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ARCHIVE FOCUS | 2호 1956. 5. 16.《4인전》팸플릿과 반국전 선언문

ARCHIVE FOCUS | 2호 1956. 5. 16.《4인전》팸플릿과 반국전 선언문

(1) 1956년 5월 16일 《4인전》 팸플릿

자료 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 No.1(1954~1961)

(2) 박서보, 「체험적한국전위미술」, 『공간』 (1966. 11. 창간호), pp. 83-87. 

자료 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 No.3(1965~1968)


[원문]


(1) 《4인전》 팸플릿

4인전


문우식

김충선

김영환

박서보



1956


장소 동방문화회관 삼층 화랑

시일 5월16일 ...... 25일

후원 홍익대학

        홍익대학동창회

문우식 서울 출생

홍대미술학부졸업

김영환 함남 출생

홍대미술학부졸업

1 나의 공방

2 K씨 상

3 풍경 (A)

4 풍경 (B)

5 카스ㅡ탱크

6 탁상과여인

7 침실의여인

8 정물

1 뎃상

2 흉형의개화

3 여인의위치

4 촌길

5 소

6 작품

김충선 함남 출생

홍대미술학부졸업

박서보 경기도 출생

홍대미술학부졸업

1 작품 (A)

2 여인

3 무제

4 소

5 작품 (B)

1 명상

2 가두 (A)

3 얼골

4 영상

5 여명

6 가두 (B)



(2) 박서보, 「체험적한국전위미술」, 『공간』 (1966. 11. 창간호), pp. 83-87.


제2차세계대전이 전쟁 도발자들의 패망으로 문을 닫았을때 세계의 도처에는 전쟁체험이 여러 형태로 지울 수 없는 중층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연합군에 의하여 조국해방을 맞기는 했으나 일제로부터 조국을 되찾은 기쁨은 곧 또하나의 민족적 시소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광복이후에 분명히 있어야 했던 통일된 민족주체의식의 형성을 보지도 못한채 우리는 피동적으로 조국을 되찾았던 것이며 때문에 동서 양대진영의 사상이식 실험장화의 비운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이 비극적인 현실은 마침내 조국의 인위적인 분단, 민족의 분열, 그리고 동족상쟁의 처절한 남북전쟁에로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1945년에서 50년,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까지의 일대혼란기에 있었던 화가들은, 하기는 회화이념이란 말이 사치스러운 대명동일수 있겠지만 그들은 회화이념을 중심한 운동체로서의 집단화가 아니라 어설픈 이데오로기의 대립 내지는 투쟁으로 이합집산하면서 일제 식민지 정책하의 유산인 선민체제하 묘사주의를 유일한 가치관으로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두 얼어있는 완고하고도 두터운 얼음을 부수는 일에 의하여 자기표현의 길을 찾아 보려는 자각을 일깨우지 못한채 사회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멸의 수렁으로 한발자욱씩 다가서고 있었을때 우리의 경우와는 달리 파리와 뉴우욕에서는 금세기를 특징짓는 현대회화의 폭발적인 개화기를 맞았던 것이다.파리가 나치스의 점령에서 겨우 해방되었던 다음 해인 45년에 나치스에게 고문당한 그리고 총살 당한 무명의 레지스땅스 얼굴이 인질이라는 이름 하에 루네・두루앙화랑에서 연작전이 개최되었을때 "어느 역사로 부터도 부채를 지지 않은 화가이며 또한 그의 그림은 고통의 상형문자의 세계"라고 앙드레 말로가 들고 나섰는가 하면, 세인의 들끓는 분노와 욕설은 그칠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 분노와 거절속에서 또하나의 차원의 전쟁체험을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며 인질은 새로운 수법의 완성위에 처음으로 심리차원을 가능케한 것이다. 이는 역사적상황의 이메지인 동시에 또한 회화상황의 이메지이기도 하다. 이 강렬한 것의 배후에는 전통의 격렬한 거부가 있는 것이다. 포트리에는 볼스, 듀뷰페와 함께 밋셀・따삐에에 의하여 또하나의 미학을 완성하는데 있어 모멘트가 되었던 것이며 전후 방황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들끓는 모험에의 길을 여는데 한 몫을 하였다.


인질의 해인 45년 파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향한 창조적인 참여가 모험의 불꽃을 튀기고 있을때 뉴우욕에서는 유럽의 문화적 식민시대가 끝장을 보기 시작 하였다. 그러니까 1948년은 미국현대회화가 폭발적인 개화의 원점에 달한 해이다. 폴록크는 1947년부터 흘리는 기법의 발견과 함께 놀라운 항해를 시작하였으며 데・쿠닝은 이때에 최초의 개전을 벌려 단번에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으며 콜키의 비극적인 자살도 이 해에 감행되었다. 미국의 현대회화가 국제적으로 신흥의 개척자집단 인정을 받기에 이른 시기도 바로 이 때인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인 움직임과는 달리 유일한 가치관처럼 절대시 되어온 묘사주의회화는 국전을 그들의 권위를 지키는 전당으로 하고 몇몇 묘사주의 회화의 법왕들이 욕구불만에 찬 새로운 세대들의 움직임을 직접, 간접으로 협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후진적이고 봉건적인 제요인속에서도 어쩔수없이 새로운 회화운동을 위한 순교적인 젊은이들의 결의는 굳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결의가 굳어진데에는 다음의 몇 가지 요인을 살피지 않을수없다.그것은 한국전쟁에 기인한다. 사춘기에 있었던 젊은이들이 한결같이 겪어야 했던 가장 비극적인 전쟁⎯잿더미로 화한 기존질서나 가치에 대한 신뢰의 상실과 이에 잇닿는 이성의 위기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에 있어 50년의 전쟁에서 비록 생존했다 손 치더라도 빈곤과 기아는 젊은이들의 모든 꿈을 앗아갔고 이들은 현실적인 생존의 포기를 강요해 당해왔던 것이다. 때문이 이들이 조상이 신봉했던 하늘도, 땅도 그리고 어떠한 사실도 믿지 않으려는 전세대적 가치관에 대한 불신은 전중 또는 전후 풍조와 어울려 고조되었으며 이러한 것들은 마침내 누적된 정신적 부채에 대한 아주 깊은 자각을 일깨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들은 죽업의 해협을 항해하듯, 또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보다는 현실의 거의 신음에 찬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었다. 이 절박한 공동운명속에서 오히려 이들 젊은이는 그들의 존재이유때문에 살아야 했던 것이 아니라 산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가장 발랄한 사춘기에 전대미문의 비극적인 전쟁에서 체험한 정신적 육체적인 심각한 고뇌 지적 고독, 그리고 피의 교훈속에 있었던 인간의 존엄성, 인간보호를 위한 날카로운 의식과 자각, 이 모든것이 젊은이들을 생에 대해 불가사의한 힘에 차있게 하였으며 또한 광명과 암흑에 대해 다시 맛 볼수 없는 신비에 찬 눈을 가꾸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쟁체험을 중심한 상황은 한편으로 기성화단이 묘사주의일변도에 있었고 아울러 기성인들의 무지한 복종의 횡포와 유아독존적인 전단속에 국전을 중심으로 하여 봉건적이며 전근대적인 요인을 철저히 부식하고 있는데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며 또한 이러한 젊은 세대들의 미칠듯한 누적된 감정이 한국동란중 UN군의 군화에 묻어 들어온 구미의 새로운 회화사조와 결부되어 어설픈 대로 1956년 5월 16일⎯25일까지 동방문화회관3층화랑에서 김충선, 문우식, 김영환, 필자에 의해 4인전이란 이름 아래 제일탄이 쏘아졌다. 이들은 선언을 통해 뭇 봉건의 아성인 국전에 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형시각 개발과 아울러 가장 자유로운 창조 활동이 보장되는 명예롭고 혁신된 새 사회를 향해 창조적으로 참여할 것을 다짐 했던 것이다.


물론 이 시기의 이들의 회화가 비록 상징적인 구상성을 띄운 것이었다손 치더라도, 혹은 이들 이전의 신사실파의 운동이 벌려졌었다는 선례가 있다손 치더라도 문제는 그 엄청난 위력을 지닌 국전에 정공법을 사용하면서 도전한데 있으며 이 4인전의 선언은 툭하면 빨갱이로 몰아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감히 반국전 집단을 형성치 못하고 있던 분산된 재야세력에게 그들의 행동을 표면화하도록 직접, 간접으로 요청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1956년을 역사가 새로운 회화운동을 잉태한 해라고 한다면 1957년은 새로운 회화운동을 분만한 해이다. 그러니까 엄격한 의미에서 한국의 전위회화운동은 그 계기를 56년에 두고 57년부터 폭발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략]


1956년을 역사가 새로운 회화운동을 잉태한 해라고 가정한다면, 오늘날의 한국전위미술은 57년에 분만되어 개척자들의 텍사스의 황야를 달리던 것 같은 시대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1950년 한국 동란과 함께 군화에 묻어온 구미의 열띈 감정과 결부되어 불모지대에 개화기가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또한 이 미학은 토착화함과 함께 국제적인 보편화 그리고 포화상태와 더불어 어떠한 의미로는 구미의 식민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이 침묵은 식민시대 혹은 개척시대에서 새로운 변경지대에의 탐구로 변하고 있으며 마치 피카소와 미로 이후의 오랜 침묵이 스페인의 지열을 뚫고 솟은 다삐에스와 그의 동배들의 집단적인 등장과 같이 화려한 침묵으로 변할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시세에 편승하는 자의 편이 아니고 독창적인 발견자만을 보호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 할것이다.



<표기원칙>

한글음독본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 한글음독으로만 표기

그 외 서양어권 고유명사: 외국어 원문 그대로 표기

- 띄어쓰기나 오타는 원문 그대로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틀린 정보(인명, 전시명 등)인 경우에는 대괄호 [ ]에 의미하는 바를 추정해 병기한다.



[자료 설명]

ARCHIVE FOCUS 2호에서 다루는 자료는 1956년 5월 16일부터 25일까지 개최된 《4인전(四人展)》의 전시 팸플릿과 1966년 11월자 『공간(空間)』 창간호(1966. 11)에 실린 박서보의 기고글 「체험적한국전위미술(體驗的韓國前衛美術)」이다.

1956년 5월 16일, 박서보는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과 함께 명동의 동방문화회관에서 《4인전》을 개최한다. 김영환과 김충선, 문우식은 박서보와 한 학년 차이의 홍대미술학부 졸업생들로,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계에 막 발을 내딛은 젊은 예술가들이 느끼고 있던 화단에 대한 답답함과 이를 타파하고자 하는 패기를 대변했다. 이들은 《4인전》을 통해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 신인 등용과 작가 명성에 핵심적 권위를 가지고 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 소위 ‘국전’에 반기를 들었다. 국전에 작품을 제출하는 대신 독립적인 단체전을 기획하고, 박서보가 작성한 ‘반국전 선언’을 전시장 입구에 써붙였다. 《4인전》과 반국전 선언은 국전이 드러낸 잘못된 관행에 맞선 상징적 사건이었으며, 이들의 저항정신과 에너지는 한묵, 이경성 등 화단 평론가들에게 신선한 인상을 남겼다.

《4인전》의 팸플릿은 전시에 참여한 4인의 정보와 출품작 목록을 담은 간략한 인쇄물이다. 반국전 선언의 원본은 아카이브에 소장되어 있지 않으나 1966년 11월 박서보가 직접 한국 전위미술의 역사를 정리하여 기고한 『공간』 창간호, 「체험적한국전위미술」에 당시 선언문 전문이 인용되어 있다. 박서보는 「체험적한국전위미술」에서 1956년의 《4인전》을 1957년을 기점으로 대거 등장한 전위미술 단체 활동의 도화선으로 보고 1957년부터 1966년까지 한국전위미술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공간』지는 1966년 건축가 고(故) 김수근에 의해 창간되어 건축, 도시, 연극 등 예술을 주제로 현재까지도 출간되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예술 잡지 중 하나이며, 박서보 아카이브의 서고에는 박서보가 구독하여 수집한 『공간』지가 다수 소장되어 있다. 박서보 증빙자료집에 보존된 것은 해당 잡지의 복사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