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CUS⎮24호 새해를 알리는 편지들
(1) 김창열이 박서보에게 보낸 신년연하장, 한지에 수채와 유채, 1987년
(2) 세키네 노부오의 신년연하장, 엽서에 실크스크린, 1979년
(3) 김구림, <용의 머리가 있는 판화>, 종이에 동판화, 1975년
(1) 김창열이 박서보에게 보낸 신년연하장
1987.
서보(栖甫)
신체 강건(身体 彊健)하야 또 한 해를 열심히 그러나 조금 여유도 있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 진다.
(2) 세키네 노부오가 박서보에게 보낸 신년연하장
郵便はがき
年賀
[박서보 손글씨] 関根伸夫
新年あけましておめでとう
(株)環境美術硏究所
〒152 目黑区自由ヶ丘1-3-20 TEL717-8819
[한글번역]
우편엽서
연하
[박서보 손글씨] 세키네 노부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 환경미술연구소
〒152 메구로구 지유가오카 1-3-20 TEL717-8819
[자료 설명]
2025년의 첫 번째 ARCHIVE FOCUS에서는 박서보가 받았던 새해를 알리는 편지들을 소개한다. 24호의 자료들은 박서보가 ‘특별한 편지’로 분류하여 보관하던 신년연하장 세 점이다. 박서보 편지모음집에 수집된 신년연하장은 대다수가 간략한 현지의 풍경이 담긴 엽서나 대량생산된 일반 신년카드지만, 손글씨와 드로잉, 그리고 판화와 함께 담긴 같이 예술적 가치가 있는 그림 연하장도 적지 않은 수 포함되어 있다. 작가는 이러한 연하장들을 ‘특별한 편지’로 간주하여 별도로 보관했다. 신년연하장들을 통해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작가들 간에 오가던 마음들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역마살이 있다”1)고 스스로 평할 정도로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한 해에도 여러 번 외국에 오가곤 했지만 박서보가 대한민국에 단단히 정착하여 기반을 두고 작업했던 것과 달리 작가의 미술계 여러 동료들은 프랑스나 일본, 때로는 미국으로 향했다. 박서보 편지모음집 내 많은 수의 그림 연하장들은 머나먼 타국에서 신년을 보내게 된 동료 작가들에게서 도착했다. 이번 호의 첫 번째 자료인 박서보의 친우, 김창열이 프랑스에서 보내 온 신년연하장은 짤막하지만 두 작가 사이에 켜켜이 쌓여 온 예술적 교감과 다정한 응원을 전한다.2) 김창열의 연하장은 일반 엽서 사이즈보다 조금 작은 세로 12cm, 가로 10cm 내외의 한지에 어두운 채도의 푸른 수채로 빛을 받아 반짝이는 한 개의 물방울을 배경에 그려 넣었다. 어두운 빛깔의 마포 위에 선연하게 빛나는 존재감을 가지는 물방울이 등장하는 김창열의 유화 작품과 대조적으로 한지 위에 수채로 그려진 물방울의 형태는 종이의 섬유질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든다. 흰 유화 물감을 사용해 강조한 물방울의 반사광도 간결하지만 투박한 붓질로 표현되었다. 찬 기운으로 물기 어린 창을 통해 들여다 본 따스한 실내의 모습과도 같이 흔들리는 빛과 번져 나가는 물방울의 형상은 소박한 새해 소망을 담은 김창열의 손글씨 메시지와 어우러져 애틋한 온기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박서보의 편지모음집에서는 또한 신년연하장을 주고 받는 문화가 크게 발달했던 일본의 미술계 인사들이 보내 온 엽서의 비중이 눈에 띈다. 1970년대 중반 일본 미술계에 진출하고 이우환이라는 현지에서의 소통 창구가 생기면서 박서보의 행보는 당대 일본 현대미술 작가들과 자주 교차하곤 했다. 24호의 두 번째 자료는 이우환과 더불어 일본 모노하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세키네 노부오(関根伸夫, 1942-2019)가 1979년에 제작한 연하장이다.3) 세키네 노부오의 신년엽서를 박서보가 소장하게 된 경위를 확정하기 어려우나, 그는 1974년 제2회 앙데팡당 개최와 시기를 맞추어 박서보와 이우환의 중개로 일본 화랑가의 인물들의 내한이 이루어졌을 때 조셉 러브, 건축가 소네 고이치(曽根幸一, 1936 -)와 함께 경주를 방문한 바 있었다.4) 엽서에는 우표와 발송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별도의 서신에 담겨 박서보에게 전달되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박서보는 이를 ‘특별한 편지’로 분류하여 보관하였다. 세키네 노부오의 연하장 표지는 실크스크린 판화로 작업되었고 후면은 일본 체신청(遞信省, 우리나라의 우정사업본부에 해당)에서 발행했던 일반 엽서의 형태이다. 매끈한 코팅 종이인 경우가 많은 일반 유통 엽서와 달리 수채 등의 작업을 위한 텍스처가 있는 종이가 사용된 점, 이미지 하단에 세키네 노부오가 서명과 일자를 연필 수기로 남긴 점, 그리고 전면 판화에 사용된 진한 잉크가 후면의 주소와 신년 메시지에도 사용된 점 등에 비추어 보았을 때 작가가 체신청에 특별 주문제작을 맡겨 인쇄하기보다 일반 엽서를 구매하여 실크스크린 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세키네 노부오는 모노하 작가로서 환경 조각을 중심으로 한 설치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70년대와 80년대에 모노하의 세계를 확장하는 매체로서 판화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 작업했다. 판화 엽서는 세키네 노부오가 실크스크린이라는 매체로 확장한 모노하적 실험의 연장선상에 있다.5) 언뜻 해수면 위로 떠오르는 새해의 태양이라는 흔한 신년 연하장의 주제로 보이지만 엽서는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해수면을 기점으로 서로 다른 차원 혹은 현실을 드러낸다. 하늘은 색면의 영역으로, 붓질 등의 흔적이 없는 색면 그라데이션이며 그 위에 솟아 오른 태양은 하나의 붉은 점으로 구현되었다. 이와 달리 하단 해수면의 일렁이는 물결과 태양의 잔영은 공간감과 입체감이 드러난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실크스크린 기법이다. 연필 등의 필치가 느껴지는 드로잉이 실크스크린 특유의 망점으로 구현된 파도는 해수면에 입체감과 공간감을 더하여 그 장면을 고전적인 회화 이미지의 창으로 전환한다. 태양 아래로 드리워진 해수면 위의 그림자는 타원 형태의 명확한 테두리와 오른쪽으로 치우친 명암 표현으로 인해 평면 형태처럼도 보이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해수면 중간에 뚫려 있는 원통형의 구멍처럼도 인식된다. 기묘한 차원을 점유하는 타원형의 잔영은 그 원본인 깊이도 공간도 없이 색면의 점으로 머무는 붉은 태양과 괴리감을 가져온다. 세키네 노부오의 판화 속에서 보는 이는 색면의 평면에서 입체의 이미지로, 그리고 또 다시 그 화면 밖의 현실, 혹은 모노하의 문법에 따라 자연이나 환경이라고 불릴 수 있는 차원으로 이리저리 이동하며 헤매이게 된다. 세키네 노부오의 신년 인사는 이렇듯 엽서를 받는 이에게 선사하는 사소하지만 즐거운 화제(話題)이면서 동시에 이 시기 그가 고민하던 모노하 세계로의 초대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박서보의 ‘특별한 편지’ 가운데에는 여러 장을 반복하여 제작하기 용이한 판화 매체를 사용한 작가들의 연하장이 다수 발견된다. 대표적인 것이 신년호의 마지막 자료인 김구림의 1975년 제작 연하장이다. 한국 실험 미술의 선구자인 김구림의 판화 작업은 그의 실험적 설치 조각이나 퍼포먼스에 비해 많이 논의되지 않지만, 작가는 1970년대 일본에서 동판화를 배우고 민중미술에서 목판화나 실크스크린 기법 정도가 보급되어 있었던 한국 미술계에 메조틴트와 같은 새로운 판화 미술을 들여 와 중대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된다.6) 김구림과 박서보의 교류는 박서보 편지모음집에 보관된 서신들을 통해 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꾸준히 확인되며, 박서보는 70년대 김구림의 판화 작품 또한 여러 점 소장하고 있었다.7) 김구림은 1973년 일본에 넘어가 박서보의 도움을 받아 이우환을 비롯한 일본 화랑들과 교류했고, 이후 박서보가 받은 70년대 서신들에서 이우환은 김구림의 활동을 꾸준히 전하며 판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익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김구림에 대한 응원을 표하곤 했다.8) 김구림의 1975년 판화에서는 제작일과 서명 외에 메시지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작 시기가 1975년인 점과 판화의 주제가 용이라는 점에 기반하여 보았을 때, 그의 판화가 1976년 병진년(丙辰年) 붉은 용띠의 해를 기념하는 연하장의 의미로 제작되었다는 추정이 설득력을 가진다. 판화에는 입을 벌린 용의 머리와 풍경이 전통화 화풍으로 표현되어 있다. 화면을 가로 세로로 교차되는 세밀한 선으로 긁어 달무리 혹은 해처럼 보이는 용의 배경 부분을 밝게 구현하고 검은 잉크가 묻게 될 부분을 바니쉬로 문질러 구름과 산의 무늬, 그리고 용의 입체감을 부드럽게 명암 표현했는데, 이는 작가가 일본에서 익힌 메조틴트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로 10센티미터를 넘지 않는 작은 크기의 이미지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세공한 판화의 세심함에서 신년 연하장을 받을 이들에 대한 김구림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세 점의 연하장들을 통해 작가들은 국경과 언어를 넘어 자신이 시도하는 새로운 실험들을 서로에게 공유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작업과 건강을 기원한다. 이 편지들이 이제는 수십 년의 시간을 넘어 2025년의 우리들에게 더 많은 이들과 연대하고 더 폭넓은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한 해를 만들어내는 작은 힘이 되길 바란다.
글 최윤정
일본어 번역/이미지 임한빛
<주석>
1) 박서보, 「역마살」, 『엘레강스』(1979년 5월), 페이지 미확인(박서보 증빙자료집 No.11)
2) 김창열의 신년연하장이 담겨 있던 봉투는 확인되지 않으나, 비슷한 시기인 1979년 12월 18일 박서보가 김창열에게 보낸 편지의 주소지를 통해 김창열이 이 시기 프랑스에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3) 연하장은 다음 해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 그 전 해 연말에 발송되므로 보통 실제 기념하는 해보다 한 해 전에 제작되었다. 그러므로 김창열의 엽서는 1988년, 세키네 노부오의 엽서는 1980년, 그리고 김구림의 엽서는 1976년 용띠의 해를 각각 알리는 것이었다.
4) 박서보 사진모음집 No.2의 1974년 12월 23일자 사진들에서 세키네 노부오가 박서보, 조셉 러브, 소네 고이치(曽根幸一), 심문섭, 이우환, 하인두와 함께 발견된다. 74년의 내한 이후 박서보와 세키네 노부오의 직접적인 교류 기록은 현시점 확인하기 어려우나, 1979년 일자로 기록된 신년엽서를 통해 그 관계는 느슨하게나마 수년간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5) 도키노와스레모노 갤러리(ときの忘れもの)는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일본 판화 미술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도키노와스레모노의 디렉터 와타누키 레이코(綿貫令子)의 글에 따르면 세키네 노부오는 1973년 일본에 귀국하여 환경미술연구소를 설립했는데, 다음 해 설립된 일본의 현대판화센터(現代版画センター)에서 그에게 판화 커미션을 주문한 것을 계기로 작가는 판화라는 매체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70-80년대에 다양하게 실험하기 시작했다. 와타누키 레이코는 세키네 노부오가 판화라는 매체를 통해 모노하의 저변을 확장하고 대중화하고자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일례로 1970년대와 80년대의 <환상> 실크스크린 판화 연작에서 세키네 노부오는 평면과 입체를 넘어 이미지와 현실의 경계를 실험했다. 1975년작 <환상-빨간 풍선(絵空事-赤い風船)>에서 색면으로만 구현된 풍선은 명암과 그림자가 있는 입체적인 이미지로 구현된 색연필과 연결되어 있다. 색연필은 풍선을 묶은 실에 매달려 낙서와 같은 선을 바닥에 긋는 듯이 보인다. 이리 저리 그어지며 이어진 선은 이윽고 화면의 하단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작가의 서명으로 변화한다. 이하 본문의 세키네 노부오에 대한 내용은 다음의 글을 참고했다. 도키노와스레모노 블로그, “세키네 노부오 1975~1982 판화들(関根伸夫1975~1982print works)”(2015년 9월 23일자) https://tokinowasuremono.blog.jp/archives/53211721.html (최종접속일: 2025년 1월 7일)
6) 김구림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일본에서 머물며 동판화 기법을 익히고 일본판화가협회에서 정식 회원으로 등록하여 활동했다. 특히 75년 귀국 후에는 “풍부한 재료와 좋은 시설 속에서 누구나 판화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1981년 ‘구림판화공방’을 열어 운영했다. 《김구림》(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3. 8. 25. - 2024. 2. 12.) 전시 브로셔; 박서보 아카이브에 여러 점의 판화 연하장이 소장된 이인화 또한 김구림의 공방에서 처음 동판화를 접하고 판화 작업을 시작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이인화 <점에서 공간으로 8808>(1988) 작품설명 페이지 https://sema.seoul.go.kr/kr/knowledge_research/collection/collection_detail?artSeq=WORK_0000000053
7) 김구림은 1973년 일본에 건너가 자리를 잡은 후 박서보에게 안부 인사를 전했다. 1974년 6월 3일자 김구림이 박서보에게 보낸 엽서(박서보 편지모음집 No.2)
8) 2025년 1월 7일 시점 1985년도까지 디지털화된 박서보 편지모음집에서 이우환은 최소 열두 개의 편지에서 김구림을 언급하고 있다.
ARCHIVE FOCUS⎮24호 새해를 알리는 편지들
(1) 김창열이 박서보에게 보낸 신년연하장, 한지에 수채와 유채, 1987년
(2) 세키네 노부오의 신년연하장, 엽서에 실크스크린, 1979년
(3) 김구림, <용의 머리가 있는 판화>, 종이에 동판화, 1975년
(1) 김창열이 박서보에게 보낸 신년연하장
1987.
서보(栖甫)
신체 강건(身体 彊健)하야 또 한 해를 열심히 그러나 조금 여유도 있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 진다.
(2) 세키네 노부오가 박서보에게 보낸 신년연하장
郵便はがき
年賀
[박서보 손글씨] 関根伸夫
新年あけましておめでとう
(株)環境美術硏究所
〒152 目黑区自由ヶ丘1-3-20 TEL717-8819
[한글번역]
우편엽서
연하
[박서보 손글씨] 세키네 노부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 환경미술연구소
〒152 메구로구 지유가오카 1-3-20 TEL717-8819
[자료 설명]
2025년의 첫 번째 ARCHIVE FOCUS에서는 박서보가 받았던 새해를 알리는 편지들을 소개한다. 24호의 자료들은 박서보가 ‘특별한 편지’로 분류하여 보관하던 신년연하장 세 점이다. 박서보 편지모음집에 수집된 신년연하장은 대다수가 간략한 현지의 풍경이 담긴 엽서나 대량생산된 일반 신년카드지만, 손글씨와 드로잉, 그리고 판화와 함께 담긴 같이 예술적 가치가 있는 그림 연하장도 적지 않은 수 포함되어 있다. 작가는 이러한 연하장들을 ‘특별한 편지’로 간주하여 별도로 보관했다. 신년연하장들을 통해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작가들 간에 오가던 마음들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역마살이 있다”1)고 스스로 평할 정도로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한 해에도 여러 번 외국에 오가곤 했지만 박서보가 대한민국에 단단히 정착하여 기반을 두고 작업했던 것과 달리 작가의 미술계 여러 동료들은 프랑스나 일본, 때로는 미국으로 향했다. 박서보 편지모음집 내 많은 수의 그림 연하장들은 머나먼 타국에서 신년을 보내게 된 동료 작가들에게서 도착했다. 이번 호의 첫 번째 자료인 박서보의 친우, 김창열이 프랑스에서 보내 온 신년연하장은 짤막하지만 두 작가 사이에 켜켜이 쌓여 온 예술적 교감과 다정한 응원을 전한다.2) 김창열의 연하장은 일반 엽서 사이즈보다 조금 작은 세로 12cm, 가로 10cm 내외의 한지에 어두운 채도의 푸른 수채로 빛을 받아 반짝이는 한 개의 물방울을 배경에 그려 넣었다. 어두운 빛깔의 마포 위에 선연하게 빛나는 존재감을 가지는 물방울이 등장하는 김창열의 유화 작품과 대조적으로 한지 위에 수채로 그려진 물방울의 형태는 종이의 섬유질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든다. 흰 유화 물감을 사용해 강조한 물방울의 반사광도 간결하지만 투박한 붓질로 표현되었다. 찬 기운으로 물기 어린 창을 통해 들여다 본 따스한 실내의 모습과도 같이 흔들리는 빛과 번져 나가는 물방울의 형상은 소박한 새해 소망을 담은 김창열의 손글씨 메시지와 어우러져 애틋한 온기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박서보의 편지모음집에서는 또한 신년연하장을 주고 받는 문화가 크게 발달했던 일본의 미술계 인사들이 보내 온 엽서의 비중이 눈에 띈다. 1970년대 중반 일본 미술계에 진출하고 이우환이라는 현지에서의 소통 창구가 생기면서 박서보의 행보는 당대 일본 현대미술 작가들과 자주 교차하곤 했다. 24호의 두 번째 자료는 이우환과 더불어 일본 모노하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세키네 노부오(関根伸夫, 1942-2019)가 1979년에 제작한 연하장이다.3) 세키네 노부오의 신년엽서를 박서보가 소장하게 된 경위를 확정하기 어려우나, 그는 1974년 제2회 앙데팡당 개최와 시기를 맞추어 박서보와 이우환의 중개로 일본 화랑가의 인물들의 내한이 이루어졌을 때 조셉 러브, 건축가 소네 고이치(曽根幸一, 1936 -)와 함께 경주를 방문한 바 있었다.4) 엽서에는 우표와 발송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별도의 서신에 담겨 박서보에게 전달되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박서보는 이를 ‘특별한 편지’로 분류하여 보관하였다. 세키네 노부오의 연하장 표지는 실크스크린 판화로 작업되었고 후면은 일본 체신청(遞信省, 우리나라의 우정사업본부에 해당)에서 발행했던 일반 엽서의 형태이다. 매끈한 코팅 종이인 경우가 많은 일반 유통 엽서와 달리 수채 등의 작업을 위한 텍스처가 있는 종이가 사용된 점, 이미지 하단에 세키네 노부오가 서명과 일자를 연필 수기로 남긴 점, 그리고 전면 판화에 사용된 진한 잉크가 후면의 주소와 신년 메시지에도 사용된 점 등에 비추어 보았을 때 작가가 체신청에 특별 주문제작을 맡겨 인쇄하기보다 일반 엽서를 구매하여 실크스크린 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세키네 노부오는 모노하 작가로서 환경 조각을 중심으로 한 설치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70년대와 80년대에 모노하의 세계를 확장하는 매체로서 판화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 작업했다. 판화 엽서는 세키네 노부오가 실크스크린이라는 매체로 확장한 모노하적 실험의 연장선상에 있다.5) 언뜻 해수면 위로 떠오르는 새해의 태양이라는 흔한 신년 연하장의 주제로 보이지만 엽서는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해수면을 기점으로 서로 다른 차원 혹은 현실을 드러낸다. 하늘은 색면의 영역으로, 붓질 등의 흔적이 없는 색면 그라데이션이며 그 위에 솟아 오른 태양은 하나의 붉은 점으로 구현되었다. 이와 달리 하단 해수면의 일렁이는 물결과 태양의 잔영은 공간감과 입체감이 드러난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실크스크린 기법이다. 연필 등의 필치가 느껴지는 드로잉이 실크스크린 특유의 망점으로 구현된 파도는 해수면에 입체감과 공간감을 더하여 그 장면을 고전적인 회화 이미지의 창으로 전환한다. 태양 아래로 드리워진 해수면 위의 그림자는 타원 형태의 명확한 테두리와 오른쪽으로 치우친 명암 표현으로 인해 평면 형태처럼도 보이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해수면 중간에 뚫려 있는 원통형의 구멍처럼도 인식된다. 기묘한 차원을 점유하는 타원형의 잔영은 그 원본인 깊이도 공간도 없이 색면의 점으로 머무는 붉은 태양과 괴리감을 가져온다. 세키네 노부오의 판화 속에서 보는 이는 색면의 평면에서 입체의 이미지로, 그리고 또 다시 그 화면 밖의 현실, 혹은 모노하의 문법에 따라 자연이나 환경이라고 불릴 수 있는 차원으로 이리저리 이동하며 헤매이게 된다. 세키네 노부오의 신년 인사는 이렇듯 엽서를 받는 이에게 선사하는 사소하지만 즐거운 화제(話題)이면서 동시에 이 시기 그가 고민하던 모노하 세계로의 초대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박서보의 ‘특별한 편지’ 가운데에는 여러 장을 반복하여 제작하기 용이한 판화 매체를 사용한 작가들의 연하장이 다수 발견된다. 대표적인 것이 신년호의 마지막 자료인 김구림의 1975년 제작 연하장이다. 한국 실험 미술의 선구자인 김구림의 판화 작업은 그의 실험적 설치 조각이나 퍼포먼스에 비해 많이 논의되지 않지만, 작가는 1970년대 일본에서 동판화를 배우고 민중미술에서 목판화나 실크스크린 기법 정도가 보급되어 있었던 한국 미술계에 메조틴트와 같은 새로운 판화 미술을 들여 와 중대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된다.6) 김구림과 박서보의 교류는 박서보 편지모음집에 보관된 서신들을 통해 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꾸준히 확인되며, 박서보는 70년대 김구림의 판화 작품 또한 여러 점 소장하고 있었다.7) 김구림은 1973년 일본에 넘어가 박서보의 도움을 받아 이우환을 비롯한 일본 화랑들과 교류했고, 이후 박서보가 받은 70년대 서신들에서 이우환은 김구림의 활동을 꾸준히 전하며 판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익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김구림에 대한 응원을 표하곤 했다.8) 김구림의 1975년 판화에서는 제작일과 서명 외에 메시지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작 시기가 1975년인 점과 판화의 주제가 용이라는 점에 기반하여 보았을 때, 그의 판화가 1976년 병진년(丙辰年) 붉은 용띠의 해를 기념하는 연하장의 의미로 제작되었다는 추정이 설득력을 가진다. 판화에는 입을 벌린 용의 머리와 풍경이 전통화 화풍으로 표현되어 있다. 화면을 가로 세로로 교차되는 세밀한 선으로 긁어 달무리 혹은 해처럼 보이는 용의 배경 부분을 밝게 구현하고 검은 잉크가 묻게 될 부분을 바니쉬로 문질러 구름과 산의 무늬, 그리고 용의 입체감을 부드럽게 명암 표현했는데, 이는 작가가 일본에서 익힌 메조틴트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로 10센티미터를 넘지 않는 작은 크기의 이미지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세공한 판화의 세심함에서 신년 연하장을 받을 이들에 대한 김구림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세 점의 연하장들을 통해 작가들은 국경과 언어를 넘어 자신이 시도하는 새로운 실험들을 서로에게 공유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작업과 건강을 기원한다. 이 편지들이 이제는 수십 년의 시간을 넘어 2025년의 우리들에게 더 많은 이들과 연대하고 더 폭넓은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한 해를 만들어내는 작은 힘이 되길 바란다.
글 최윤정
일본어 번역/이미지 임한빛
<주석>
1) 박서보, 「역마살」, 『엘레강스』(1979년 5월), 페이지 미확인(박서보 증빙자료집 No.11)
2) 김창열의 신년연하장이 담겨 있던 봉투는 확인되지 않으나, 비슷한 시기인 1979년 12월 18일 박서보가 김창열에게 보낸 편지의 주소지를 통해 김창열이 이 시기 프랑스에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3) 연하장은 다음 해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 그 전 해 연말에 발송되므로 보통 실제 기념하는 해보다 한 해 전에 제작되었다. 그러므로 김창열의 엽서는 1988년, 세키네 노부오의 엽서는 1980년, 그리고 김구림의 엽서는 1976년 용띠의 해를 각각 알리는 것이었다.
4) 박서보 사진모음집 No.2의 1974년 12월 23일자 사진들에서 세키네 노부오가 박서보, 조셉 러브, 소네 고이치(曽根幸一), 심문섭, 이우환, 하인두와 함께 발견된다. 74년의 내한 이후 박서보와 세키네 노부오의 직접적인 교류 기록은 현시점 확인하기 어려우나, 1979년 일자로 기록된 신년엽서를 통해 그 관계는 느슨하게나마 수년간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5) 도키노와스레모노 갤러리(ときの忘れもの)는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일본 판화 미술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도키노와스레모노의 디렉터 와타누키 레이코(綿貫令子)의 글에 따르면 세키네 노부오는 1973년 일본에 귀국하여 환경미술연구소를 설립했는데, 다음 해 설립된 일본의 현대판화센터(現代版画センター)에서 그에게 판화 커미션을 주문한 것을 계기로 작가는 판화라는 매체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70-80년대에 다양하게 실험하기 시작했다. 와타누키 레이코는 세키네 노부오가 판화라는 매체를 통해 모노하의 저변을 확장하고 대중화하고자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일례로 1970년대와 80년대의 <환상> 실크스크린 판화 연작에서 세키네 노부오는 평면과 입체를 넘어 이미지와 현실의 경계를 실험했다. 1975년작 <환상-빨간 풍선(絵空事-赤い風船)>에서 색면으로만 구현된 풍선은 명암과 그림자가 있는 입체적인 이미지로 구현된 색연필과 연결되어 있다. 색연필은 풍선을 묶은 실에 매달려 낙서와 같은 선을 바닥에 긋는 듯이 보인다. 이리 저리 그어지며 이어진 선은 이윽고 화면의 하단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작가의 서명으로 변화한다. 이하 본문의 세키네 노부오에 대한 내용은 다음의 글을 참고했다. 도키노와스레모노 블로그, “세키네 노부오 1975~1982 판화들(関根伸夫1975~1982print works)”(2015년 9월 23일자) https://tokinowasuremono.blog.jp/archives/53211721.html (최종접속일: 2025년 1월 7일)
6) 김구림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일본에서 머물며 동판화 기법을 익히고 일본판화가협회에서 정식 회원으로 등록하여 활동했다. 특히 75년 귀국 후에는 “풍부한 재료와 좋은 시설 속에서 누구나 판화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1981년 ‘구림판화공방’을 열어 운영했다. 《김구림》(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3. 8. 25. - 2024. 2. 12.) 전시 브로셔; 박서보 아카이브에 여러 점의 판화 연하장이 소장된 이인화 또한 김구림의 공방에서 처음 동판화를 접하고 판화 작업을 시작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이인화 <점에서 공간으로 8808>(1988) 작품설명 페이지 https://sema.seoul.go.kr/kr/knowledge_research/collection/collection_detail?artSeq=WORK_0000000053
7) 김구림은 1973년 일본에 건너가 자리를 잡은 후 박서보에게 안부 인사를 전했다. 1974년 6월 3일자 김구림이 박서보에게 보낸 엽서(박서보 편지모음집 No.2)
8) 2025년 1월 7일 시점 1985년도까지 디지털화된 박서보 편지모음집에서 이우환은 최소 열두 개의 편지에서 김구림을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