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ARCHIVE FOCUS⎮11호 박서보와 김환기

2024-03-21

ARCHIVE FOCUS⎮11호 박서보와 김환기


박서보, 「[특집(特輯) / 잊을수 없는 사람] 소주잔 기울이던 학(鶴) 선생」, 『엘레강스』 (1978. 9.), pp. 101-102

자료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_No.10(1978)



누구에게나 아무리 바쁜 생활속에서도 때때로 묵은 기억을 들쳐내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비오는 날 구접스런 대포집에 앉아서, 아니면 묵은 엽서를 뒤적인다든가 한가한 저녁에 평소 아끼는 물건을 닦고 문지르면서 문득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여러가지 사연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 사연마다 기억에 떠오르는 숱한 이름중에 지금은 타계(他界)하고 안 계신 수화 김환기 선생님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 분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내게 가장 깊은 사랑과 평생의 교훈을 남겨주신 분이였다. 지금도 가끔 캠퍼스 안을 들다가 수화 선생님이 계시던 연구실 앞을 서성대면 「박군! 박군!」하시면서 급하게 쫓아나오실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나는 그 즈음(62년도) 지금 몸담고 있는 홍대를 시간강사로 나갈 때였는데 내 연구실에서 대여섯 방을 지나 선생님의 연구실이 있었다. 수화 선생님이나 나나 강의 시간 외에는 노상 연구실에서 작품 제작에 몰두했다. 수시로 선생님 방에 불려가서 틀에 캔버스를 메꾸는 일하며 때로는 붓도 빨아 드리고 차도 끓여 함께 마시며 2년간을 거의 함께 생활했다.

그러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는 늘 서로의 방을 기웃거리며 이러쿵저러쿵 작품에 대해 격의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는데, 난 선생님의 두텁게 바르는 작업에 대해 언제나 불만스러워 했었다. 당신도 캔버스 위에 덕지덕지 덧바르는 일에 싫증이 나셨는지 그 날 따라 몹시 투덜대기에 그것을 벗겨내는 방법을 일러 드리고 돌아왔는데 좀 있으려니까 "서보! 서보!" 하시며 다급한 비명 소리가 난다. 내가 무슨 일인가 하고 급히 달려가보니 방 안 가득한 연기 속에서 캔버스는 지글지글 불이 붙어 있고 선생님은 손에 화상을 입고 쩔쩔 매신다. 종이에 석유를 묻혀 그림 위에 덮고 불을 붙인 다음 나이프로 긁어 내시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었는데 방바닥에 눕혀 놓지를 않고 세워 놓은 채 시작하신 모양이라 불이 붙은 물감 찌꺼기가 손등에 떨어지면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대소동이 끝난 뒤 긁어낸 그림의 부분이 오히려 생동감을 주는 것 같아 「선생님, 이 부분 좋은데요」 했더니, 「예끼 이 사람. 사람 잡는 소리 그만하게」 하시면서도 그림이 좋다니까 환한 얼굴을 하신다. 6.25 부산 피난 시절부터 시작된 수화선생님과의 사제지간은 엄한 한편 지극히 자애롭고 흉허물 없는 어버이의 정이였다. 대쪽같이 곧은 반면 다혈질인 그 분의 성품 뒤엔 아주 섬세하고 다감하여 문학 소년 같은 정열이 숨겨져 있었다. 평생을 외골쑤로 달린 그 저력 밑바탕에는 어린 시절을 귀엽고 풍족하게 자라면서 구김살 없이 익어진 그의 낭만과 정열의 힘이 있을 것이다. 예술원 회원으로서 충분히 보장받는 안락한 노년기를 과감히 걷어차 버리고 그는 63년도 다 저물 무렵 두 번째 타국으로 떠났다. 그 대결은 얼마나 큰 용기와 인내를 요구했을 것인가.

한가롭게 달과 산을 그리고 새나 항아리를 탐미했던 선생님의 작품 세계가 거대한 현대 문명의 첨단을 걷는 미국에서 겪어내야 했던 소외감을 나는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치장스럽게 달라붙는 기억을 지워내고 이야기를 엮어가던 일을 뿌리치면서 무수한 점으로 승화되는 선생님의 만년의 작품은 그분이 얼마나 긴 고통의 시간을 뛰어넘어 훨씬 높고 맑은 경지까지 도달하고 있나를 보여준다. 수화는 한 세대를 이끌고 간 거인이셨다. 거의 십 년 동안 한 번도 고국에 돌아오지 않은 채, 그리고는 훌훌이 떠나버렸다.

「됐네 됐어. 이젠 그만 쉬러 갑세」하시며 궂이 싸구려 탁주집으로 끌고 가시던 기름때 묻은 따뜻한 손길도 영원히 없어졌다. 혼자 치달리는 고독한 길에 열심히 응원을 해 주시던 단 한분이 이젠 내 곁에 안 계시게 됐다.

74년 여름 빠리에서 선생님의 타계(他界)를 들었을 때 그렇게 가슴이 메이는 충격을 받았고 언제나 멀리 계셔도 든든히 의지되던 언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림을 느껴야 했다.

청바지를 끼어 입은 긴 다리에 헐렁한 바바리를 날개처럼 펄럭이며 교정 안팎을 성큼성큼 돌아 다니시던 크은 키의 수화 김환기. 그는 내 마음 속의 초원에 새하얀 학(鶴)의 모습을 하고 전설처럼 남아서 언제나 지켜보아 주시리라.


<표기원칙>

- 한글음독본 :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그 외 서양서권의 고유명사는 외국어 원문을 그대로 표기하였다.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한다.

- 가독성의 향상을 위해 띄어쓰기, 연도, 문장부호 등을 현대 국어 맞춤법에 따라 교정하고 수기로 수정된 부분은 수정 이후 단어로만 표기한다. 외국어 표기 시 사용되는 낫표 「」는 생략, 겹낫표 『』는 의미상 사용에 따라 따옴표 ' ' 와 쌍따옴표 " " 로, 그리고 단어 병렬 시 사용되는 · 는 쉼표 , 로 대체했다.

- 틀린 정보(인명, 전시명 등)인 경우와 보다 정확한 지칭 대상을 아는 경우에는 대괄호 [ ] 에 의미하는 바를 추정해 병기한다.



[자료 설명]

홍익대학교와 박서보의 인연을 이야기할 때 김환기의 존재를 빠뜨릴 수 없다. 박서보가 1950년 홍익대학교 문학부 미술과 동양화 전공으로 입학한 지 한 학기도 채 끝나기 전, 6.25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을 피해 홍대 미술과가 부산으로 이전하며 제대로 된 수업을 듣기 어려웠고 곧이어 국군의용대원으로 복부 기간을 거치며 1952년에야 복학할 수 있었던 박서보는 대부분의 강사진이 자리를 비운 동양화 전공에서 서양화 전공으로 변경하고 김환기, 이종우, 그리고 윤효중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4년 전 작고한 김환기(1913-1974)를 회상하는 1978년의 잡지 기고글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박서보는 김환기를 깊은 사랑과 평생의 교훈을 남겨준 은사로 생각했다. 박서보는 글에서 1962년부터 홍익대학교에서 재직하기 시작해 김환기가 뉴욕으로 새로운 예술적 도전을 하기 위해 떠날 때까지 2년여 간 서로의 연구실을 자주 드나들며 김환기와 작품에 대해 소탈하게 의견을 교환했다고 회고한다. 그림 위에 불을 붙여서 물감 두께를 수정해보라는 박서보의 제안을 김환기가 따르다가 화재가 날 뻔한 에피소드의 묘사 그리고 청바지에 헐렁한 버버리 코트 차림을 하고 키가 큰 김환기가 홍대 캠퍼스를 성큼성큼 돌아다니는 모습을 초원의 새하얀 학으로 비유한 부분에서 스승인 김환기를 향한 박서보의 애정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다. 한가로운 달과 새의 탐미에서 푸른 빛의 점묘로 화면을 채우는 방식으로 변화한 김환기의 뉴욕 시기 작업을 박서보는 세계 미술계에서 자리 잡고자 하는 한국 작가로서의 고충으로 해석하며 공감하는 듯 보인다. 무수한 푸른 점들로 화면 전면을 메우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김환기가 도달하는 “높고 맑은 경지”는 자연과 전통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수행과 같은 반복적인 선긋기로 구현되는 박서보 묘법의 작업 과정과도 비교된다.

아카이브 소장 박서보 사진모음집에서 박서보가 묘사하는 모습의 김환기 사진은 확인되지 않지만 레인코트 차림을 한 김환기의 사진을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의 도움으로 함께 게시할 수 있었다. 1963년 뉴욕에서 찍힌 사진 속 김환기는 박서보가 묘사한 것과 같은 레인코트 차림을 하고 벤치에 기대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참고문헌

- 서성록, 「홍익미술 60년─회화, 판화를 중심으로」, 『한국 현대미술사 속 홍익미술』, 2009 홍익아트·디자인 페스티벌 학술심포지엄 학술집,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2009, pp. 1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