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CUS⎮18호 박서보의 작업실(1) 이봉상회화연구소
(1) 1956년, 안국동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2) 1956년경 안국동로타리 근처의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3) 1956년, 안국동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이양노와 함께 (4) 1958년1) 안국동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 (5) 1958년 가을, 서울회화연구소 연구생들과 정능으로 MT를 가다. (6) 1958년 가을 안국동연구소생들과 우이동으로 엠티갔을때 (7) 「예술의 온상 회화연구소」, 『연합신문』(1957. 6. 17.) 자료 출처: 박서보 사진모음집 No.1, 박서보 증빙자료집 No.1 |
[6번 사진 뒷면 손글씨]
1958년 가을, 서울회화연구소(전. 이봉상회화연구소2)) 연구생들과 정능으로 MT를 가다.
앞줄로부터 윤명로, 고. 손찬성, 한 사람 건너 이성미
둘째줄 좌로부터 김종학, 이만익
셋째줄 좌로부터 최관도, 그의 뒤쪽의 모자 쓴 사람이 지도위원인 박서보이다.
「예술의 온상(溫床) 회화연구소」, 『연합신문』(1957년 6월 17일)
테두리를 벗어난 연구
오직 생활 속에서 창작
‘안국동 로타리’를 굽어보는 ‘관현동’ 구석진 1각, 표식도 없는 ‘이봉상회화연구소’에는 창너머로 ‘캼바스’와 또 벽에 수많이 걸린 유화(油画)들이 갸웃거린다. 석고 내음이 강렬하게 풍기는 화실에서는 기초반 연구생들이 석고로 만들어진 각종의 마스크나 상체(上体)를 대상으로 뎃상에 여념 없어 보이고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시작하기로 되어있으나 “공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작가 개인의 화실과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항상 개방하고 있다”는 말 그대로 연구생들은 자기 형편을 따라 수시로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단지 6시부터 8시 사이에는 석고 아닌 인체(나체)를 모델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조건이 덧붙여져 기초반의 입회금이 2천환인데 비하여 전문반이라 하여 월간 3천환의 회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현재의 회원은 남자 14명, 여자 16명의 30명이라 한다.
오늘날 모든 작가들이 짊어지고 있는 근대(近代)라든가 혹은 시대에 대한 콤푸스[콤플렉스]에 조금도 물들지 않은 소위 아마추어들, ■ [뒷부분 자료 없음]
<표기 원칙>
- 한글음독본: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에 사용된 기호나 숫자는 현대한국어 문법에 맞추어 교정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어 표기 시 사용되는 낫표 「」는 생략, 겹낫표 『』는 의미상 사용에 따라 따옴표 ' ' 로 교정했다. 확인할 수 없는 글자는 ■로 표기한다. 변경된 명칭이나 번역자 주는 대괄호 [ ] 로 표기하고 긴 내용의 경우에는 주석을 달았다.
[자료 설명]
ARCHIVE FOCUS 7월과 8월의 주제는 박서보의 작업실이다. 예술가의 작업실은 작품이 탄생하는 산실이자 작가 개인의 삶의 궤적을 연결하는 교차점이라는 점에서 작품과 예술관을 이해하는 또 다른 경로를 제공한다. 이번 호에서 다루어질 자료들은 박서보의 첫 번째 작업실인 이봉상회화연구소의 사진들과 관련 기사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직장이 확보되지 않아 작업실을 마련하기 여의치 않았던 박서보에게 이봉상회화연구소는 작업실이자 동시대 미술계 인물들과 생각을 교류하는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1960년 3월 3일의 『동아일보』 기사는 이봉상회화연구소가 “이봉상, 박서보, 김창열, 박석호 씨 등 화가들이 심심찮게 ‘크로키’회를 연 것에서 비롯된다”고 서술하고 있다.3) 박서보는 회고록에서 이봉상회화연구소가 55년 가을부터 개관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는 회화연구소가 공식 개관하기 이전부터 박서보를 비롯한 작가들이 모이고 작업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4) 18호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진은 작가의 자필로 1956년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찍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봉상회화연구소가 정식으로 개관한 1957년 2월보다 1년 가량 이른 시기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진은 박서보의 복장으로 보아 동일한 날 찍힌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에서는 등받이가 있는 상자와 같은 형태의 좌대에 앉아 포즈를 취한 인물들의 방향으로 이젤들이 놓여 있다. 이젤 위 캔버스들에 그려진 것은 흰 천을 머리에서 늘어뜨린 여성의 ‘크로키’이다.
두 번째 사진에서 박서보와 함께 찍힌 인물들의 신상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으나 박서보의 왼쪽에 앉은 인물이 동덕재단 설립자의 아들로 숙대 교수였던 국문학자 이능우일 가능성이 제기된다.5) 홍익대학교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던 박서보는 1955년, 홍익대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은 이봉상에게서 이능우의 개인 미술 교습 일을 소개 받았다.6) 교습은 이능우가 제공한 당시 안국동 동덕빌딩의 동덕여대 별관 2층(현재 관훈동 동덕아트갤러리)에서 진행되었는데, 이능우를 지도하며 작업에 적합한 채광 좋고 널찍한 공간을 계속 활용하고 싶어진 박서보는 이봉상에게 건의해 그 공간에 이봉상의 이름을 딴 회화연구실을 만들자고 제안했다.7)
이봉상회화연구소는 1957년 2월 1일 입시생부터 미술대학 학생들, 그리고 미술을 취미로 했던 이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미술 인구에게 교육을 제공하는 사설 미술 교육 기관으로 정식 개소했다.8) 박서보 증빙자료집에 보관된 1957년 6월 17일의 『연합신문』 기사(7번째 이미지)9)에 따르면, 작업 공간이 필요한 경우 화실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된 운영과 기존 미술 교육관과 방식에 매몰되지 않은 “테두리를 벗어난 연구”의 시도가 이봉상회화연구소의 주된 지향점이었다.10)
기사에 실린 이봉상회화연구소의 사진에서는 저화질이지만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내려다보며 앉아 있는 모델을 중심으로 연구생들이 이젤을 두고 둘러 앉아 데생을 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연구생들의 뒤쪽으로 빛이 잘 들어오는 커다란 창이 있는 벽이 보이며 모델 옆쪽의 벽 곳곳에 습작들이 걸려 있는데, 창문의 배치를 비교했을 때 1956년의 사진과 반대 방향의 벽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공간 중 한 방은 『연합신문』 기사 사진에서와 같이 학생들을 위한 수업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남은 공간은 박서보 외에도 연구생들과 작가들의 작업실로 활용되었는데, 박서보의 회고에 따르면 복도식의 공간을 다시 세 개로 나누어 하나는 이봉상이 개인 회의실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김서봉의 작업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자신의 작업실로 사용했다.11)
18호의 세 번째부터 여섯 번째 사진들에서는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박서보와 교류한 인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12) 56년 혹은 58년으로 추정되는 사진에서 베레모를 쓰고 편안한 반소매 셔츠 차림의 박서보는 접이식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렌즈를 응시한다. 한 사진에서는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강의를 했던 이양노가 중절모에 양복 차림으로 웃는 모습으로 박서보와 함께 담겨 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사진은 1958년 연구생들과 강사들이 함께 떠난 엠티에서의 사진이다.13) 사진 속에 등장하는 연구생들 중 일부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에는 한국 현대 추상회화의 주요한 인물들인 윤명로, 김종학, 손찬성, 이만익, 최관도 등이 확인되며 이 외에도 미술사학자인 이성미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문 기사들에서 박서보와 함께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활동한 것으로 언급된 강사진들에는 이봉상, 안상철, 김창열, 전상수, 장성순, 이명의, 김서봉, 이양노, 방근택, 장리석, 박항섭 등이 있었다.14) 홍익대학교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출신의 작가와 비평가들로 이루어진 강사진와 학생의 구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봉상회화연구소는 신진 작가과 예비 미술가들, 기자, 시인, 비평가 등 다양한 예술문화계 인사들의 교류가 이루어진 장소로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957년 6월 17일의 『연합신문』의 이봉상회화연구소 소개의 말미에서는 연구소가 새로운 미술 교육 방식을 통해 회원들이 “시대에 대한 콤플렉스”에 물들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서술하고 있다.15) 이 문구는 1958년 2월 1일의 『연합신문』 기사에서도 반복되는데, 박서보를 비롯한 강사진과 학생들은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의 교육과 연구를 시대와 이에 대해 한국 미술계가 가지고 있던 일종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파악했으며 이 같은 관점의 연장선에서 기존 아카데미즘 회화의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실험적인 현대 회화를 고찰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서보는 이 시기 이봉상회화연구소의 작업실에서 다양한 안료를 직접 만들어 활용했으며 1000호 크기에 달하는 대작 <회화 No.7>와 같은 앵포르멜 계열의 작업을 그리고 다시 부수는 등 파격적인 실험을 진행했다.16) 이봉상회화연구소에 모인 강사진과 김종학, 윤명로, 김봉태, 방혜자, 이만익, 김재임 등의 연구생들은 학교나 기존 화단에서 보기 힘들었던 이러한 작업들을 연구하며 두터운 마티에르와 붓질의 동세, 안료의 질감이 두드러지는 실험적인 현대 회화를 선보였고, 이에 따라 ‘안료파’ 혹은 ‘안국동파’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봉상회화연구소에 드나든 많은 작가들은 《현대전》으로 대표되는 현대미술가협회와 60년미술가협회의 주요 작가들로 참여하며 1960년대 소위 ‘한국 앵포르멜 미술’의 흐름을 주도한 주요한 인물들이 되었다.17)
<주석>
1) 박서보의 복장과 사진 속 기물의 배치, 그리고 사진의 구도로 비교했을 때 2번 사진과 동일 시기에 찍힌 것으로 추정되며, 이 경우 1956년의 사진이다.
2) 이봉상회화연구소는 이봉상미술연구소로도 지칭된다. 60년에 신설동으로 이전하며 바꾼 명칭은 서울회화연구소가 아닌 서울미술연구소로 추정된다. 본 글에서는 보다 널리 통용되는 이봉상회화연구소와 서울미술연구소로 명칭을 통일한다. 「미술연구소개설(硏究所開)」, 『동아일보』 (1960년 1월 7일 조간 4면); 「[계절의 광장] 아트리에에도 봄」, 『동아일보』(1960년 3월 3일).
3) 「[계절의 광장] 아트리에에도 봄」, 위의 글.
4) 박서보의 1955년도 이봉상회화연구소 언급은 박서보와 이용의 인터뷰를 통해 작성된 회고록인 박서보재단 홈페이지의 [Autobiography] 11. 이봉상회화연구소와 ‘안국동파’ 게시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parkseobofoundation.org/55/?idx=11181445&bmode=view
5) 2006년 작고한 이능우 교수의 부고 기사들에서 이능우의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편집, 『2014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238 박서보』(이후 『구술채록연구』), pp. 69-70.
7) 박서보의 말, 이용의 글, [Autobiography] 11. 이봉상회화연구소와 ‘안국동파’; 『구술채록연구』, pp. 70-72.
8) 『구술채록연구』, p. 72; 「이봉상회화연구소(李鳳商繪畫硏究所) 2월1일(二月一日)부터 개소(開所)」, 『동아일보』 (1957년 1월 24일 석간).
9) 보존된 『연합신문』의 기사는 복사본이나 여러 차례 사명의 변경과 폐간으로 인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연합신문』의 흔치 않은 사료이다.
10) 「예술의 온상(溫床) 회화연구소」, 『연합신문』(1957년 6월 17일).
11) 『구술채록연구』, pp. 73-74.
12) 세 번째와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사진은 캡션과 달리 각각 같은 일자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13) 두 개 사진 속 장소로 기록된 정릉과 우이동은 약간의 거리가 있지만,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복장을 통해 보았을 때 동일한 일정에서의 사진이다.
14) 이봉상, 박서보, 전상수, 안상철, 김창열, 장성순, 이명의, 방근택, 「미술연구소생모집」, 『홍대주보』(1957년 월일불명); 이봉상, 박서보, 김서봉, 김창열, 「봄과 더부러: 이봉상회화연구소(李鳳商繪畫硏究所)에서」, 『연합신문』(1958년 2월 1일); 박서보, 김창열, 김서봉, 이양로, 방근택, 「어린이미술연구소 탄생」, 『동아일보』(1958년 12월 15일); 이봉상, 박서보, 「젊은 화가(畫家)들의 작은 광장(廣場) 이봉상회화연구소(李鳳商繪畫硏究所) [봄의 클럽]」, 『동아일보』 (1959년 4월 17일 조간); 이봉상, 박서보, 안상철, 김창열, 전상수, 「미술연구소개설」, 『동아일보』 (1960년 1월 7일 조간 4면); 박서보, 안상철, 전상수, 김창열, 장성순, 이명의, 방근택, 장리석, 박항섭, MMCA리서치랩 “이봉상회화연구소” 항목 https://www.mmcaresearch.kr/terms/view.do?fid=1416
15) 박서보 증빙자료집에는 57년의 『연합신문』 기사의 앞부분만 보존되어 있어 인용된 문구 이후의 문장이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에 대한 콤플렉스”에 대한 언급은 58년의 기사에서 유사한 내용과 문장이 반복되는 점을 바탕으로, “시대에 대한 콤플렉스에 물들이 않도록” 한다는 내용이 동일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예술의 온상(溫床) 회화연구소」, 『연합신문』(1957년 6월 17일); 「봄과 더부러: 이봉상회화연구소(李鳳商繪畫硏究所)에서」, 『연합신문』(1958년 2월 1일).
16) 『구술채록연구』, p. 74; <회화 No.7>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박서보 증빙자료집에 보관된 1958년 11월 30일자 『한국일보』, 1958년 12월 3일자 『The Korean Republic』 등의 기사에서 박서보가 <회화 No.7>앞에서 역동적으로 붓질을 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박서보의 말에 기반해 보았을 때, <회화 No.7> 앞에서의 사진이 찍힌 장소는 이봉상회화연구소일 가능성이 높다.
17) 박서보의 말, 이용의 글, [Autobiography] 11. 이봉상회화연구소와 ‘안국동파’
참고자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편집, 『2014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238 박서보』(2015)
「이봉상회화연구소(李鳳商繪畫硏究所) 2월1일(二月一日)부터 개소(開所)」, 『동아일보』 (1957년 1월 24일 석간)
「예술의 온상(溫床) 회화연구소」, 『연합신문』(1957년 6월 17일)
「미술연구소생모집」, 『홍대주보』(1957년 월일불명)
「봄과 더부러: 이봉상회화연구소(李鳳商繪畫硏究所)에서」, 『연합신문』(1958년 2월 1일)
「어린이미술연구소 탄생」, 『동아일보』(1958년 12월 15일)
「[봄의 클럽] 젊은 화가(畫家)들의 작은 광장(廣場) 이봉상회화연구소(李鳳商繪畫硏究所)」, 『동아일보』 (1959년 4월 17일 조간)
「미술연구소개설(硏究所開)」, 『동아일보』 (1960년 1월 7일 조간 4면)
「[계절의 광장] 아트리에에도 봄」, 『동아일보』(1960년 3월 3일)
박서보재단 홈페이지(박서보의 말, 이용의 글) [Autobiography] 11. 이봉상회화연구소와 ‘안국동파’ https://parkseobofoundation.org/55/?idx=11181445&bmode=view
박서보재단 홈페이지(박서보의 말, 이용의 글) [Autobiography] 14. 국전과 나 https://parkseobofoundation.org/55/?idx=13357436&bmode=view
MMCA리서치랩 “이봉상회화연구소” 항목 https://www.mmcaresearch.kr/terms/view.do?fid=1416
MMCA리서치랩 1957년 연표 https://www.mmcaresearch.kr/timeline/view.do?searchYearmm=195702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
ARCHIVE FOCUS⎮18호 박서보의 작업실(1) 이봉상회화연구소
(1) 1956년, 안국동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2) 1956년경 안국동로타리 근처의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3) 1956년, 안국동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이양노와 함께
(4) 1958년1) 안국동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5) 1958년 가을, 서울회화연구소 연구생들과 정능으로 MT를 가다.
(6) 1958년 가을 안국동연구소생들과 우이동으로 엠티갔을때
(7) 「예술의 온상 회화연구소」, 『연합신문』(1957. 6. 17.)
자료 출처: 박서보 사진모음집 No.1, 박서보 증빙자료집 No.1
[6번 사진 뒷면 손글씨]
1958년 가을, 서울회화연구소(전. 이봉상회화연구소2)) 연구생들과 정능으로 MT를 가다.
앞줄로부터 윤명로, 고. 손찬성, 한 사람 건너 이성미
둘째줄 좌로부터 김종학, 이만익
셋째줄 좌로부터 최관도, 그의 뒤쪽의 모자 쓴 사람이 지도위원인 박서보이다.
「예술의 온상(溫床) 회화연구소」, 『연합신문』(1957년 6월 17일)
테두리를 벗어난 연구
오직 생활 속에서 창작
‘안국동 로타리’를 굽어보는 ‘관현동’ 구석진 1각, 표식도 없는 ‘이봉상회화연구소’에는 창너머로 ‘캼바스’와 또 벽에 수많이 걸린 유화(油画)들이 갸웃거린다. 석고 내음이 강렬하게 풍기는 화실에서는 기초반 연구생들이 석고로 만들어진 각종의 마스크나 상체(上体)를 대상으로 뎃상에 여념 없어 보이고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시작하기로 되어있으나 “공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작가 개인의 화실과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항상 개방하고 있다”는 말 그대로 연구생들은 자기 형편을 따라 수시로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단지 6시부터 8시 사이에는 석고 아닌 인체(나체)를 모델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조건이 덧붙여져 기초반의 입회금이 2천환인데 비하여 전문반이라 하여 월간 3천환의 회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현재의 회원은 남자 14명, 여자 16명의 30명이라 한다.
오늘날 모든 작가들이 짊어지고 있는 근대(近代)라든가 혹은 시대에 대한 콤푸스[콤플렉스]에 조금도 물들지 않은 소위 아마추어들, ■ [뒷부분 자료 없음]
<표기 원칙>
- 한글음독본: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에 사용된 기호나 숫자는 현대한국어 문법에 맞추어 교정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어 표기 시 사용되는 낫표 「」는 생략, 겹낫표 『』는 의미상 사용에 따라 따옴표 ' ' 로 교정했다. 확인할 수 없는 글자는 ■로 표기한다. 변경된 명칭이나 번역자 주는 대괄호 [ ] 로 표기하고 긴 내용의 경우에는 주석을 달았다.
[자료 설명]
ARCHIVE FOCUS 7월과 8월의 주제는 박서보의 작업실이다. 예술가의 작업실은 작품이 탄생하는 산실이자 작가 개인의 삶의 궤적을 연결하는 교차점이라는 점에서 작품과 예술관을 이해하는 또 다른 경로를 제공한다. 이번 호에서 다루어질 자료들은 박서보의 첫 번째 작업실인 이봉상회화연구소의 사진들과 관련 기사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직장이 확보되지 않아 작업실을 마련하기 여의치 않았던 박서보에게 이봉상회화연구소는 작업실이자 동시대 미술계 인물들과 생각을 교류하는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1960년 3월 3일의 『동아일보』 기사는 이봉상회화연구소가 “이봉상, 박서보, 김창열, 박석호 씨 등 화가들이 심심찮게 ‘크로키’회를 연 것에서 비롯된다”고 서술하고 있다.3) 박서보는 회고록에서 이봉상회화연구소가 55년 가을부터 개관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는 회화연구소가 공식 개관하기 이전부터 박서보를 비롯한 작가들이 모이고 작업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4) 18호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진은 작가의 자필로 1956년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찍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봉상회화연구소가 정식으로 개관한 1957년 2월보다 1년 가량 이른 시기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진은 박서보의 복장으로 보아 동일한 날 찍힌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에서는 등받이가 있는 상자와 같은 형태의 좌대에 앉아 포즈를 취한 인물들의 방향으로 이젤들이 놓여 있다. 이젤 위 캔버스들에 그려진 것은 흰 천을 머리에서 늘어뜨린 여성의 ‘크로키’이다.
두 번째 사진에서 박서보와 함께 찍힌 인물들의 신상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으나 박서보의 왼쪽에 앉은 인물이 동덕재단 설립자의 아들로 숙대 교수였던 국문학자 이능우일 가능성이 제기된다.5) 홍익대학교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던 박서보는 1955년, 홍익대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은 이봉상에게서 이능우의 개인 미술 교습 일을 소개 받았다.6) 교습은 이능우가 제공한 당시 안국동 동덕빌딩의 동덕여대 별관 2층(현재 관훈동 동덕아트갤러리)에서 진행되었는데, 이능우를 지도하며 작업에 적합한 채광 좋고 널찍한 공간을 계속 활용하고 싶어진 박서보는 이봉상에게 건의해 그 공간에 이봉상의 이름을 딴 회화연구실을 만들자고 제안했다.7)
이봉상회화연구소는 1957년 2월 1일 입시생부터 미술대학 학생들, 그리고 미술을 취미로 했던 이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미술 인구에게 교육을 제공하는 사설 미술 교육 기관으로 정식 개소했다.8) 박서보 증빙자료집에 보관된 1957년 6월 17일의 『연합신문』 기사(7번째 이미지)9)에 따르면, 작업 공간이 필요한 경우 화실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된 운영과 기존 미술 교육관과 방식에 매몰되지 않은 “테두리를 벗어난 연구”의 시도가 이봉상회화연구소의 주된 지향점이었다.10)
기사에 실린 이봉상회화연구소의 사진에서는 저화질이지만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내려다보며 앉아 있는 모델을 중심으로 연구생들이 이젤을 두고 둘러 앉아 데생을 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연구생들의 뒤쪽으로 빛이 잘 들어오는 커다란 창이 있는 벽이 보이며 모델 옆쪽의 벽 곳곳에 습작들이 걸려 있는데, 창문의 배치를 비교했을 때 1956년의 사진과 반대 방향의 벽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공간 중 한 방은 『연합신문』 기사 사진에서와 같이 학생들을 위한 수업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남은 공간은 박서보 외에도 연구생들과 작가들의 작업실로 활용되었는데, 박서보의 회고에 따르면 복도식의 공간을 다시 세 개로 나누어 하나는 이봉상이 개인 회의실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김서봉의 작업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자신의 작업실로 사용했다.11)
18호의 세 번째부터 여섯 번째 사진들에서는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박서보와 교류한 인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12) 56년 혹은 58년으로 추정되는 사진에서 베레모를 쓰고 편안한 반소매 셔츠 차림의 박서보는 접이식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렌즈를 응시한다. 한 사진에서는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강의를 했던 이양노가 중절모에 양복 차림으로 웃는 모습으로 박서보와 함께 담겨 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사진은 1958년 연구생들과 강사들이 함께 떠난 엠티에서의 사진이다.13) 사진 속에 등장하는 연구생들 중 일부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에는 한국 현대 추상회화의 주요한 인물들인 윤명로, 김종학, 손찬성, 이만익, 최관도 등이 확인되며 이 외에도 미술사학자인 이성미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문 기사들에서 박서보와 함께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활동한 것으로 언급된 강사진들에는 이봉상, 안상철, 김창열, 전상수, 장성순, 이명의, 김서봉, 이양노, 방근택, 장리석, 박항섭 등이 있었다.14) 홍익대학교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출신의 작가와 비평가들로 이루어진 강사진와 학생의 구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봉상회화연구소는 신진 작가과 예비 미술가들, 기자, 시인, 비평가 등 다양한 예술문화계 인사들의 교류가 이루어진 장소로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957년 6월 17일의 『연합신문』의 이봉상회화연구소 소개의 말미에서는 연구소가 새로운 미술 교육 방식을 통해 회원들이 “시대에 대한 콤플렉스”에 물들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서술하고 있다.15) 이 문구는 1958년 2월 1일의 『연합신문』 기사에서도 반복되는데, 박서보를 비롯한 강사진과 학생들은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의 교육과 연구를 시대와 이에 대해 한국 미술계가 가지고 있던 일종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파악했으며 이 같은 관점의 연장선에서 기존 아카데미즘 회화의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실험적인 현대 회화를 고찰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서보는 이 시기 이봉상회화연구소의 작업실에서 다양한 안료를 직접 만들어 활용했으며 1000호 크기에 달하는 대작 <회화 No.7>와 같은 앵포르멜 계열의 작업을 그리고 다시 부수는 등 파격적인 실험을 진행했다.16) 이봉상회화연구소에 모인 강사진과 김종학, 윤명로, 김봉태, 방혜자, 이만익, 김재임 등의 연구생들은 학교나 기존 화단에서 보기 힘들었던 이러한 작업들을 연구하며 두터운 마티에르와 붓질의 동세, 안료의 질감이 두드러지는 실험적인 현대 회화를 선보였고, 이에 따라 ‘안료파’ 혹은 ‘안국동파’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봉상회화연구소에 드나든 많은 작가들은 《현대전》으로 대표되는 현대미술가협회와 60년미술가협회의 주요 작가들로 참여하며 1960년대 소위 ‘한국 앵포르멜 미술’의 흐름을 주도한 주요한 인물들이 되었다.17)
<주석>
1) 박서보의 복장과 사진 속 기물의 배치, 그리고 사진의 구도로 비교했을 때 2번 사진과 동일 시기에 찍힌 것으로 추정되며, 이 경우 1956년의 사진이다.
2) 이봉상회화연구소는 이봉상미술연구소로도 지칭된다. 60년에 신설동으로 이전하며 바꾼 명칭은 서울회화연구소가 아닌 서울미술연구소로 추정된다. 본 글에서는 보다 널리 통용되는 이봉상회화연구소와 서울미술연구소로 명칭을 통일한다. 「미술연구소개설(硏究所開)」, 『동아일보』 (1960년 1월 7일 조간 4면); 「[계절의 광장] 아트리에에도 봄」, 『동아일보』(1960년 3월 3일).
3) 「[계절의 광장] 아트리에에도 봄」, 위의 글.
4) 박서보의 1955년도 이봉상회화연구소 언급은 박서보와 이용의 인터뷰를 통해 작성된 회고록인 박서보재단 홈페이지의 [Autobiography] 11. 이봉상회화연구소와 ‘안국동파’ 게시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parkseobofoundation.org/55/?idx=11181445&bmode=view
5) 2006년 작고한 이능우 교수의 부고 기사들에서 이능우의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편집, 『2014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238 박서보』(이후 『구술채록연구』), pp. 69-70.
7) 박서보의 말, 이용의 글, [Autobiography] 11. 이봉상회화연구소와 ‘안국동파’; 『구술채록연구』, pp. 70-72.
8) 『구술채록연구』, p. 72; 「이봉상회화연구소(李鳳商繪畫硏究所) 2월1일(二月一日)부터 개소(開所)」, 『동아일보』 (1957년 1월 24일 석간).
9) 보존된 『연합신문』의 기사는 복사본이나 여러 차례 사명의 변경과 폐간으로 인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연합신문』의 흔치 않은 사료이다.
10) 「예술의 온상(溫床) 회화연구소」, 『연합신문』(1957년 6월 17일).
11) 『구술채록연구』, pp. 73-74.
12) 세 번째와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사진은 캡션과 달리 각각 같은 일자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13) 두 개 사진 속 장소로 기록된 정릉과 우이동은 약간의 거리가 있지만,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복장을 통해 보았을 때 동일한 일정에서의 사진이다.
14) 이봉상, 박서보, 전상수, 안상철, 김창열, 장성순, 이명의, 방근택, 「미술연구소생모집」, 『홍대주보』(1957년 월일불명); 이봉상, 박서보, 김서봉, 김창열, 「봄과 더부러: 이봉상회화연구소(李鳳商繪畫硏究所)에서」, 『연합신문』(1958년 2월 1일); 박서보, 김창열, 김서봉, 이양로, 방근택, 「어린이미술연구소 탄생」, 『동아일보』(1958년 12월 15일); 이봉상, 박서보, 「젊은 화가(畫家)들의 작은 광장(廣場) 이봉상회화연구소(李鳳商繪畫硏究所) [봄의 클럽]」, 『동아일보』 (1959년 4월 17일 조간); 이봉상, 박서보, 안상철, 김창열, 전상수, 「미술연구소개설」, 『동아일보』 (1960년 1월 7일 조간 4면); 박서보, 안상철, 전상수, 김창열, 장성순, 이명의, 방근택, 장리석, 박항섭, MMCA리서치랩 “이봉상회화연구소” 항목 https://www.mmcaresearch.kr/terms/view.do?fid=1416
15) 박서보 증빙자료집에는 57년의 『연합신문』 기사의 앞부분만 보존되어 있어 인용된 문구 이후의 문장이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에 대한 콤플렉스”에 대한 언급은 58년의 기사에서 유사한 내용과 문장이 반복되는 점을 바탕으로, “시대에 대한 콤플렉스에 물들이 않도록” 한다는 내용이 동일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예술의 온상(溫床) 회화연구소」, 『연합신문』(1957년 6월 17일); 「봄과 더부러: 이봉상회화연구소(李鳳商繪畫硏究所)에서」, 『연합신문』(1958년 2월 1일).
16) 『구술채록연구』, p. 74; <회화 No.7>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박서보 증빙자료집에 보관된 1958년 11월 30일자 『한국일보』, 1958년 12월 3일자 『The Korean Republic』 등의 기사에서 박서보가 <회화 No.7>앞에서 역동적으로 붓질을 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박서보의 말에 기반해 보았을 때, <회화 No.7> 앞에서의 사진이 찍힌 장소는 이봉상회화연구소일 가능성이 높다.
17) 박서보의 말, 이용의 글, [Autobiography] 11. 이봉상회화연구소와 ‘안국동파’
참고자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편집, 『2014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238 박서보』(2015)
「이봉상회화연구소(李鳳商繪畫硏究所) 2월1일(二月一日)부터 개소(開所)」, 『동아일보』 (1957년 1월 24일 석간)
「예술의 온상(溫床) 회화연구소」, 『연합신문』(1957년 6월 17일)
「미술연구소생모집」, 『홍대주보』(1957년 월일불명)
「봄과 더부러: 이봉상회화연구소(李鳳商繪畫硏究所)에서」, 『연합신문』(1958년 2월 1일)
「어린이미술연구소 탄생」, 『동아일보』(1958년 12월 15일)
「[봄의 클럽] 젊은 화가(畫家)들의 작은 광장(廣場) 이봉상회화연구소(李鳳商繪畫硏究所)」, 『동아일보』 (1959년 4월 17일 조간)
「미술연구소개설(硏究所開)」, 『동아일보』 (1960년 1월 7일 조간 4면)
「[계절의 광장] 아트리에에도 봄」, 『동아일보』(1960년 3월 3일)
박서보재단 홈페이지(박서보의 말, 이용의 글) [Autobiography] 11. 이봉상회화연구소와 ‘안국동파’ https://parkseobofoundation.org/55/?idx=11181445&bmode=view
박서보재단 홈페이지(박서보의 말, 이용의 글) [Autobiography] 14. 국전과 나 https://parkseobofoundation.org/55/?idx=13357436&bmode=view
MMCA리서치랩 “이봉상회화연구소” 항목 https://www.mmcaresearch.kr/terms/view.do?fid=1416
MMCA리서치랩 1957년 연표 https://www.mmcaresearch.kr/timeline/view.do?searchYearmm=195702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