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CUS⎮25호 박서보의 작업실(6) 안성 한서당-2: 안성 한서당의 사회적 삶

(1) 1981년 4월 5일, 안성 공도면 대림동산 내의 작업실 한서당에서의 기념 식수를 하기 위해 모인 「오픈하우스」 파티날 사진들
자료 출처: 박서보 사진자료집 No.4



(2) 유흥목, 「넓은 공간(空間)은 「자연 화실」」, 『세계』(1986년 5월), pp. 19-22.
자료 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 No.21
(1) 1981년 4월 5일, 안성 공도면 대림동산 내의 작업실 한서당에서의 기념 식수를 하기 위해 ‘오픈하우스’ 파티날 사진들
1981. 4. 5 안성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 내 작업실 기념 식수를 마치고
좌로부터 최명영 박석원 전정수 김종일 한기주 박서보 박승범 김수익 박장년 이경수 ?
1981.4.5., 안성 공도면 대림동산 내의 작업실 한서당에서의 기념 식수를 하기 위해 「오픈하우스」 파티날
[뒷줄 좌(左)로부터] ⓵송형근 ⓶한기주 ⓷이승택 ⓸이태현 ⓹박홍 ⓺김광협(동아일보기자) ⓻오광수 ⓼하태진 ⓽박장년 ⓾최기원의 처 ⑪송수남 ⑫처 윤명숙 ⑬여운 ⑭박서보 ⑮하태진의 처 [신원미확인 1인] ⑯김영순 ⑰김종일 ⑱김진석 ⑲김수익 ⑳한만영 ㉑정인건 ㉒이정용 ㉓황승호 ㉔신일근 ㉕서승원 ㉖최덕교 ㉗□ ㉘예유근 ㉙전정수 ㉚이승조 ㉛박석원 (화살표 이후 계속) ㉜최기원 ㉝심문섭
[앞줄 좌(左)로부터] ⓵이근 ⓶이주원 ⓷박승범 ⓸이호수 ⓹김구림 ⓺김선회 ⓻조돈구 ⓼김영진 ⓽신항섭 ⓾조승래 ⑪최명영 ⑫문창식 ⑬이동엽 ⑭이상조 ⑮염태진(경희대의료원 시대분원장)
(2) 유흥목, 「넓은 공간은 ‘자연 화실(画室)’」, 『세계』(1986년 5월), pp. 19-22.
(사진 캡션)
안성군 보개면에 지은 이승조 중앙대 예대교수의 화실. 너와집 모양으로 예술 감각이 가미돼 설계된 게 특징이다. 그앞에 이 교수와 박서보 교수, 김형대 화백(오른쪽부터)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넓은 공간은 ‘자연 화실’
박서보씨 등 유명화가들 탈(脫) 서울 붐
벌써 7개면에 24명 안주(安住) 창작생활
(사진 캡션)
맨 위: 안성군 공도면에 있는 김형대 화백의 화실, 김화백 옆에 있는 큰 그림이 75년도 작품인 <심상75>이다.
위와 오른쪽: 50평 규모의 박서보 화백의 화실내부.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에 소재한 박서보 화백의 화실은 응접실로 쓰고 있지만 때로 작업장으로도 활용한다.
경기도 안성이 ‘화가마을’로 변하고 있다. 안성을 중심으로 7개면 곳곳에 국내 유명화백들의 화실이 들어서 문화예술의 기운이 움트게 됐다.
지난 80년 서양화가 박서보씨(55·홍익대 미대교수)가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에 ‘한서당(寒栖堂)’ 화실을 마련한 것을 출발로 지금까지 24명의 화가들이 작업을 위한 집을 지었거나 대지를 구입해 놓았다. 개중에는 화실을 건립중에 있는 화백도 있다.
박교수가 고향인 안성에 화실을 차려 놓고는 동료 화백들에게 과밀한 서울을 벗어나 확 트인 공간의 전원에서 자연과 더불어 창작활동을 권유, 이처럼 호응을 얻게 된 것이다.
유기와 농장으로 널리 알려진 안성은 예부터 풍수해가 없는 안성마춤의 고장.
차령산맥이 분수령을 이룬 구릉지로 공기와 물이 맑은 외에 한적하고 경관이 좋은 전원 평야지대로 유명하다.
서울과 대전이 1시간 거리로 교통이 편리한 점도 ‘화가마을’을 이루는데 한몫한다.
지금까지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한 화백은 박서보 교수를 비롯, 김형대 이화여대 미대 교수(공도면), 이승조 중앙대 예술대교수(보개면), 석난희 홍익대 미대강사(양성면), 정영렬 중앙대 회화과교수(공도면), 이필언 동아대 회화과 전임강사(양성면), 하태진 홍익대 동양화과장(미양면), 송수남 홍익대 미대교수(미양면), 류(柳)종민 중앙대 조소과장(보개면), 유제국 중앙대 예대교수(금광면), 최기원 홍익대 조소과교수(고삼면) 등이다.
이두식 홍익대 미대전임강사와 박광진 서울교대교수는 보개면과 양성면에 각각 제2의 창작활동을 펼 화실을 짓고 있다. 또 작업실 지을 땅을 구입해 놓은 화가로는 하종현 한국미술협회이사장(홍익대 미대교수·양성면), 최명영 홍익대 서양화과장(보개면), 서승원 홍익대 미대교수(양성면), 윤미란 홍익대미대강사(공도면), 이숙자 서울교대교수(양성면), 박권수 후반기미술학원장(삼죽면), 안동숙 이화여대 미대학장(보개면), 정대유 성신여대 예대교수(보개면), 김종휘 홍익공전교수(미양면), 이 번 덕성여대미술과교수(고삼면), 최현칠 홍익대 미대교수(금광면) 등이다.
현재 24명의 안성 ‘화가마을’ 식구는 알게 모르게 화실로 쓸 대지를 물색중인 화백들이 있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참신한 창작생활을 위해 이곳에 화실을 마련하게 된 것은 우선 한적한 자연을 벗삼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교통이 편리한 외에 땅값이 싸기 때문에 넓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땅값이 올라 있지만 일찍 서두른 화백들은 평당 몇 백원에서 몇 천원 정도에 구입했다. 그래서 보통 300평에서 많게는 6000~7000평까지의 대지를 마련해 놓고 있다.
서울에서 이 만큼의 땅을 확보하기란 어림도 없다. 교단 생활에서의 수입이 이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안성에 진작 땅을 사놓고도 화실을 꾸미지 못한 화백들이 많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화백들이 지금은 생활의 터전으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노후를 대비하고 새로운 창작을 위해 안성을 찾은 것이다. 바로 작가가 굳이 서울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게 그들의 설명이다.
게다가 미술 문화의 지방 확산이란 측면도 고려했다. 비좁고 비싼 서울을 피해서 말이다.
안성에 ‘화가마을’을 이루고 있는 화백들 대부분은 그들의 안성 화실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다. 국가에 기증하거나 문화 재단으로 만들어 기념관으로 보존하겠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이 기념관이 제대로 가꿔질 때 앞으로 서양화를 배우려는 후세들이 이곳을 꼭 찾아봐야 한다는 화백들의 얘기는 꽤 설득력이 있었다.
사진/ 조성위 기자 글/ 유흥목 기자
(사진캡션)
위: 이승조 화백의 작업장내부.
토틀디자인[토탈 디자인, total design]으로 꾸며진 이 작업실은 파이프(원통)가 담긴 그림으로 꽉 차있다.
왼쪽: 개나리와 목련이 활짝 핀 박서보 화백의 화실 정원에서 이승조, 김형대, 박 화백(왼쪽부터)이 웃고 있다.
<표기 원칙>
- 한글본: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에 사용된 기호나 숫자는 현대한국어 문법에 맞추어 교정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어 표기 시 사용되는 낫표 「」는 생략, 겹낫표 『』는 의미상 사용에 따라 따옴표 ' ' 로 교정했다. 확인할 수 없는 글자는 ■로 표기한다. 변경된 명칭이나 번역자 주는 대괄호 [ ]로 표기하고 긴 내용의 경우에는 주석을 달았다.
[자료 설명]
ARCHIVE FOCUS 25호는 지난 23호에 이어 안성 한서당에 대해 다룬다. 작업실이 자리 잡은 경기도 안성은 도시와 화단의 번잡한 삶을 벗어나 있었지만, 한 편으로 박서보에게 새로운 사회문화적 환경을 제공했다. 이번 호에서는 23호의 자료였던 1982년 3월 『공간』 지 인터뷰의 후반부와 1986년 5월의 『세계』, 그리고 작업실이 존재했던 1980년부터 1996년 사이의 여러 잡지 기사들과 박서보 아카이브 자료들을 통해 안성 한서당의 사회적 중력장을 살펴본다.
『공간』 지의 조정권은 1982년 인터뷰 초반부에서 안성 작업실의 자연 환경에 대해 다룬 후 곧이어 작가에게 국내 화단의 동향과 이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이는 안성 한서당이 작업 공간일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작가의 사회적 행보와 깊은 연관이 있었음을 미술 관계자들이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미술협회(미협)의 설립 이래로 꾸준히 협회 활동에 기여해 온 박서보는 1977년에 미협 이사장직에 선출된다. 작가는 미협을 구심점으로 하여 국내외 전시 관련 행정을 조율하고 한국에 현대 미술을 뿌리내리게 할 다방면의 체제를 마련했다. 박서보의 미협 활동은 한국 현대 미술이 전국 곳곳에서 자리 잡고 국제 미술계에 진출하여 하나의 미술사적 흐름으로 인식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추상 위주 한국 현대 미술에 집중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적 지원에 대한 불만이 화단 내에서 누적되어, 1980년에는 특히 박서보를 구심점으로 하는 추상 미술 세력에 대한 견제로 작가는 미협 이사장 재선에 실패하게 된다.
조정권와의 대화에서 박서보는 “[미협 선거에] 떨어진 다음 날 바로 시골로 내려가” 안성 작업실을 만드는 데 전념했다고 언급한다. 안성 한서당 작업실 마련의 계기는 예술가로서의 오랜 숙원이었다고 짚어 말하면서도 작업실에서의 생활이 일종의 사회적 은거를 의미했음을 작가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박서보는 속세에서 벗어나 자연에 귀의하는 탈속(脫俗)을 지향하는 예술가라 할 지라도 “현실 구조 속의 한 일원이라는 걸 잊을 순 없다”고 강조한다. 80년대 초의 박서보에게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 현실은 “현대미술을 빨리 세계의 중심부에 연결시”켜야 한다는 과제와 이를 위한 국내 미술계 내 체계 마련의 필요성이었다. 박서보는 이 시기 개인 작업에 몰두하면서도 미협 밖에서 현대미술을 다루는 각종 미술제와 전시에 출품하고 국제 교류전 및 행사 기획에 참여하며 한국 현대 미술의 국제화를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작업실이 축조되고 공개된 80년에서 81년 사이 박서보가 동료들에게 받은 편지들에서는 한서당의 공사 진척도를 묻거나 완공을 축하하는 인사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서당이 완공된 이듬해인 1981년 4월, 박서보는 작업실의 오픈을 알리는 식수(植樹) 축하 기념 행사에는 미술계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여 새 작업실의 명성을 짐작해보게 한다.(사진 첫 번째와 두 번째) 박서보는 손글씨로 이 날 함께했던 이들의 이름을 사진 뒷면에 빼곡히 기록했는데, 그 목록은 비평가 오광수 그리고 작가 김구림, 최명영, 서승원과 작가들의 가족 등 50여명에 달한다. 지금과 달리 수도권에서 벗어난 노지에 가까웠던 경기도 안성은 당시 기준으로는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박한 투자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고즈넉한 자연 속에 자리한 박서보의 넓은 작업실은 동료 화가들과 제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국내외 미술계 인사들이 찾아와 방문하는 공간이 되었다.
안성 작업실의 사회적 삶을 보여주듯, 박서보 아카이브 내 한서당에서 촬영한 350여 점 가량의 사진들 가운데에는 지인들과 작가가 함께 보낸 시간을 기록한 것들이 과반수를 차지한다. 교수 생활을 하던 홍익대에서의 입지는 더욱 커져 1985년, 박서보는 홍익대학교 대학원장이라는 보직을 맡고 뒤이어 86년에는 미술대학장에 임하며 서울의 학교에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도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는 집을 1985년경 홍대 인근의 동교동에 새로이 얻는다. 하지만 작가는 이후로도 여전히 안성 작업실을 삶의 일부로 간주했으며 말년의 여생을 보낼 중요한 공간으로 여기며 이 곳에서 홍익대학교 내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르거나 별장처럼 여름마다 화가들과 방문하기도 했다.
박서보의 작업실을 다녀간 화가들이 서울이라는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자연 속 드넓은 공간의 작업실을 진지하게 숙려해보게 되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이와 관련해 1986년 5월의 『세계』 인터뷰 80년대 안성 한서당의 사회적 맥락에 흥미로운 층위를 더한다.(세 번째 자료) 『세계』는 박서보의 안성 한서당을 시작으로 24명의 화가들이 도심에서 벗어난 경기도 안성 인근에 작업실을 마련하며 일종의 “화가마을”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도한다. 기사는 이 ‘마을’ 작업실의 대표적인 예로서 박서보의 한서당과 더불어 김형대와 이승조의 공간을 담았다.
기사 속 이승조의 작업실은 박서보의 한서당과 유사하게 한쪽으로 높은 빗면의 지붕이 있는 벽돌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천장에 원목 패널을 덮고 회색빛 벽돌로 바닥을 구성한 박서보의 작업실과 달리 천장과 벽 대부분을 매끈하게 흰색으로 마감하고 바닥은 황토빛의 장판, 일부 벽에는 시멘트로 고정한 붉은 벽돌을 그대로 노출하여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김형대의 작업실 외견은 기사에 실리지 않았으나 내부 벽면과 바닥 모두를 나무로 마감하여 맨발로 걸어 다니면서 작업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 화가의 작업실은 모두 높은 층고와 자연 채광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넓은 작업실을 활용하여 제작한 100호 이상의 작품들이 여럿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세계』에 실린 한서당의 사진에서는 현재 박서보재단의 박서보컬렉션 속 이승조의 <핵> 작품 두 점 가운데 하나가 벽에 걸려 있는 것이 확인되어 이승조와 박서보의 작업실 공간 간 밀접한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
『세계』 인터뷰의 기자는 작가들이 미술관이 될 작업실의 공간적 집적을 통해 경기도 안성 일대를 일종의 국내 서양화가들의 성지(聖地)로 만들고자 계획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많은 작가들이 작업실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토지를 파는 경우가 많아졌고, 박서보의 작업실 또한 수 차례의 도난 이후 화재로 소진되어 걸어 잠그게 되면서 안성 화가마을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다.
서울과 홍대, 동교동으로 삶의 중심이 옮겨 갔지만 안성 한서당은 80년대의 박서보에게 제2의 작업실이자 은퇴 후 말년의 여생을 보낼 장소였으며, 작가의 사후에도 기념관이자 미술관으로서 영속할 공간으로 여겨졌다. 이렇듯 안성 작업실이라는 새로운 공간은 여러 층위에서 이 시기 작가의 삶을 이끌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영향은 한지 묘법의 발견일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안성 한서당에 대한 마지막 연재로 80년대 초에 탄생한 한지 묘법과 안성 작업실의 역사문화적 환경을 다루는 아카이브 자료들을 살펴본다.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
<주석>
1) 1982년 3월 『공간』 지 인터뷰, 「특집(特輯): 화가(畫家)와 아뜰리에 건축(建築): 안성 한서당」 전문은 ARCHIVE FOCUS 23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parkseobofoundation.org/story/?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34433038&t=board
2) 박서보의 70년대 미협 활동에 대해 보다 상세한 내용은 합정동 이층집 시기를 다룬 아카이브 포커스 22호의 자료, 이흥우의 『화랑』 기사를 참조. https://parkseobofoundation.org/story/?idx=127308081&bmode=view
3) 2025년 3월 5일 기점 파악된 박서보의 전시 기록에 따르면, 70년대 85개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출품했던 박서보는 80년대에 약 1.3배 늘어난 109개 전시에 참여했다. 80년대 진행된 전시 가운데 국외 전시는 30개, 국내 전시는 79개였다. 이 시기에는 《현대(現代)∙종이의 조형(造形): <한국(韓國)과 일본(日本)>》(1982), 국제종이회의 ‘83, 《한국현대미술전: 70년대 후반·하나의 양상(韓國現代美術展: 70年代後半·ひとつの様相)》(1983), 그리고 《FIAC 84》(1984) 등 굵직한 전시들이 국내외에서 진행되며 한국 현대미술을 국제 미술계에 소개했다. 국내에서는 박서보를 포함한 단색화 계열의 현대 추상 미술 작가들의 개인전이 새로이 부상한 상업화랑에서 다수 열리며 미술계와 시장에서의 입지를 공고히했다고 분석된다. 조수진, 「시장은 미술사에 어떻게 관여하는가: 현대화랑과 1970~90년대 한국미술」, 『한국근현대미술사학』(2024. 하반기), pp. 192-234 중 pp. 215-217.
4) 이 시기 한글 편지들에서 안성 한서당을 언급한 이들은 정상화, 이우환, 윤형근, 김창열, 강석영, 그리고 서승원 등이 있다. 박서보 편지모음집 내 목록: 1980년 7월 8일 정상화가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 1980년 10월 3일 이우환이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 1981년 1월 6일 이우환이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 1981년 1월 14일 정상화가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박서보 편지모음집 No.6); 1981년 2월 19일 윤형근이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 1981년 3월 22일 김창열이 박서보에게 보낸 초대장, 1981년 6월 22일 강석영이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 1981년 7월 24일 서승원이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 1981년 9월 6일 이우환이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박서보 편지모음집 No.7)
5) 이용우는 1985년 12월의 『여성동아』 기사에서 7-80년대 다양한 예술계 인물들의 재산과 작품 가치, 그리고 그 형성 요인을 실명으로 상세히 정리하여 당시 예술계의 경제 구조에 대한 흔치 않은 자료를 제공한다. 당시 예술계의 시선에서 호황기를 구가한 구상 화가들에 비해 비구상 화가들은 작품 판매를 통해 큰 재력을 모으지는 못했다. 대신 이들은 학교에 자리 잡아 교직 생활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이용우, 「[심층취재] 고소득 예술인들의 재산실태: 고급저택에 별장까지」, 『여성동아』(1985년 12월), pp. 138-146. 1985년 12월의 『여성동아』 기사와 더불어 『세계』 기사에서도 경기도 안성을 비슷하게 평가하고 있다. 1986년 5월의 유흥목, 르포/안성(安城)의 「화가(画家)마을」, 『세계』, 61호, (1986년 5월 1일), p. 20.
6) 박서보 작업실 벽에 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이승조, <핵>, 1978, 캔버스에 유채, 162x135cm, 박서보재단 소장.
7)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편집, 『2014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238 박서보』(2014), p. 220.
참고자료
「특집(特輯): 화가(畫家)와 아뜰리에 건축(建築): 안성 한서당」, 『공간(空間)』(1982년 3월) (박서보 증빙자료집 No.15)
- 박홍(朴洪), 「안성한서당(安城 寒栖堂): 박서보씨 화실(朴栖甫氏 画室)」, pp. 46-50.
- 박서보, 조정권, 「박서보씨(朴栖甫氏)와의 대화(対話): 안성 한서당(安城 寒栖堂)─그 현장(現場)을 찾아서」, pp. 51-58.
「특집(特輯): 박서보의 묘법(1967~1983)」, 『공간(空間)』(1983년 4월) (박서보 증빙자료집 No.16)
- 조정권(趙鼎權), 「박서보의 묘법(1967~1983)」, pp. 24-28.
유흥목, 르포/안성(安城)의 「화가(画家)마을」, 『세계』, 61호, (1986년 5월 1일), 사진: 조성위
조수진, 「시장은 미술사에 어떻게 관여하는가: 현대화랑과 1970~90년대 한국미술」, 『한국근현대미술사학』(2024년 하반기), pp. 192-234.
박승숙,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박서보의 삶과 예술』(인물과 사상사, 2019)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편집, 『2014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238 박서보』(2014).
[원문]
(1) 1981년 4월 5일, 안성 공도면(安城 孔道面) 대림(大林)동산 내의 작업실(作業室) 한서당(寒栖堂)에서의 기념(記念) 식수를 하기 위해 「오픈하우스」 파티날 사진들
1981. 4. 5 안성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 내 작업실 기념 식수를 마치고
좌로부터 최명영 박석원 전정수 김종일 한기주 박서보 박승범 김수익 박장년 이경수 ?
1981.4.5., 안성 공도면(安城 孔道面) 대림(大林)동산 내의 작업실(作業室) 한서당(寒栖堂)에서의 기념(記念) 식수를 하기 위해 「오픈하우스」 파티날
[뒷줄 좌(左)로부터] ⓵송형근(宋亨根) ⓶한기주(韓基柱) ⓷이승택(李升沢[澤]) ⓸이태현(李泰鉉) ⓹박홍(朴弘) ⓺김광협(金光協)(동아일보기자(東亞日報記者)) ⓻오광수(吳光洙) ⓼하태진(河泰瑨) ⓽박장년(朴庄年) ⓾최기원(崔起源)의 처(妻) ⑪송수남(宋秀南) ⑫처 윤명숙(妻 尹明淑) ⑬여운(呂運) ⑭박서보(朴栖甫) ⑮하태진(河泰瑨)의 처(妻) [신원미확인 1인] ⑯김영순(金英順) ⑰김종일(金鍾一) ⑱김진석(金鎭石) ⑲김수익(金秀益) ⑳한만영(韓萬榮) ㉑정인건(鄭寅建) ㉒이정용(李政竜) ㉓황승호(黃承虎) ㉔신일근(申一根) ㉕서승원(徐承元) ㉖최덕교(崔德敎) ㉗□ ㉘예유근(芮遺根) ㉙전정수(全正洙) ㉚이승조(李承祚) ㉛박석원(朴石元) (화살표 이후 계속) ㉜최기원(崔起源) ㉝심문섭(沈文变)
[앞줄 좌(左)로부터] ⓵이근(李堇) ⓶이주원(李濬元) ⓷박승범(朴承範) ⓸이호수(李昊洙) ⓹김구림(金丘林) ⓺김선회(金鮮会) ⓻조돈구(趙敦九) ⓼김영진(金榮鎭) ⓽신항섭(申恒变) ⓾조승래(趙承来) ⑪최명영(崔明永) ⑫문창식(文昌植) ⑬이동엽(李東熀) ⑭이상조(李商照) ⑮염태진(廉泰鎮) (경희대의료원 시대분원장)
(2) 유흥목, 「넓은 공간(空間)은 「자연 화실(画室)」」, 『세계』(1986년 5월), pp. 19-22.
(사진 캡션)
안성군 보개면에 지은 이승조(李承祚) 중앙대 예대교수의 화실. 너와집 모양으로 예술 감각이 가미돼 설계된 게 특징이다. 그앞에 이(李)교수와 박서보(朴栖甫)교수, 김형대(金炯大) 화백(오른쪽부터)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넓은 공간(空間)은 「자연 화실(画室)」
박서보(朴栖甫)씨 등 유명화가들 탈(脫) 서울 붐
벌써 7개면에 24명 안주(安住) 창작생활
(사진 캡션)
맨 위: 안성군 공도면에 있는 김형대(金炯大) 화백의 화실, 김(金)화백옆에 있는 큰 그림이 75년도 작품인 「심상75」이다.
위와 오른쪽: 50평 규모의 박서보(朴栖甫) 화백의 화실내부.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에 소재한 박서보(朴栖甫) 화백의 화실은 응접실로 쓰고 있지만 때로 작업장으로도 활용한다.
경기도 안성이 「화가마을」로 변하고 있다. 안성을 중심으로 7개면 곳곳에 국내 유명화백들의 화실이 들어서 문화예술의 기운이 움트게 됐다.
지난 80년 서양화가 박서보(朴栖甫)씨(55·홍익대 미대교수)가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에 「한서당(寒栖堂)」화실을 마련한 것을 출발로 지금까지 24명의 화가들이 작업을 위한 집을 지었거나 대지를 구입해 놓았다. 개중에는 화실을 건립중에 있는 화백도 있다.
박(朴)교수가 고향인 안성에 화실을 차려 놓고는 동료 화백들에게 과밀한 서울을 벗어나 확 트인 공간의 전원에서 자연과 더불어 창작활동을 권유, 이처럼 호응을 얻게 된 것이다.
유기와 농장으로 널리 알려진 안성은 예부터 풍수해가 없는 안성마춤의 고장.
차령산맥이 분수령을 이룬 구릉지로 공기와 물이 맑은 외에 한적하고 경관이 좋은 전원 평야지대로 유명하다.
서울과 대전이 1시간 거리로 교통이 편리한 점도 「화가마을」을 이루는데 한몫한다.
지금까지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한 화백은 박서보(朴栖甫)교수를 비롯, 김형대(金炯大) 이화여대 미대 교수(공도면), 이승조(李承祚) 중앙대 예술대교수(보개면), 석난희(石蘭姬) 홍익대 미대강사(양성면), 정영렬(鄭永烈) 중앙대 회화과교수(공도면), 이필언(李必彦) 동아대 회화과 전임강사(양성면), 하태진(河泰瑨) 홍익대 동양화과장(미양면), 송수남(宋秀南) 홍익대 미대교수(미양면), 류(柳)종민 중앙대 조소과장(보개면), 유제국(柳齊國) 중앙대 예대교수(금광면), 최기원(崔起源) 홍익대 조소과교수(고삼면) 등이다.
이두식(李斗植) 홍익대 미대전임강사와 박광진(朴洸眞) 서울교대교수는 보개면과 양성면에 각각 제2의 창작활동을 펼 화실을 짓고 있다. 또 작업실 지을 땅을 구입해 놓은 화가로는 하종현(河鍾賢)한국미술협회이사장(홍익대 미대교수·양성면), 최명영(崔明永) 홍익대 서양화과장(보개면), 서승원(徐承元) 홍익대 미대교수(양성면), 윤미란(尹美蘭) 홍익대미대강사(공도면), 이숙자(李淑子) 서울교대교수(양성면), 박권수(朴權洙) 후반기미술학원장(삼죽면), 안동숙(安東淑) 이화여대 미대학장(보개면), 정대유(鄭大有) 성신여대 예대교수(보개면), 김종휘(金鍾輝) 홍익공전교수(미양면), 이 번(李蕃) 덕성여대미술과교수(고삼면), 최현칠(崔賢七) 홍익대 미대교수(금광면) 등이다.
현재 24명의 안성 「화가마을」 식구는 알게 모르게 화실로 쓸 대지를 물색중인 화백들이 있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참신한 창작생활을 위해 이곳에 화실을 마련하게 된 것은 우선 한적한 자연을 벗삼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교통이 편리한 외에 땅값이 싸기 때문에 넓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땅값이 올라 있지만 일찍 서두른 화백들은 평당 몇 백원에서 몇 천원 정도에 구입했다. 그래서 보통 300평에서 많게는 6000~7000평까지의 대지를 마련해 놓고 있다.
서울에서 이 만큼의 땅을 확보하기란 어림도 없다. 교단생활에서의 수입이 이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안성에 진작 땅을 사놓고도 화실을 꾸미지 못한 화백들이 많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화백들이 지금은 생활의 터전으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노후를 대비하고 새로운 창작을 위해 안성을 찾은 것이다. 바로 작가가 굳이 서울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게 그들의 설명이다.
게다가 미술문화의 지방확산이란 측면도 고려했다. 비좁고 비싼 서울을 피해서 말이다.
안성에 「화가마을」을 이루고 있는 화백들 대부분은 그들의 안성 화실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다. 국가에 기증하거나 문화재단으로 만들어 기념관으로 보존하겠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이 기념관이 제대로 가꿔질 때 앞으로 서양화를 배우려는 후세들이 이곳을 꼭 찾아봐야 한다는화백들의 얘기는 꽤 설득력이 있었다.
사진/조성위(趙盛暐)기자 글/유흥목(俞興穆)기자
(사진캡션)
위: 이승조(李承祚) 화백의 작업장내부.
토틀디자인[토탈 디자인, total design]으로 꾸며진 이 작업실은 파이프(원통)가 담긴 그림으로 꽉 차있다.
왼쪽: 개나리와 목련이 활짝 핀 박서보(朴栖甫)화백의 화실정원에서 이승조(李承祚), 김형대(金炯大), 박(朴)화백(왼쪽부터)이 웃고 있다.
ARCHIVE FOCUS⎮25호 박서보의 작업실(6) 안성 한서당-2: 안성 한서당의 사회적 삶
(1) 1981년 4월 5일, 안성 공도면 대림동산 내의 작업실 한서당에서의 기념 식수를 하기 위해 모인 「오픈하우스」 파티날 사진들
자료 출처: 박서보 사진자료집 No.4
(2) 유흥목, 「넓은 공간(空間)은 「자연 화실」」, 『세계』(1986년 5월), pp. 19-22.
자료 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 No.21
(1) 1981년 4월 5일, 안성 공도면 대림동산 내의 작업실 한서당에서의 기념 식수를 하기 위해 ‘오픈하우스’ 파티날 사진들
1981. 4. 5 안성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 내 작업실 기념 식수를 마치고
좌로부터 최명영 박석원 전정수 김종일 한기주 박서보 박승범 김수익 박장년 이경수 ?
1981.4.5., 안성 공도면 대림동산 내의 작업실 한서당에서의 기념 식수를 하기 위해 「오픈하우스」 파티날
[뒷줄 좌(左)로부터] ⓵송형근 ⓶한기주 ⓷이승택 ⓸이태현 ⓹박홍 ⓺김광협(동아일보기자) ⓻오광수 ⓼하태진 ⓽박장년 ⓾최기원의 처 ⑪송수남 ⑫처 윤명숙 ⑬여운 ⑭박서보 ⑮하태진의 처 [신원미확인 1인] ⑯김영순 ⑰김종일 ⑱김진석 ⑲김수익 ⑳한만영 ㉑정인건 ㉒이정용 ㉓황승호 ㉔신일근 ㉕서승원 ㉖최덕교 ㉗□ ㉘예유근 ㉙전정수 ㉚이승조 ㉛박석원 (화살표 이후 계속) ㉜최기원 ㉝심문섭
[앞줄 좌(左)로부터] ⓵이근 ⓶이주원 ⓷박승범 ⓸이호수 ⓹김구림 ⓺김선회 ⓻조돈구 ⓼김영진 ⓽신항섭 ⓾조승래 ⑪최명영 ⑫문창식 ⑬이동엽 ⑭이상조 ⑮염태진(경희대의료원 시대분원장)
(2) 유흥목, 「넓은 공간은 ‘자연 화실(画室)’」, 『세계』(1986년 5월), pp. 19-22.
(사진 캡션)
안성군 보개면에 지은 이승조 중앙대 예대교수의 화실. 너와집 모양으로 예술 감각이 가미돼 설계된 게 특징이다. 그앞에 이 교수와 박서보 교수, 김형대 화백(오른쪽부터)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넓은 공간은 ‘자연 화실’
박서보씨 등 유명화가들 탈(脫) 서울 붐
벌써 7개면에 24명 안주(安住) 창작생활
(사진 캡션)
맨 위: 안성군 공도면에 있는 김형대 화백의 화실, 김화백 옆에 있는 큰 그림이 75년도 작품인 <심상75>이다.
위와 오른쪽: 50평 규모의 박서보 화백의 화실내부.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에 소재한 박서보 화백의 화실은 응접실로 쓰고 있지만 때로 작업장으로도 활용한다.
경기도 안성이 ‘화가마을’로 변하고 있다. 안성을 중심으로 7개면 곳곳에 국내 유명화백들의 화실이 들어서 문화예술의 기운이 움트게 됐다.
지난 80년 서양화가 박서보씨(55·홍익대 미대교수)가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에 ‘한서당(寒栖堂)’ 화실을 마련한 것을 출발로 지금까지 24명의 화가들이 작업을 위한 집을 지었거나 대지를 구입해 놓았다. 개중에는 화실을 건립중에 있는 화백도 있다.
박교수가 고향인 안성에 화실을 차려 놓고는 동료 화백들에게 과밀한 서울을 벗어나 확 트인 공간의 전원에서 자연과 더불어 창작활동을 권유, 이처럼 호응을 얻게 된 것이다.
유기와 농장으로 널리 알려진 안성은 예부터 풍수해가 없는 안성마춤의 고장.
차령산맥이 분수령을 이룬 구릉지로 공기와 물이 맑은 외에 한적하고 경관이 좋은 전원 평야지대로 유명하다.
서울과 대전이 1시간 거리로 교통이 편리한 점도 ‘화가마을’을 이루는데 한몫한다.
지금까지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한 화백은 박서보 교수를 비롯, 김형대 이화여대 미대 교수(공도면), 이승조 중앙대 예술대교수(보개면), 석난희 홍익대 미대강사(양성면), 정영렬 중앙대 회화과교수(공도면), 이필언 동아대 회화과 전임강사(양성면), 하태진 홍익대 동양화과장(미양면), 송수남 홍익대 미대교수(미양면), 류(柳)종민 중앙대 조소과장(보개면), 유제국 중앙대 예대교수(금광면), 최기원 홍익대 조소과교수(고삼면) 등이다.
이두식 홍익대 미대전임강사와 박광진 서울교대교수는 보개면과 양성면에 각각 제2의 창작활동을 펼 화실을 짓고 있다. 또 작업실 지을 땅을 구입해 놓은 화가로는 하종현 한국미술협회이사장(홍익대 미대교수·양성면), 최명영 홍익대 서양화과장(보개면), 서승원 홍익대 미대교수(양성면), 윤미란 홍익대미대강사(공도면), 이숙자 서울교대교수(양성면), 박권수 후반기미술학원장(삼죽면), 안동숙 이화여대 미대학장(보개면), 정대유 성신여대 예대교수(보개면), 김종휘 홍익공전교수(미양면), 이 번 덕성여대미술과교수(고삼면), 최현칠 홍익대 미대교수(금광면) 등이다.
현재 24명의 안성 ‘화가마을’ 식구는 알게 모르게 화실로 쓸 대지를 물색중인 화백들이 있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참신한 창작생활을 위해 이곳에 화실을 마련하게 된 것은 우선 한적한 자연을 벗삼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교통이 편리한 외에 땅값이 싸기 때문에 넓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땅값이 올라 있지만 일찍 서두른 화백들은 평당 몇 백원에서 몇 천원 정도에 구입했다. 그래서 보통 300평에서 많게는 6000~7000평까지의 대지를 마련해 놓고 있다.
서울에서 이 만큼의 땅을 확보하기란 어림도 없다. 교단 생활에서의 수입이 이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안성에 진작 땅을 사놓고도 화실을 꾸미지 못한 화백들이 많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화백들이 지금은 생활의 터전으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노후를 대비하고 새로운 창작을 위해 안성을 찾은 것이다. 바로 작가가 굳이 서울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게 그들의 설명이다.
게다가 미술 문화의 지방 확산이란 측면도 고려했다. 비좁고 비싼 서울을 피해서 말이다.
안성에 ‘화가마을’을 이루고 있는 화백들 대부분은 그들의 안성 화실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다. 국가에 기증하거나 문화 재단으로 만들어 기념관으로 보존하겠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이 기념관이 제대로 가꿔질 때 앞으로 서양화를 배우려는 후세들이 이곳을 꼭 찾아봐야 한다는 화백들의 얘기는 꽤 설득력이 있었다.
사진/ 조성위 기자 글/ 유흥목 기자
(사진캡션)
위: 이승조 화백의 작업장내부.
토틀디자인[토탈 디자인, total design]으로 꾸며진 이 작업실은 파이프(원통)가 담긴 그림으로 꽉 차있다.
왼쪽: 개나리와 목련이 활짝 핀 박서보 화백의 화실 정원에서 이승조, 김형대, 박 화백(왼쪽부터)이 웃고 있다.
<표기 원칙>
- 한글본: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에 사용된 기호나 숫자는 현대한국어 문법에 맞추어 교정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어 표기 시 사용되는 낫표 「」는 생략, 겹낫표 『』는 의미상 사용에 따라 따옴표 ' ' 로 교정했다. 확인할 수 없는 글자는 ■로 표기한다. 변경된 명칭이나 번역자 주는 대괄호 [ ]로 표기하고 긴 내용의 경우에는 주석을 달았다.
[자료 설명]
ARCHIVE FOCUS 25호는 지난 23호에 이어 안성 한서당에 대해 다룬다. 작업실이 자리 잡은 경기도 안성은 도시와 화단의 번잡한 삶을 벗어나 있었지만, 한 편으로 박서보에게 새로운 사회문화적 환경을 제공했다. 이번 호에서는 23호의 자료였던 1982년 3월 『공간』 지 인터뷰의 후반부와 1986년 5월의 『세계』, 그리고 작업실이 존재했던 1980년부터 1996년 사이의 여러 잡지 기사들과 박서보 아카이브 자료들을 통해 안성 한서당의 사회적 중력장을 살펴본다.
『공간』 지의 조정권은 1982년 인터뷰 초반부에서 안성 작업실의 자연 환경에 대해 다룬 후 곧이어 작가에게 국내 화단의 동향과 이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이는 안성 한서당이 작업 공간일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작가의 사회적 행보와 깊은 연관이 있었음을 미술 관계자들이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미술협회(미협)의 설립 이래로 꾸준히 협회 활동에 기여해 온 박서보는 1977년에 미협 이사장직에 선출된다. 작가는 미협을 구심점으로 하여 국내외 전시 관련 행정을 조율하고 한국에 현대 미술을 뿌리내리게 할 다방면의 체제를 마련했다. 박서보의 미협 활동은 한국 현대 미술이 전국 곳곳에서 자리 잡고 국제 미술계에 진출하여 하나의 미술사적 흐름으로 인식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추상 위주 한국 현대 미술에 집중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적 지원에 대한 불만이 화단 내에서 누적되어, 1980년에는 특히 박서보를 구심점으로 하는 추상 미술 세력에 대한 견제로 작가는 미협 이사장 재선에 실패하게 된다.
조정권와의 대화에서 박서보는 “[미협 선거에] 떨어진 다음 날 바로 시골로 내려가” 안성 작업실을 만드는 데 전념했다고 언급한다. 안성 한서당 작업실 마련의 계기는 예술가로서의 오랜 숙원이었다고 짚어 말하면서도 작업실에서의 생활이 일종의 사회적 은거를 의미했음을 작가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박서보는 속세에서 벗어나 자연에 귀의하는 탈속(脫俗)을 지향하는 예술가라 할 지라도 “현실 구조 속의 한 일원이라는 걸 잊을 순 없다”고 강조한다. 80년대 초의 박서보에게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 현실은 “현대미술을 빨리 세계의 중심부에 연결시”켜야 한다는 과제와 이를 위한 국내 미술계 내 체계 마련의 필요성이었다. 박서보는 이 시기 개인 작업에 몰두하면서도 미협 밖에서 현대미술을 다루는 각종 미술제와 전시에 출품하고 국제 교류전 및 행사 기획에 참여하며 한국 현대 미술의 국제화를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작업실이 축조되고 공개된 80년에서 81년 사이 박서보가 동료들에게 받은 편지들에서는 한서당의 공사 진척도를 묻거나 완공을 축하하는 인사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서당이 완공된 이듬해인 1981년 4월, 박서보는 작업실의 오픈을 알리는 식수(植樹) 축하 기념 행사에는 미술계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여 새 작업실의 명성을 짐작해보게 한다.(사진 첫 번째와 두 번째) 박서보는 손글씨로 이 날 함께했던 이들의 이름을 사진 뒷면에 빼곡히 기록했는데, 그 목록은 비평가 오광수 그리고 작가 김구림, 최명영, 서승원과 작가들의 가족 등 50여명에 달한다. 지금과 달리 수도권에서 벗어난 노지에 가까웠던 경기도 안성은 당시 기준으로는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박한 투자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고즈넉한 자연 속에 자리한 박서보의 넓은 작업실은 동료 화가들과 제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국내외 미술계 인사들이 찾아와 방문하는 공간이 되었다.
안성 작업실의 사회적 삶을 보여주듯, 박서보 아카이브 내 한서당에서 촬영한 350여 점 가량의 사진들 가운데에는 지인들과 작가가 함께 보낸 시간을 기록한 것들이 과반수를 차지한다. 교수 생활을 하던 홍익대에서의 입지는 더욱 커져 1985년, 박서보는 홍익대학교 대학원장이라는 보직을 맡고 뒤이어 86년에는 미술대학장에 임하며 서울의 학교에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도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는 집을 1985년경 홍대 인근의 동교동에 새로이 얻는다. 하지만 작가는 이후로도 여전히 안성 작업실을 삶의 일부로 간주했으며 말년의 여생을 보낼 중요한 공간으로 여기며 이 곳에서 홍익대학교 내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르거나 별장처럼 여름마다 화가들과 방문하기도 했다.
박서보의 작업실을 다녀간 화가들이 서울이라는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자연 속 드넓은 공간의 작업실을 진지하게 숙려해보게 되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이와 관련해 1986년 5월의 『세계』 인터뷰 80년대 안성 한서당의 사회적 맥락에 흥미로운 층위를 더한다.(세 번째 자료) 『세계』는 박서보의 안성 한서당을 시작으로 24명의 화가들이 도심에서 벗어난 경기도 안성 인근에 작업실을 마련하며 일종의 “화가마을”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도한다. 기사는 이 ‘마을’ 작업실의 대표적인 예로서 박서보의 한서당과 더불어 김형대와 이승조의 공간을 담았다.
기사 속 이승조의 작업실은 박서보의 한서당과 유사하게 한쪽으로 높은 빗면의 지붕이 있는 벽돌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천장에 원목 패널을 덮고 회색빛 벽돌로 바닥을 구성한 박서보의 작업실과 달리 천장과 벽 대부분을 매끈하게 흰색으로 마감하고 바닥은 황토빛의 장판, 일부 벽에는 시멘트로 고정한 붉은 벽돌을 그대로 노출하여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김형대의 작업실 외견은 기사에 실리지 않았으나 내부 벽면과 바닥 모두를 나무로 마감하여 맨발로 걸어 다니면서 작업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 화가의 작업실은 모두 높은 층고와 자연 채광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넓은 작업실을 활용하여 제작한 100호 이상의 작품들이 여럿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세계』에 실린 한서당의 사진에서는 현재 박서보재단의 박서보컬렉션 속 이승조의 <핵> 작품 두 점 가운데 하나가 벽에 걸려 있는 것이 확인되어 이승조와 박서보의 작업실 공간 간 밀접한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
『세계』 인터뷰의 기자는 작가들이 미술관이 될 작업실의 공간적 집적을 통해 경기도 안성 일대를 일종의 국내 서양화가들의 성지(聖地)로 만들고자 계획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많은 작가들이 작업실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토지를 파는 경우가 많아졌고, 박서보의 작업실 또한 수 차례의 도난 이후 화재로 소진되어 걸어 잠그게 되면서 안성 화가마을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다.
서울과 홍대, 동교동으로 삶의 중심이 옮겨 갔지만 안성 한서당은 80년대의 박서보에게 제2의 작업실이자 은퇴 후 말년의 여생을 보낼 장소였으며, 작가의 사후에도 기념관이자 미술관으로서 영속할 공간으로 여겨졌다. 이렇듯 안성 작업실이라는 새로운 공간은 여러 층위에서 이 시기 작가의 삶을 이끌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영향은 한지 묘법의 발견일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안성 한서당에 대한 마지막 연재로 80년대 초에 탄생한 한지 묘법과 안성 작업실의 역사문화적 환경을 다루는 아카이브 자료들을 살펴본다.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
<주석>
1) 1982년 3월 『공간』 지 인터뷰, 「특집(特輯): 화가(畫家)와 아뜰리에 건축(建築): 안성 한서당」 전문은 ARCHIVE FOCUS 23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parkseobofoundation.org/story/?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34433038&t=board
2) 박서보의 70년대 미협 활동에 대해 보다 상세한 내용은 합정동 이층집 시기를 다룬 아카이브 포커스 22호의 자료, 이흥우의 『화랑』 기사를 참조. https://parkseobofoundation.org/story/?idx=127308081&bmode=view
3) 2025년 3월 5일 기점 파악된 박서보의 전시 기록에 따르면, 70년대 85개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출품했던 박서보는 80년대에 약 1.3배 늘어난 109개 전시에 참여했다. 80년대 진행된 전시 가운데 국외 전시는 30개, 국내 전시는 79개였다. 이 시기에는 《현대(現代)∙종이의 조형(造形): <한국(韓國)과 일본(日本)>》(1982), 국제종이회의 ‘83, 《한국현대미술전: 70년대 후반·하나의 양상(韓國現代美術展: 70年代後半·ひとつの様相)》(1983), 그리고 《FIAC 84》(1984) 등 굵직한 전시들이 국내외에서 진행되며 한국 현대미술을 국제 미술계에 소개했다. 국내에서는 박서보를 포함한 단색화 계열의 현대 추상 미술 작가들의 개인전이 새로이 부상한 상업화랑에서 다수 열리며 미술계와 시장에서의 입지를 공고히했다고 분석된다. 조수진, 「시장은 미술사에 어떻게 관여하는가: 현대화랑과 1970~90년대 한국미술」, 『한국근현대미술사학』(2024. 하반기), pp. 192-234 중 pp. 215-217.
4) 이 시기 한글 편지들에서 안성 한서당을 언급한 이들은 정상화, 이우환, 윤형근, 김창열, 강석영, 그리고 서승원 등이 있다. 박서보 편지모음집 내 목록: 1980년 7월 8일 정상화가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 1980년 10월 3일 이우환이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 1981년 1월 6일 이우환이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 1981년 1월 14일 정상화가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박서보 편지모음집 No.6); 1981년 2월 19일 윤형근이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 1981년 3월 22일 김창열이 박서보에게 보낸 초대장, 1981년 6월 22일 강석영이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 1981년 7월 24일 서승원이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 1981년 9월 6일 이우환이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박서보 편지모음집 No.7)
5) 이용우는 1985년 12월의 『여성동아』 기사에서 7-80년대 다양한 예술계 인물들의 재산과 작품 가치, 그리고 그 형성 요인을 실명으로 상세히 정리하여 당시 예술계의 경제 구조에 대한 흔치 않은 자료를 제공한다. 당시 예술계의 시선에서 호황기를 구가한 구상 화가들에 비해 비구상 화가들은 작품 판매를 통해 큰 재력을 모으지는 못했다. 대신 이들은 학교에 자리 잡아 교직 생활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이용우, 「[심층취재] 고소득 예술인들의 재산실태: 고급저택에 별장까지」, 『여성동아』(1985년 12월), pp. 138-146. 1985년 12월의 『여성동아』 기사와 더불어 『세계』 기사에서도 경기도 안성을 비슷하게 평가하고 있다. 1986년 5월의 유흥목, 르포/안성(安城)의 「화가(画家)마을」, 『세계』, 61호, (1986년 5월 1일), p. 20.
6) 박서보 작업실 벽에 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이승조, <핵>, 1978, 캔버스에 유채, 162x135cm, 박서보재단 소장.
7)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편집, 『2014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238 박서보』(2014), p. 220.
참고자료
「특집(特輯): 화가(畫家)와 아뜰리에 건축(建築): 안성 한서당」, 『공간(空間)』(1982년 3월) (박서보 증빙자료집 No.15)
- 박홍(朴洪), 「안성한서당(安城 寒栖堂): 박서보씨 화실(朴栖甫氏 画室)」, pp. 46-50.
- 박서보, 조정권, 「박서보씨(朴栖甫氏)와의 대화(対話): 안성 한서당(安城 寒栖堂)─그 현장(現場)을 찾아서」, pp. 51-58.
「특집(特輯): 박서보의 묘법(1967~1983)」, 『공간(空間)』(1983년 4월) (박서보 증빙자료집 No.16)
- 조정권(趙鼎權), 「박서보의 묘법(1967~1983)」, pp. 24-28.
유흥목, 르포/안성(安城)의 「화가(画家)마을」, 『세계』, 61호, (1986년 5월 1일), 사진: 조성위
조수진, 「시장은 미술사에 어떻게 관여하는가: 현대화랑과 1970~90년대 한국미술」, 『한국근현대미술사학』(2024년 하반기), pp. 192-234.
박승숙,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박서보의 삶과 예술』(인물과 사상사, 2019)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편집, 『2014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238 박서보』(2014).
[원문]
(1) 1981년 4월 5일, 안성 공도면(安城 孔道面) 대림(大林)동산 내의 작업실(作業室) 한서당(寒栖堂)에서의 기념(記念) 식수를 하기 위해 「오픈하우스」 파티날 사진들
1981. 4. 5 안성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 내 작업실 기념 식수를 마치고
좌로부터 최명영 박석원 전정수 김종일 한기주 박서보 박승범 김수익 박장년 이경수 ?
1981.4.5., 안성 공도면(安城 孔道面) 대림(大林)동산 내의 작업실(作業室) 한서당(寒栖堂)에서의 기념(記念) 식수를 하기 위해 「오픈하우스」 파티날
[뒷줄 좌(左)로부터] ⓵송형근(宋亨根) ⓶한기주(韓基柱) ⓷이승택(李升沢[澤]) ⓸이태현(李泰鉉) ⓹박홍(朴弘) ⓺김광협(金光協)(동아일보기자(東亞日報記者)) ⓻오광수(吳光洙) ⓼하태진(河泰瑨) ⓽박장년(朴庄年) ⓾최기원(崔起源)의 처(妻) ⑪송수남(宋秀南) ⑫처 윤명숙(妻 尹明淑) ⑬여운(呂運) ⑭박서보(朴栖甫) ⑮하태진(河泰瑨)의 처(妻) [신원미확인 1인] ⑯김영순(金英順) ⑰김종일(金鍾一) ⑱김진석(金鎭石) ⑲김수익(金秀益) ⑳한만영(韓萬榮) ㉑정인건(鄭寅建) ㉒이정용(李政竜) ㉓황승호(黃承虎) ㉔신일근(申一根) ㉕서승원(徐承元) ㉖최덕교(崔德敎) ㉗□ ㉘예유근(芮遺根) ㉙전정수(全正洙) ㉚이승조(李承祚) ㉛박석원(朴石元) (화살표 이후 계속) ㉜최기원(崔起源) ㉝심문섭(沈文变)
[앞줄 좌(左)로부터] ⓵이근(李堇) ⓶이주원(李濬元) ⓷박승범(朴承範) ⓸이호수(李昊洙) ⓹김구림(金丘林) ⓺김선회(金鮮会) ⓻조돈구(趙敦九) ⓼김영진(金榮鎭) ⓽신항섭(申恒变) ⓾조승래(趙承来) ⑪최명영(崔明永) ⑫문창식(文昌植) ⑬이동엽(李東熀) ⑭이상조(李商照) ⑮염태진(廉泰鎮) (경희대의료원 시대분원장)
(2) 유흥목, 「넓은 공간(空間)은 「자연 화실(画室)」」, 『세계』(1986년 5월), pp. 19-22.
(사진 캡션)
안성군 보개면에 지은 이승조(李承祚) 중앙대 예대교수의 화실. 너와집 모양으로 예술 감각이 가미돼 설계된 게 특징이다. 그앞에 이(李)교수와 박서보(朴栖甫)교수, 김형대(金炯大) 화백(오른쪽부터)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넓은 공간(空間)은 「자연 화실(画室)」
박서보(朴栖甫)씨 등 유명화가들 탈(脫) 서울 붐
벌써 7개면에 24명 안주(安住) 창작생활
(사진 캡션)
맨 위: 안성군 공도면에 있는 김형대(金炯大) 화백의 화실, 김(金)화백옆에 있는 큰 그림이 75년도 작품인 「심상75」이다.
위와 오른쪽: 50평 규모의 박서보(朴栖甫) 화백의 화실내부.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에 소재한 박서보(朴栖甫) 화백의 화실은 응접실로 쓰고 있지만 때로 작업장으로도 활용한다.
경기도 안성이 「화가마을」로 변하고 있다. 안성을 중심으로 7개면 곳곳에 국내 유명화백들의 화실이 들어서 문화예술의 기운이 움트게 됐다.
지난 80년 서양화가 박서보(朴栖甫)씨(55·홍익대 미대교수)가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에 「한서당(寒栖堂)」화실을 마련한 것을 출발로 지금까지 24명의 화가들이 작업을 위한 집을 지었거나 대지를 구입해 놓았다. 개중에는 화실을 건립중에 있는 화백도 있다.
박(朴)교수가 고향인 안성에 화실을 차려 놓고는 동료 화백들에게 과밀한 서울을 벗어나 확 트인 공간의 전원에서 자연과 더불어 창작활동을 권유, 이처럼 호응을 얻게 된 것이다.
유기와 농장으로 널리 알려진 안성은 예부터 풍수해가 없는 안성마춤의 고장.
차령산맥이 분수령을 이룬 구릉지로 공기와 물이 맑은 외에 한적하고 경관이 좋은 전원 평야지대로 유명하다.
서울과 대전이 1시간 거리로 교통이 편리한 점도 「화가마을」을 이루는데 한몫한다.
지금까지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한 화백은 박서보(朴栖甫)교수를 비롯, 김형대(金炯大) 이화여대 미대 교수(공도면), 이승조(李承祚) 중앙대 예술대교수(보개면), 석난희(石蘭姬) 홍익대 미대강사(양성면), 정영렬(鄭永烈) 중앙대 회화과교수(공도면), 이필언(李必彦) 동아대 회화과 전임강사(양성면), 하태진(河泰瑨) 홍익대 동양화과장(미양면), 송수남(宋秀南) 홍익대 미대교수(미양면), 류(柳)종민 중앙대 조소과장(보개면), 유제국(柳齊國) 중앙대 예대교수(금광면), 최기원(崔起源) 홍익대 조소과교수(고삼면) 등이다.
이두식(李斗植) 홍익대 미대전임강사와 박광진(朴洸眞) 서울교대교수는 보개면과 양성면에 각각 제2의 창작활동을 펼 화실을 짓고 있다. 또 작업실 지을 땅을 구입해 놓은 화가로는 하종현(河鍾賢)한국미술협회이사장(홍익대 미대교수·양성면), 최명영(崔明永) 홍익대 서양화과장(보개면), 서승원(徐承元) 홍익대 미대교수(양성면), 윤미란(尹美蘭) 홍익대미대강사(공도면), 이숙자(李淑子) 서울교대교수(양성면), 박권수(朴權洙) 후반기미술학원장(삼죽면), 안동숙(安東淑) 이화여대 미대학장(보개면), 정대유(鄭大有) 성신여대 예대교수(보개면), 김종휘(金鍾輝) 홍익공전교수(미양면), 이 번(李蕃) 덕성여대미술과교수(고삼면), 최현칠(崔賢七) 홍익대 미대교수(금광면) 등이다.
현재 24명의 안성 「화가마을」 식구는 알게 모르게 화실로 쓸 대지를 물색중인 화백들이 있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참신한 창작생활을 위해 이곳에 화실을 마련하게 된 것은 우선 한적한 자연을 벗삼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교통이 편리한 외에 땅값이 싸기 때문에 넓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땅값이 올라 있지만 일찍 서두른 화백들은 평당 몇 백원에서 몇 천원 정도에 구입했다. 그래서 보통 300평에서 많게는 6000~7000평까지의 대지를 마련해 놓고 있다.
서울에서 이 만큼의 땅을 확보하기란 어림도 없다. 교단생활에서의 수입이 이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안성에 진작 땅을 사놓고도 화실을 꾸미지 못한 화백들이 많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화백들이 지금은 생활의 터전으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노후를 대비하고 새로운 창작을 위해 안성을 찾은 것이다. 바로 작가가 굳이 서울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게 그들의 설명이다.
게다가 미술문화의 지방확산이란 측면도 고려했다. 비좁고 비싼 서울을 피해서 말이다.
안성에 「화가마을」을 이루고 있는 화백들 대부분은 그들의 안성 화실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다. 국가에 기증하거나 문화재단으로 만들어 기념관으로 보존하겠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이 기념관이 제대로 가꿔질 때 앞으로 서양화를 배우려는 후세들이 이곳을 꼭 찾아봐야 한다는화백들의 얘기는 꽤 설득력이 있었다.
사진/조성위(趙盛暐)기자 글/유흥목(俞興穆)기자
(사진캡션)
위: 이승조(李承祚) 화백의 작업장내부.
토틀디자인[토탈 디자인, total design]으로 꾸며진 이 작업실은 파이프(원통)가 담긴 그림으로 꽉 차있다.
왼쪽: 개나리와 목련이 활짝 핀 박서보(朴栖甫)화백의 화실정원에서 이승조(李承祚), 김형대(金炯大), 박(朴)화백(왼쪽부터)이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