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CUS⎮14호 박서보, 「오도당한 진실과 한국현대미술의 주체성: 파리 그랑팔레 국제미전 시비를 중심으로」
박서보, 「오도(誤導)당한 진실과 한국현대미술의 주체성: 파리 「그랑팔레국제미전」 시비(是非)를 중심으로」, 『공간』 (No. 142, 1979. 4.), pp. 44-52
자료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 No.12
70년대를 전후한 한국현대미술의 자성(自省)과 그 배경 (pp. 47-48)
근대미술의 조형이념이 붕괴됨에 따라 ‘그리는 일’ 자체가 궁지에 몰린 사례를 부정할 수는 없는 성 싶다. 뭐니 뭐니해도 현대미술의 최첨단으로 유행을 계속해 오고 있는 것도 역시 개념의 정체를 밝혀 보려는 일련의 노력들이며 따라서 비창조적이고 비개성적이며 세계를 중성적(中性的)으로 표현하고 있는 개념미술은 일상 생활 속에서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들을 소재로 쓰고 있는 것이 또한 특징으로 되어 있다. 때문에 개인적인 이미지나 개성을 내세우지 않는 ‘객관적인 미디어’인 인쇄문이나 사진, 비데오등을 동원하여 객관적인 개념만을 극대화해 가는 경향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리는 일(描)’보다는 ‘비치는 일(映)’, ‘보는 일(見)’보다는 ‘읽는 일(讀)’이 새로운 표현의 방법이나 양식으로서 돋보이고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들의 대두는 결과적으로 구체적인 ‘손’의 부재와 폐기를 의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작금에 와서 손의 자재로움의 획득에 관한 관심이 세계적인 관심으로 대두되면서 현대미술은 ‘그리는 일’을 향해 새로운 모색이 펼쳐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어느 역사학자가 역사란 시계추와 같다고 했지만, 다시 되돌아 가는 것 같이 보이는 그것은 결코 ‘어제’의 시공 속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공을 맞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종래의 의미강조시대의 유산인 이미지를 나타내는 미술이 아니고 그것을 뛰어 넘어 일정의 법칙에 따라 손의 운동과 색과의 물리적・심리적인 상호관계가 하나의 장면을 만드는 회화적 실험이라고 하는 양상을 받아 들이는데 인색해서는 안될 것 같다.
그러니까 이미지를 강조해온 종래의 ‘눈’이나 ‘손’의 주박(呪縛)에서 해방되어 눈과 손의 자재함과 그 상태・호흡・행위의 진폭 속에서 ‘그리는 일’ 자체의 리얼리티와 그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나 할까.
본다든가 그린다고 하는 행위를 최저한 인간의 신체의 움직임의 일부분으로서 인식해 보려는 자세라고나 할까. 근대미술의 조형이념이 붕괴되면서 한때 ‘눈과 손의 실권(失權)’시대를 가져왔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대적인 조형이념에 따른 ‘눈’이나 ‘손’이라고 하는 제도적인 관념이었던 것임을 알아야 할것 같다. 이 제도적 관념에 의한 ‘눈’과 ‘손’의 실권은 어제의 장으로 넘어 갔고 비록 역사의 추가 눈과 손에 관심을 표명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신체성의 회복’을 통한 ‘손의 재발견’이란 새로운 장을 펼치게 된 것이다.
70년대를 전후하여 한국 현대미술은 지난날의 구미 현대미술의 세계관 또는 사조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국제성의 공동 실천이라는 명분 아래 살아온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이 일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공동 실천기를 가리켜 구미 현대미술의 식민지 문화시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고도 정보사회 속에서 동시성이란 숙명 아래 상호 침투되어 온 현대의 생리를 송두리째 부정한다면 냉정하게 말하여 세계에는 미국 문화 이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한국만의 책임도 아니요 이 불행한 시대가 서로 나누어져야 하는 책임이랄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현대라는 시대적 생리를 지나치게 우려한다는 것도 또한 문화의 폭을 왜소하고 연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오히려 모질고 거센 시대의 급류 속에서 헤엄쳐 나오는 것이 먼 훗날을 밝고 건강하며 그리고 자신감있는 문화로 이끄는 길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고 나는 생각해 본다.
한국 현대미술의 본격적이고 집단적인 운동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역사는 불과 20년이다. 이제 겨우 스스로 자신의 신념과 이상에 따라 운명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아갈 수 있는 청년이 된 셈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보호자 없는 유년기에 이들이 먹지도 입지도 못하며 가혹한 역사 시련을 이겨내고 겨우 청년기에 접어 들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허망하기 그지 없는 자신들의 바램⎯즉, 세계 제1이 되길 바란다. 이러한 그들의 허욕이 충족되지 않았을 땐 느닷없이 전면적으로 비하하기 일쑤인 것이다. 79년 1월 29일자 경향신문에 「현대미술과 문화정책」이란 글 속에서 오광수씨는 “우리가 처해온 여건에 비긴다면 이만한 수준에 도달한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한국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점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독자적인 정신의 패턴이 하나의 뚜렷한 양태로서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비관적으로 말하는 문화의 식민지 현상론은 지나친 자기비하 내지 자학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비판에 안주하려는 자기도취가 진정한 오늘의 미술 내지 오늘의 한국미술이 지니고 있는 가능성에 고의적으로 눈을 돌리려는 처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 것에 대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것은 지속적이고 기획성 있는 현대미술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과 배려이다. 우수한 개인은 많지만 우수한 집단으로서 한국 현대미술을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시의적(時宜的)인 문화정책이 이루어져야 할 때가 아닌가 본다.”고 지적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바 있는 70년대를 전후한 한국 현대미술의 자성(自省)은 어떠한 양상을 띠고 나타났던가 살펴보자.
소박한 자연관과 이미지없는 구조적 표현 (p. 48)
자연관의 회복과 함께 이 무렵 구미에서 일기 시작한 중성구조론(中性構造論)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궁극적으론 서로 다른 기착점을 향해 가다가 우연스럽게도 시대라는 교차로에서 만난 셈이다. 만약에 그와 같은 토착적인 자연관과 중성구조론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구미선진국에 대한 우위사상(優位思想)을 말씀히 씻고 정면에서 당당히 맞설 기회를 상실했을 지도 모른다고 나는 회고한 바 있다.
한 마디로 한국 현대미술에 특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체질화 되어있는 소박한 자연관과 이미지 없는 구조적인 표현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것들이 ‘손의 재발견’을 통해 ‘그리는 일’ 자체의 리얼리티와 그 의미를 묻는 일이며 행위를 최저한의 인간의 신체의 움직임의 일부분으로서 인식해 보려는 자세라고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구미에 일고있는 최첨단이랄 수 있는 세계관이 어떤 특정한 이미지나 환상을 응고시키는 근대주의 예술관을 포기함으로써 비롯된 되도록이면 자연에 가깝게 사물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볼 수 있는 세계로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한국에서는 어떤 존재의 절대성이나 이미지를 떠난 구조성을 띤 토착적인 예술관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어떤 의미에선 구미의 현대적인 인식론과 통한다는데서 관심과 평가의 대상이 되는 지도 모른다.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관이 신선하다고 평가하는 까닭도 우리의 오랜 정신전통인 자연관의 회복을 통해 자기주장이나 개성을 앞세우지 않고, 또한 작위(作爲)를 싫어하고, 자연과 더불어 무명(無名)으로 살길 바라는 그러한 세계관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이 현대 이외의 또 다른 세계를 만들려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어찌 서구의 어떤 나라 문화 식민지 예술로 평가될 수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은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나 이해 없이 지난날의 구미의 근대주의 조형론으로 접근하려는데서 몰이해와 무지를 드러내게 된 것이라고 보며 이러한 세계관의 정체를 밝히려는 각기 서로 다른 작가들의 발상법이나 방법론이 어찌 획일적이니 천편일률적이라는 표현으로 난도질 당할 수 있단 말인가. 출품작가중 고(故) 김환기와 권영우, 윤형근, 하종현, 이우환, 심문섭 그리고 필자의 작품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러한 표현이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결같이 공통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존재의 절대성이나 이미지를 떠난 구조성이다. 이것은 결코 근대주의 조형론으론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흔히들 획일성으로 파악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표기원칙>
- 한글음독본 :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그 외 서양어권의 고유명사는 외국어 원문을 그대로 표기하였다.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하고, 수기로 수정된 부분은 수정 이후 단어로만 표기한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에 사용된 기호는 현대한국어 문법에 맞추어 교정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어 표기 시 사용되는 낫표 「」는 생략, 겹낫표 『』는 의미상 사용에 따라 따옴표 ' ' 와 쌍따옴표 " " 로, 그리고 단어 병렬 시 사용되는 · 는 쉼표 , 로 교정했다. 확인할 수 없는 글자는 ■로 표기한다. 틀린 정보(인명, 전시명 등)와 보다 정확한 명칭이 추정되는 경우에는 대괄호 [ ] 에 병기하거나 긴 내용의 경우에는 주석을 달았다.
[자료 설명]
ARCHIVE FOCUS 14호의 자료는 1979년 4월 『공간』에 실린 박서보의 글, 「오도(誤導)당한 진실과 한국현대미술의 주체성: 파리 「그랑팔레국제미전」 시비(是非)를 중심으로」이다.
1978년 11월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국가 초대전인 《제2회 국제현대미술전: 한국 9인의 작가(Secondes Rencontres Internationales D'art Contemporain: Corée 9 Peintres)》(1978. 11. 9.-1979. 1. 29.)에 선정된 작품들이 “모노크롬”1)의 “전위적인 추상화”2) 위주였다는 점을 두고 작품 선정 절차의 정당성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몇 달 간 지면 공방이 지속되었다.3) 이에 미술문화 잡지 『공간』은 1979년 4월호의 특집 주제를 ‘그랑팔레전 그 세평과 시비와 문제점’으로 정하고 기사 모음, 설문 조사와 의견, 에세이 등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토론의 장을 마련했다. 특집의 마지막을 장식한 박서보의 9페이지에 걸친 에세이에서는 행사의 대내외적 정황과 선정 주체, 현지 평가 등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특히 전시에 참여한 추상 미술 작가이자 당시 비판의 대상이 된 한국미술협회(미협)의 이사장인 박서보가 생각하는 이 시기 한국 추상 미술의 정체성이 어떠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이 글을 통해 한지 묘법을 시작하기 직전의 박서보가 자연에 대해 가진 관점을 살펴볼 수 있다.
1979년 4월의 『공간』 특집이 정리한 글들에서 살펴볼 수 있는 파리 그랑팔레 전시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파리 그랑팔레 전시 포함 근래의 국제전에서 한국 추상 미술 외에 한국의 정체성 혹은 전통으로 간주할 수 있는 다른 미술들이 대표되지 못했다는 지적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 추상 미술이 국제 미술의 흐름을 좇아가려 지나치게 서구화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 대한 경계이다.
그러나 박서보는 국제 미술계와 교류하며 한국 추상 미술이 성장한 과정을 일방적인 “식민”화가 아닌 “국제성의 공동 실천”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국제 미술을 의식하며 그 속에 자신의 위치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던 한국 추상 미술의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모질고 거센 시대의 급류 속에서 헤엄쳐 나오는” 과정을 통해 “먼 훗날을 밝고 건강하며 그리고 자신감있는 문화로 이끄는 길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한국 작가들을 국제 미술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역사적 주체로 의식하는 박서보의 적극적인 태도가 인상적이다.
박서보가 보기에 한국 추상 미술은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자성(自省)” 과정에서 회복한 “우리의 오랜 정신전통인 자연관”을 기반으로 “어떤 존재의 절대성이나 이미지를 떠난 구조성”에 관심을 둔다. 중성구조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전반 국내 미술 비평에서 한국의 추상 미술을 설명하며 종종 등장하는 용어로, 이 시기 박서보는 탈-이미지, 그리고 탈-개인정체성과 연관된 중성성 혹은 중성구조라는 용어를 사용해 연필 묘법의 시각적 양식을 설명하기도 했다.4) 한국 추상 미술이 서구 미술과 구분되는 중요한 지점은 작품의 중성성이 “체질화된 소박한 자연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한국 추상 미술이 고찰하는 세상은 인간과 대립하는 세계(world)나 실재하는 현실(reality)보다는 자연(nature) 혹은 우주(cosmos)이며, 한국 추상 미술의 구조성은 단순히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전통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무명성”, 즉, 자연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를 통해 발생한다.5)
이러한 중성성, 구조, 혹은 중성구조를 통해 한국 추상 미술은 “어떤 특정한 이미지나 환상을 응고시키는 근대주의 예술관을 포기”하고 70년대 전후 구미에서 일기 시작한 “중성구조론(中性構造論)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 추상 미술은 “비창조적이며 비개성적”인 미니멀리즘이나 개념 미술과 같이 “세계를 중성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었으며 이 시기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부상했던 물질과 매체에 대해 탐구한다는 점에서 국제 미술의 최신 담론에 참여할 수 있었다.6) 그러나 한 편으로 이러한 관심사들이 근래의 서구 미술에서 기피하는 “그리는 행위”를 핵심으로 하는 “손의 재발견”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전통적 자연관을 통해 도달한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 추상 미술은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고유의 미술로서 새로운 위치를 점한다고 박서보는 설명하고 있다.
1978년의 파리 그랑팔레 전시 논쟁은 한국 미술계 전반이 스스로의 작업 방식과 국제 미술계에서의 역할을 고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촉발된 국제성과 전통성, 그리고 우리의 자연관에 대한 고민은 이후 박서보가 안성으로 작업실을 옮기고 고심하게 된 새로운 작업 양식의 밑거름이 되었다. 1982년의 한지 묘법 작업에서 박서보는 캔버스와 연필을 활용했던 연필 묘법에서 나아가 매체와 물질 그 자체에서 자연스러운 것, 그리고 전통적인 것에 대한 고민을 심화하기 시작한다.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
<주석>
1) Le Figaro(1979. 1. 16.); 김성우, 「파리서 주목(注目)못끈 한국화가(画家)들」, 『한국일보』(1979. 2. 2.)에서 재인용.
2) 신용석, 「서구(西欧) 흉내만 낸 「한국출품작(韓國出品作)」」, 『조선일보』(1978. 12. 28.).
3) 12월 파리 주재 특파원 신용석의 신문 기사를 통해 파리 그랑팔레 전시의 한국 작품들에 대한 현지 논평이 부정적이라는 보도가 전해지면서 논쟁이 촉발되어,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같은 신문과 『뿌리깊은 나무』, 『창』 등의 문화 잡지 지면을 통해 기자, 비평가, 작가들 간에 3개월 여에 걸친 공방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1978년 파리 그랑팔레 전시 논쟁’으로 불리게 된다.
4) 박서보 아카이브에 소장된 자료 중 중성구조 혹은 중성성의 개념을 논의하는 주요 문헌은 다음과 같다. 「[특집(特輯): 신진(新進)과 중견(中堅)의 대화(對話)](Special Section: Dialogues between Rising Artists and Artists of Influence) 「중성구조(中性構造)」와 「논리(論理)의 종말(終末)」(A Neutral Stru[c]ture and the End of Logic): 「만남의 현상학」에서 국제주의에 이르기까지」, 『공간』(1978. 2.), pp. 8-12; 「팝아트이후의 구상(具象)과 비구상(非具象): 허(虛)의 상태로 지향, 동양(東洋)정신과 합류(合流)」 「현대미술 어디까지 왔나: 중성화(中性化)와 함께 소박한 자연(自然)에 복귀」, 『국제신문』 (1978. 8. 25.).
5) 박서보는 2014년의 구술채록문에서 “중성적”이라는 표현 대신 “무명성화”라는 표현으로 용어를 수정했는데, 이를 통해 박서보가 70년대 후반 전후로 사용하던 중성성이라는 개념이 무명성에 상응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편집, 『2014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238 박서보』(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5), p. 173; 이필은 한국 추상 미술에서 무위의 개념을 정리하며 중성구조를 자연의 흐름에의 순응하는 물아일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해석했다. 이필, 「1970년대 한국추상회화에 있어서 작위(作爲)와 무위(無爲)의 역설: 이일의 ‘범자연주의’와 박서보의 ‘무위론’을 중심으로」,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제54집(2021), pp. 233-252.
6) 한국의 추상 미술은 앵포르멜 및 추상표현주의에서 미니멀리즘, 그리고 개념미술로 이어지는 어떠한 미술사적 사조의 단계에 정확히 상응하기보다는 그 전반의 과정에서 중요하게 부상했던 물질과 매체에 대한 관심을 공유한다. 그러나 박서보가 강조하는 ‘물성’ 개념은 자연 속의 물질 혹은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도록 만드)는 물질이라는 측면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서양미술사에서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물질성(materiality)과는 구분해서 사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ARCHIVE FOCUS⎮14호 박서보, 「오도당한 진실과 한국현대미술의 주체성: 파리 그랑팔레 국제미전 시비를 중심으로」
박서보, 「오도(誤導)당한 진실과 한국현대미술의 주체성: 파리 「그랑팔레국제미전」 시비(是非)를 중심으로」, 『공간』 (No. 142, 1979. 4.), pp. 44-52
자료출처: 박서보 증빙자료집 No.12
70년대를 전후한 한국현대미술의 자성(自省)과 그 배경 (pp. 47-48)
근대미술의 조형이념이 붕괴됨에 따라 ‘그리는 일’ 자체가 궁지에 몰린 사례를 부정할 수는 없는 성 싶다. 뭐니 뭐니해도 현대미술의 최첨단으로 유행을 계속해 오고 있는 것도 역시 개념의 정체를 밝혀 보려는 일련의 노력들이며 따라서 비창조적이고 비개성적이며 세계를 중성적(中性的)으로 표현하고 있는 개념미술은 일상 생활 속에서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들을 소재로 쓰고 있는 것이 또한 특징으로 되어 있다. 때문에 개인적인 이미지나 개성을 내세우지 않는 ‘객관적인 미디어’인 인쇄문이나 사진, 비데오등을 동원하여 객관적인 개념만을 극대화해 가는 경향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리는 일(描)’보다는 ‘비치는 일(映)’, ‘보는 일(見)’보다는 ‘읽는 일(讀)’이 새로운 표현의 방법이나 양식으로서 돋보이고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들의 대두는 결과적으로 구체적인 ‘손’의 부재와 폐기를 의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작금에 와서 손의 자재로움의 획득에 관한 관심이 세계적인 관심으로 대두되면서 현대미술은 ‘그리는 일’을 향해 새로운 모색이 펼쳐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어느 역사학자가 역사란 시계추와 같다고 했지만, 다시 되돌아 가는 것 같이 보이는 그것은 결코 ‘어제’의 시공 속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공을 맞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종래의 의미강조시대의 유산인 이미지를 나타내는 미술이 아니고 그것을 뛰어 넘어 일정의 법칙에 따라 손의 운동과 색과의 물리적・심리적인 상호관계가 하나의 장면을 만드는 회화적 실험이라고 하는 양상을 받아 들이는데 인색해서는 안될 것 같다.
그러니까 이미지를 강조해온 종래의 ‘눈’이나 ‘손’의 주박(呪縛)에서 해방되어 눈과 손의 자재함과 그 상태・호흡・행위의 진폭 속에서 ‘그리는 일’ 자체의 리얼리티와 그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나 할까.
본다든가 그린다고 하는 행위를 최저한 인간의 신체의 움직임의 일부분으로서 인식해 보려는 자세라고나 할까. 근대미술의 조형이념이 붕괴되면서 한때 ‘눈과 손의 실권(失權)’시대를 가져왔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대적인 조형이념에 따른 ‘눈’이나 ‘손’이라고 하는 제도적인 관념이었던 것임을 알아야 할것 같다. 이 제도적 관념에 의한 ‘눈’과 ‘손’의 실권은 어제의 장으로 넘어 갔고 비록 역사의 추가 눈과 손에 관심을 표명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신체성의 회복’을 통한 ‘손의 재발견’이란 새로운 장을 펼치게 된 것이다.
70년대를 전후하여 한국 현대미술은 지난날의 구미 현대미술의 세계관 또는 사조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국제성의 공동 실천이라는 명분 아래 살아온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이 일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공동 실천기를 가리켜 구미 현대미술의 식민지 문화시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고도 정보사회 속에서 동시성이란 숙명 아래 상호 침투되어 온 현대의 생리를 송두리째 부정한다면 냉정하게 말하여 세계에는 미국 문화 이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한국만의 책임도 아니요 이 불행한 시대가 서로 나누어져야 하는 책임이랄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현대라는 시대적 생리를 지나치게 우려한다는 것도 또한 문화의 폭을 왜소하고 연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오히려 모질고 거센 시대의 급류 속에서 헤엄쳐 나오는 것이 먼 훗날을 밝고 건강하며 그리고 자신감있는 문화로 이끄는 길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고 나는 생각해 본다.
한국 현대미술의 본격적이고 집단적인 운동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역사는 불과 20년이다. 이제 겨우 스스로 자신의 신념과 이상에 따라 운명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아갈 수 있는 청년이 된 셈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보호자 없는 유년기에 이들이 먹지도 입지도 못하며 가혹한 역사 시련을 이겨내고 겨우 청년기에 접어 들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허망하기 그지 없는 자신들의 바램⎯즉, 세계 제1이 되길 바란다. 이러한 그들의 허욕이 충족되지 않았을 땐 느닷없이 전면적으로 비하하기 일쑤인 것이다. 79년 1월 29일자 경향신문에 「현대미술과 문화정책」이란 글 속에서 오광수씨는 “우리가 처해온 여건에 비긴다면 이만한 수준에 도달한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한국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점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독자적인 정신의 패턴이 하나의 뚜렷한 양태로서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비관적으로 말하는 문화의 식민지 현상론은 지나친 자기비하 내지 자학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비판에 안주하려는 자기도취가 진정한 오늘의 미술 내지 오늘의 한국미술이 지니고 있는 가능성에 고의적으로 눈을 돌리려는 처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 것에 대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것은 지속적이고 기획성 있는 현대미술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과 배려이다. 우수한 개인은 많지만 우수한 집단으로서 한국 현대미술을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시의적(時宜的)인 문화정책이 이루어져야 할 때가 아닌가 본다.”고 지적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바 있는 70년대를 전후한 한국 현대미술의 자성(自省)은 어떠한 양상을 띠고 나타났던가 살펴보자.
소박한 자연관과 이미지없는 구조적 표현 (p. 48)
자연관의 회복과 함께 이 무렵 구미에서 일기 시작한 중성구조론(中性構造論)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궁극적으론 서로 다른 기착점을 향해 가다가 우연스럽게도 시대라는 교차로에서 만난 셈이다. 만약에 그와 같은 토착적인 자연관과 중성구조론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구미선진국에 대한 우위사상(優位思想)을 말씀히 씻고 정면에서 당당히 맞설 기회를 상실했을 지도 모른다고 나는 회고한 바 있다.
한 마디로 한국 현대미술에 특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체질화 되어있는 소박한 자연관과 이미지 없는 구조적인 표현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것들이 ‘손의 재발견’을 통해 ‘그리는 일’ 자체의 리얼리티와 그 의미를 묻는 일이며 행위를 최저한의 인간의 신체의 움직임의 일부분으로서 인식해 보려는 자세라고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구미에 일고있는 최첨단이랄 수 있는 세계관이 어떤 특정한 이미지나 환상을 응고시키는 근대주의 예술관을 포기함으로써 비롯된 되도록이면 자연에 가깝게 사물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볼 수 있는 세계로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한국에서는 어떤 존재의 절대성이나 이미지를 떠난 구조성을 띤 토착적인 예술관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어떤 의미에선 구미의 현대적인 인식론과 통한다는데서 관심과 평가의 대상이 되는 지도 모른다.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관이 신선하다고 평가하는 까닭도 우리의 오랜 정신전통인 자연관의 회복을 통해 자기주장이나 개성을 앞세우지 않고, 또한 작위(作爲)를 싫어하고, 자연과 더불어 무명(無名)으로 살길 바라는 그러한 세계관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이 현대 이외의 또 다른 세계를 만들려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어찌 서구의 어떤 나라 문화 식민지 예술로 평가될 수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은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나 이해 없이 지난날의 구미의 근대주의 조형론으로 접근하려는데서 몰이해와 무지를 드러내게 된 것이라고 보며 이러한 세계관의 정체를 밝히려는 각기 서로 다른 작가들의 발상법이나 방법론이 어찌 획일적이니 천편일률적이라는 표현으로 난도질 당할 수 있단 말인가. 출품작가중 고(故) 김환기와 권영우, 윤형근, 하종현, 이우환, 심문섭 그리고 필자의 작품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러한 표현이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결같이 공통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존재의 절대성이나 이미지를 떠난 구조성이다. 이것은 결코 근대주의 조형론으론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흔히들 획일성으로 파악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표기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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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설명]
ARCHIVE FOCUS 14호의 자료는 1979년 4월 『공간』에 실린 박서보의 글, 「오도(誤導)당한 진실과 한국현대미술의 주체성: 파리 「그랑팔레국제미전」 시비(是非)를 중심으로」이다.
1978년 11월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국가 초대전인 《제2회 국제현대미술전: 한국 9인의 작가(Secondes Rencontres Internationales D'art Contemporain: Corée 9 Peintres)》(1978. 11. 9.-1979. 1. 29.)에 선정된 작품들이 “모노크롬”1)의 “전위적인 추상화”2) 위주였다는 점을 두고 작품 선정 절차의 정당성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몇 달 간 지면 공방이 지속되었다.3) 이에 미술문화 잡지 『공간』은 1979년 4월호의 특집 주제를 ‘그랑팔레전 그 세평과 시비와 문제점’으로 정하고 기사 모음, 설문 조사와 의견, 에세이 등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토론의 장을 마련했다. 특집의 마지막을 장식한 박서보의 9페이지에 걸친 에세이에서는 행사의 대내외적 정황과 선정 주체, 현지 평가 등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특히 전시에 참여한 추상 미술 작가이자 당시 비판의 대상이 된 한국미술협회(미협)의 이사장인 박서보가 생각하는 이 시기 한국 추상 미술의 정체성이 어떠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이 글을 통해 한지 묘법을 시작하기 직전의 박서보가 자연에 대해 가진 관점을 살펴볼 수 있다.
1979년 4월의 『공간』 특집이 정리한 글들에서 살펴볼 수 있는 파리 그랑팔레 전시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파리 그랑팔레 전시 포함 근래의 국제전에서 한국 추상 미술 외에 한국의 정체성 혹은 전통으로 간주할 수 있는 다른 미술들이 대표되지 못했다는 지적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 추상 미술이 국제 미술의 흐름을 좇아가려 지나치게 서구화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 대한 경계이다.
그러나 박서보는 국제 미술계와 교류하며 한국 추상 미술이 성장한 과정을 일방적인 “식민”화가 아닌 “국제성의 공동 실천”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국제 미술을 의식하며 그 속에 자신의 위치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던 한국 추상 미술의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모질고 거센 시대의 급류 속에서 헤엄쳐 나오는” 과정을 통해 “먼 훗날을 밝고 건강하며 그리고 자신감있는 문화로 이끄는 길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한국 작가들을 국제 미술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역사적 주체로 의식하는 박서보의 적극적인 태도가 인상적이다.
박서보가 보기에 한국 추상 미술은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자성(自省)” 과정에서 회복한 “우리의 오랜 정신전통인 자연관”을 기반으로 “어떤 존재의 절대성이나 이미지를 떠난 구조성”에 관심을 둔다. 중성구조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전반 국내 미술 비평에서 한국의 추상 미술을 설명하며 종종 등장하는 용어로, 이 시기 박서보는 탈-이미지, 그리고 탈-개인정체성과 연관된 중성성 혹은 중성구조라는 용어를 사용해 연필 묘법의 시각적 양식을 설명하기도 했다.4) 한국 추상 미술이 서구 미술과 구분되는 중요한 지점은 작품의 중성성이 “체질화된 소박한 자연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한국 추상 미술이 고찰하는 세상은 인간과 대립하는 세계(world)나 실재하는 현실(reality)보다는 자연(nature) 혹은 우주(cosmos)이며, 한국 추상 미술의 구조성은 단순히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전통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무명성”, 즉, 자연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를 통해 발생한다.5)
이러한 중성성, 구조, 혹은 중성구조를 통해 한국 추상 미술은 “어떤 특정한 이미지나 환상을 응고시키는 근대주의 예술관을 포기”하고 70년대 전후 구미에서 일기 시작한 “중성구조론(中性構造論)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 추상 미술은 “비창조적이며 비개성적”인 미니멀리즘이나 개념 미술과 같이 “세계를 중성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었으며 이 시기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부상했던 물질과 매체에 대해 탐구한다는 점에서 국제 미술의 최신 담론에 참여할 수 있었다.6) 그러나 한 편으로 이러한 관심사들이 근래의 서구 미술에서 기피하는 “그리는 행위”를 핵심으로 하는 “손의 재발견”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전통적 자연관을 통해 도달한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 추상 미술은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고유의 미술로서 새로운 위치를 점한다고 박서보는 설명하고 있다.
1978년의 파리 그랑팔레 전시 논쟁은 한국 미술계 전반이 스스로의 작업 방식과 국제 미술계에서의 역할을 고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촉발된 국제성과 전통성, 그리고 우리의 자연관에 대한 고민은 이후 박서보가 안성으로 작업실을 옮기고 고심하게 된 새로운 작업 양식의 밑거름이 되었다. 1982년의 한지 묘법 작업에서 박서보는 캔버스와 연필을 활용했던 연필 묘법에서 나아가 매체와 물질 그 자체에서 자연스러운 것, 그리고 전통적인 것에 대한 고민을 심화하기 시작한다.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
<주석>
1) Le Figaro(1979. 1. 16.); 김성우, 「파리서 주목(注目)못끈 한국화가(画家)들」, 『한국일보』(1979. 2. 2.)에서 재인용.
2) 신용석, 「서구(西欧) 흉내만 낸 「한국출품작(韓國出品作)」」, 『조선일보』(1978. 12. 28.).
3) 12월 파리 주재 특파원 신용석의 신문 기사를 통해 파리 그랑팔레 전시의 한국 작품들에 대한 현지 논평이 부정적이라는 보도가 전해지면서 논쟁이 촉발되어,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같은 신문과 『뿌리깊은 나무』, 『창』 등의 문화 잡지 지면을 통해 기자, 비평가, 작가들 간에 3개월 여에 걸친 공방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1978년 파리 그랑팔레 전시 논쟁’으로 불리게 된다.
4) 박서보 아카이브에 소장된 자료 중 중성구조 혹은 중성성의 개념을 논의하는 주요 문헌은 다음과 같다. 「[특집(特輯): 신진(新進)과 중견(中堅)의 대화(對話)](Special Section: Dialogues between Rising Artists and Artists of Influence) 「중성구조(中性構造)」와 「논리(論理)의 종말(終末)」(A Neutral Stru[c]ture and the End of Logic): 「만남의 현상학」에서 국제주의에 이르기까지」, 『공간』(1978. 2.), pp. 8-12; 「팝아트이후의 구상(具象)과 비구상(非具象): 허(虛)의 상태로 지향, 동양(東洋)정신과 합류(合流)」 「현대미술 어디까지 왔나: 중성화(中性化)와 함께 소박한 자연(自然)에 복귀」, 『국제신문』 (1978. 8. 25.).
5) 박서보는 2014년의 구술채록문에서 “중성적”이라는 표현 대신 “무명성화”라는 표현으로 용어를 수정했는데, 이를 통해 박서보가 70년대 후반 전후로 사용하던 중성성이라는 개념이 무명성에 상응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편집, 『2014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238 박서보』(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5), p. 173; 이필은 한국 추상 미술에서 무위의 개념을 정리하며 중성구조를 자연의 흐름에의 순응하는 물아일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해석했다. 이필, 「1970년대 한국추상회화에 있어서 작위(作爲)와 무위(無爲)의 역설: 이일의 ‘범자연주의’와 박서보의 ‘무위론’을 중심으로」,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제54집(2021), pp. 233-252.
6) 한국의 추상 미술은 앵포르멜 및 추상표현주의에서 미니멀리즘, 그리고 개념미술로 이어지는 어떠한 미술사적 사조의 단계에 정확히 상응하기보다는 그 전반의 과정에서 중요하게 부상했던 물질과 매체에 대한 관심을 공유한다. 그러나 박서보가 강조하는 ‘물성’ 개념은 자연 속의 물질 혹은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도록 만드)는 물질이라는 측면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서양미술사에서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물질성(materiality)과는 구분해서 사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