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ARCHIVE FOCUS⎮9호 1977년 파리와 신문지 위의 묘법

2024-02-28

ARCHIVE FOCUS⎮9호 1977년 파리와 신문지 위의 묘법


(1) 1977년 2월 8일 박서보가 윤명숙에게 보낸 편지

자료 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 No.4(1976~1977)


 (2) 박서보, <묘법 No.02-77>, 1977, 르몽드지에 연필과 유채, 33.8x50cm, 박서보재단 소장


[원문]


그리운 처에게


내가 기거하고 있는 호텔 앞집에 고갱이나 모디리아니가 살던 집이야. 오늘 환기하겠다고 창문을 활짝 열어재치고 물끄럼히 앞집을 바라다 보고 있다가 문뜩 모디리아니 생각을 했지. 모디리아니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그 소식을 드른 부인이 만삭의 몸으로 저 높은 집 창에서 투신 자살을 했구나 생각하니 사랑이란 무서운 힘을 갖이고 있구나하고 …. 

생각이 멀리멀리 꼬리를 물고 달아나는 것을 쫓다보니까 엿가래 늘어나다 보면 가운데가 툭하고 끊어지듯 끊어지더구만. 그제사 아이쿠 밥타는 냄새야 하고 뛰었지. 요지움 하두 그림이 마르질 안해 그것 말리는 사이에 틈틈히 『LE MONDE(르 몽드)』라는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신문지를 주어다가 그곳에 유화 에노구와 연필로 단숨에 제작하는 뎃상같은 것을 시도해 보는데 때로는 꽤 좋은 작품이 되더군. 신문지 위에 그리는데도 2, 3일이 지나도 끈적끈적하고 마르질 않더군. “요 죽일 놈의 날씨와 에노구야!”하고 마구 구박을 해도 날 잡아 잡수 하는지라 내가 지고 말지. 신문지 뎃상 많이 만들어 서울 갖이고 가서 뎃상전을 해볼까? 아니면 동경화랑 개전(個展)때 가네꼬화랑(金子画廊)에서 해볼까 하고 여러 모로 생각 중. 

김기린씨가 요지움 두 차례나 자기 집에 나와 김창열씨를 저녁과 점심에 초대를 했었지. 그리곤 어제는 나와 많은 이야기를 했지. 그 사람 성격 구조가 매우 복잡하더군. 내 개전(個展)을 쇼브랭화랑[Galerie Jean Chauvelin]이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돈 때문에 그런다면서 자기도 카다로그(제작비 6,000프랑 약 65만원) 및 안내상 일절을 자기부담이라고 솔직히 말하더군. 15년래 가장 작품이 팔리지 않는 지라 큼직한 화랑들이 많이 넘어지는데 쇼브랭도 한 달에 이것 저것 경비만 400여 만원식 찔러넣고 있는 지라 그래서 그 모양인가 봐. 쇼브랭이 돈은 일체(화랑비는 없고 경비만) 네가 내라 할 수 없어 슬슬 꽁무니를 뺀 모양. 쇼브랭씨도 나를 맞났을때 내 작품에 대한 칭찬은 자자하면서도 자기 사정 때문이라 했는데. 김기린씨가 그의 친구인 평론가 (내 그림을 아주 높이 평가하는 자로서 머지않아 국제적으로 꽤 큰 소리 칠만한 실력 있는 평론가임) [Pierre Dunoyer]에게 어제 찾아가서 내 개전(個展)을 쇼브랭에서 개최토록 설득해보랬더니 오늘 가보겠다고 한다면서 어제 밤에 전화를 했더군. 김창열씨 말에 의하면 그 평론가가 내 그림을 무척 평가한다면서 그 자가 쇼브랭전(展)때 서문을 자기가 쓰겠다고 했다나. 창열씨도 그 자의 눈(안목)을 평가해. 그래서 어제는 김기린씨보고 장문의 박서보론을 그 평론가가 쓰면 어떻겠느냐 했더니 자기 생각으론 내 작품 세계를 그 자가 평가하니까 쓸 것이라면서 하나 쓰는데 (우리 식으로 하자면 원고지 7, 80매에서 130~140매) 3개월이 걸린다 하더군 (자기 것도 쓰는데 4개월이 걸렸다더군. 그러니 원고료라기보다는 미안해서 1,000프랑(약 10여 만원)주었다면서 실제로 원고료로 따지면 훨신 비싸지) 그러면서 나도 쓴 다음 1,000프랑쭘의 사례는 해야할 것이라기에 하마고 했지. 그래 어제 그 평론가를 자기가 맞난 김에 내 론(論)을 쓰지 않겠느냐 했더니 박서보면 쓸만한 흥미가 있으나 간단한 글(예를 들어 내 카다로그에 쓴 정도의 것)이면 안 쓰고 본격적인 논문이면 쓰겠다 한다면서 나를 맞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한다고 뇌전. 

김기린씨가 자기 집에 그 평론가와 나를 초대하겠다고 하면서 김창열씨는 따돌리는 눈치야. 내 생각엔 자기 공을 세우려는 눈치 같애. 내가 창열씨와 접촉한 몇 군데 화랑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가 측면에서 이야기를 하겠다면서 뭣하면 내 글 쓸 평론가를 (그 자는 내 작품에 반하다 싶이 했으니까) 시켜 접촉토록 하겠다고 하드군. 김기린씨가 요지움 이렇게 나오는 것은 첫째 금년 6월에 서울 개전(個展)건, 둘째 에꼴 드 서울전(展)에 초대할 터이니 내란 점, ③째 동경에도 눈을 돌려야 할 터인데 내가 딲어 놓은 터전을 썼으면 하는 생각이 있을 것이고, ④째론 국제전 ⑤째론 어제 함께 김창열씨 집에 갔다가 2월 2일자 『한국일보』에 내가 예총부회장에 당선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나도 생각지도 안 한 것이라 놀랬고 창열씨가 너도 없는데 이쭘 되면 너의 영향력이나 한국에 있어서의 너의 위치를 과연 평가할 만 하다면서 악수를 청하는 것 등이 자극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여하튼 김기린씨 아니라 해도 내 개전(個展)은 멀지 않은 장래에 파리와 다른 나라에서도 열릴 것이라고 확신하오. 그런데 옆에서 부축하면 더 좋지. 김기린씨는 발발이처럼 화랑가를 도는지라 그 자의 입방아가 잘못 찌어지면 내겐 불리하고 말고. 그러니 잘 대해 주고 있오. 그 자도 내게 공 세우겠다고 열심히 뛸 것이야.


77. 2. 8 오전에


- 후략 -


<표기원칙>

- 한글음독본 :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그 외 서양서권의 고유명사는 외국어 원문을 그대로 표기하였다.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한다.

- 가독성의 향상을 위해 띄어쓰기, 연도, 문장부호 등을 현대 국어 맞춤법에 따라 교정하고 수기로 수정된 부분은 수정 이후 단어로만 표기한다. 외국어 표기 시 사용되는 낫표 「 」는 생략, 겹낫표 『 』는 의미상 사용에 따라 따옴표 ' ' 와 쌍따옴표 " " 로, 그리고 단어 병렬 시 사용되는 · 는 쉼표 , 로 대체했다.

- 틀린 정보(인명, 전시명 등)인 경우와 보다 정확한 지칭 대상을 아는 경우에는 대괄호 [ ] 에 의미하는 바를 추정해 병기한다.



[자료 설명]

ARCHIVE FOCUS 9호에서는 1977년 파리에서 박서보의 활동을 알 수 있는 편지와 신문지에 실험했던 연필 묘법 작품을 다룬다.

1977년 2월 8일의 글은 홍익대학교 방학 기간에 쇼블랭화랑(Galerie Jean Chauvelin)에서의 개인전 유치와 작업적인 발전을 위해 파리에 머물던 박서보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이다. 작가의 편지에 따르면 신문지 작품은 캔버스 작업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중간 중간 실험적으로 시도해본 것이다. 2014년도 구술채록연구의 인터뷰에 따르면, 1977년의 신문지 작업은 당시 박서보가 거주하던 호텔 앞 방의 일본인 학생이 보고 내다 버리던 『르 몽드』 지를 주워다 붓을 닦던 용도로 사용하다가 우연히 그 시각적 형식에 매력을 느껴 그려 본 것이다. 박서보는 1977년 파리에서 이 “뎃상”을 30여 점 제작하여 한국으로 가져왔고, 주변에 선물하기도 하였다고 인터뷰했다. 작가는 “단숨에 제작하는 뎃상”에 가까운 이 신문지 작품들을 도쿄센트럴미술관의 《한국·현대미술의 단면(韓國·現代美術の断面)》(1977) 전시에서 선보일 생각이 있었으나 실제 전시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드로잉’이나 ‘종이’를 테마로 하는 1979년 진화랑에서 열린 《종이 위의 작업(Work on Paper)》과 같은 전시에서 출품작으로 주로 확인된다.

“신문지 뎃상”은 1977년 당시에는 연필 묘법 양식을 다른 매체에 실험해본 일회성 습작에 가까웠다. 그러나 노년의 박서보는 전신을 사용해 작업해야 하는 한지 작업을 떠나 지금의 신체와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작업 방식을 고민하던 중 다시 신문지 작품에 주목하여 2022년부터 이 양식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2022년부터 제작된 이른바 ‘신문지 묘법’은 ‘컬러 연필 묘법’과 함께 박서보가 작고 전까지 매일 같이 몰두하여 작업했던 마지막 양식이 되었다. 1977년의 신문지 작품인 <묘법 No.02-77>은 2022년 이후 제작된 ‘신문지 묘법’ 작품들과 함께 올해 하반기 화이트큐브를 통해 진행될 해외 전시에서 선보이게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