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CUS⎮19호 박서보의 작업실(2) 파리의 다락방들
(1) 1961 봄, PARIS, 바스티이유 다락방에서
(2) 1961년 PARIS 9 RUE DE ST. SÉVERIN PARIS (5e) 작업실에서
(3) 1961년 3월 31일 박서보가 윤명로에게 보낸 편지
자료 출처: 박서보 사진모음집 No.1, 박서보 편지모음집 No.1 041
[원문]
친애(親愛)하는 명로(明老)형(兄),
오늘, 명로(明老)형(兄)의 편지는 참으로 반가웠읍니다. 우리는 결(決)코불행(不幸)하지는 않씁니다. 우리는 보다 광대(廣大)한 지역(地域)에 필사적(必死的)으로 나선 탐험가(家)임을 자각(自覚)해야 합니다. 여러가지의미(意味)의 고통(苦痛)을 인내(忍耐)해야하는것이 우리들의 숙명(宿命)입니다. 인내(忍耐)그것은 인생(人生)을 기름지게 하는 유일한 힘입니다. 인내(忍耐)에는 중지(中止)나 휴식이 없고. 또 인내(忍耐)하는 대중(対[大]衆)의 상실은 곧 인내(忍耐)해온 인간(人间)그자체(自体)의 상실이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요지음 보다 광대(廣大)한 미지(未知)에로의 확대(拡大)된인간(人间)투영(投影).... 다시 말하자면 상실했든 인간(人间)으로의 복귀(復歸)를 통절이 갈망하고 있읍니다. 오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전위작가(前衛作家)들의 작품(作品)을 대(対)할때마다. 그들의 인색한 우주성(宇宙性)에. 아니면 그들의 시대적편식성(時代的偏食性)에 노골적인 반발(反撥)과 함께. 아직 개발(開発)되지 않은 저태고(泰[太]古)로부터의 인간체험(人间体驗)의 총화. 그것이 아쉬어 몸부림 칩니다. 파리(巴里)는 확실(確実)히 오늘에 미달(未達), 정상(正常)이 아니면 허세(虛勢)들이 잡탕(雜湯)이 되어 살고 있읍니다. 예술(芸術)이 어떠한 의미(意味)의 그 시대(時代)의 정언(証言)이라면 너무나 이들 가운덴 위증죄(罪)에 해당하는 무리가 많씁니다. 이것은 현대(現代)의 위기(危期[機])요 타락(堕落)입니다. 현대(現代)는 확실(確実)히 양식(樣式)이 아니라 선(禪)의 경지(境地)에서 참다운 인간(人间), 다시 말하자면 인간(人间)에로의 귀이입니다. 불교(佛敎) 냄새가 나지만…. 종극적(種極的)인 자아(自我)의 회수작업(囬收作業)입니다. 소위(所謂) 그림하나를 놓고 이야기하자면 반회화계(反绘画系)의 움직임이 오늘의 파리지층(巴里地層)의 동맥(動脈)입니다. 다다이즘인것 같지만 결(決)코 그것만은 아닌 새로운 의미(意味)를 갖고 있읍니다.
캼버스라는 하나의 평면(平面)이 그림을 그위에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캼버스 자체(自体)가 하나의 표현재료(表現材料)로 쓰이고 있읍니다. 말이 부족(不足)하여 보다 실감있게 전(伝)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깁니다. - 중략 - 나는 요지음 그림이 빩앟거나, 아니면 색까만 것입니다. 걸래쪼각, 샤쓰떨어진것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물론(勿論)그것이 승화(昇華)된 정신체(精神体)로 나타나는 한 “오부제”이지요. 공간(空间)에 대(対)한 심각한 고민(苦悯)에 빠젔읍니다, 우리는 확실(確実)히 서양(西洋)의 합리적(合理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문화(文化)(사상(思想))의 발달(発達)과는 달리, 주관적(主觀的)이고 비현실적(非現實的)인 사상(思想)의 전달(伝達)을 조상(祖上)으로 부터 받아내려왔다고 봅니다. 부처님 무음(無音)속에 흐르는 자비, 인내(忍耐). 허무(虛無)가 아니라 무(無)의 경지(境地), 이 무(無)가 곧 인간(人间)임을 하루 17,8시간(時间)의 제작생활(制作生活)(몰두)에서 깨달았읍니다. 확실(確実)히 무아(無我)의 경지가 무엇인가 맞보았읍니다. 우리들이 말하는 미지(未知)가 곧 이것의 부분(部分)이었음도…. 공간(空间)그것은 예술(芸術)의 전부(全部)입니다. 그러나. 과거 어느시대 어느누가 시도한 그것과는 다른 것이겠지요, 시각(視覚)앞에 멈추는 면적(面積)이 아니라. 심연(深淵)에 흐르는 차원(次元)(정신(精神)의 밀도(密度))이겠지요. 인간(人间)이 아쉽고 그리워만 집니다. 장식(裝飾)(문명(文明)이란 의상)에 가리워진 인간(人间)이 아니라 비밀(祕密)에 가치운 인간(人间), 아니 인간(人间)이란 그것 자체(自体)를 부정(否定)한 그것이 자꾸만 자꾸만 유혹하는 군요. 쨩글인지 가시밭인지 모를 곳으로 끌고 가는군요. 가다가 가다가 어느 광명(光明)앞에. 마주설때. 나는 살고 있는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대체(大体)동양인(東洋人)들은 의곡된 동양(東洋)을 팔고 있어…. 그따위식(式)의 개성(個性)(자칫하면 병적(病的)인 결과(結果)를 초래할)이 아니라, 인간(人间)이 공동관리(共同管理)하는 오늘 속에서의 개인(個人)의 정신발육상(精神発育上)의 차(差), 의식(意識)의 총화라는 지성(知性)의 체험(体驗)의 차(差), 이것들이 오늘의 인간조건(人间條件)속에서의 진정한 개성(個性)(확대(拡大)된 의미(意味)의)이 아닌가 생각(生覚)하오, 너무 가난한 말만 늘어 놓았구려. 용서해주오─. 참 병역관계(兵役関係)가 잘 해결된다니 다행(多幸)이요. 파리(巴里)구경 오지 않겠소? 오겠다면 초청장 구해보내리다. 최소(最小) 일년(一年) 쓸 돈 없으면 자신(自身)을 비교, 비판, 증리, 하려고나 오는편이 좋소. 하여튼 오겠다면….60년미협(年美協)의 선언문(宣言文)(국문(国文)으로) 보내시요. 이곳에서 번역해서 소개(紹介)하리다(곧보내시요) 그림사진(큰것)도 보내주오, 또 벽전(壁展)멤버의 이름좀 적어보내고. 60년미협(年美協)도…. 10월(月)에 쓸 인비테이숀 원문(原文)(국문)과 윤(尹)형(兄)의 “싸인” 그것은 고무도장으로, 또 협회(協会) 스담뿌(고무인(印)을 해보내시요. 이것은 현대미협(現代美協)의 창열(昌烈)형(兄)한테도 전(伝)해주오. 60년전(年展)의 그림 좋은 것.(2회전(回展)에서)있거든 사진 찍어 보내오, 틈나는대로 소개좀 해보려고 하니까. 김병기(金秉騏)선생(先生)님께 문안(问安)드리시요. 한 번 서신(書信)을 드렸는데 못 받으셨는지 통소식이없어─. 연구소(硏究所)가 잘된다니 참 다행(多幸)이요. 화단(画壇)을 위해서나 김선생(金先生)님을 위해 마음껏 축복을 보내오. 우리,뭐 이렇게 살다 갈 사람아니오? 좋은 일이나 많이많이하고가야하지않소? 김봉태(金鳳台), 손찬성(孫贊聖), 이만익(李滿益)형(兄)에게 안부(安否)해주오, 그외(外) 내아는사람들께도─.
하(河)린두(斗)가 무사(無事)했다니 다행(多幸)이요, 오늘 문혜자(文惠子)양이 이응노(李應魯)선생부처(先生夫妻)와 함께 와서. 하(河)형(兄)에 대(対)해 물었드니 그렇게 이야기하드군…. 나는 여러 차례 심한 노동을 해서 오늘까지 살아왔소. 이렇게라도 일거리가 있으면 좋으련만 없구려, 천상 비행기표(飛行機票)가 한국(韓国)에서 팔리지 않으면(물러쓰도록 펜.아메리칸 파리지사(巴里支社)에) 연락해주지않으면) 파리(巴里)에서의 전쟁준비(战爭準備)는 도중에서 포기하는수밖에 없구려, 좋은 생각이 있으면 하교(下敎)해주오,
- 중략 -
이곳 화랑의 카다록을 부칠래도 돈이없구려, 한국에서 “쿠번[쿠폰]”이란것을 한(韓)화를 주고 우편국에서 사서 그것을 보내면 그것을 파리(巴里)우편국에서 바꾸어(이 곳 우표로) 쓸수있다니 그것이 무엇인가 알아보구려.
그런 것이 있다면 약 만(万)환 노치 사보내시요, 그래야 몇 번 못 보낼것이외다, (캬다록 같은 것 보내줄께) 오늘은 이만 주리오. 김(金)형(兄)에게 작품사진(作品寫眞)과 편지(便紙)받았다고 전(伝)해주오, 파리(巴里)비엔날문서(文書)는 없드라고 해주오(이곳 본부(本部)에 보내겠다고 하든 것) 그러면 또 봅시다. 아무쪼록 좋은 그림 많이 많이 그리시요.
※이구열(李龜烈)형(兄)께 안부해주오,
3월(月)31일(日) 박서보(朴栖甫)
[한글]
친애하는 명로 형,
오늘, 명로 형의 편지는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우리는 결코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보다 광대한 지역에 필사적으로 나선 탐험가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여러가지 의미의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숙명입니다. 인내 그것은 인생을 기름지게 하는 유일한 힘입니다. 인내에는 중지나 휴식이 없고, 또 인내하는 대중의 상실은 곧 인내 해 온 인간 그 자체의 상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요즈음 보다 광대한 미지에로의 확대된 인간 투영.... 다시 말하자면 상실했던 인간으로의 복귀를 통절히 갈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전위작가들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그들의 인색한 우주성에, 아니면 그들의 시대적 편식성에 노골적인 반발과 함께, 아직 개발되지 않은 저 태고로부터의 인간체험의 총화, 그것이 아쉬워 몸부림 칩니다. 파리는 확실히 오늘에 미달, 정상(正常)이 아니면 허세들이 잡탕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예술이 어떠한 의미의 그 시대의 정언이라면 너무나 이들 가운덴 위증죄에 해당하는 무리가 많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위기요 타락입니다. 현대는 확실히 양식이 아니라 선(禪)의 경지에서 참다운 인간, 다시 말하자면 인간에로의 귀의입니다. 불교 냄새가 나지만…. 종극적(種極的)인 자아의 회수작업입니다. 소위 그림 하나를 놓고 이야기하자면 반 회화계의 움직임이 오늘의 파리 지층의 동맥입니다. 다다이즘인것 같지만 결코 그것만은 아닌 새로운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캔버스라는 하나의 평면이 그림을 그 위에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캔버스 자체가 하나의 표현재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말이 부족하여 보다 실감있게 전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깁니다. - 중략 - 나는 요즈음 그림이 빨갛거나, 아니면 새까만 것입니다. 걸레 조각, 셔츠 떨어진 것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물론 그것이 승화된 정신체로 나타나는 한 “오브제”이지요. 공간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서양의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문화(사상)의 발달과는 달리, 주관적이고 비현실적인 사상의 전달을 조상으로 부터 받아 내려왔다고 봅니다. 부처님 무음(無音) 속에 흐르는 자비, 인내, 허무가 아니라 무(無)의 경지, 이 무(無)가 곧 인간임을 하루 17, 8시간의 제작생활(몰두)에서 깨달았습니다. 확실히 무아(無我)의 경지가 무엇인가 맛보았습니다. 우리들이 말하는 미지가 곧 이 것의 부분이었음도…. 공간 그것은 예술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과거 어느 시대 어느 누가 시도한 그 것과는 다른 것이겠지요. 시각 앞에 멈추는 면적이 아니라, 심연에 흐르는 차원(정신)의 밀도이겠지요. 인간이 아쉽고 그리워만 집니다. 장식(문명이란 의상)에 가리워진 인간이 아니라 비밀에 가까운 인간, 아니 인간이란 그 것 자체를 부정한 그 것이 자꾸만 자꾸만 유혹하는 군요. 정글인지 가시밭인지 모를 곳으로 끌고 가는군요. 가다가 가다가 어느 광명 앞에, 마주설 때, 나는 살고 있는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대체 동양인들은 왜곡된 동양을 팔고 있어…. 그 따위 식의 개성(자칫하면 병적인 결과를 초래할)이 아니라, 인간이 공동 관리하는 오늘 속에서의 개인의 정신발육 상의 차(差), 의식의 총화라는 지성의 체험의 차(差), 이것들이 오늘의 인간 조건 속에서의 진정한 개성(확대된 의미의)이 아닌가 생각하오. 너무 가난한 말만 늘어 놓았구려. 용서해주오─. 참 병역관계가 잘 해결된다니 다행이요. 파리 구경 오지 않겠소? 오겠다면 초청장 구해 보내리다. 최소 일 년 쓸 돈 없으면 자신을 비교, 비판, 증리, 하려고나 오는 편이 좋소. 하여튼 오겠다면…. 60년미협의 선언문(국문으로) 보내시오. 이 곳에서 번역해서 소개하리다(곧 보내시오) 그림 사진(큰 것)도 보내주오. 또 벽전(壁展) 멤버의 이름 좀 적어 보내고. 60년미협도…. 10월에 쓸 인비테이션 원문(국문)과 윤 형의 “싸인” 그것은 고무 도장으로. 또 협회 스탬프(고무 인(印))을 해 보내시오. 이것은 현대미협의 창열 형한테도 전해주오. 60년전(年展)의 그림 좋은 것(2회전에서) 있거든 사진 찍어 보내오. 틈 나는 대로 소개 좀 해보려고 하니까. 김병기 선생님께 문안 드리시오. 한 번 서신을 드렸는데 못 받으셨는지 통 소식이 없어─. 연구소가 잘 된다니 참 다행이오. 화단을 위해서나 김 선생님을 위해 마음껏 축복을 보내오. 우리, 뭐 이렇게 살다 갈 사람 아니오? 좋은 일이나 많이 많이 하고 가야 하지 않소? 김봉태, 손찬성, 이만익 형에게 안부 해 주오. 그 외 내 아는 사람들께도─.
하인두가 무사했다니 다행이오. 오늘 문혜자 양이 이응노 선생 부처와 함께 와서, 하 형에 대해 물었더니 그렇게 이야기하더군…. 나는 여러 차례 심한 노동을 해서 오늘까지 살아 왔소. 이렇게라도 일거리가 있으면 좋으련만 없구려, 천상 비행기표가 한국에서 팔리지 않으면(물러 쓰도록 펜아메리칸 파리 지사에) 연락해 주지 않으면) 파리에서의 전쟁 준비는 도중에서 포기하는 수 밖에 없구려. 좋은 생각이 있으면 하교(下敎)해주오.
- 중략 -
이 곳 화랑의 카탈로그를 부칠래도 돈이없구려, 한국에서 “쿠폰”이란 것을 한화를 주고 우편국에서 사서 그것을 보내면 그것을 파리 우편국에서 바꾸어(이 곳 우표로) 쓸 수 있다니 그것이 무엇인가 알아 보구려.
그런 것이 있다면 약 만(万)환 어치 사보내시오. 그래야 몇 번 못 보낼 것이외다. (카탈로그 같은 것 보내줄게) 오늘은 이만 줄이오. 김 형에게 작품사진과 편지 받았다고 전해주오. 파리비엔날레 문서는 없더라고 해주오(이 곳 본부에 보내겠다고 하던 것) 그러면 또 봅시다. 아무쪼록 좋은 그림 많이 많이 그리시오.
※이구열 형께 안부해주오,
3월 31일 박서보
<표기 원칙>
- 한글본: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에 사용된 기호나 숫자는 현대한국어 문법에 맞추어 교정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어 표기 시 사용되는 낫표 「」는 생략, 겹낫표 『』는 의미상 사용에 따라 따옴표 ' ' 로 교정했다. 변경된 명칭이나 번역자 주는 대괄호 [ ]로 표기하고 긴 내용의 경우에는 주석을 달았다. 원문 중 일부 개인적인 내용은 생략되었음을 밝힌다.
[자료 설명]
ARCHIVE FOCUS 19호에서 다루어질 자료들은 박서보가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서 머물면서 남긴 작업실 사진들과 이 시기 <원죄> 작업을 하며 가지게 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박서보의 편지이다.
1961년 2월로 예정되어 있었던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가 11월로 미뤄진 사실을 박서보는 1월 파리에 이미 도착한 후에 알게 되었다. 행사 기간 전후로 파리에 몇 달 간은 머물 예정으로 아시아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아 왔지만 이는 10월까지 체류비로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이응노의 집에서 신세 지는 것을 고려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된 박서보는 숙박비와 체재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지인의 숙소와 파리 호텔 이 곳 저 곳을 옮겨다니게 된다. 세계청년작가 파리대회 1위에 입상한 <원죄>가 탄생한 작업 공간은 파리 곳곳의 이러한 호텔 다락방들이었다.
“바스티이유의 다락방”이라고 기록된 첫 번째 사진은 당시 프랑스 한국 유학생회 회장이었던 신영철의 도움으로 첫 달 월세를 벌어 머물게 된 몽티유라는 여성의 집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1) 사진 속 박서보는 커다란 캔버스들로 가득한 방에 놓인 이젤 앞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한다. 박서보 앞의 캔버스는 두껍게 바른 물감을 문지르거나 긁어내어 만들어진 비정형의 색면으로 채워져 있다. 작가는 붓이 아닌 롤러처럼 보이는 도구를 들고 있는데, 이를 사용해 두터운 물감층을 누르거나 문대는 효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진이 찍힌 봄 즈음 박서보가 윤명로에게 보낸 3월 31일자 편지에서 작가가 파리의 예술에 대해 가지게 된 생각과 당시 작업하던 방식에 대한 짤막한 서술을 확인할 수 있다. 박서보는 처음으로 실견한 파리 화단의 “인색한 우주성(宇宙性)”과 “노골적 편식성”에 크게 실망을 표하고, “시대의 정언”으로서 예술은 “보다 광대한 미지에로의 확대된 인간 투영”, 다시 말하자면 상실했던 “참다운 인간으로의 귀의”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저 태고로부터의 인간체험의 총화”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통절히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시기 박서보가 작업한 그림들은 대체로 “빨갛거나, 아니면 새까만 것”이었다. 나아가 작가는 “걸레 조각, 셔츠 떨어진 것” 등 일반적이지 않은 재료들을 “오브제”로 활용했다고 적고 있다. 파리에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박서보는 이응노의 캔버스 틀을 짜는 일을 도와주고 나무 조각이나 천을 얻거나 부족한 바탕천으로 사용하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져 나온 재료를 사용했다고 회고했는데,2) “바스티이유 다락방” 사진에서도 캔버스 틀 부분의 마감천이 고르지 못한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유사한 재료들이 바탕천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서보는 윤명로에게 하루 절반 이상을 몰입해 완성하는 자신의 작업을 “종극적(種極的)인 자아의 회수작업”이라고 설명한다. 묘법 연작 예술관에서 주로 등장하는 표현이 1961년도 파리 시기에서부터 언급되고 있다는 점은 박서보가 오랜 시간 견지해 온 예술가로서의 작업 태도의 기반이 되는 생각이 이 시기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편지에서 박서보는 “공간”이라는 개념에 더욱 집중한다. 자신의 작품에서 다루어지는 공간이 “서양의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문화”와 구분되는 “주관적이고 비현실적인”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일견 동양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박서보는 동양인들이 “[왜]곡된 동양”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국 현대 미술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서양에 상응하는 대립항으로서의 동양성이 아닌, “인간이 공동관리하는 오늘 속에서의 개인의 정신발육 상의 차(差), 의식의 총화라는 지성의 체험의 차(差)”이며, 공간 속에서 도달하는 “무아의 경지”와 “미지”, 즉 ‘인간이 알지 못하는 장소’는 오히려 현대의 보편적인 시대적 관심사인 인간의 본질적 측면을 다루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5월이 되어서야 아시아재단이 박서보의 상황을 검토하고 추가적인 지원금을 지급하자 박서보는 몽티유에게 밀린 방세를 전달하고 작업에 보다 적당한 숙소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입주한 “센강 너머로 노트르담과 경시청이 보이는 풍광 좋은 건물 옥탑방”3)인 생세브랭 가(rue de St. Séverin) 9번지의 호텔 다락방에서 1961년 10월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 1위에 입상한 <원죄>가 탄생하게 된다. 두 번째 사진에서 박서보는 <원죄> 연작 가운데 <원죄 No.8>으로 알려진 작품을 완성하고 활짝 웃으며 사진으로 기념하고 있다. 사진 속의 <원죄 No.8>는 색조의 개수가 더욱 줄어들어 거의 검은 색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화면 전면에 두텁게 도포한 물감을 뭉개고 밀어낸 흔적이 남아 있으며, 바탕천과 화면에 사용된 재료들로 인해 울퉁불퉁한 화면의 질감이 더욱 두드러진다.
박서보는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가 시작된 10월부터는 주최측에서 제공한 사르셀(Sarcelles) 숙소에 묵게 되었으며, 대회 이후에는 파리에서 작업한 캔버스 30여 점을 한묵에게 맡겨두고 1961년 말 귀국한다. 1961년의 파리 생활 이후로도 박서보는 해를 건너 한 번씩 파리로 향해 화랑들을 탐색하고 재불 작가들과 교류하며 작업도 진행했다. 이후의 숙소들은 1961년에 머문 다락방들만큼 협소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파리의 호텔 방들은 박서보의 삶 군데 군데에 자리한 친숙한 공간이 되었다.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
<주석>
1) 이 시기 박서보에게 도착한 편지에 사용된 주소들에서 Montilleux 외에도 Montieux, Montilleut 등의 표기를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인의 성으로 사용되는 용례를 감안했을 때, Monthieux가 정확한 표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2) 박승숙,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박서보의 삶과 예술』(인물과 사상사, 2019), p. 145.
3) 박승숙, 위의 책, p. 149.
ARCHIVE FOCUS⎮19호 박서보의 작업실(2) 파리의 다락방들
(1) 1961 봄, PARIS, 바스티이유 다락방에서
(2) 1961년 PARIS 9 RUE DE ST. SÉVERIN PARIS (5e) 작업실에서
(3) 1961년 3월 31일 박서보가 윤명로에게 보낸 편지
자료 출처: 박서보 사진모음집 No.1, 박서보 편지모음집 No.1 041
[원문]
친애(親愛)하는 명로(明老)형(兄),
오늘, 명로(明老)형(兄)의 편지는 참으로 반가웠읍니다. 우리는 결(決)코불행(不幸)하지는 않씁니다. 우리는 보다 광대(廣大)한 지역(地域)에 필사적(必死的)으로 나선 탐험가(家)임을 자각(自覚)해야 합니다. 여러가지의미(意味)의 고통(苦痛)을 인내(忍耐)해야하는것이 우리들의 숙명(宿命)입니다. 인내(忍耐)그것은 인생(人生)을 기름지게 하는 유일한 힘입니다. 인내(忍耐)에는 중지(中止)나 휴식이 없고. 또 인내(忍耐)하는 대중(対[大]衆)의 상실은 곧 인내(忍耐)해온 인간(人间)그자체(自体)의 상실이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요지음 보다 광대(廣大)한 미지(未知)에로의 확대(拡大)된인간(人间)투영(投影).... 다시 말하자면 상실했든 인간(人间)으로의 복귀(復歸)를 통절이 갈망하고 있읍니다. 오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전위작가(前衛作家)들의 작품(作品)을 대(対)할때마다. 그들의 인색한 우주성(宇宙性)에. 아니면 그들의 시대적편식성(時代的偏食性)에 노골적인 반발(反撥)과 함께. 아직 개발(開発)되지 않은 저태고(泰[太]古)로부터의 인간체험(人间体驗)의 총화. 그것이 아쉬어 몸부림 칩니다. 파리(巴里)는 확실(確実)히 오늘에 미달(未達), 정상(正常)이 아니면 허세(虛勢)들이 잡탕(雜湯)이 되어 살고 있읍니다. 예술(芸術)이 어떠한 의미(意味)의 그 시대(時代)의 정언(証言)이라면 너무나 이들 가운덴 위증죄(罪)에 해당하는 무리가 많씁니다. 이것은 현대(現代)의 위기(危期[機])요 타락(堕落)입니다. 현대(現代)는 확실(確実)히 양식(樣式)이 아니라 선(禪)의 경지(境地)에서 참다운 인간(人间), 다시 말하자면 인간(人间)에로의 귀이입니다. 불교(佛敎) 냄새가 나지만…. 종극적(種極的)인 자아(自我)의 회수작업(囬收作業)입니다. 소위(所謂) 그림하나를 놓고 이야기하자면 반회화계(反绘画系)의 움직임이 오늘의 파리지층(巴里地層)의 동맥(動脈)입니다. 다다이즘인것 같지만 결(決)코 그것만은 아닌 새로운 의미(意味)를 갖고 있읍니다.
캼버스라는 하나의 평면(平面)이 그림을 그위에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캼버스 자체(自体)가 하나의 표현재료(表現材料)로 쓰이고 있읍니다. 말이 부족(不足)하여 보다 실감있게 전(伝)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깁니다. - 중략 - 나는 요지음 그림이 빩앟거나, 아니면 색까만 것입니다. 걸래쪼각, 샤쓰떨어진것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물론(勿論)그것이 승화(昇華)된 정신체(精神体)로 나타나는 한 “오부제”이지요. 공간(空间)에 대(対)한 심각한 고민(苦悯)에 빠젔읍니다, 우리는 확실(確実)히 서양(西洋)의 합리적(合理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문화(文化)(사상(思想))의 발달(発達)과는 달리, 주관적(主觀的)이고 비현실적(非現實的)인 사상(思想)의 전달(伝達)을 조상(祖上)으로 부터 받아내려왔다고 봅니다. 부처님 무음(無音)속에 흐르는 자비, 인내(忍耐). 허무(虛無)가 아니라 무(無)의 경지(境地), 이 무(無)가 곧 인간(人间)임을 하루 17,8시간(時间)의 제작생활(制作生活)(몰두)에서 깨달았읍니다. 확실(確実)히 무아(無我)의 경지가 무엇인가 맞보았읍니다. 우리들이 말하는 미지(未知)가 곧 이것의 부분(部分)이었음도…. 공간(空间)그것은 예술(芸術)의 전부(全部)입니다. 그러나. 과거 어느시대 어느누가 시도한 그것과는 다른 것이겠지요, 시각(視覚)앞에 멈추는 면적(面積)이 아니라. 심연(深淵)에 흐르는 차원(次元)(정신(精神)의 밀도(密度))이겠지요. 인간(人间)이 아쉽고 그리워만 집니다. 장식(裝飾)(문명(文明)이란 의상)에 가리워진 인간(人间)이 아니라 비밀(祕密)에 가치운 인간(人间), 아니 인간(人间)이란 그것 자체(自体)를 부정(否定)한 그것이 자꾸만 자꾸만 유혹하는 군요. 쨩글인지 가시밭인지 모를 곳으로 끌고 가는군요. 가다가 가다가 어느 광명(光明)앞에. 마주설때. 나는 살고 있는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대체(大体)동양인(東洋人)들은 의곡된 동양(東洋)을 팔고 있어…. 그따위식(式)의 개성(個性)(자칫하면 병적(病的)인 결과(結果)를 초래할)이 아니라, 인간(人间)이 공동관리(共同管理)하는 오늘 속에서의 개인(個人)의 정신발육상(精神発育上)의 차(差), 의식(意識)의 총화라는 지성(知性)의 체험(体驗)의 차(差), 이것들이 오늘의 인간조건(人间條件)속에서의 진정한 개성(個性)(확대(拡大)된 의미(意味)의)이 아닌가 생각(生覚)하오, 너무 가난한 말만 늘어 놓았구려. 용서해주오─. 참 병역관계(兵役関係)가 잘 해결된다니 다행(多幸)이요. 파리(巴里)구경 오지 않겠소? 오겠다면 초청장 구해보내리다. 최소(最小) 일년(一年) 쓸 돈 없으면 자신(自身)을 비교, 비판, 증리, 하려고나 오는편이 좋소. 하여튼 오겠다면….60년미협(年美協)의 선언문(宣言文)(국문(国文)으로) 보내시요. 이곳에서 번역해서 소개(紹介)하리다(곧보내시요) 그림사진(큰것)도 보내주오, 또 벽전(壁展)멤버의 이름좀 적어보내고. 60년미협(年美協)도…. 10월(月)에 쓸 인비테이숀 원문(原文)(국문)과 윤(尹)형(兄)의 “싸인” 그것은 고무도장으로, 또 협회(協会) 스담뿌(고무인(印)을 해보내시요. 이것은 현대미협(現代美協)의 창열(昌烈)형(兄)한테도 전(伝)해주오. 60년전(年展)의 그림 좋은 것.(2회전(回展)에서)있거든 사진 찍어 보내오, 틈나는대로 소개좀 해보려고 하니까. 김병기(金秉騏)선생(先生)님께 문안(问安)드리시요. 한 번 서신(書信)을 드렸는데 못 받으셨는지 통소식이없어─. 연구소(硏究所)가 잘된다니 참 다행(多幸)이요. 화단(画壇)을 위해서나 김선생(金先生)님을 위해 마음껏 축복을 보내오. 우리,뭐 이렇게 살다 갈 사람아니오? 좋은 일이나 많이많이하고가야하지않소? 김봉태(金鳳台), 손찬성(孫贊聖), 이만익(李滿益)형(兄)에게 안부(安否)해주오, 그외(外) 내아는사람들께도─.
하(河)린두(斗)가 무사(無事)했다니 다행(多幸)이요, 오늘 문혜자(文惠子)양이 이응노(李應魯)선생부처(先生夫妻)와 함께 와서. 하(河)형(兄)에 대(対)해 물었드니 그렇게 이야기하드군…. 나는 여러 차례 심한 노동을 해서 오늘까지 살아왔소. 이렇게라도 일거리가 있으면 좋으련만 없구려, 천상 비행기표(飛行機票)가 한국(韓国)에서 팔리지 않으면(물러쓰도록 펜.아메리칸 파리지사(巴里支社)에) 연락해주지않으면) 파리(巴里)에서의 전쟁준비(战爭準備)는 도중에서 포기하는수밖에 없구려, 좋은 생각이 있으면 하교(下敎)해주오,
- 중략 -
이곳 화랑의 카다록을 부칠래도 돈이없구려, 한국에서 “쿠번[쿠폰]”이란것을 한(韓)화를 주고 우편국에서 사서 그것을 보내면 그것을 파리(巴里)우편국에서 바꾸어(이 곳 우표로) 쓸수있다니 그것이 무엇인가 알아보구려.
그런 것이 있다면 약 만(万)환 노치 사보내시요, 그래야 몇 번 못 보낼것이외다, (캬다록 같은 것 보내줄께) 오늘은 이만 주리오. 김(金)형(兄)에게 작품사진(作品寫眞)과 편지(便紙)받았다고 전(伝)해주오, 파리(巴里)비엔날문서(文書)는 없드라고 해주오(이곳 본부(本部)에 보내겠다고 하든 것) 그러면 또 봅시다. 아무쪼록 좋은 그림 많이 많이 그리시요.
※이구열(李龜烈)형(兄)께 안부해주오,
3월(月)31일(日) 박서보(朴栖甫)
[한글]
친애하는 명로 형,
오늘, 명로 형의 편지는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우리는 결코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보다 광대한 지역에 필사적으로 나선 탐험가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여러가지 의미의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숙명입니다. 인내 그것은 인생을 기름지게 하는 유일한 힘입니다. 인내에는 중지나 휴식이 없고, 또 인내하는 대중의 상실은 곧 인내 해 온 인간 그 자체의 상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요즈음 보다 광대한 미지에로의 확대된 인간 투영.... 다시 말하자면 상실했던 인간으로의 복귀를 통절히 갈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전위작가들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그들의 인색한 우주성에, 아니면 그들의 시대적 편식성에 노골적인 반발과 함께, 아직 개발되지 않은 저 태고로부터의 인간체험의 총화, 그것이 아쉬워 몸부림 칩니다. 파리는 확실히 오늘에 미달, 정상(正常)이 아니면 허세들이 잡탕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예술이 어떠한 의미의 그 시대의 정언이라면 너무나 이들 가운덴 위증죄에 해당하는 무리가 많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위기요 타락입니다. 현대는 확실히 양식이 아니라 선(禪)의 경지에서 참다운 인간, 다시 말하자면 인간에로의 귀의입니다. 불교 냄새가 나지만…. 종극적(種極的)인 자아의 회수작업입니다. 소위 그림 하나를 놓고 이야기하자면 반 회화계의 움직임이 오늘의 파리 지층의 동맥입니다. 다다이즘인것 같지만 결코 그것만은 아닌 새로운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캔버스라는 하나의 평면이 그림을 그 위에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캔버스 자체가 하나의 표현재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말이 부족하여 보다 실감있게 전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깁니다. - 중략 - 나는 요즈음 그림이 빨갛거나, 아니면 새까만 것입니다. 걸레 조각, 셔츠 떨어진 것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물론 그것이 승화된 정신체로 나타나는 한 “오브제”이지요. 공간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서양의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문화(사상)의 발달과는 달리, 주관적이고 비현실적인 사상의 전달을 조상으로 부터 받아 내려왔다고 봅니다. 부처님 무음(無音) 속에 흐르는 자비, 인내, 허무가 아니라 무(無)의 경지, 이 무(無)가 곧 인간임을 하루 17, 8시간의 제작생활(몰두)에서 깨달았습니다. 확실히 무아(無我)의 경지가 무엇인가 맛보았습니다. 우리들이 말하는 미지가 곧 이 것의 부분이었음도…. 공간 그것은 예술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과거 어느 시대 어느 누가 시도한 그 것과는 다른 것이겠지요. 시각 앞에 멈추는 면적이 아니라, 심연에 흐르는 차원(정신)의 밀도이겠지요. 인간이 아쉽고 그리워만 집니다. 장식(문명이란 의상)에 가리워진 인간이 아니라 비밀에 가까운 인간, 아니 인간이란 그 것 자체를 부정한 그 것이 자꾸만 자꾸만 유혹하는 군요. 정글인지 가시밭인지 모를 곳으로 끌고 가는군요. 가다가 가다가 어느 광명 앞에, 마주설 때, 나는 살고 있는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대체 동양인들은 왜곡된 동양을 팔고 있어…. 그 따위 식의 개성(자칫하면 병적인 결과를 초래할)이 아니라, 인간이 공동 관리하는 오늘 속에서의 개인의 정신발육 상의 차(差), 의식의 총화라는 지성의 체험의 차(差), 이것들이 오늘의 인간 조건 속에서의 진정한 개성(확대된 의미의)이 아닌가 생각하오. 너무 가난한 말만 늘어 놓았구려. 용서해주오─. 참 병역관계가 잘 해결된다니 다행이요. 파리 구경 오지 않겠소? 오겠다면 초청장 구해 보내리다. 최소 일 년 쓸 돈 없으면 자신을 비교, 비판, 증리, 하려고나 오는 편이 좋소. 하여튼 오겠다면…. 60년미협의 선언문(국문으로) 보내시오. 이 곳에서 번역해서 소개하리다(곧 보내시오) 그림 사진(큰 것)도 보내주오. 또 벽전(壁展) 멤버의 이름 좀 적어 보내고. 60년미협도…. 10월에 쓸 인비테이션 원문(국문)과 윤 형의 “싸인” 그것은 고무 도장으로. 또 협회 스탬프(고무 인(印))을 해 보내시오. 이것은 현대미협의 창열 형한테도 전해주오. 60년전(年展)의 그림 좋은 것(2회전에서) 있거든 사진 찍어 보내오. 틈 나는 대로 소개 좀 해보려고 하니까. 김병기 선생님께 문안 드리시오. 한 번 서신을 드렸는데 못 받으셨는지 통 소식이 없어─. 연구소가 잘 된다니 참 다행이오. 화단을 위해서나 김 선생님을 위해 마음껏 축복을 보내오. 우리, 뭐 이렇게 살다 갈 사람 아니오? 좋은 일이나 많이 많이 하고 가야 하지 않소? 김봉태, 손찬성, 이만익 형에게 안부 해 주오. 그 외 내 아는 사람들께도─.
하인두가 무사했다니 다행이오. 오늘 문혜자 양이 이응노 선생 부처와 함께 와서, 하 형에 대해 물었더니 그렇게 이야기하더군…. 나는 여러 차례 심한 노동을 해서 오늘까지 살아 왔소. 이렇게라도 일거리가 있으면 좋으련만 없구려, 천상 비행기표가 한국에서 팔리지 않으면(물러 쓰도록 펜아메리칸 파리 지사에) 연락해 주지 않으면) 파리에서의 전쟁 준비는 도중에서 포기하는 수 밖에 없구려. 좋은 생각이 있으면 하교(下敎)해주오.
- 중략 -
이 곳 화랑의 카탈로그를 부칠래도 돈이없구려, 한국에서 “쿠폰”이란 것을 한화를 주고 우편국에서 사서 그것을 보내면 그것을 파리 우편국에서 바꾸어(이 곳 우표로) 쓸 수 있다니 그것이 무엇인가 알아 보구려.
그런 것이 있다면 약 만(万)환 어치 사보내시오. 그래야 몇 번 못 보낼 것이외다. (카탈로그 같은 것 보내줄게) 오늘은 이만 줄이오. 김 형에게 작품사진과 편지 받았다고 전해주오. 파리비엔날레 문서는 없더라고 해주오(이 곳 본부에 보내겠다고 하던 것) 그러면 또 봅시다. 아무쪼록 좋은 그림 많이 많이 그리시오.
※이구열 형께 안부해주오,
3월 31일 박서보
<표기 원칙>
- 한글본: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에 사용된 기호나 숫자는 현대한국어 문법에 맞추어 교정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어 표기 시 사용되는 낫표 「」는 생략, 겹낫표 『』는 의미상 사용에 따라 따옴표 ' ' 로 교정했다. 변경된 명칭이나 번역자 주는 대괄호 [ ]로 표기하고 긴 내용의 경우에는 주석을 달았다. 원문 중 일부 개인적인 내용은 생략되었음을 밝힌다.
[자료 설명]
ARCHIVE FOCUS 19호에서 다루어질 자료들은 박서보가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서 머물면서 남긴 작업실 사진들과 이 시기 <원죄> 작업을 하며 가지게 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박서보의 편지이다.
1961년 2월로 예정되어 있었던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가 11월로 미뤄진 사실을 박서보는 1월 파리에 이미 도착한 후에 알게 되었다. 행사 기간 전후로 파리에 몇 달 간은 머물 예정으로 아시아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아 왔지만 이는 10월까지 체류비로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이응노의 집에서 신세 지는 것을 고려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된 박서보는 숙박비와 체재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지인의 숙소와 파리 호텔 이 곳 저 곳을 옮겨다니게 된다. 세계청년작가 파리대회 1위에 입상한 <원죄>가 탄생한 작업 공간은 파리 곳곳의 이러한 호텔 다락방들이었다.
“바스티이유의 다락방”이라고 기록된 첫 번째 사진은 당시 프랑스 한국 유학생회 회장이었던 신영철의 도움으로 첫 달 월세를 벌어 머물게 된 몽티유라는 여성의 집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1) 사진 속 박서보는 커다란 캔버스들로 가득한 방에 놓인 이젤 앞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한다. 박서보 앞의 캔버스는 두껍게 바른 물감을 문지르거나 긁어내어 만들어진 비정형의 색면으로 채워져 있다. 작가는 붓이 아닌 롤러처럼 보이는 도구를 들고 있는데, 이를 사용해 두터운 물감층을 누르거나 문대는 효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진이 찍힌 봄 즈음 박서보가 윤명로에게 보낸 3월 31일자 편지에서 작가가 파리의 예술에 대해 가지게 된 생각과 당시 작업하던 방식에 대한 짤막한 서술을 확인할 수 있다. 박서보는 처음으로 실견한 파리 화단의 “인색한 우주성(宇宙性)”과 “노골적 편식성”에 크게 실망을 표하고, “시대의 정언”으로서 예술은 “보다 광대한 미지에로의 확대된 인간 투영”, 다시 말하자면 상실했던 “참다운 인간으로의 귀의”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저 태고로부터의 인간체험의 총화”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통절히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시기 박서보가 작업한 그림들은 대체로 “빨갛거나, 아니면 새까만 것”이었다. 나아가 작가는 “걸레 조각, 셔츠 떨어진 것” 등 일반적이지 않은 재료들을 “오브제”로 활용했다고 적고 있다. 파리에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박서보는 이응노의 캔버스 틀을 짜는 일을 도와주고 나무 조각이나 천을 얻거나 부족한 바탕천으로 사용하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져 나온 재료를 사용했다고 회고했는데,2) “바스티이유 다락방” 사진에서도 캔버스 틀 부분의 마감천이 고르지 못한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유사한 재료들이 바탕천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서보는 윤명로에게 하루 절반 이상을 몰입해 완성하는 자신의 작업을 “종극적(種極的)인 자아의 회수작업”이라고 설명한다. 묘법 연작 예술관에서 주로 등장하는 표현이 1961년도 파리 시기에서부터 언급되고 있다는 점은 박서보가 오랜 시간 견지해 온 예술가로서의 작업 태도의 기반이 되는 생각이 이 시기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편지에서 박서보는 “공간”이라는 개념에 더욱 집중한다. 자신의 작품에서 다루어지는 공간이 “서양의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문화”와 구분되는 “주관적이고 비현실적인”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일견 동양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박서보는 동양인들이 “[왜]곡된 동양”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국 현대 미술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서양에 상응하는 대립항으로서의 동양성이 아닌, “인간이 공동관리하는 오늘 속에서의 개인의 정신발육 상의 차(差), 의식의 총화라는 지성의 체험의 차(差)”이며, 공간 속에서 도달하는 “무아의 경지”와 “미지”, 즉 ‘인간이 알지 못하는 장소’는 오히려 현대의 보편적인 시대적 관심사인 인간의 본질적 측면을 다루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5월이 되어서야 아시아재단이 박서보의 상황을 검토하고 추가적인 지원금을 지급하자 박서보는 몽티유에게 밀린 방세를 전달하고 작업에 보다 적당한 숙소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입주한 “센강 너머로 노트르담과 경시청이 보이는 풍광 좋은 건물 옥탑방”3)인 생세브랭 가(rue de St. Séverin) 9번지의 호텔 다락방에서 1961년 10월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 1위에 입상한 <원죄>가 탄생하게 된다. 두 번째 사진에서 박서보는 <원죄> 연작 가운데 <원죄 No.8>으로 알려진 작품을 완성하고 활짝 웃으며 사진으로 기념하고 있다. 사진 속의 <원죄 No.8>는 색조의 개수가 더욱 줄어들어 거의 검은 색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화면 전면에 두텁게 도포한 물감을 뭉개고 밀어낸 흔적이 남아 있으며, 바탕천과 화면에 사용된 재료들로 인해 울퉁불퉁한 화면의 질감이 더욱 두드러진다.
박서보는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가 시작된 10월부터는 주최측에서 제공한 사르셀(Sarcelles) 숙소에 묵게 되었으며, 대회 이후에는 파리에서 작업한 캔버스 30여 점을 한묵에게 맡겨두고 1961년 말 귀국한다. 1961년의 파리 생활 이후로도 박서보는 해를 건너 한 번씩 파리로 향해 화랑들을 탐색하고 재불 작가들과 교류하며 작업도 진행했다. 이후의 숙소들은 1961년에 머문 다락방들만큼 협소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파리의 호텔 방들은 박서보의 삶 군데 군데에 자리한 친숙한 공간이 되었다.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
<주석>
1) 이 시기 박서보에게 도착한 편지에 사용된 주소들에서 Montilleux 외에도 Montieux, Montilleut 등의 표기를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인의 성으로 사용되는 용례를 감안했을 때, Monthieux가 정확한 표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2) 박승숙,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박서보의 삶과 예술』(인물과 사상사, 2019), p. 145.
3) 박승숙, 위의 책, p. 149.