일종의 “여유감”이 생기고, 사방이 트인 공간을 인지하며 작업하다 보니 “가슴을 여는 폭이나 호흡거리가 전혀 달라졌다”고 서술한다. 또한 노란 빛이 돌던 형광등 아래에서의 제작했던 작품들의 색이 낮의 밝은 자연 채광 속에서는 누렇게 느껴져, 보다 미묘한 흰색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1981년 11월 현대화랑 개인전에 실제로 박서보는 150호가 대부분인 대작들을 출품했는데, 이 작품들에 대해 『중앙일보』에서는 “종래에 비해 선이 유연해지고 전체 화면에 여유감”이 보인다고 서술했으며 평론가 이일은 초기의 규칙적인 선묘에서 무아(無我)의 상태로 변모했다고 분석하기도 하였다. 현재 재단에 아카이브된 작품 이미지로는 이 시기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색채의 전반적 경향을 검증하기 어려우나, “인간의 의지가 가장 표백된 흰색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흰색의 개성’마저 중화시키기 위해 5~6가지 색을 섞어” (1981년 11월 3일자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작가의 표현이다) 안료를 만들어 온 작가가 이 시기부터 자연광 아래에서의 색조를 보다 섬세하게 고심하기 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터뷰] 6년만에 개인전(個人展) 연 박서보(朴栖甫) 화백」, 『중앙일보』(1981년 11월 3일); 이일, 「[미술평(美術評)] 「경지(境地)」이룬 대범한 필치(筆致): 박서보(朴栖甫)의 묘법(描法)시리즈전(展)을 보고」, 『조선일보』(1981년 11월 11일); 「[인터뷰] 「묘법(描法)」개인전(展) 갖는 박서보(朴栖甫)씨」, 『한국일보』(1981년 11월 3일).

13) 박홍의 한문 표기는 朴弘이다. 잡지의 표기는 오타인 것으로 파악된다.


참고자료

박서보, 「아뜨리에 작만의 꿈」, 『동서문화(東西文化)』(1979년 1월).

박서보, 「역마살」, 『엘레강스』(1979년 5월), 페이지 미확인.

「[인터뷰] 「묘법(描法)」개인전(展) 갖는 박서보(朴栖甫)씨」, 『한국일보』(1981년 11월 3일).

「[인터뷰] 6년만에 개인전(個人展) 연 박서보(朴栖甫) 화백」, 『중앙일보』(1981년 11월 3일).

이일, 「[미술평(美術評)] 「경지(境地)」이룬 대범한 필치(筆致): 박서보(朴栖甫)의 묘법(描法)시리즈전(展)을 보고」, 『조선일보』(1981년 11월 11일).

「특집(特輯): 화가(畫家)와 아뜰리에 건축(建築): 안성 한서당」, 『공간(空間)』(1982년 3월).

- 박홍, 「안성한서당(安城 寒栖堂): 박서보씨 화실(朴栖甫氏 画室)」, pp. 46-50.

- 박서보, 조정권, 「박서보씨(朴栖甫氏)와의 대화(対話): 안성 한서당(安城 寒栖堂)─그 현장(現場)을 찾아서」, pp. 51-58.

「특집(特輯): 박서보의 묘법(1967~1983)」, 『공간(空間)』(1983년 4월).

- 조정권, 「박서보의 묘법(1967~1983)」, pp. 24-28.

이일, 「미술평(美術評)] 「경지(境地)」이룬 대범한 필치(筆致): 박서보(朴栖甫)의 묘법(描法)시리즈전(展)을 보고」, 『조선일보』(1981년 11월 11일).

강정자, 「[그사람/그집/그생활]자연에 붙안긴 한서당의 삶과 예술」, 『현대주택(現代住宅)』(1984. 7.), pp. 40-44.

윤세영, 「추상화 운동의 선구자: 박 서보 화백」, 『한국화보(The Monthly Pictorial of Korea)』(1986년 12월), 사진: 최영재.

박서보, 「나의 창작실: 누에의 흰색 꿈이 간직된 곳.」, 『삼성문화(三星文化)』(1990년 가을호·겨울호), 통권 제12호, pp. 67-69.

「〔작가의 고향 <93>〕 안성: 나를 지우는 묘법(描法)의 고장」, 『월간조선』(1992. 2.), pp. 497-503.

유흥목, 「르포/안성(安城)의 「화가(画家)마을」」, 『세계』, 61호, (1986년 5월 1일), 사진: 조성위.


[원문]


특집(特輯): 화가(畫家)와 아뜰리에 건축(建築), 『공간(空間)』(1982년 3월)


안성 한서당(安城 寒栖堂)

Hanseo-dang in Ansung

박서보(朴栖甫)씨 화실(画室)

설계(設計)/ 박홍(朴洪)13)

photo/ 정정웅(鄭正雄)


건물명칭/ 박서보(朴栖甫)교수 「아틀리에」(한서당(寒栖堂)). 위치/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90~32/ 대지면적/ 1,580m². 건축면적/ 173m². 구조·층수/벽: 적연과 치장쌓기, 지붕: 스페니쉬 기와잇기. 내부마감/ 바닥·벽: 고압벽돌 미장쌓기, 천정(스튜디오): 유절미송후로링. 외부창호/ 발색알미늄 칼라샷시+(모라돈). 설계기간/ 40일(1980년 8월~9월). 공사기간/ 3개월(1980년 9~12월)


(사진캡션/ 왼쪽) 동남(東南)쪽에서 본 외관(外觀), 외벽재(外壁材) 적연

(오른쪽) 동북(東北)쪽에서 본 외관(外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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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朴洪), 「안성한서당(安城 寒栖堂): 박서보씨 화실(朴栖甫氏 画室)」, pp. 46-50


(캡션/ 왼쪽) 응접실

(오른쪽) 화가(画家)가 기거하는 방(房) 아뜰리에(부분(部分))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를 50분쯤 달리다 보면 「안성인터체인지」에 이른다. 여기서 좌측방향이 경기도 안성땅. 허허벌판의 경기평야(京畿平野)가 펼쳐지면서 5분 가량 달리기를 계속하면 「대림동산」이라는 별장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글자 그대로 자그마한 동산을 단지로 일구어 놓은 조용한 마루턱 아래 양지바른 구형(矩形)의 땅을 찾아간 것이다.

아름드리 노송(老松)들이 울울창창한 사이로 소슬바람이 초여름의 이마를 식히고 이따금 방울이 구르는 듯한 멧새소리가 산사(山寺)와도 같은 적막함을 깨치는 곳이었다.

나는 여기서 이제부터 짓고자 할 「아틀리에」의 주인(主人)이자, 내 형(兄)인 박화백(朴画伯)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이곳에 대한 애착은 우리 형제들이 자라난 고향이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도시를 훌쩍 떠나고파했던 그의 바램 때문이리라. 그가 얼마나 자연을 그리워 하고 또 자연에 귀의코자 했던가는 설계하기 전부터 「풍경」이랑 「연자방아」 등을 구해다 놓고, 손수 뙤약볕아래 나무에 물을 주는 수선스러움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설계(設計)는 시작되이었다. 그것도 한달간의 여유 밖에 주지 않고 아주 급하게….

이 건물은 애초부터 형태(形態)보다는 기능(機能)에 충실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게다가 훗날 자신의 유작품(遺作品)을 상설, 전시하는 미술관(美術館)으로 전용(転用)한다는 기능(機能)의 요구와 함께….

건물의 배치는 암입동선(岩入動線)으로 보아 후문(後門)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시켜 장래 증축코자 하는 살림채(주택(住宅))와의 연관과 전망좋은 정원을 확보하는데 두었다.

평면계획은 회화작업(绘画作業)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하나의 공간(空間)이면서도 세개의 「쳄바」로 구획되는 기능(機能)의 배분(配分)과 공간의 변화를 꾀했으며 벽체의 엇막음이 구조체(構造体)의 역할과 함께 작업면적(作業面積)과 전시(展示)벽면의 확대효과를 더해준다.

좁고 긴 창문이 모서리마다 설치된 것은 좀 더 넓은 벽 면적의 확보를 위함이고 더 이상의 채광조절은 천정 높이 설치된 고창(高窓)이 담당케 했다. 「제 1스튜디오」의 고창을 북쪽에 둠에서 오는 밝지 못함을 커버하고 정원조망(庭園眺望)을 위해 창문을 시원스레 튼 것은 이 방이 휴식(休息), 응접(應接), 식사(食事)등 다목적(多目的)으로 쓰여지게 될 것이라는 기능적 배려이고, 「제 3스튜디오의」의 고창(高窓)을 남쪽으로 역배치(逆配置)한 것은 외부의 형태적 조화와 함께 계절과 시각변화에 따른 공간이용(空間利用)의 자유로움을 부여(賦与)하는데 있다.

외벽에 돌출된 「조각대」는 벽체를 지탱시키는 「부축벽」의 구조적 부산물이고 벽돌벽의 단조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릴리프」는 시공되지 않았다.

어느 건물(建物)이거나 각기 요구되는 기능이 있기 마련이지만 설계자(設計者)는 형태적인 추구를 즐거워 한다. 그러나 이 건물의 경우에는 그것이 허용되지 못한 아쉬움만을 남겼다. 더구나 먼 훗날 미술관(美術館)이라는 기념성(紀念性)을 지닌 건물이 되고자 한다면 좀 더 조형적(造形的)인 구성이 허용되지 못함이 원망스럽다. 그것은 자신은 별스러우면서도 별스런 거물이 되는 것을 싫어 했던 그의 화가(画家)스런 고집과 예산의 한정, 공사 진행의 무계획이 빚은 졸속(拙速)이었으며 타협과 설득력이 부족했던 나 자신을 자책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연을 벗삼아 노닐면서 작품제작에 열중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가장 큰 나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박홍(朴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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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조정권, 「박서보씨(朴栖甫氏)와의 대화(対話): 안성 한서당(安城 寒栖堂)─그 현장(現場)을 찾아서」, pp. 51-58


「안성 한서당(安城 寒栖堂)─그 현장(現場)을 찾아서」

A Visit of the Newly-built Hanseo-dang in Ansung

-박서보씨(朴栖甫氏)와의 대화(対話)-


대화자(対話者): 조정권

CHO Choung-kwun


『나는 우리 사회에서 진실 아닌 것들에 의해 매도 당하고, 어느 사람의 주장이 주장으로서 받아 들여지기 보다는 저 사람 자기 얘기만 하다고 매도되는 그런 모순된 현실을 많이 봅니다. 그래서 나는 죽어서 욕먹을 짓은 전혀 안한다. 살아있는 동안 주위로부터 오해 당해서 매도된다 해도 그걸 감수하겠다. 그러니까 종교적 의미에서의 영생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영생을 택하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고독속에서 자신과 대면을

서울을 벗어나 한 50분쯤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를 달리면 경기도 안성(安城)땅. 정류장에서 내려 눈앞에 전개되는 허허한 평야를 사이에 두고 그는 한적한 길을 일부러 걷는다. 택시로 가면 7,8분쯤 걸릴까하는 거리를 걷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에게는 이곳이 바로 고향(故鄕)땅이요 그가 나서 자라고 뜻을 키우던 곳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90의32. 조그마한 산등성이를 깍아 내린 약 5백평 정도의 언덕, 양지바른 터전에 아담한 스페인풍(風)의 기와를 얹은 벽돌집. 그는 수요일이나 목요일 정오면 어김없이 이곳에 도착해있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서울에 도착해있다. 마당에는 정자(亭子)가 있고 연자방아, 석등(石燈), 망부석(望夫石), 철쭉, 백목련, 목백일홍…. 옛말에 각병정년(却病廷年)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에게는 이곳이 도시에서 묻혀온 마음의 때를 벗고, 세사(世事)의 병(病)을 잊는 작업에 몰두하며 뼈를 깎고 정신의 수명(壽*命))을 연장하는 곳이다. 전화가 있을 리가 없다. 문을 걸어 잠그면 완전히 외부와 단절되는 곳.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저만치 떼어놓고 바라보는 방법(方法)을 터득해온 것이다. 아니 이 경우 터득이라는 표현보다는 차라리 심득(心得)이라는 말이 적절하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된다. 그가 이곳에서 자연과 접하며 무자서(無子書)나 읽고 소나무와 정자(亭子)를 벗하며 무현금(無絃琴)을 뜯으며 자족(自足)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에게 있어 이곳은 자기자신을 본래의 일상적(日常的)인 의미(작가(作家))로 환원시켜놓고 거기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심전지(心戰地)이요 그 현장(現場)인 것이다.

기자(記者)는 우선 시골생활에 대해 질문을 했다.

조(趙): 선생님의 화실을 한서당(寒栖堂)이라고 이름지은 데에는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읍니까?

박(朴): 특별한 뜻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마음에 드는 이름이예요. 퇴계가 나이 오십에 낙향(落鄕)해서 정자를 하나 지었는데 그게 바로 한서암(寒栖岩)입니다. 최명영(崔明永)씨가 퇴계를 읽다가 발견하고서 저에게 한서당(寒栖堂)이 어떠냐고 하더군요. 공교롭게 나도 나이 오십에 고향을 찾아 화실을 지었고, 퇴계도 오십에 낙향(落鄕)했다는 것이 일치되고, 차가울 「한(寒)」자(字)의 의미가 앞으로 내 인생과 삶을 그속에다 몰아붙이며 살아가려는 어떤 의지와 생명력을 다시 주는 것 같아요. 또 「서(栖)」자(字)도 내 이름자 중에 한 글자이고요. 그래서 그렇게 정해버린 거죠.

조(趙): 벌써 햇수로 2년인가요. 선생님의 경우는 낙향(落鄕)하신 게 아니지만, 만나뵈니까 여전히 건강하고 작업도 왕성하시군요. 어때요? 안성(安城)생활이.

박(朴): 내가 나이 쉰이 되도록 변변한 아틀리에 하나 없었다는 이유때문에도 아틀리에를 지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장소를 시골을 택한 이유는 나를 사회로부터 단절시키고 고립화 시킴으로써, 자신의 근원적인 문제부터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게 첫째 이유였어요. 둘째 이유는 경제적 이유죠. 집 자체야 도시에 짓는 거나 시골에 짓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도시에 지으려면 땅값이 많이 들어요. 그리고 저는 반드시 도시에 있어야 예술이 된다고는 생각질 않아요.

시골에 화실을 짓고 그 생활속에서 제일 보람으로 느끼는 것은 어떤 인생의 쓰라린 밑바닥 같은 것을 경험해 본다는 거죠. 일주일이면 일주일, 열흘이면 열흘을 가족이나 기타 모든 것하고도 완전히 단절되어 지내야 하는 고독을 경험하면서, 저는 고통을 겪지 않고는 예술이 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어요. 2년동안의 그런 경험위에서 저는 시골로 내려가길 정말 잘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조(趙): 거기서는 그러면 선생님이 직접 끓여 잡수시는지요?

박(朴): 그럼요. 끓여 먹는 것도 익숙해지니까 별로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처음에 안성가서 한 반년 가장 고통을 겪었어요. 이런 경험은 겪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을 거예요. 이 경험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인생이 무엇이구나 하는 것을 음미할 나이에 이러한 경험을 하니까 이것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오는 거예요. 만약에 나처럼 시골에 혼자가서 그림을 그린다든가 사색 한다든가 하는 일을 20대나 30대에 한다면 지금 내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맛이 안 날거예요. 처음에는 자연으로부터의 공포, 아주 적막한 환경에서 오는 공포감이랄까, 겨울철같은 때 소나무 사이로 서풍이 불고, 밖에 나가면 뺨이 도려져 나가는 것 같이 춥고 할 때 자연으로부터 받던 공포감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컸어요. 처음 서너달 동안 그걸 경험하고 나니까 기습해 오는 게 고독감이예요. 그 고독감이란 청소년들의 어떤 센티멘탈한 바탕에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아주 냉랭하게 대좌하는 데서 오는 고독감입니다. 나는 20대부터 죽어라고 전위운동을 한다든가, 일평생을 돈 안생기는 일, 욕만 먹는 일로 뛰던 사람이거든요. 그렇게 살다가 이제 전화도 없고 일체의 정보하고 단절되어서 살게 되니까, 그런데서 오는 고독감이라는 게 어떤 걸 유발하냐 하면요. 인생 그 자체에 대해서 자기 반성을 하게 돼요. 내가 이제까지 살아 온 삶의 태도라든가,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스스로 반성해 보게 되더군요. 내가 나이 쉰을 넘겼으니까 앞으로 산다고 해야 20년이 못 돼요. 대체로 그림이라는 게 동양인에게는 65세까지를 한계로 하더군요. 동양화가나 서예가는 조금 다르지만요. 서양화를 하는 사람들, 우리같이 행위를 주로 하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체력과의 관계가 절대로 중요하다고 봐요. 행동반경이 굉장히 넓거든요. 하루종일 앉았다 일어났다, 체력의 소모가 대단한데, 그런 일을 하다보면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보다 자기 한계연령에 대해서 절감하게 돼요. 나는 내 자신이 다른 화가들보다는 꽤 타고난 체력이 있다고 자위하고 있거든요. 하루 18시간 20시간 하는 작업을 한달이고 두달이고 계속해도 비교적 견디는 편이니까요. 그런 점에서는 다른 화가들보다 타고난 체력이 있다고 보지마는, 내 자신을 볼 때 65세까지가 가장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닌가, 그리고 65세 넘어서 70세까지를 일단 한계로 볼 때, 내 경우는 앞으로 18년정도 남았는데, 최소한도 3분의 2를 저쪽 가서 산다 하면 앞으로 20년을 잡아도 7년 밖에는 가족하고 같이 사는 시간이 없는 셈이예요. 그런 데서 오는 전반적인 문제, 경험하지 않았던 몇가지 문제들에 대해 아주 차근차근히 펼쳐서 생각하게 되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여유 또한 내가 그런 환경에 놓여졌기 때문에 생긴 거지요.


자연을 통해 그림 속에서 찾은 여유

조(趙): 처음 6개월 정도가 선생님께서 만들어 놓은 환경,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환경에서 오는 엄습감에 적응하는 데 걸린 시간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후에는 어떤 심경의 변화가 오셨는지요?

박(朴): 그 다음부터는 아주 평화로왔어요. 내 일평생 어느 때보다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주 심신에 안정을 가지게된 때였어요. 심신에 안정이 오니까 서두르지도 않고 다그치지도 않고 아주 유유하게 인생을 관조할 수 있다 하는 것이 하나의 소득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서울 와 있는 시간이 골이 아파요. 때로는 이게 모든 것에 대한 체념이 아닌가, 또 이 체념이 자신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하지만 내가 볼 때는 나 나름대로 이러한 생활에서 가장 이상적인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현실과 떨어져서만 산다면 오늘날같이 정보물량화된 시대에 현실감각에서 너무 벗어날 수도 있는데, 사흘은 서울 와서 골을 썩히다, 나흘은 시골에서 머리를 식히는 생활을 반복하니까 시대감각과도 동떨어지지 않는 조화를 맞출 수 있다고 봅니다.

조(趙): 이제야말로 자연속에 몰입을 해서 작업을 하시게 되었는데 작품상에 어떤 변화를 느끼시지 않습니까?

박(朴): 나 자신은 엄청나게 변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관념적으로 사물을 보는 경향이 대단히 강하니까 박서보(朴栖甫)의 그림이라면 흰 바탕에 연필로 직직 그은 것이고 항상 그게 그거라고 보지만요. 그건 아주 관념적으로 파악하는 거지요. 나 자신은 과거의 그림하고 굉장히 달라졌다고 보는 게, 과거에는 그림을 그림처럼 만들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림이 어떻게 되는가엔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행위를 통해서 산다는 일에 충실하려 해요. 그림의 결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 그림이 되어 가는 거라고 봐요. 그만큼 여유를 갖는 거니까요. 이런 것이 과거하고 근본적으로 변화가 생겼다고 보는 점이죠.


작가로 성공하려며 대작이어야

조(趙): 선생님은 항상 「나는 예술을 하려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예술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도 지워버리고 있다」는 식으로 말씀해오셨는데, 논리의 역설을 경험하면서 예술에 보다 더 깊숙이 도달하시려는 철학이 아니었읍니까?

박(朴): 예, 그런 얘기는 70년대 들어서부터 얘기해 왔죠. 그러면서도 그 당시는 예술을 하려고 하는 의식이 강했어요. 그런데 최근에 시골로 가면서 부터는 전혀 그런 게 없어졌어요. 예를 들면 선을 그리다가 그게 뭉그러져도 관심이 없어요. 그걸 다시 바로 잡으려고 하질 않는 거죠. 그러니까 훨씬 어떤 여유감이 생기지 않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 부분을 지적해서 평가하는 작가들이 꽤 있어요.

조(趙): 그 부분이 아주 중요한 부분 같은데요. 이전까지의 작업이 정신적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였다면 지금부터의 작업은 그것을 생활화하면서 정신의 육화(肉化)를 꾀하고 있다고 봅니다. 막상 시골에 내려가서 보니까 이제까기 나를 구속해왔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들로 부터도 해방되는 여유감이 생긴 것 같아요. 이제까지 선생님이 해오신 「묘법」시리즈는 모두 몇점이나 됩니까?

박(朴): 이번에 그림을 차곡차곡 정리를 해봤어요. 정확히 세어보니까 1천점이 넘더군요. 그러나 1년전 것, 2년전 것, 10년전 것이 그렇게 달라요. 그래서 내 그림의 변화를 알기 위해서는 역시 회고전식의 전람회를 열어야 많은 사람들이 실감있게 느끼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관념적으로, 내 그림 그저 허옇고 연필로 선이나 직직 그은 거로 한데 의미를 넣어 버리거든요..

조(趙): 그 이전 작품들은 전부 어디 갔읍니까?

박(朴): 전부 없어졌어요. 팔렸다는 것이 아니라 없어진 겁니다.

조(趙): 안성에 있는 아틀리에에 묘법만 천여점이라 하셨는데 외국에 나가있는 작품도 꽤 되지 않습니까?

박(朴): 꽤 되지요.

조(趙): 얼마나 됩니까?

박(朴): 2백여점 될까요?

조(趙): 작년에 안성화실을 방문했을 때도 대작(大作)들이 거의 인 것 같던데요.


(52페이지 캡션) 사진/ 편(片) 산섭삼(山摂三)씨 제공(1981년 5월 22일 촬영)


박(朴): 네, 여기에는 3백호, 2백호 주로 대작들만 있어요. 나는 대작을 주로 하니까요. 나는 작가가 결국은 대작을 가지고 성공한다고 봐요. 세계 어느 미술가도 대작을 가지고 성공해요. 그런데 우리나라를 보면 팔아 먹기에 바빠서 대작들을 안해요. 안하는 이유가 간수하기도 힘들고 갖다 놀 장소도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장소 없다는 것도 핑계지요. 왜 장소없는 사람들이 집은 그렇게 잘 해놓고 살아요? 집을 팔아서라도 화실중심으로 집을 지으면, 왜 꼭 도시에 있어야 하나요? 변두리로 나가면 되지요. 요는 작가의식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내 인생을 살아갈까 하는 철저한 생각이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문제예요. 나도 저 화실 돈 있어서 지은 거 아니예요. 월급타면 모두 이자 갚고, 빚은 빚을 낳고, 내 저것 때문에 몇 년 고생했읍니다. 나는 공간이라는 게 작가에게 절대로 중요하다고 봐요. 예를 들어서 장욱진(張旭鎭)선생 같은 분은 커다란 방에서 그림 그리라 하면 절대로 그림 못 그린다고 생각됩니다. 조그맣고 따뜻한 방안에 앉아야 그분은 그림 그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건 특수한 경우예요. 그런데 나는 현대미술일수록 공간이 넓어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합정동 집의 차고를 화실로 썼을 때 천장높이가 꼭 2m였어요. 그러니까 대작을 제작하기엔 아주 거북한 데죠. 그런데서 제작을 하다가 공간이 넓은 데에 가니까 캔버스가 마치 자연이라고 생각이 되더군요. 그 자연을 대하는 자기의 기본적인 태도가 달라져요. 그래서 거리감이 후러씬 더 생기고 스케일이 커지고 호흡거리가 깊어지지요. 공간이 좁으면 왜소해질 수 밖에 없거든요. 그런 작업현장에서 주는 것이 내 커다란 변화속의 하나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연채광속에서 칼라상의 변화가

조(趙): 안성 화실은 선생님이 순수하게 작업만 하시려고 지으셨는데, 제일 높은 천정벽이 얼마나 됩니까?

박(朴): 6m50cm입니다. 화실 내부는 세 파트로 나뉘어져 있고, 그것을 하나로 트면 55평이 전체 작업장으로 될 수도 있읍니다. 작년 겨울에는 연료를 아끼려고 첫방 응접실에서 제작을 했거든요. 그런데 거기는 소파도 있고 목기같은 것도 몇 개 있으니까 제작 공간은 서울보다 훨씬 넓은데도 그러한 것들이 방해가 되어 제작을 못하겠어요. 그래서 금년에는 안쪽에 스토오브를 하나 더 달고 그 쪽에서만 제작을 하는데 훨씬 더 능률이 있더군요.

나는 작년말 현대화랑에서의 개인전을 끝내고도 꽤 여러점 시작하고 있는데 모두 대작들이예요. 이번엔 150호짜리 190개를 한번에 맞추어 가지고 시작했죠.

조(趙): 작가와 공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차고를 화실로 사용하실 때는 천장이 2m이고 안성화실 높이는 6m인데, 이제 스케일도 넓어지고 캔버스와 자신과의 간격도 훨씬 넓어져 간 것 아닙니까? 또 곁들여 말할 수 있는 건 차고에서는 조명이 백열등이었는데 여기서는 자연채광 아닙니까? 거기에서 오는 어떤 칼라의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박(朴): 좋은 점 지적해 주셨는데, 나는 그전 작품이 그렇게 누렇다고는 생각질 않았어요. 그런데 여기서 그린 것을 자연채광 속에서 보니 어쩌면 그렇게 누런지 모르겠어요. 또 전반적으로 흰 톤이 침울하리만큼 너무 가라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자연으로 가니까 흰색에 대한 미묘한 반응이 훨씬 더 예민해졌다는 거예요. 역시 자연채광 속에서 직접 칼라는 개어 가지고 톤을 봐 가면서 하니까 색에 대한 민감도가 훨씬 달라지더군요. 또하나, 서울에서는 화실 밖으로 나가면 사방이 시멘트벽들로 공간이 밀폐돼 있었는데 시골에서는 수십리로 사방이 트여있으니까 자기 가슴을 여는 폭이나 호흡거리가 전혀 달라져요. 이렇게 자연이 주는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조(趙): 안성에선 밤에는 작업을 안하시죠?

박(朴): 왜요. 밤에도 하지요. 낮에는 태양광선이 조금 너무 밝게 들어오니까 정신적으로 산만해요. 과거에 밤을 주로 이용했던 습관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요즘은 밤이건 낮이건 모두 이용해서 작업을 해요. 미리 낮에 오일칼라(흰색)를 전부 개어 놓는데, 언뜻 보면 같은 흰색이지만 그게 전부 달라요. 육안으로는 내가 봐도 그게 그거지만 제작한 후에 보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통에 번호를 매겨 놓지요.

조(趙): 이제는 안성의 화실 생활에 아주 익숙해지셨겠네요.

박(朴): 익숙이라기 보다는 그렇게 사는 게 아주 틀에 박힌 것 같이 돼 버렸어요. 수요일이나 목요일 아침에 내려가서는 일요일 저녁이나 월요일 아침에 올라오죠. 일단 내려가서는 대문 잠궈버리고 집밖에 나오질 않아요. 일이 다 끝나면 대림동산에서 버스타고 올라 오니까 안성읍에는 별로 안나가지요.


미협선거의 억울함을 화실건축에

조(趙): 아틀리에의 조경을 손수 매만지고 가꾸시면서 저알로 자연을 사랑하고 애착을 갖는 그러한 것도 삶의 한 패턴으로서 50대 이후에 갖는 중요한 변화인 것 같읍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런 여유감이랄까, 느긋함을 몸소 체험하기까지 선생님이 손수 가꾼 안성화실은 그 시끄럽던 미협(美協)선거 결과와 연결되는 게 아닐까요?

박(朴): 79년 박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나면서 소위 자유화물결이라는게 한꺼번에 들이닥쳤지 않습니까? 그때 화단에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많았어요. 박대통령때는 그 밑에서 팔아먹는 그림들, 주문그림을 그리면서 별 아양들 다 떨었지만 나는 그 당시에 단 한점 그런식으로 팔아본 적이 없읍니다. 단지 전위미술운동 하나에 나를 바쳤다고 지금도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 내가 만약 정치적인 역량이 있는 작가였다면 선거일자를 연기했었을 겁니다. 정치란 이해에 민감해야 하는데 그때 나는 이해에 민감한다든가 하는 건 절대 없었어요. 다만 이념에 대해서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 당시에 내가 총회같은 것도 연기해 버리고 조금 사회가 안정된 다음에 선거를 치워도 충분한 건데 그러질 않았읍니다. 그 엄청난 금력공세와 모략에도 나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고 또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총회를 몇 달 연기하자는 얘기를 할 때도 나는 그럴 의향이 없다고 했읍니다. 결과적으로는 내 생각이나 이념하고는 너무나도 다른 오해를 받으면서 밀려난 거죠. 나는 내가 사는 과정에서 두 번의 충격을 당한 일이 있읍니다. 그런데 그때 나를 모함하고 밀어내자고 했던 사람들에게 지금은 오히려 고마움을 느낍니다. 하나는, 내가 있던 홍익대학에서 한 10년간 오해속에서 수난을 당한 일인데 그때 만약 내가 물러나지 않고 홍익대학에 머물러 있었다면 내가 그 대학출신이고 대학교육에 이념이 있는 이상 그 대학을 위해 힘썼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작가로서의 내 인생 그 자체는 손해를 봤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때 나를 밀어냈던 주동 인물들에 대해 고맙게 여기는 겁니다. 또 지난 미협선거의 경우도 만약 내가 미협 이사장에 그대로 당선이 되었다면 나는 안성 화실 짓는 것을 또 몇 년 연기해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같이 심신 양면으로 내 생활의 밸런스를 잘 유지해 가면서 내 생을 객관적으로 관망하는 그런 거리감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협선거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자기 평생을 화단운동에 바쳐오던 사람이, 그렇게 당하고도 그렇게 초연할 수가 있느냐고 위로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건 당신네들이 나를 정말 모르기 때문에 하는 얘기요, 내가 이렇게 초연할 수 있는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로 돌아왔기 때문에 초연할 수 있는 거요 라고 했지요. 사실 나는 미협선거 전부터 안성가서 터닦고 있었어요. 남이 볼때, 저사람이 아주 떨어지려고 각오를 한 사람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떨어진 다음날 바로 시골로 내려가 버렸어요. 내려가서는 3~4십만원이면 부르도저로 밀 수 있는 산등성이를 직접 3개월을 인부들하고 같이 새카맣게 타가면서 일을 했읍니다. 처음으로 내 땅에 대한 애착을 갖고, 내가 그곳에서 살다가 갈 것이라는 생각밑에서 곡괭이질을 하면서 거기다가 내 땀을 뿌린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안성화실에 대한 애정은 대단한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경제적으로 많은 손해를 봤지만 미협선거 후의 억울함을 그 현장에서 일을 함으로써 다 잊고 해소시킬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나는 젊은 사람들한테, 『절대로 인생을 약게 살지 말라, 약은 것하고 현명한 것과는 다르다, 인생을 현명하게 운위해 사는 것이 욕되지 않게 사는 것이다』라고 얘기하죠. 그게 내 인생관이예요. 그래서 만약 누가 나에게 돈, 명예, 사람 중에서 어떤 걸 택하겠느냐 하면 나는 사람을 택하겠다는 얘기를 가끔 합니다. 막말로 나는 화단의 사령관노릇도 해 보았는데 밑에서 모함도 하고 아부도 하는 걸 다 봤읍니다. 그럴 때 나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해서 일을 처리했지 절대로 거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하지 않았어요. 내 이념이나 생각대로 일을 처리했지요. 만약 자신이 약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가 분명치 않다면 늘 휘청거리게 되는거죠. 위에서 휘청거리면 밑에서는 더 휘청거립니다.

조(趙): 선생님은 이제 안성에 가서 생각도 많이 하셨고 흔히 말하는 세속적인 명예와는 어느정도의 거리르 두고 계신 것 같군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과 나하고의 거리를 발견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거리감을 못 느끼셨죠.


화단 뒷전의 장로(長老)가 되려…

박(朴): 요즘 나는 내자신이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걸 느낍니다. 바보가 된다는 건 첫째 탈욕때문이라고 봅니다. 그 탈욕은 사회적 무기력하고 일맥 상통할 수도 있읍니다. 그런데 나는 사람은 둘로 반드시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인간세계란 한 생태로서 나타난 현실하고, 인간이 사고하는 세계하곤 별개입니다. 과거에 나보고, 『화단운동 한다고 하던 사람이 그림 그리면서 가장 탈속(脫俗)한 것 같은 소리를 하는데 이율배반이다』라고 하는 얘기도 가끔 들었어요. 그러나 그건 인생이라는 걸 모르고 하는 말이예요. 내가 예수나 부다가 될 수 없듯이, 그런 탈속한 경지엔 절대로 못 갑니다. 단지 범인(凡人)의 단계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져 보려고 바둥거리는 거지 그 이상은 조금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그전 같으면 내가 배가 고플때 옆에 있는 놈이 무엇을 먹고 있다면 때려서라도 같이 먹으려 했는데, 요즘은 두 번이나 세 번까진 참을 수는 있읍니다. 그러나 내가 저걸 뺏어 먹어야 살 수 있다고 할 때, 그때까지 예수처럼 참고 있진 않는다는 겁니다. 이 얘기를 왜 하냐하면 내가 시골가서 그림만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해도 현실이 나를 그렇게만 살도록은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이 얘기는 잘못 들으면 저 살마이 화단운동에 다시 나오겠다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오해이고, 다만 현실하고 전혀 관계없이 만은 살 수 없다는 겁니다. 나도 현실 구조 속의 한 일원이라는 걸 잊을순없다는 거죠. 요즘 일본의 비평가나 작가들이 많이 얘기하는게 국제전같은데서 한국은 요 1, 2년 사이에 왜 이모양이냐고 합니다. 우리 화단이 아주 전근대적 화단이라는 거예요. 시대를 파악해서 어떤 사람이 적합하냐를 찾아내지 않고, 안나갔던 사람들을 배급식으로 해서 너도 나가고, 너도 나가라는 그런 식이니까요. 그런 배급주의라는 건 결국 중심없는 것이고 이념이고 뭐고 부재(不在)하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결과가 지금 우리 화단을 그렇게 평가받도록 만들고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조(趙): 그 얘긴 화단 내부에서도 많이 오가는 얘기입니다. 편파성이 있었다는 오해도 있었지만 오히려 옛날에 정선된 멤버들이 나갈 때가 더 낫지, 지금은 너무 한번 나가봐라, 너도 한번 나가봐라 하니까 한번은 좋아도 계속 그런 식이라면 국제전 분위기를 아주 흐려버린다는 얘기이지요.

박(朴): 최근에 화단이 겉보기에도 지리멸렬해져 가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까 서로 책임전가를 하게 되고 불만이 일고 하다보니 자연히 내부적인 갈등이 있었읍니다. 그래서 나는 이래 가지고는 우리 화단이 잘되는게 아니다 해서, 비록 일선에는 안타나난다 해도 한번 모여서 의견을 나눠보자 해서 한번 모였읍니다. 아까 현실감각에서 떠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거기서 나는 미협에는 신경쓰지 않더라도 현대미술을 어느 이념적인 차원에는 올려놔야 하지 않느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집약시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읍니다. 그 집약된 힘을 가지고 80년대 화단을 좋은 각도로 영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죠. 앞으로는 국내의 구조하고는 다르게 능동적으로 국제전에 참여한다든가, 국제적인 순회전같은 걸 계획한다든가 하는 일을 하자, 그래서 현대미술을 빨리 세계의 중심부에 연결시키자는 거죠. 미협에서 행하는 국제전을 위한 선발과는 별개로요. 나는 또, 우리 현대미술에는, 의견충돌같은 게 있을 때 그걸 조절해주는 장로(長老)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적인 리더가 없다는 거죠. 훨씬 연대가 위인 분들이 몇분 계시기만 그분들은 몸을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할 수가 없으니 그렇다면 내가 장로가 되는 수 밖에 도리가 없지 않으냐고 했죠. 그런식으로 나는 뒷전으로 물러 앉겠다는 얘기죠. 대개 그런 쪽으로 일치를 봤읍니다만 현실로 돌아오자는 건 그런 의미예요.

조(趙):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그 영역을 벗어날 수는 없어요. 그 영역속에서 자신은 자신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거지요.


국전의 비평세력으로 남길 원했으나

박(朴): 그건 그래요. 나도 아무리 중생활하듯이 파묻혀 있어도 현실이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아요. 그래서 그것도 적극적으로 뿌리쳐 봤읍니다만, 1, 2년 뿌리치니까 어떤 현상이 있냐 하면, 당신 이사장 한번 해봤다고 이제 난 몰라라 하고 있는 거냐고 그런식으로 해석들을 해요. 그런게 아니라 나는 앞에서 일하면 뒤에서 박수도 치고 잘못은 지적해주고 하겠다는 것이거든요.

어제도 모지(某誌)에서 국전에 관한 좌담회가 있어서 거기에 참석했읍니다만, 과거 한때 국전이 돼먹지 않았다고 하던 비평가들이 국전 심사위원이 되고나선 왜 전부 꿀먹은 벙어리가 됐느냐고 그랬더니 함께 참석한 비평가가 그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열명이면 열명의 심사위원 중에 비평가가 한사람 밖에 들어 있지않으니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건 그럴수 없는 일이예요. 비평가라는 사람이 화가에게 콤플렉스를 느끼기 때문이예요. 좀더 자신만만하다면 비평가가 나서서 이론을 세우고 시정할 건 시정해야 하는게 아닙니까?

조(趙): 열명중에 9표가 찬성이 나와도 자기 한표로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힐줄 알아야 된다는 말씀이군요.

박(朴): 예. 그게 안돼 있어요. 비평가들이 국전의 심사위원으로 들어가면서 부터는 국전의 비평세력이 없어졌어요. 나는 그때당시의 내막을 전부 밝혔읍니다. 국전에서 비판세력을 소위 총화단결이라 해서 추천이니 초대니 하는 명목으로 받아들였을 때, 나는 끝까지 비판세력으로 남길 원했읍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국전에 들어가야 하느냐를 의논했는데 나는 국전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지요. 우리가 건전한 비판세력으로 남는게 국전을 위해서도 좋지 않으냐고 했어요. 그러나 들어가자는 사람들이 얘기는, 지금 우리나라는 취직하는데도 국전출신 작가들을 쳐준다, 추천작가면 석사학위 받은 것으로, 초대작가면 박사학위 받은 것으로 쳐준다, 또 어디 취직하려면 국전에 입선했느냐부터 따지는데, 이런 풍토는 우리가 들어가서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이었읍니다. 이렇게 의견이 양분 되니까 다수결로 결정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했지요. 찬반을 거수로 하자구요. 떳떳히 손을들고 결정하자는 거지요. 그런데 결과는 들어가지 말자는 쪽이 나 하나뿐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펄펄 뛰었죠. 그랬더니 누구보다도 가장 국전을 비판해 온 사람이 박선생님이니, 박선생님 입장을 이해하나 우리의 전제조건이 무조건 들어가거나 안들어가기로 한 거니까 거기에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저도 추천작가로 들어가게 된 거죠. 이해 못하는 사람이 보면 저사람이 저러다가 추천작가 하나 주니까 냉큼 들어갔다 하는 오해를 했을 만하죠.


그는 롤백할 것인가

박(朴): 머지않아서 국내구조하고 관계없이 국제적인 흐름에서 파악하고, 국제적인 채널하고 연결된다고 할까, 그런 작업의 일환으로서 단체가 하나 나오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을 마치 미협하고 조그만 연관이라도 갖고 미협의 구조속에서 이루어지는 거라고 오해해선 안됩니다. 나 자신도 그렇다면 흥미없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제일 큰 문제가 돈문제예요. 회원제라 하면 회원이 많아야 단체가 크고 관(官)이라는 데서도 민의(民意)의 반영으로 받아들이지요. 또 현실로서도 그걸 운영하려면 회원이 많아요 운영비를 충당하게 되는데 거기 큰 딜레마가 생기다는 거예요. 어느 지역에 순회전을 한다 할 때 『나도 회비를 냈으니까 나도 회원이다』하면 전부 나갈 수 있느냐, 그렇게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안나간 사람들은 너희 나가게 하기 위해서 내가 없는 돈을 내갸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그건 단체로서 단명(短命)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내 의견은 그걸 어떤 고정회원이 있는 단체로서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단체라는 것만 몇사람이 모여서 이루어 놓고, 가령 일본에서 전람회를 개최한다는 그것을 개최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고 뛰어다니면서 만드는 그러한 소수 운영위원만 두고, 또 그 운영위원들은 세계의 흐름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의뢰해서 그 사람들이 선정한 결과에 무조건 승복하는 그런 기구가 되지 않으면 명(命)이 절대로 길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에 연관지어서 우리 문화정책의 빈곤같은 것을 얘기한다면요. 예술가는 자기 일을 하는 거고 정부는 예술가를 완전히 문화전략적인 측면에서 개발을 해야 하는 거예요. 오늘날의 국제사회에선 문화를 전략의 한 부분으로 개발을 하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전혀 안 돼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앙드레 말로같은 문화상(文化相)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국장이라든가 전문적인 치원에서 전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고, 그렇다면 남의 머리라도 빌려서 생각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것마저도 인색해서 무사안일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차피 지금은 불가능한 거니까 그렇다면 관(官)이 자기네들의 생각을 반대로 민간의 차원에서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기구로서 이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일본의 예를 들자면 일본견본시(見本市)가 있었는데 그건 완전히 문화를 전략적으로 이끌고 나가는 기구입니다. 예산은 경제인 쪽에서 나오고 정부가 그 채널만 연결해 주면 되는 겁니다. 오늘날 일본의 Sony라든가, Canon같은 건 세계 어느 곳에 갖다 놔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읍니다. 그런데 처음에 일본이 패전후 그걸 선전할 때 뭐 가지고 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은 상품전시회를 하기전에 문화전시회를 했읍니다. 그래서 그 나의 의식수준을 선전한 후에 물건을 갖다 놓으면 그걸 충분히 인정을 한다는 겁니다. 일본 견본시(日本 見本市)는 지금 명칭이 바뀌어 국제예술문화진흥회가 되었는데 이건 완전히 문화를 잘 이해하는 중요위원이 중심이 돼서 재계(財界) 사람들과 합세해서 하는 겁니다. 매년 열리는 「Japan Art Festival」이 철저히 일본 현대미술을 세계에 소개하고 있고, 전 세계를 휩쓸고 돌아다닙니다. 우리도 지금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러자면 우리 현대미술이 국제적인 맥락속에서 파악되고 연결지어지는 그런 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정부는 문화전략적인 측면에서도, 현대미술과 재계(財界)와를 연결지어 주는 그런 역할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런 기구가 있어도 회비 관계라든가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현대미술을 배급주의 식으로 이력이나 만드는 그런 일이 아니라 이념적인 작업을 추진하도록 옆에서 지원해 줄 수는 있으리라고 봅니다.

조(趙): 상당히 고무적인 말씀이신데 그것이 선생님의 「현실로의 롤백」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박(朴): 우리 화단의 상황을 볼때 나는 전혀 세상 모른다고만은 할 수 없어요. 다만 그것이 내가 미협에 롤백하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오해하지는 말아달라는 겁니다.

조(趙): 그 기미가 작년부터 선생님 주변에서 있었지 않았습니까?

박(朴): 네. 그걸 나는 「나 모른다」하고 눌러 있자니 아까도 얘기했듯이 너는 이제 해먹을 것 다 해먹고 모른다고 하기냐 하는 식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 시점에서는 내 입장을 분명히 해줘야겠다 해서 내 생각엔 이런 각도로 나가는게 좋다. 국내의 복잡한 연관속으로 절대로 들어가지 말아다오, 그런 조건하에서만 동의한다고 했지요.

조(趙): 서울현대미술제도 좀 문제가 있었데요. 마치 규모만을 내세우는 행사전 같기도 하고, 에꼴 드 서울전(展)도 그렇고 무언가 새롭게 변모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주변의 오해는 여전하지 않습니까? 오해가 두려워서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아쉽고 답답한 감이 있어요.


서울현대미술제는 개혁되어야

박(朴): 그것도 지금 개혁을 하려 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과거에 박서보(朴栖甫)란 사람이 현대미술을 요새화시키기 위해 각 지방에서 현대미술을 인수받아서 수용하는 태세로 보면 안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것이고 또, 각 지방마다 미술운동을 자발적으로 시켜놓았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어느 단계까지 끌어 올렸는데 이것도 역시 세월이 가니까 나 모르겠다 하곤 전부가 그렇게 돼 버렸어요.

조(趙): 경제력때문이겠지요. 더군다나 현대미술운동이란 우리의 현실로 보아 외로움을 동반하는 것이고 보면, 그래도 그때는 정신과 정신끼리 결집되어 있었지 않았습니까?

박(朴): 네. 첫째는 경제력입니다만 꼭 경제력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의식이 희박하다고 봅니다. 적극적으로 헤쳐나가려 하면 길이 조금씩 열리게 돼 있는데 그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려 안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거죠.

조(趙): 그럼 지방 현대미술제는 다 없어진거나 마찬가지겠네요. 전혀 회생(回生)할 태세는 없습니까?

박(朴): 그렇게 봐야 옳죠. 그런 의미에서 단하나 남아있는 서울현대미술제의 개혁이 여러가지 진통을 겪어야 하는데 이것을 완전히 정수 제일주의로만 나가면 지방에서 그거나마 기대하고 살던 사람들이 전부 버림받는 결과가 되지요. 그러니까 적당한 선에서 절충을 해서 그 사람들을 살려가면서, 일할 수 있도록 끌고 나가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고민입니다.

조(趙): 서울현대미술제는 서울을 비롯해서 각 지방을 수용하는 거니까 꼭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성립됩니다만 제 얘기는 그 운영문제에 있어서의 개혁이 있어야겠다는 겁니다. 우리의 현대미술운동은 그 자체가 훗날 하나의 역사요 기록이 되겠지만, 「지킬 힘이 없으면 가질 자격이 없다」는 정신으로 몰고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朴): 우선 운영체제에 대한 개혁이 불가피한 게, 현실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개혁을 안하면 그건 현실감각하고 동떨어져서 우습게 돼 버리는 거죠. 지금같은 운영체제는 그대로 가되, 조금 더 이념적인 작업으로 밀고가야 한다는 것도 있고, 운영위원도 지금같은 여러사람의 운영제도는 없애야 한다고 봅니다.

조(趙): 최근 한 2년사이에 20대말, 30대초의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들이 집단을 결성해서 많은 전시회를 가졌어요. 그런 것이 상당히 많이 늘었더군요. 서울현대미술제에 참여하지 못한 소외층, 최하한선에 해당하는 세대들이 그런 그룹을 활성화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朴): 대단히 좋다고 봐요. 젊은 사람들이 개인활동이나 개인전으로 나간다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되니까, 몇사람들이 집단을 만들어서 활동을 한다는 데는 나도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고 싶읍니다.

조(趙): 이 기회에 한국의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기존의 미술비평에 대해서 얘기를 좀 나누어 볼까요?


한국 기존 미술비평의 오류

박(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비평하는 사람들이 공부를 안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비평가라는 직업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직업이라고 보는데, 아주 주관적이고 지독히 철늦은 생각, 그리고 국제적인 시야에서는 아주 동떨어진 우물안의 개구리같은 생각을 가지고 그것만 옳다고 하고, 그것 외에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 그런 편협성같은 것을 최근 몇사람들을 통해서 왕왕 보고 있어요. 그게 물론 1930년대의 미학에 근거를 두고 있건, 그것을 지역적인 특성에 무리해서 연결하건 간에, 상대적인 관계에 있는 한 흐름을 냉랭하게 인정하고 평가하고, 정리해서 분석할 줄을 알아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질 못하고 그것이 마치 자기의 주장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세계사조에 맞서서 분석하고 검증해내서 어떤 이념이랄까,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선 폐쇄적으로 부정하려고만 듭니다. 또 나는 추상미술을 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현대 추상미술을 마치 서구의 것인양 단정해 버리는건 엄청난 오류라는 겁니다. 추상성이라는 자체는 서양보단 오히려 동양에서 태고부터 있었읍니다. 서예도 그렇고 사군자같은 것도 추상성입니다. 그리고 엄격히 따지고 들어가면 서양에서 추상미술이 정립된 것은 근대에 와서예요. 근대에 와서도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측면에서 더 나아가 변증법적인 측면에서 전개되어지는 일입니다. 몬드리안같은 경우도 어떤 대상을 놓고 그것을 자꾸 단순화하고 단순화해서 기본적인 문제만을 추출해내는, 그래서 추상의 근원을 찾아내는 이런 대단히 검증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읍니다. 그리고 예를들어 피카소같은 사람의 분석주의같은 것, 그것도 추상에 도달하는 일 아닙니까. 그런 것도 지극히 합리주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다시 얘기하자면 주관과 객관을 철저히 분리시켜서 대비시켜 나가는 하나의 어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동양은 오히려 그런게 아니거든요. 동양은 주관과 객관을 분리시키는게 아니라 하나의 직관론의 세계에서 영위한다, 그게 출발이라는 겁니다. 그런 것은 우리의 사고안에도 수천년전부터 흐르고 있읍니다. 한국 현대미술이 서양적 조형어법에 따라서 되고 있는 것들도 많이 있읍니다. 그러나 적어도 70년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추상미술은 전혀 그런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걸 분석해 낼 생각은 하지 않고 이걸 엎어 놓고 서양것이다 하고 매도하는 것은 그 사람의 논리구조가 바탕이 안돼 있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비평정신의 객관성을 상실한 일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서양과 동양미술은 상호관계지 우리가 일방적으로 서양의 현대미술을 수용했다고 보는건 콤플렉스적인 해석이예요. 이런 매도행위는 끝내야 합니다. 비평하는 사람들의 한계를 넓히는 의미에서도 그렇습니다.

앞으로 80년대의 화단이라는건 건전한 의미의 활성화를 절대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또 건전한 의미의 활성화엔 반드시 수반되는 것이 건전한 비평정신입니다. 그러자면 작가상호간이건, 작가와 비평가 사이건, 비평가끼리건 철저한 논쟁이 있어야 된다고 봐요. 예를들어 모노크롬화(画)만 놓고 보아도 그렇습니다. 내가 주도한 일이지만 70년대의 모노크롬이란 다색(多色)주의에 대한 철저한 Anti로서의 모노크롬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모노크롬이란 자연주의, 자연관에 바탕으로 두고있는 겁니다. 전혀 다른 거지요. 서양에서는 다색주의에 대한 Anti로서의 모노크롬이기 때문에 그냥 희거나 꺼멓읍니다. 여기서는 희다는 것 자체도 그 개념을 철저히 없애버리기 때문에 이게 아주 오며한 색이라고 할까 중성적인 색이 되는 겁니다. 희다는 것마저도 중성화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분석 못해내는 겁니다. 한국에서의 모노크롬을 서양의 2, 3십년 전에 있었던 모노크롬, 다색주의의 앤티로서 나타났던 모노크롬의 패턴 속에서 보려고 하거든요. 이런 비평가나 작가들의 태도는 전적으로 객관성의 결여라는 것입니다. 또 남의 주의주장이나 사고의식을 매도하기에 앞서 자기의 주장을 철저하게 이론적으로 들고 나오고, 그것을 결과적으로 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과 상호대립관계에 놓이도록 하는게 옳다고 봅니다.

조(趙): 이 기회에 선생님의 작품세계와는 상반되는 형상성(形象性)에 대해 얘기를 듣고 싶은데요.

박(朴): 나는 형상을 지녀서 틀렸다고는 보지 않읍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 시대와 달라서 지역국가라는 것도 세계속에서 파악되어져야 하며 우리 자신도 철저한 국제주의자가 돼야합니다. 그런 인식을 갖지 못한다면 코스모폴리탄이라는 거죠. 그런 미묘한 문제를 잡지 못한다면 헌대미술을 얘기할 수 없읍니다. 역사라는건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계추가 왼쪽으로 갔다 오른쪽으로 갔다 할 때, 왼쪽이라고 하면 그건 현재에서의 왼쪽이라는 뜻이지 과거의 왼쪽으로 다시 되돌아간 건 아니란 말입니다.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속에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역사를 비데오 거꾸로 돌리듯이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다시 어떤 형상성을 지닌 쪽으로 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형상성으로 되돌아간게 아니라 새로운 시간속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탄생된 형상성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의미의 형상성을 띤 미술이라면 나는 전적으로 찬성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형상성으로 되돌아간다는 일은 역사적인 추회라는 겁니다.

나는 내 예술세계를 이끌고 나오는데서 시행착오도 많이 했지요.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있어요. 나는 직업적인 작가는 안된다는 소리를 자주해요. 그냥 인생을 맑게 살고 영위하는 수단으로서 예술을 택했을 뿐이예요. 그전엔 그림이 조형적으로 어떻게 된다는 것에 묶여 있었는데 이젠 그림이 어떻게 되는가에는 관심이 없다고 아까도 얘길 했지요.

조(趙): 작품속에 나타난 형상(形象)-형상(形象)이 아니라고 부정하시겠지만-그런 것들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는 얘기겠지요.

박(朴): 물론이죠. 그러니까 그림이 되건 지워진 상태로 드러나건 간게 결론적으로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 하면 그건 그렇게 끝나는 겁니다.

조(趙): 그게 바로 예술이 되는거란 얘기입니까?

박(朴): 그렇죠. 예술이라는 게 별게 아닙니다.

조(趙): 앞으로도 선생님이 하실 일은 많은 것 같습니다.


작가로서의 영생을 택하려…

박(朴): 내가 진 지게는 작은데 거기에 져야할 짐은 참 많읍니다. 그래서 요즘은 분담주의쪽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문제가 많이 생겨요. 어떤 사람은 나보고 왜 후계자를 키우지 못했느냐하는 얘길 하는데 그것은 내가 키우지 못한 게 아닙니다. 나는 폭넓게 키워 왔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공리적인 사고를 한다는 데 있읍니다. 나는 화단에서건 어디서건 지도자가 되려면 몇 개의 요건이 있다고 봐요. 우선 전체를 위해서 책임질 줄 알아야 해요. 지도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건 가장 시원챦은 태도예요. 그리고 어떠한 것도 두려워해선 안됩니다. 신념을 갖고 밀어야 하고 그 신념은 철저히 객관성을 띠어야 합니다. 그 신념이 객관성을 띠었다 하더라도 상대가 객관적인 사고를 못 가진 사람이 봤을 때는 그 사람은 그걸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일로만 파악하려 들지요. 그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그걸 두려워해선 안돼요. 자기를 철저히 객관화해서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중에 100명중 한명이 객관적인 눈으로 보고 99명이 주관적인 눈으로 봐서, 그건 객관적인 처사가 아니라 해도 그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절대 개인의 이해에 얽히지 말라는 겁니다. 또 이건 작가의 세계이니까 이론적으로 지도자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또 작가로서도 누가 봐도 존경받을 수 있을 만한 물량공세를 취할 줄 알아야 해요. 질이라는 건 양속에서 나오니까요. 우리나라에선 작가가 작품수가 적을수록 희귀한 것으로 얘기되는데 이건 말도 안되는 소립니다. 철저한 물량이 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모든 생활을 빈곤으로 몰아 넣더라도 그 돈 가지고 투자해서 밤낮으로 일을 해야 되지요. 우리나라는 외국처럼 좋은 일 했다 해서 재단에서 문화를 위해 돈 대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렇다고 자기 작품이 팔려 가지고 재투자될 만큼 사회환경이 돼 있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자기 뼈를 깎고 노력하는 수밖엔 없어요. 그러한 모든 일을 함께 추진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존경받을 수 있는 겁니다. 지도자가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이 잘못했을 때 그 책임을 자기가 지지않고 화살을 남에게 돌린다든가, 일거리가 있다 할 때 자기가 먼저 집어 먹는다 하면 그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진실 아닌 것들에 의해 매도 당하고, 어느 사람의 주장이 주장으로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저 사람 자기 얘기만 한다고 매도되는 그런 모순된 현실을 많이 봅니다. 그래서 나는 죽어서 욕먹을 짓은 전혀 안한다, 살아있는 동안 주위로부터 오해 당해서 매도된다 해도 그걸 감수하겠다, 그러니까 종교적 의미에서의 영생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영생을 택하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사람이 크려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거기에 대해 남이 비판하는 걸 수용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요즘은 그림들도 보며는 전부 공리적인 그림이예요. 나는 이러한 공리적인 그림을 「판화같은 회화」라고 생각합니다. 물감을 바르면 바른 만큼 똑똑 떨어지는 그림들이라는 겁니다. 저는 이제까지 위험부담율이 큰 세계를 걸어왔어요. 절절매다, 실패도 하다 어느 순간에 그게 딱 떨어졌을 때 그때 진짜 쾌감을 느껴요. 공리적인 그림, 복사할 수 있는 그림은 참예술이라 할 수 없지요. 작업의 현실이라는 게, 작업을 하다보면 어느 것 하나가 맞아 떨어지는 게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 성공한 것을 나는 늘 되새기지 않아요. 거기에 매달리려 들지 않고 항상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래야 자기 매너리즘에 안 빠지는 거예요. 흔히들 자기가 성공한 것에 매달리려 하다 보면 그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항상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상태에서 예술이라는 건 추진되는 겁니다. <정리·오승신(吳承信)>


*원문에는 '목숨 수' 한자의 간체자가 사용되었으나 한컴독스 프로그램 및 웹상에서 표기되지 않아 본디한자로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